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성도, 무덤으로 넘겨지다 (I)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0. 13.

 

 

성도, 무덤으로 넘겨지다 (I)

 

(김성수 목사)

 

 

(롬 1:26-32)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공자의 사상을 가장 잘 담고 있는 논어라는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인(仁)’입니다. 어질 인(仁). 그래서 공자의 철학을 인의 철학이라고들 합니다. ‘인(仁)’이란 글자는 사람 인(人)자와 두 이(二)자가 어우러져서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인(仁)’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즉 관계를 통하여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연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인(仁)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자기를 극복하고 예를 따르는 것(克己復禮爲仁), 그것이 바로 인(仁)이다.’ 공자가 말한 자기는 자기사랑이라는 욕망을 품은 보편적 ‘나’를 말합니다. 그러한 자아를 극복하고, 죽이고, 예를 따르는 것이 인(仁)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나의 욕망을 억누르고 타자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인(仁)입니다. 그래서 번지(樊遲)라는 제자에게는 인(仁)을 설명하면서 ‘인은 곧 이웃 사랑이다’라고 짧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공자철학의 핵심입니다.

 

안연이라는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럼 예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때 공자는 ‘다른 이에게 실례(失禮)를 범하지 않는 것이 예를 따라 행하는 것’이라 대답을 했습니다.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그러니까 인의 핵심인 예(禮)는 예법(禮法), 즉 도덕과 윤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며 사는 것이 실례를 범하지 않고 예를 따라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곧 인(仁)이고요.

 

이렇게 자기의 사욕을 버리고 자발적 예를 따르는 자를 군자라 부릅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의 욕망을 쳐서 복종시키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따라 행동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생산해 내고자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 아닌가요? 이렇게 예를 따라서 인을 실천하면서 살다가 보면 그 인이 사람의 마음속에 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을 인도하는 원리가 되고 그 사람의 성품이 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덕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덕은 인간 개인의 내면에 쌓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데 기독교와 너무 비슷하지요?

 

아울러 공자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원리를 도(道)라고 부릅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 따라야 하는 윤리와 사회적인 법도는 물론 자연 세계 속에 들어 있는 자연의 원리를 통틀어 도(道)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의 도를 잘 간파하여 그 도를 따라 사는 것을 예라고 하고 그렇게 예를 행하며 사는 것을 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는, 자연과 인간의 정상적이며 최적의 존재 원리임과 동시에 생존 원리인 것입니다. 공자는 이러한 도가 행해지는 나라를 꿈꾸며 살았습니다. 이상적인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이 보여준 도리에 순응하면서 사람들 간에는 서로 실례를 범하지 않으며 남을 먼저 생각하면서 사는 그러한 이상 세계 말입니다.

 

그는 이러한 자연의 도리를 천(天)이라고도 부릅니다. 논어 위정(爲政)편에 보면 공자 자신은 50세에 천명을 알았다고 했습니다(五十而知天命). 또 천에 순응하는 자는 살고 천을 거스리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또 선을 행하는 자는 천이 복으로 갚아 주고 선을 행하지 않는 자는 천이 화로서 갚아 준다고 했습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 차등 상급론입니다. 이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명심보감의 주제이기도 하고요.

 

이런 도의 세계를 꿈꾸면서 그는 72 세가 되도록 살았는데 나중에는 이 천의 법칙과 자기가 거의 하나가 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도가 통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고 합니다. 자기 마음이 원하는 것과 도와 천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양하면서, 자기를 성찰하면서, 예를 따라 살다 보니 70에는 자기 마음의 원하는 것과 법도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70에 도가 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유교에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훌륭해지고 완벽해지는 인간상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자신이 20세에 약관(弱冠: 갓을 쓰는 어른답게 사는 것), 30세에 이립(而立: 마음이 도덕 위에 확고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음), 40세에 불혹(不惑: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음), 50세에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앎), 60세에 이순(耳順: 귀가 순해져서 무엇을 들어도 다 깨우쳐짐), 그리고 70에 종심(從心: 자기 뜻대로 행해도 하늘의 도와 어긋나지 않음)의 도에 당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자연에 계시가 된 하늘의 도를 깨달아 그 도를 따라 예를 실천하여 살면서 결국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종심의 자리에 당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공자가 꿈꾼 이상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자도 종심에 다 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인간 이성의 능력을 믿었고 그 가능성을 믿었던 공자가 열심히 노력하여 예를 행함으로 도달한 종심의 상태에서 죽음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는 죽어서 그가 꿈꾸던 이상세계로 들어갔을까요? 아니요. 공자가 꿈꾸던 이상 세계는 이 역사 속에 구현되는 세계였습니다. 그는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에게 ‘내가 사는 것도 잘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솔직하게 대답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죽음 뒤의 세상을 모르는 공자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죽음 이전의 세상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여 이상 세계를 이 역사 속에 구현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자의 열심과 노력과 도착지점을 오늘날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자고요. 공자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용어로 바꾸면 자연계시 속에서 하늘의 뜻을 찾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생 그 뜻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결국 그 하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종심(從心). 도가 통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지옥 갔습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곳에도 하늘의 뜻을 안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공자처럼 자연계시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아볼 수 있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특별계시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자연 계시로 끝내시지. 자연 계시로는 하나님을 알아먹을 수 있는 자들이 없기에 예수와 말씀이라는 특별 계시가 우리에게 내려온 것입니다.

 

각설하고 그들도 자기들 수준에서 알아 낸 그 하늘의 뜻을 열심히 수행하여 종심의 단계에 도달하려 애를 씁니다. 도덕과 윤리를 실천하고 사회를 개혁하고 정화하여 모든 이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이상 세계를 꿈꿉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열심 앞에 예수의 은혜와 긍휼과 십자가는 장식물에 불과합니다. 왜요? 자기들이 힘이 있거든요. 하나님이 그들을 어디로 보내야 할까요? 여러분, 성도는 불혹과 지천명과 이순과 종심의 과정을 통과하여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제발 알아먹으라고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이 역사 속으로 내려 보내셨는데 그들이 ‘우리끼리 예를 행하고 법도를 지켜 당신이 제시하신 곳으로 올라가 볼 테니 거기서 기다리세요.’ 하고 열심히 벽돌과 역청으로 탑을 쌓고 있는 꼴 아닙니까? 그게 에덴동산 위의 아담이었고, 시날 땅의 바벨탑이었고, 바리새인들의 유대주의였고, 펠라기우스와 알매니우스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어떤 메시지를 받으셔야 하겠습니까? 열심히 노력하여 이런 천인공노할 죄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가다가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까지 성숙하여 성도다움을 완성하자는 것으로 결론을 맺어야 할까요?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들을 보시면서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거구나’를 배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매다시는 방법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구나’를 배우셔야 한단 말입니다. 그걸 배우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이지 지금 읽은 죄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줄여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신앙생활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러한 자기부인의 고백을 들어내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을 이 광야로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넘겨주시자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시무시한 경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26절과 27절을 보세요.

 

(롬 1:26-27)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 다시 동성애를 지적하는 듯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소재를 하나 택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 동성애라는 것 자체를 죄 중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죄로 상정하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이라는 것을 소재로 쓰셔서 인간들의 자기자리 이탈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끄러운 욕심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파떼 아티미아스’는 ‘빗나간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빗나간 사랑’이라는 단어를 한 단어로 표현을 하면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나다’입니다. 그걸 성경이 ‘죄’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죄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빗나간 사랑을 소재로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사랑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졌습니까? 하나님, 남자, 여자, 짐승으로 내려가던 질서 체계가 완전히 뒤집어졌지요? 뱀이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그리고 남자가 하나님께 대드는(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것으로 질서가 파괴가 되었습니다. 존재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상태를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존재들이 자기 역할을 떠나면서 질서가 깨지고 불의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26절과 27절은 동성애를 묘사하는 것이기 보다는 바로 그 불의가 진리를 막은 상태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남자와 여자의 역할 이탈, 자기 자리 이탈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동성애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걸 소재로 택한 것입니다. 26절을 보시면 여자에 대한 지적이 먼저 나오지요? 그것도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순서 되어 진 것입니다. 그렇게 순리로 써야 할 것을 역리로 쓸 때,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는 사랑을 자기에게로 쏟아 부을 때, 인간들은 어처구니없는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상태를 상당한 보응을 받은 상태라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너무도 확고하게 그 보응을 가리켜 에이즈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렇다면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은 다 지옥 가야 하나요? 보응을 받은 거니까요. 여기에서 쓰인 보응이라는 단어는 원래 나쁜 의미의 벌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 보응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분명히 해두고 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본문에 나열된 죄의 목록이 성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전부 우리의 것이었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풍성하게 흘러넘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상에게 넘겨주심으로 발생한 그 죄의 증상들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면 우리 또한 세상에게 넘겨진 삶을 지금 살고 있는 중이잖아요? 그런데 그 넘겨줌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한 넘겨줌이 되지요? 우리도 남자나 여자나 순리로 써야 할 것을 역리로 쓰고 있는 중 아닙니까? 하나님 사랑하라고 주신 모든 것을 ‘나’에게로 쏟아 붓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쏟아진 보응은 무엇인가요? 현재적 보응 말고 결과적 보응이요. 구원입니다. 우리는 넘겨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고 세상은 넘겨줌을 통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보응이라는 단어를 현재형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보응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세상에게 넘겨준 상태 자체를 지칭하는 것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멸망의 보응이 되는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리대로 써야 할 것을 역리로 쓰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내린 보응은 에이즈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멸망인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나만을 위해 사는 게 지금은 복 받고 잘 사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게 놔두는 것이 멸망의 보응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 보응을 통하여 구원으로 가야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살면 살수록 모든 일이 자기마음대로 안 되어야 맞습니다. 그래야 그 보응이 구원의 보응이 맞는 것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그 방향성을 쉽게 바꾸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넘겨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성령이 개입을 하심으로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황되며 어떠한 고통으로 결국이 되는 지를 경험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먼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음이고 뭐고 상관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진짜 ‘나’를 올바로 직시 하고, 내가 얼마나 불가능하고 추악한 자인가를 자각하며 고통스러우셔야 하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을 치고 들어오시는 성령에 의해 또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 눈물을 하나님께서 닦아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계 7:17,21:4)

 

28절은 자기 자신을 신 삼아 사는 자들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말 자체가 ‘나’를 신 삼아 살겠다는 말이니까요. 내가 스스로 신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신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신에게 버림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상실한 마음이라고 번역이 된 ‘아도키몬 눈’을 직역을 하면 ‘신에게 버림받은 지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그리로 넘겨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자들이 힘을 모아 구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역사라는 것의 실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역사 체감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버려진 지성으로 사람을 넘겨주게 되면 사람은 자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되고 그 결과 발생하는 것이 29절 이하인 것입니다.

 

(롬 1:29-31)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무려 스무 개가 넘는 죄의 세목들이 나열 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 자기와 상관없는 게 하나라도 있나요? 살인? 사기? 뭐 그 정도는 아직 안 했다고 자부 하십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면서요. 그럼 그것도 우리 것 맞네요. 사기? 그 단어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 자기 이외의 타자를 곤경에 빠뜨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적 없으세요? 이 목록 들 중에 제일 앞의 ‘모든 불의’는 나머지 세목들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불의’의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불의의 대표적 증상들이 몇 가지 나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죄의 목록들을 보면서 어느 것은 나에게 해당이 되고 어느 것은 나에게 해당이 안 되는 가에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매 순간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는 나에게서 나오고 있고 나올 수 있는 것들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왜 발생하는 것이라 했지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나오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기인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기뻐하면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지나요? 그렇게 해서 하나하나 없애라는 말입니까? 바울은 지금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이런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다 멸망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를 그 행간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훌륭하게 잘 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잖아요? 거기에서 이러한 증상들이 터져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겠어요?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 자인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면 이 죄들을 다 없애 줄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 방법밖에 없는 거 아니니?’를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안 짓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게 공자, 맹자의 유교요, 불교와 힌두교 같은 범신론 적 종교요, 이슬람교 같은 이신론 적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안 짓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체를 올바로 깨닫고 인정하여 그 죄에 올바로 반응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여기에 묻혀 멸망할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올바른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는 것이 기독교의 최종 목적지인 것이지, 어떻게 해서든 이 죄들을 멀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의 은혜를 모르고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공자가 그러했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동서고금의 많은 착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결단과 노력과 투지를 폄하할 생각이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저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들이 지켜 낼 수 있는 도덕과 윤리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정말 마음을 빼앗길만한 것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을 도덕으로 붙들어 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평생 자기가 정말 마음을 빼앗길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고 그의 생이 마감될 때 그는 훌륭한 군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타가 공인하는 가치 있는 것이, 자기의 마음을 빼앗고도 남을 만한 것이 나타나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난 안 그럴 거라고 너무 서둘러 단정 짓지 마세요. 가져도 되고 안 가져도 되는 그런 허접한 것 앞에서는 의지의 강약이 소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강렬한 매력이 담긴 대상 앞에서는 그런 거 다 소용없어요. 사람들은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심드렁함을 도덕지킴이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성은 누가 얼마나 큰 욕망을 갖고 있느냐에 의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짜 큰 욕망을 가진 사람은 작은 것들에 별 관심이 없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착하다, 도덕적이다, 윤리적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작 인간집단이 요구하는 행동기준으로서의 윤리라는 것은 인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욕망제어의 마지노선 아래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마지노선 너머의 그 매력적인 것들 앞에서는 전혀 힘을 못 쓰는 우스꽝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법, 법,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다 지키다가 한 가지 어기면 그 전에 지킨 것 다 무효처리 하신다고 하셨으니까요. 하나님은 완벽을 요구하신단 말입니다. 그 말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는 다 똑같이 취급하신다는 말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내어 놓는 행위나 됨됨이에서 차이라는 것이 발생한다고 믿고 그 차이를 계산하여 차등을 매깁니다. 정말 하나님도 겉으로 드러난 그 차이라는 것으로 차등을 매기실까요?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게 된 모든 인간,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 모든 인간들은 세상을 대면하여 살아갈 거짓 인격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안에 진짜 자기 인격이 있어요. 그건 더럽고 나약할 뿐 아니라 추악하기까지 한 타락한 본성입니다. 첫째 아담에 속한 본성입니다. 그런데 그걸 들키게 되면 ‘하나님처럼’ 살아야 하는 자신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됩니다. 그래서 도덕과 윤리와 착한 행위 등으로 자신을 위장해 내지요. 모든 인간이 바로 그러한 가면을 쓰고 삽니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가면을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가면 인격, 거짓 인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 안의 내면 인격을 못 보게 됩니다. 자기스스로도 철저하게 속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면이 벗겨지고 그 안의 진짜 인격이 폭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감추고 싶은 자기 안의 진짜 모습이 어떤 대상에게서 발견이 되면 화들짝 놀람과 동시에 그걸 공격하게 됩니다. 그래야 자기 안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고 자가진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걸 투사(projection)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비판(critic)을 업으로 삼다시피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 보면 참 불쌍하고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스스로 다 까발리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아요. 그들은 사실 홀딱 벗고 대중 앞에 서서 자기 자신 속의 추한 것들을 다 들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비평가는 항상 ‘난 안 그런데’를 그 비평의 행간에 담아내지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 했던 그 무리는 자신들의 내면의 욕구를 들킨 것입니다. 자기들도 하고 싶어 죽겠는 것을 어떤 인간들이 해 내고야 만 것입니다. 그걸 돌로 쳐 죽여야 자기 안의 그 욕망이 감추어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을 꿰뚫어 보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너희는 어떤데?’하고 되물었더니 다 도망갔잖아요? 왜 백인들이 흑인들을 그렇게 싫어해요? 자기들 안의 저급함이 흑인들에게서 표면적으로 나타나자 그것을 공격하여 자신들의 더러움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하나님은 분명 자기 백성들까지도 상실한 마음에게 넘겨주셨단 말입니다. 본문 32절이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더라고 기록을 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행사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마치 나만은 거기에서 제외된 것처럼 그렇게 재는 자들은 뭐냐고요? 하나님이 실수로 몇 명 빠뜨리고 넘겼는데 그 중 하나가 자기 자신이라 우기고 싶은 거겠지요.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넘겨졌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가 상실한 마음에 넘겨진 자가 맞네요’하며 자신의 내면 인격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고 시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저 사형당해 마땅한 자입니다’하고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들만이 겉과 속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게 창녀와 세리들이었잖아요? 하나님은 그들만 구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하신 자는 반드시 그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렇게 위장된 겉 가면을 벗고 자신의 내면 실체를 겉으로 드러내는 이들, ‘내가 죄인 중의 괴수 입니다’를 고백하는 자들의 그것을 ‘회개’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한 회개에서 필연적으로 격발이 되는 것이 ‘그래서 내게는 예수가 필요합니다.’라는 상한 심령입니다. 외면 인격, 거짓 인격이 너무 튼튼하면 인간은 자신의 내면 인격의 실체를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그것을 찢어발기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은 죄 생산 공장이요, 그래서 예수의 의가 필요한 자요, 그 길 말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은 전무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그러니까 교회는 아담들의 거짓 가면을 벗기는 곳이지 도덕과 윤리와 봉사와 착한 일을 억지로 독려하여 그들의 가면에 덧칠을 해 주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건강한 교회, 올바른 교회라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what we do?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who we are?로 판단을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이 ‘넌 내 백성이야’라고 당신의 이름을 주신 이들이 구원을 얻는 거란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실체’를 올바로 보고 ‘예, 제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맞습니다.’하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겁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제가 비록 실수는 좀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열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저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세요.’ 이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죄를 안 지은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요일 1::5-10)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

 

여기에서 여러분이 조심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것과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을 나쁜 일 하는 것, 착한 일 하는 것으로 서둘러 결론 맺는 것입니다. 빛이 하는 일이 뭡니까? 어두움에 숨어 있는 것들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 감추어 둔 것을 폭로 당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밖으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자’라 하는 것이고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1장 말미의 그 죄의 세목들이 다 뭐라고 했어요? 불의. 그런데 그 불의가 어떻게 해결이 된다고 해요? 다 지켜서? 하나하나 물리쳐서? 아니요. 자백입니다. ‘제 안에 들어있는 것이 바로 그것들 맞습니다.’라는 진솔한 자백이요. 그러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하잖아요?(9절) 그리고는 1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범죄를 자각하고 자백하게 된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이사야서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사 1:2-6,18, 2:2-5)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 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 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 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잘 보세요. 1장 2절부터 6절까지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로마서 본문의 내용이지요? ‘너희는 다 죽었어’입니다. 그런데 18절에서 갑자기 ‘오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는 회복의 언약이 주어집니다. 그리고는 2장으로 넘어가서 우리가 지난 수요일 산상수훈 공부 때 미가서에서 찾아 읽었던 바로 그 산, 옛 산이 무너진 자리에 선 새로운 산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 죽어야 할 자들이 새로운 성전 안에서 아무런 제지도 없이 하나님의 도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산, 율법의 산, 시내산의 안목으로 이스라엘을 보면 성한 곳 없이 계속 맞아도 싼 그런 모습이지만 신약의 산, 은혜의 산의 안목으로 보면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중한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 두 산 사이에 십자가가 서 있는 것이라 했지요? 여기에서도 ‘야곱 족속아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하고 결론을 맺습니다. 여호와의 빛에 행하는 것이 뭐라고 했어요? 내 안에 있는 가면 인격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가 드러나면 하나님이 붙이시는 하나님 나라의 국선 변호사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요한 일서로 가보시면 1장에서 ‘빛 가운데 행하라. 그래야 용서 받는다. 죄 없다 하지 마라. 그러면 불의에서 깨끗하게 될 수 없다’라고 한 요한이 갑자기 변호사 한 분을 소개합니다.

 

(요일 2:1-2)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잘 보셔야 해요. 사도 요한은 1장에서 ‘죄 없다 하는 것이 용서 받지 못할 죄’라고 이야기를 한 후 2장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이 요한일서를 쓴 이유가 ‘우리는 죄 없어요’라고 우기는 그 죄를 경고하기 위해 썼다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변호사 한 분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대언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advocate’ ‘변호사’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변호사는 죄인의 죄 없음을 증명하여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시면 그 변호사가 무턱대고 죄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화목제물이 되어서 죄 없음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죄가 없어서 무죄가 아니라 변호사가 직접 그 죄인의 죄를 다 뒤집어 써 버린 것입니다. 왜요? 그 의뢰인은 자기 죄를 대속할 능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죄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밖에 없어요? ‘내가 죄인 맞고요. 나에게는 그 죄를 대속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변호사께서 변호사의 능력으로 나를 무죄로 만들어 주시는 수밖에 없어요.’ 이거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으로 가볼까요?

 

(사 53:11-12)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보세요. 우리의 죄 때문에 누가 수고해요? 변호사가 수고해요.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우리의 구원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기도 덕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뭐 대단하게 이루어내고 성취해 내어 하나님께 용서받고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거 알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하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지요? 바리새인의 의란 자기들의 행위를 근거로 한 의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의 말고 다른 의를 찾으세요. 더 나은 의라는 것은 둘을 비교했을 때 조금 더 나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종류의 의 말고 다른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의 말고 다른 의를 내어놓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했던, 세리와 창기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히 다른 이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저건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할 죄라느니, 적어도 나는 저런 죄는 안 지었다느니, 이런 말을 하며 다른 이들을 정죄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에게서 자꾸 그런 정죄가 나온다고요? 그게 바로 우리 안에 욕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서 그런 겁니다. 그걸 상대방에게 투사해서 상대방을 죽임으로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려 하는 그런 마귀 짓 이제 그만 두세요. 플라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부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들이 죽는 날까지 끊지 못한 죄가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삶이, 아니 그들의 존재 전체가 다 그 죄 안에서 해석이 되어야 합니까? 정말 하나님은 모든 죄를 다 끊고 당신 앞에 서야 천국 입장 티켓을 내어 놓으시는 그런 분인가요? ‘다른 것은 다 잘했는데 그거 하나 부족하구나. 안 됐다. 넌 지옥으로 가거라.’그러실까요? 물론 우리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죄의 문제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아파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워야 해요. 그리고 거기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케직 사경회 때 오늘 본문인 로마서 1장 후반부를 설교 하시던 목사님께서 인간들을 쥐새끼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때 듣고 있던 회중의 한 사람이 일어나 ‘당장 사과 하시오’하고 외쳤습니다. 왜 기분 나쁘게 이 고귀한 인간을 쥐새끼에 비유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께서 정중하게 사과를 하셨습니다. ‘쥐새끼만도 못한 죄인인 우리 인간을 쥐에게 비유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쥐들에게 사과를 하는 바입니다’ 기실 우리는 쥐보다도 못 한 존재들이 맞습니다.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자리에서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인간 때문에 저주받은 땅에서 존재하느라 왜곡이 되고 흠이 난 것은 있지만 하나님을 거스리지 않습니다. 인간만 하나님을 거스려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역사에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의 종으로, 마귀의 자식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감기가 자기 마음대로 들어왔다가 자기 마음대로 나가듯 우리가 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죄가 우리를 좌지우지 합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그때 진정한 자유가 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주신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예수를 보십니다. 내 아들 예수가 있나 없나로 당신의 백성을 분별하신단 말입니다. 그걸 절대 잊지 마세요. 그게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입니다.

 

예전에 필립 얀시의 절친한 친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영화 평론가이며 목사인 멜 화이트가 어느 날 커밍아웃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결혼을 해서 아이들까지 두신 분인데 그렇게 사는 것을 도저히 견뎌 낼 수가 없어서 어느 날 고백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 친구가 울면서 이야기를 했다지요. 자기는 어려서부터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너무 힘이 들어서 수차례 자살 시도를 했고, 계속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왔으며, 병원에서 주는 약을 먹으며 늘 몽롱한 상태로 지내왔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런 충동이 들 때마다 혐오요법으로 자신의 몸을 괴롭히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전기 충격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나오는 죄와 싸우기 위해 이 정도의 싸움을 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잖아요? 적어도 그 사람은 자신의 죄와 싸우기 위해 그 정도의 열심은 부렸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안 되는 거예요. 그는 그 일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가정도 잃었고, 직장도 잃었고, 그의 책은 반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방송국 기자가 그의 어머니에게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신의 자식이 지금 이렇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 당신은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의 질문에 그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럽고 추한 괴물 취급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들이요, 어미의 자랑이요,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자식입니다’ 이걸 긍휼이라고 해요.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어미도 자기 자식의 약점이나 실수나 범죄를 이렇게 감싸줍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창세전에 아들을 삼아버린 우리의 실수나 죄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약점이나 실수나 죄를 폭로시켜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자신만 사랑하던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육의 처형을 이 역사 속에서 시행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32절에서 그 불의에 대한 보응이 뭐라 했어요? 사형이라잖아요? 그렇다면 영원 속에서 사형당하지 않으려면 이 역사 속에서 사형 당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실체가 자기 자신에게 ‘죄 있음’으로 자각이 되어야 하고 그러한 자각과 고백 위로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만 사랑하던 자들이 서서히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육의 죽음이 예수의 은혜를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세한 죄의 세목들이 여러분에게서 보여 질 때 ‘이걸 어떻게 없앨까?’를 고민하시기 전에 ‘나의 참 인격은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구나’하고 여러분의 실체를 인정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대속의 은혜를 붙드셔야 하며, 지금도 여러분의 죄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먼저 찬송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약관,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의 단계를 거쳐 종심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안 되는 자신을 직시하고 인정하며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일차적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전부 자신을 계발하고 연습하고 노력하여 종심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자신의 영광을 챙기려 할 때에 성도만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의 인생을 ‘무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가?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