예수라는 친구가 맺는 사랑이라는 열매(I)
(김성수 목사)
(요 15:7-17)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다 이루리라’라는 흥분되는 구절을 가지고 기도와 열매에 관해 공부를 하면서, 기도는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원인과 방법과 도구이기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요 결론으로 주어진 위대한 특권임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지향되어야 되며 완성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그렇게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귐을 돈독하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의 관계가 될 때 그 분과 닮아가게 되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기도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을 닮은 자로의 성숙과 완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관한 모든 기도는 다 들어 주시겠다는 것이 지난주 본문 7절과 16절이 이야기하는 바입니다. 그게 바로 기도의 지향점임과 동시에 우리가 요한복음 15장을 통하여 몇 주간에 걸쳐 공부하고 있는, 성도가 맺어야 하는 열매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맺어야 하는 열매와 기도는 떼려야 뗄 수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모두 들어주시겠다고 하시며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기도가 과실, 즉 열매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 15:16)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의 삶에 항상 과실을 맺게 하실 것인데 그 과정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16절은 헬라어의 ‘히나’ 목적절이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택하신 이유와 목적이 두 개의 절로 설명이 되어 있는 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택하신 이유가 과실을 맺게 하시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신 것임과 동시에 그 택함 받은 자들의 기도를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두 번째 목적절은 첫 번째 목절 절에 지배를 받는 종속 결과 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은 반드시 과실을 맺게 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과실을 맺어내고 마실 것이기 때문에 그 과실을 맺는 데에 필요한 기도의 응답을 완벽하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내용은 과실을 맺는 일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기도를 통하여 맺어지게 되는 그 열매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 해서 기도의 진의를 좀 더 명확하게 규명을 해 보고, 아울러 성도의 지향점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매듭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열매에 대해 잠깐 공부를 하면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는 단순히 선한 일이나 착한 일 정도가 아니라고 했지요? 만일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열매가 착한 일이나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인 열매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보다 훨씬 열매를 못 맺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마 간디나 슈바이처가 최고로 열매를 많이 맺은 사람들의 반열에 올라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예수를 믿지 않았던 그들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이들이 되고 우리가 찍혀 불에 던지우는 가라지가 되는 우스운 그림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맺으라 하시는 열매는 그런 단순한 행위들이 아닙니다.
종로에 있는 탑골 공원을 아십니까? 서울과 서울 근교에 거주하시는 은퇴를 하신 노인들이 매일같이 모여 외로움을 달래는 그런 곳입니다. 지금은 탑골 공원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노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갈 곳 없는 노인들이 그 탑골 공원 주변 낙원동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하루를 보내신다고 합니다. 저도 그 탑골 공원과 그 주위 낙원동, 인사동을 참 좋아 합니다. 그 곳은 지금도 제 어린 시절의 추억과 그리움이 박재가 되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 그런 곳입니다. 거기에는 지금도 1,500원 짜리 국밥집이 있고 3,000원 짜리 이발소도 있습니다. 그리고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있고 500원짜리 빈대떡이 있습니다. 은퇴를 하고 자식들과 떨어져 사시는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입니다. 하루 5,000원만 있으면 점심, 저녁 모두 해결을 하고 거나하게 막걸리도 한잔 걸칠 수 있는 그런 곳이니까요. 그런데 그나마도 없어서 다른 이들이 식사를 할 때 식당 밖에서 침만 꿀꺽꿀꺽 삼키는 그런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그 곳에 40년 넘게 노인들과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급식을 해 주는 곳이 있습니다. 하루에 200 그릇 이상의 식사를 만들어 외롭고 가난한 노인들과 갈 곳 없는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급식을 해 주시는 아낙네 들이 계신데 그 분들은 어느 절의 보살들이십니다. 제가 중학교 때도 그 곳에서 봉사 활동을 하시던 할머니가 아직도 거기에 계시더군요. 그분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들보다 더 불쌍한 노인들을 위해 매일같이 나와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십니다. 그 분들 중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 금년 93세 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도 매일같이 나오셔서 노인들의 밥을 하시고 배식을 하시고 설거지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식들의 무관심 속에서 돈 1,500원이 없어 무료 급식소 앞에 줄을 서 있는 노인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 줍니다. 그들은 불교인들입니다.
그 탑골 공원 바로 옆이 그 유명한 인사동입니다. 그 인사동에는 늙고 병든 문인들과 미술인들에게 무료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 주시는 김청해라는 노부부가 계십니다. 인사동은 지금 국제적인 관광 상품이 되어 있는 곳이라 그 자리에서 여관을 하시거나 모텔을 하셔도 큰돈을 버실 수 있는 분들인데 그 분들은 선뜻 그 자리를 가난하고 병든 문인들과 미술인들에게 내 놓으셨습니다. 그 분들은 거기에 찾아온 늙고 병든 노인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입고 주무십니다. 자기 것을 털어 이웃과 똑같이 나누는 삶을 몸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김청해씨 부부는 유교를 공부하신 무신론자 들입니다. 거기서 한참을 걸어 명동 성당 앞으로 가면 그 앞에서 20년 넘게 불우한 장애인들을 위해 가두 모금을 하고 있는 성대경씨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본인도 지체 장애 1급의 뇌성마비 환자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20년 넘게 자기보다 불우한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자청하여 구청의 모금함을 들고 하루 종일 찬송을 하며 모금을 합니다. 그 분은 가톨릭 신자입니다. 여러분, 이런 분들의 삶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하나님께서 지금 엉뚱한 가지들에다가 열매를 맺고 계신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우리 성도에게 맺혀져야 하는 열매가 지금 다른 종교인들의 가지에 주렁주렁 맺혀지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금 실수하고 계신 것이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는 그러한 종류의 착한일, 선한일 정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기부인과 절대 순종이라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선한 일에 힘쓰고, 구제에 힘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은 모두 죄일 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첫 열매를 맺으셨지요? 어떻게 열매를 맺으셨습니까? 죽어서, 자기를 부인해서 맺으셨습니다.
(요 12: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많은 열매를 맺으실 것이라 하시는데 그 열매가 어떻게 해서 열리게 된다고 합니까?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어야 열매가 많이 맺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예수님처럼 자기 생명을 미워하여, 비워내고 죽는 자가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이웃을 내 생명보다 앞세우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성품이 어떤 것이 있는지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자, 이 열매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맺으라고 요구하시는 열매들입니다. 잘 맺고 계세요? 잘 안되시지요? 그런데 주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진다고 하셨습니다.(마7:19)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되지도 않는 선행의 열매, 도덕의 열매, 윤리의 열매, 그것들을 열심히 맺어내라는 것이 짐이지 어떻게 복음입니까? 여러분, 잘 보세요. 여기에서 성령의 열매는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라는 뜻입니다. 엄밀히 말해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맺어 가시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열매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맺혀진 것이고,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맺혀지고 있는 것이며, 주님의 재림의 날에 완전히 완성이 될 그런 열매인 것입니다. 그 열매를 위해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완전하게 응답하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 나열되어 있는 열매들을 주의 깊게 보세요. 성령이 포도나무 줄기로서 우리 안에 맺으시는 열매가 전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자기 사랑에서 빠져나와 이웃과 화목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들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성품이며 삶의 방식과 원리들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맺으시겠다고 하시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신의 성품’이라고도 릅니다.
(벧후 1:4) “1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약속의 실체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절대 썩어질 이 땅의 것들을 충족시켜 주시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악 된 성품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끌어 내셔서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 즉 하나님의 선택 속에 들어 있는 자들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그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은 기도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게 바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게서 맺어지는 열매’가 담고 있는 선택 교리에 관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강세는 ‘열매를 맺어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미 하나님이 너희 안에 뚫고 들어와 계시니 너희는 얼마나 수지맞은 인생들인가?’에 있는 것입니다.
(요 15:5)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잘 보세요.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떠나서 절대로 할 수 없는, 본문의 말로 바꾸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일이 무엇입니까? 과실을 맺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자기부인과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예수와의 회복된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라, 열매를 맺어라, 선한 삶을 살아라’ 등등의 권고들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가만 안두겠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니라 ‘너희는 여전히 그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이미 너희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완성해 놓으시고, 가시적으로도 완성해 내시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하니?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좀 살아 보아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권고는 은혜와 사랑의 자각을 근거로 한 권고인 것이지 강요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기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제가 예를 들어서 보충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한 열매,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 신의 성품 등을 한 단어로 줄여 보세요. 뭘까요? ‘거룩’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단순히 모범적인 삶의 형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해있는 이 세상의 것들과 이 세상 삶의 원리들과는 완전히 구별된, 하늘의 것과 하늘의 삶의 원리, 하늘의 성품 등을 아우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거룩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거룩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벧전 1:15-16)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레 20:26) “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즉 세상에서 건져 내신 것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구별해 내신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한 군데 더 볼까요?
(엡 1:4) “3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따라서 우리 성도의 지향점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거룩입니다. 그 거룩이라는 개념은 창세기 2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창 2:3)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일곱째 날은 안식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있고 하나님 백성의 안식이 있는 그런 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원래 안식을 하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여섯째 날 지어지고 그들이 바로 첫날로 안식일을 맞게 된 것입니다. 차치하고, 그 안식일에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개념이 약속으로 들어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라는 책에서 안식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으니까 그걸 참조하세요.) 그래서 그 ‘날, 시간’에 복이 주어지고 거룩이라는 단어로 제한을 하는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야말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유일한 지향점이자 목표지점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거룩이라는 것은 우리 성도의 유일하고 필연적인 지향점이며, 그 거룩의 개념은 이 세상의 속된 것과 구별되어진 하늘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룩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십니다. 애굽에 있던 당신의 백성들을 왕조를 바꿔 가면서까지 박해를 받게 하시고 결국 그들을 당신의 열심으로 그 풍요의 땅에서 꺼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은 하나님의 열심에서 격발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 1:2)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여기에서 ‘거룩하여지고’는 완료형 동사입니다. 이미 거룩해졌다는 것입니다.
(고전 1:30)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 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우리의 거룩함이라는 것입니다.
(히 2:11)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여기서도 역시 성도들을 이미 거룩하게 된 자라 하지요?
(히 10:14)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렇게 성경은 우리 성도에게 ‘거룩하라’ 고 명령을 하심과 동시에 ‘예수가 이미 너희의 거룩함이 되셨다’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하나님이 당신의 열심으로 맺으시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가 맺어야 하는 이중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들어보세요. 조나단 에드워드가 성화는 100%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100% 성도의 몫이라고 말한 것이 무슨 말인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태초에 아담은 거룩한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아담은 죄로부터 구별되어 있었고 하나님께로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에 의해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구별되어 있던 인간이 세상의 편으로 돌아서 버린 것입니다. 쉬운 말로 거룩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곳에서 다시 구별시켜 내십니다. 그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어진 거룩에서 온전한 거룩으로의 회복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출 19:6)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 지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세상과 섞여 버린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땅으로 구별시켜 내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삶의 원리, 마귀의 지배 원리에서 건져 내셔서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이라는 것은 단순히 착하고 선하고 순결한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과 한 마음, 한 뜻, 심지어 거룩한 연합 속에서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증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레 10:10) “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아주 중요한 구절인데요, 이 구절을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좀 더 풀어서 번역을 하면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그 속된 것 안의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고 속된 것의 구별이 있고, 그 속된 것 안에 정하고 부정한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대조인 것입니다. 정하고 부정한 모든 것이 속된 것입니다. 거룩은 단순히 깨끗하고 착하고 선한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크고 깊은 것이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께서 세상과 한 편이 되어 버린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 가셔서 그들을 건져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 출애굽을 시키십니다. 그렇게 애굽과 구별이 되어 버린 하나님 백성들은 이제 세상과의 교제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그들 속으로 들어오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이 속된 세상에 직접 들어오시면 세상은 그 즉시 멸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진과 성막으로 오신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화해를 하고 화복하게 되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진영을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거룩에 대한 개념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진 안에는 문둥병자라든지, 혈루병 환자 등의 부정한 이들이 절대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 안에는 마치 율법에서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과 같이 정하다고 인정받은 자들만이 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소 안에는 정한 자라고 해서 모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안에는 정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특별히 구별된 아론의 후손들, 제사장만이 출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지성소를 ‘거룩한 곳’이라 하지요? 왜냐하면 그 곳에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다른 곳은 속된 곳입니다. 그 속된 곳에는 정하고 부정한 것, 다른 말로 착하고 악한 것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곳에는 착하고 악하고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 정하신 자만이 들어 올 수 있습니다. 거기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 요구되는 거룩은 정하고 부정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며, 반드시 완성되고야 말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아론의 후손들이 다른 이들보다 뭐가 특별해서 거룩한 지성소를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제사장이 누구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지요?(히9:11) 그런데 그 대 제사장의 의복 중에 그가 목에 걸고 있는 흉패가 있지요? 그 흉패에 열 두 보석이 박혀 있고 그 각개의 보석에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 보석이 상징하는 것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렇게 참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에 걸려, 공짜로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어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성도라는 이름 자체가 ‘거룩한 무리’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거룩한 자가 된 것이고, 거룩한 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은 착하고 악하고, 정하고 부정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 쪽으로 돌아서서 그 분의 편이 되어 그 분을 사랑하느냐 아니냐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나안 족속을 아기까지 전부 몰살 시키는 것이 거룩한 행동인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거짓말을 한 사무엘을 거룩한 자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불가능하고 무력하고 음탕하고 더러운 자들을 값없이 선택하시고 구별시켜 건져내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선하심을 근거로 그 분의 편을 드는 것이 바로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배운 것을 토대로 레위기 11장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레 11:44-45) 44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어떠세요? 아직도 버거우세요? ‘어떻게 거룩하게 살지? 어떻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살지?’ 아직도 그런 걱정 하고 계십니까? 그런 걱정하시기 전에 먼저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시란 말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를 거룩하게 완성하고야 마실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하십시오. 그 감사와 감격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의 손과 발이 하나님의 편을 드는 거룩으로 움직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착하고 선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그 거룩은 우리의 거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우리의 열매는 사실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랑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성화가 100% 하나님의 몫임과 동시에 100% 성도의 몫이라는 이야기는 성도가 자신의 노력으로 100% 거룩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거룩을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100% 자신들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만일 그 말을 우리의 행위로 이해를 하시면 그건 또 다른 알미니언 주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거룩에 관한 일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이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고 완성이 되는 일이 어찌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성도의 삶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맺으시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값없이 열매 맺는 자, 계명을 지키는 자,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성실하게 열매를 맺으시는 동안에 우리의 타락상과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경험함과 동시에 우리 안에서 실제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열매 맺음 또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 앞에 온전히 굴복하여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이며 그 것이 참 열매인 것입니다. 절대로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는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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