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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교회로 흐르는 야곱의 축복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0. 12.

 

 

교회로 흐르는 야곱의 축복

 

(김성수 목사)

 

 

(창 27:1-40) “1 이삭이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된 어느 날, 맏아들 에서를 불렀다. "나의 아들아." 에서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이삭이 말하였다. "얘야, 보아라, 너의 아버지가 이제는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너는 나를 생각해서, 사냥할 때에 쓰는 기구들 곧 화살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서, 사냥을 해다가, 4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너에게 마음껏 축복하겠다." 5 이삭이 자기 아들 에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리브가가 엿들었다. 에서가 무엇인가를 잡아오려고 들로 사냥을 나가자, 6 리브가는 아들 야곱에게 말하였다. "얘야, 나 좀 보자. 너의 아버지가 너의 형에게 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7 사냥을 해다가,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께 가져 오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잡수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주님 앞에서 너의 형에게 축복하겠다고 하시더라. 8 그러니 얘야, 너의 어머니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여라. 9 염소가 있는 데로 가서, 어린 것으로 통통한 놈 두 마리만 나에게 끌고 오너라. 너의 아버지가 어떤 것을 좋아하시는지 내가 잘 아니까, 아버지가 잡수실 별미를 만들어 줄 터이니, 10 너는 그것을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라. 그러면 아버지가 그것을 잡수시고서, 돌아가시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여 주실 것이다." 11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하였다.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나는 이렇게 피부가 매끈한 사람인데, 12 아버지께서 만져 보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버지를 속인 죄로, 축복은커녕 오히려 저주를 받을 것이 아닙니까?" 13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하였다. "아들아, 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가서, 두 마리를 끌고 오너라." 14 그가 가서, 두 마리를 붙잡아서 어머니에게 끌고 오니, 그의 어머니가 그것으로 아버지의 입맛에 맞게 별미를 만들었다. 15 그런 다음에 리브가는, 자기가 집에 잘 간직하여 둔 맏아들 에서의 옷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꺼내어,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리브가는 염소 새끼 가죽을 야곱의 매끈한 손과 목덜미에 둘러 주고 나서, 17 자기가 마련한 별미와 빵을 아들 야곱에게 들려 주었다.18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러자 이삭이 "나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다.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제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하여 온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마음껏 축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 이삭이 아들에게 물었다. "얘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냥거리를 찾았느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아버지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이, 일이 잘 되게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21 이삭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얘야, 내가 너를 좀 만져 볼 수 있게,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로 나의 아들 에서인지, 좀 알아보아야겠다." 22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아들을 만져 보고서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구나." 23 이삭은, 야곱의 두 손이 저의 형 에서의 손처럼 털이 나 있으므로, 그가 야곱인 줄을 모르고, 그에게 축복하여 주기로 하였다. 24 이삭은 다짐하였다. "네가 정말로 나의 아들 에서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25 이삭이 말하였다. "나의 아들아, 네가 사냥하여 온 것을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서, 너에게 마음껏 복을 빌어 주겠다." 야곱이 이삭에게 그 요리한 것을 가져다가 주니, 이삭이 그것을 먹었다. 야곱이 또 포도주를 가져다가 따르니, 이삭이 그것을 마셨다. 26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들아, 이리 와서, 나에게 입을 맞추어 다오." 27 야곱이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삭이 야곱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서,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나의 아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주님께 복받은 밭의 냄새로구나. 28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슬을 내려 주시고, 땅을 기름지게 하시고, 곡식과 새 포도주가 너에게 넉넉하게 하실 것이다. 29 여러 민족이 너를 섬기고, 백성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너는 너의 친척들을 다스리고, 너의 어머니의 자손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마다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마다 복을 받을 것이다." 30 이삭은 이렇게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야곱이 아버지 앞에서 막 물러나오는데, 사냥하러 나갔던 그의 형 에서가 돌아왔다. 31 에서도 역시 별미를 만들어서, 그것을 들고 자기 아버지 앞에 가서 말하였다. "아버지, 일어나셔서, 이 아들이 사냥하여 온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마음껏 축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2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에서가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33 이삭이 크게 충격을 받고서,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렇다면, 네가 오기 전에 나에게 사냥한 고기를 가져 온 게 누구란 말이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그것을 이미 다 먹고, 그에게 축복하였으니, 바로 그가 복을 받을 것이다." 34 아버지의 말을 들은 에서는 소리치며 울면서, 아버지에게 애원하였다. "저에게 축복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저에게도 똑같이 복을 빌어 주십시오." 35 그러나 이삭이 말하였다. "너의 동생이 와서 나를 속이고, 네가 받을 복을 가로챘구나." 36 에서가 말하였다. "그 녀석의 이름이 왜 1)야곱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 이번까지 두 번이나 저를 속였습니다. 지난번에는 맏아들의 권리를 저에게서 빼앗았고, 이번에는 제가 받을 복까지 빼앗아갔습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에게 주실 복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까?" '발뒤꿈치를 잡다' 즉 '속이다' 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가 너를 다스리도록 하였고, 그의 모든 친척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고, 곡식과 새 포도주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니, 나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 38 에서가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비실 수 있는 복이 어디 그 하나뿐입니까? 저에게도 복을 빌어 주십시오, 아버지!" 이 말을 하면서, 에서는 큰소리로 울었다. 39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40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복음을 설명하는 데에 이런 이야기가 꼭 성경에 기록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아낼만한 내용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오늘 공부할 창세기 27장의 내용입니다. 차남이 장남의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고,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까지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얻어내는가 하면, 장남은 자기 동생이 가로챈 아버지의 축복은 무효라며 다시 자신에게 축복을 하라고 방성대곡을 하는, 마치 주말 연속극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과연 그렇게 속여서 받은 축복도 효과가 있는 것일까?’였습니다. 저는 혼자서 답을 내리길 그렇게 도득(盜得)한 축복은 하나님도 무효로 처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속여서 가로챈 그 축복으로 꽤 험악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야곱이 보여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집념을 하나님이 기특하게 보셔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면 그의 삶이 그렇게 험악하게 끝나면 안 되는 것이잖아요?

 

두 번째 질문은 ‘만일 제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속여서 가로챈 축복이 유효한 것이 아니라서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다가 간 것이라면 왜 이삭은 야곱에게 한 축복을 무효라 선언하고 장자인 에서에게 다시 축복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두려워했을까?’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한 번 입 밖으로 내 뱉어 지면 절대 번복이 불가능한 것인가요? 사실 성경은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항상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 그리고 그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를 하게 되면 그러한 작은 질문들은 아주 쉽게 해결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그리고 교회로 연결이 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가 왕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떠나있던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아마 누군가에 의해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일 겁니다. 자신의 존재감이 완전히 무시당했을 때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고픈 인간들은 가장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라는 말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과 주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해 주시겠다고 하는 복음을 인간들에게 제시하셨을 때 인간들은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던 것을 기억해 보세요. 그처럼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무시당하고 자신들의 무력함이 폭로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 증명에 혈안이 된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어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를 사냥 해다 주는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하는 이삭이고, 역시 쌍둥이가 복중에 있을 때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들었음에도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꾀를 동원하여 장자 권을 도득(盜得)하도록 시킨 리브가이며, 그 어미의 말을 듣고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곱과,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광분하는 에서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그렇게 은혜를 수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열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네 명의 등장인물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맺어지는지를 염두에 두고 보시면 오늘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주는 축복의 내용이 나옵니다.(27-29) 잘 보시면 이삭이 야곱에게 주는 축복은 땅에 관한 축복과 열국을 다스리는 통치권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축복의 내용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것은 여러분이 이미 공부하셨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당신의 언약을 이삭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15:18-21)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 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창 17:1-8)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 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 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22:17-18)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땅을 약속하고 계시고 그와 그 후손이 그 땅에서 승리자로서, 왕 노릇하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언약하고 계십니다. 그 언약이 점진적 형태로 지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로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무작정 그가 머물고 있는 땅에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목적지를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 아주 애매모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에서 당신의 백성을 뽑아내셔서 어떤 땅으로 옮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뽑아내신 인류 최초의 갈대아 문명은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자기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만들어낸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게 문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 보겠다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문명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진짜 복된 땅으로 인도하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것을 힌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최초의 계시로 주어졌을 때에는 아주 모호하게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그가 가야할 땅이 어디인지도 가르쳐 주시지 않은 채 그를 끌어내시고는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에 ‘여기가 그 땅 이니라’하고 그 땅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이 오늘 본문에서는 기름지고 풍요한 땅으로 좀 더 명확하게 계시되는 것이고, 그렇게 점점 밝히 계시가 되어지다가 요한 계시록에 이르러서는 그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임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하시는 내용을 보면 그 땅은 기름진 땅이며 포도주와 곡식이 풍성한 땅이라 하십니다. 출애굽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창세기의 어떤 부분과 완전히 대조가 되는 대 반전의 모습입니다.

 

(창 3:17-19)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어느 곳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통 저주를 받은 이 세상에서 저주받은 땅이 아닌 기름지고 복 된 땅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구이언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이 세상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침투해 들어오게 될 것임이 미리 예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그 저주받은 땅이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저주받은 땅 갈대아 우르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늘의 땅으로 창세전에 택해진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옮기시고야 마시겠다는 것을 성경이 점진적으로 계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땅에 관한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 중에 기름진 땅과 풍성한 소산에 관한 언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담 안에서 마귀의 종이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머리를 밟고 결국 열국의 왕으로, 통치자로 만들고야 마시겠다는 것이 지금 야곱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언약인 것입니다. 그 약속 또한 창세기 3장에서 미리 힌트 되어있습니다.

 

(창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게 될 모든 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승리는 바로 교회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 신학의 백미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서 믿음의 자손들에게 계승되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자체가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는 저주와 사망의 땅에서 죄의 종으로 살다가 죽어야 할 자들 중에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죄의 머리를 밟게 하시고 하늘의 풍요가 충만히 넘치는 약속의 나라를 허락하실 것이라는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이 탈취하여 도득한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과 축복의 수혜자는 그 자신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기 위해 장자인 에서가 아닌 차자인 야곱에게 장자 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축복을 야곱이 도둑질해서 그의 것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축복이 유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노파심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자칫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사기를 쳐서라도 빼앗을 수 있다는,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프래그머티즘이나 실용주의를 옹호하는 구절로 오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거기에 대한 오해를 더하는 에피소드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마을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가르치고 계실 때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주님께 가까이 오지 못한 중풍병자와 그를 침상에 들고 온 그의 친구들이 그 집의 지붕을 뜯고 침상을 아래로 내립니다. 그 때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것을 보고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남들이 기다리건 말건 새치기를 하거나, 남의 집 지붕을 마음대로 뜯어내도 괜찮다는 식의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기에서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 앞에 온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사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말을 참람하다고 지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죄가 사해졌다고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떤 말이 쉬우냐?’고 반문하시면서 ‘내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거기에서 도덕과 질서를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아온 것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난 그런 것 해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죄를 사해주러 온 하나님이다’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풍병자는 남의 집 지붕을 뜯으면서까지 열심을 부려서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 이미 들어 있던 사람이었기에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롬 9:11-13)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는지 그 이유가 명확히 나오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수혜자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기로 가로채도 그 축복이 유효 한가 아닌가?’라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향한 야곱의 기특한 집념’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방해될 수 없으며 그 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됨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교회에게 설명하시는 한 편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에게 계승되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좀 더 점진적 그림으로 보여 집니다. 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 탈취하여 취한 축복의 내용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거쳐 예수에게로, 또 예수에게서 나와 교회로 이어지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축복이 요한계시록에서 완성이 되는지 까지 연결을 해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그의 새 이름 이스라엘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시작이 되었지요? 따라서 그의 인생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적용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삶을 살다가 그 복을 아래로 흘려보냈던 것처럼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삶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가나안 방백들을 모두 몰아내는 승리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그들로부터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도록, 복의 근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역시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 왕 때에 만개합니다. 다윗 왕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 일경이 모두 이스라엘의 땅이 되고 그 땅에는 은과 금이 길에 구르는 돌처럼 흔한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 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축복이 거기서 모두 성취가 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수시로 가나안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적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으며 심지어 그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로 몽땅 내 모시기도 하셨습니다. 마치 야곱의 험악한 삶과 방불하지요? 그러니까 야곱과 이스라엘의 인생과 역사도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집니다.

 

(삼하 7:12-15)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계속 등장하는 ‘후손’에 관한 예언이 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바로 그 후손에게서 완성이 되고 성취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이라는 약속의 후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다른 어떤 후손에게로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아래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언약에 등장하는 말씀 중에 특이한 것은 그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이랍니다. 계시가 좀 더 명확해 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창세기 3장 15절에서 처음 등장한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등장한 후손, 그리고 다윗의 언약에 나타난 그 후손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 3:16)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런데 사무엘하의 다윗의 언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징계하시고 가르치시면서 기필코 당신의 아들로 만들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두 이야기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그 분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삼으시겠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하신 분이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그 후손이 예수님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사무엘서 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후손을 사람채찍, 인생 막대기로 징계하셔서 아들을 만드시고야 마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후손은 예수님을 가리킴과 동시에 또 다른 어떤 존재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지요?

 

(롬 4:16-17)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여기서는 후손이 누구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교회를 ‘후손’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하나님의 언약에 등장하는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 연합되어 구원받게 될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함께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목적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아들을 삼으셔서 죄를 밟아 뭉개고 하늘을 통치하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의 생애가 담고 있는 내용이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도득한 축복의 내용인 것이며, 창세기 3장 15절부터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인 것입니다.

 

(계 21:7)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명확하지요?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지는 하나님이 우리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의 ‘후손’ 즉 아들이 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그 분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겨야 합니다. 다른 말로 ‘승리’라는 이름을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그 ‘승리’라는 이름이 어떻게 주어졌지요? 하나님이 죽어야 할 야곱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승리, 이김’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있는, 마치 주말 드라마의 내용 같은 어처구니없는 이 내용은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과 구원의 과정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등장하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후손, 그리고 다윗의 언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 질 후손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받은 교회가 일관성 있게 연결이 되십니까?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은 그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을 근거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또한 그들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을 근거로 택해진 것이 아니라고 모세는 신명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신7:7) 마찬가지로 교회의 선택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욕심에서 형의 축복을 가로챘지만 결국 빈손으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재산에 손도 대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풍성한 소산과 기름진 땅은커녕 아예 고향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약속된 기름진 땅과 풍성한 소산은 이 땅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수시로 가나안 땅을 비워주어야 했고 수시로 적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고자 했던 땅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소산을 그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데에 야곱의 공로가 전무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하심과 죽으심의 은혜만이 유효했습니다.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았지만 그로부터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이 자손들에게로 계승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과 나라로부터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유익을 이렇게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롬 9:4-5)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의 계시와 언약과 율법과 제사 제도와 성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부터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어졌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순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유효한 것처럼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 10:5-6)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2-26)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는 복음의 적용 대상이 예루살렘 뿐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확장이 됩니다.

 

(행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율법으로 구원을 받던 세대와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세대가 분리되어 존재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지는 복음의 통로, 즉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등장하는 ‘후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개인을 지칭할 뿐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과 역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 안에서 탄생하게 되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는 이 땅에서 무엇을 목표로 하여 살아가야 하는가? ‘승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야곱이 어떻게 그의 인생을 승리로 끝내는지를 보면 되겠지요?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의 ‘승리’가 어떻게 야곱의 인생의 ‘승리’로 이어지는지 보세요. 오늘 본문 창세기 27장은 창세기 48장에서 결론이 납니다.

 

(창 48:17-20) “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 세웠더라”

 

어떠세요?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뜻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취향과 욕심에 이끌려 사기와 권모술수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48장에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장자인 므낫세를 뒤로 물리고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내리는 완전히 길들여진 말 잘 듣는 양 같은 야곱이 나옵니다. 그는 그렇게 손자들과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긴 뒤 역사의 뒤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결국이며, 그게 바로 성도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사기꾼 야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야곱으로 지어지는 그 과정을 창세기 기자인 모세가 장장 스물두 장을 할애하여 기록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이며 교회의 본질과 본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인 영적 이스라엘은 야곱처럼 자신의 뜻과 야망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 앞에서 사기와 권모술수까지도 동원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참 ‘후손’의 삶이 예수님의 삶 속에 확실하게 계시되어져 있습니다.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이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되지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장의 ‘승리’와 오늘 본문의 열 왕이 굴복하는 ‘통치권’이 비로소 예수 안에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 세상의 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름지고 풍요로운 하늘의 땅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비결이 뭡니까?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며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그게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기름진 땅과 하늘의 풍성한 소산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목숨 바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바로 그 언약의 상속자이니까요.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자 권을 계승하는 당신의 영적 장자들인 교회를 가시와 엉겅퀴의 땅에서 건져내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입성시키실 것을 창세전부터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이 역사와 우주 속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깊이 간섭하시어 그들을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신다는 것이 바로 야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목적지는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빠져나와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늘의 가치를 참 가치로 삼아 이 세상을 조롱하는 삶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하나님의 자리에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와 힘의 원리와 번영의 신학과 고지론 같은 것들이 자리를 잡고 떡하니 앉아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꿩 잡는 게 매라고 무조건 번영하고, 성공하고, 많이 모으면 그게 장땡입니다. 기복주의든 신비주의든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의 힘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세상의 힘을 약속해 주는 이상한 하나님이 우후죽순처럼 난무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거짓말을 전합니다.

 

(딤후 4:3-5)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주님은 그 때를 마지막 때라 하셨습니다.

 

(막 13:6,14-19)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 지어다 17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 이는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자신의 사욕을 버리고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유익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멸망의 가증한 것인,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와 번영의 신학 등이 앉아 있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을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이 사냥한 고기의 유혹에 넘어가 초개처럼 여겼던 이삭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권을 팔아버린 에서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아닙니까? 어떤 주석가는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주술의 시작’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세상 것들을 받고 신의 복을 빌어주는 무당 짓거리가 약속의 자손 이삭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치욕적인 평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그 짓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도망가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 여러분,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정신 차리세요. 여러분은 십자가로 세상을 이겨내라는 하나님의 역설을 몸으로 살아내셔야 하는 성도입니다. 힘을 빼세요. 순종하십시오. 그게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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