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주 (I)
(김성수 목사)
(창 26:1-13) “1 일찍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 적이 있는데, 이삭 때에도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이삭이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다. 2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3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5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6 그래서 이삭은 그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7 그 곳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를 보고서, 그에게 물었다. "그 여인이 누구요?" 이삭이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누이요." 이삭은 "그는 나의 아내요" 하고 말하기가 무서웠다. 이삭은, 리브가가 예쁜 여자이므로, 그 곳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8 이삭이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산 지 꽤 오래 된 어느 날,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애무하는 것을 우연히 창으로 보게 되었다. 9 아비멜렉은 이삭을 불러들여서 나무랐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의 아내인데, 어쩌려고 당신은 그를 누이라고 말하였소?" 이삭이 대답하였다. "저 여자 때문에 제가 혹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10 아비멜렉이 말하였다. "어쩌려고 당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하마터면, 나의 백성 가운데서 누구인가가 당신의 아내를 건드릴 뻔하지 않았소? 괜히 당신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될 뻔하였소." 11 아비멜렉은 모든 백성에게 경고를 내렸다. "이 남자와 그 아내를 건드리는 사람은 사형을 받을 것이다."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13 그는 부자가 되었다. 재산이 점점 늘어서,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랄에서 거부가 되는 상징적 그림을 통하여 우리 성도의 본분에 대하여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자기의 야망과 비전을 성취하여 이 땅의 번영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지어져 가다가 종국에는 하늘의 모든 풍요를 상속받게 되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삶을 잘 살다가 가야 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이삭이 거부(巨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짜 복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이 되는 때는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순종과 의뢰의 제사를 드렸을 때임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왜 하나님께서 어차피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이삭의 삶에 흉년과 여러 가지 시험들을 허락하셔서 그를 고통스럽게 하시고 그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폭로하시는가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날 혹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를 믿으면 그런 일이 모두 사라지고 만사형통의 삶이 찾아 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약속의 자손의 삶에 흉년을 허락하시고 여러 가지 시험을 두실까요?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창 26:1,7-9)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7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 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 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 이로라”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점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왜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이어 약속의 자손 이삭에게도 흉년을 허락하셨는가?’이고 두 번째는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시어 세상 앞에서 그들의 연약함을 폭로하시는가?’입니다. 요즘 이 미국도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우리 교인 중에서도 인생의 흉년을 겪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신 것을 제가 압니다. 하나님이 이런 때에 다른 사람은 다 힘들어도 우리 성도들은 그 흉년에서 좀 건져주시면 안 되나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도 이렇게 지독한 흉년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이론적으로 그러한 흉년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담대하게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성도들이 그러한 고난 속에서 아주 자주 하릴없이 무너져 버리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흉년을 피해 하나님의 언약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건 정말 신앙이 없는 불신앙의 행위일까요?
뿐만 아니라 이삭은 자기 아버지와 똑같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서 마침내 그랄 왕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하나님 백성의 대 망신입니다. 오늘 날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야단을 맞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야단맞을 짓을 하는 사람은 모두 다 가짜인가요? 성경은 그가 복 받은 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그 결론으로 가는 과정에 흉년과 시험을 차례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독자인 교회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 있겠지요? 우리는 그러한 그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허락하시는 삶의 흉년들과 그들의 연약함을 폭로하시는 시험들은 그들이 온전히 복을 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데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성도의 성숙과 완성을 이루어 가시는 데에 세상의 힘인 권력과 강함과 번영 등을 사용하시지 않고 성도의 고난과 나약함과 비굴함 등을 들어서 쓰시고 아울러 그들에게 자신들의 무력함을 경험케 하시는 것일까요?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하시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최종 목적입니까? 아니면 어떤 목적을 향한 과정입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구원받기위해 삽니까? 아니면 구원받은 자로서 어떤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하는 것입니까? 이사야서 43장7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사 43:7) “7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에스겔서 36장 22절에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너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더럽힌 나의 이름을 위해 너희를 구원했다고 하십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성도의 최종 목적지는 구원이 아닙니다. 성도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며 그 분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게 목적지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구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일까요?
여러 번 설명해 드렸다시피 이 가시적 우주 속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것과 하늘의 것이 피조물에게서 밝히 보여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독사’ ‘영광’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자명하게 밝혀지지요? 구원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사는 것, 다른 말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혹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의 손해와 상함과 희생을 감수하고 사랑하며, 인내하며, 온유를 발하며, 섬겨주고, 용서해 주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그러한 천국의 삶을 사는 자로 지어지고 완성되어지기 위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살아내며 거기에서 주어지는 하늘의 평안과 안식과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이라면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천국의 삶을 미리 살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적지는 이 땅에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에 맞게 삶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 1번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에 대한 대답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기고 누리는 것’인 것입니다. 그건 절대 이 세상의 힘을 얻고 쌓아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삶의 뚜렷한 목적도 없이 이 세상 힘을 쌓는 것은 그만큼 공허를 쌓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롬 3:23)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 가지는 생각과 행위 그 모든 것을 죄라 합니다. 따라서 그 죄에 빠진 존재들은 절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수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오직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
(요 12:43)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 하였더라”
(요 7:18) “18 스스로 말하는 자(죄인)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예수, 성도)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이게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이 세상의 힘을 쌓고 남을 밟아서라도 자기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자신만이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그 죄인의 자리에서 구원 받은 성도에게서 제일 먼저 깨어져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힘은 절대로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절대 영광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흉년이며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경험케 하는 여러 가지 시험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순종의 제사를 드림으로 참 복을 받은 자가 되는 과정 속에 흉년과 그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이 폭로되는 시험이 차례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 닥치는 고난과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세상을 포기하게 하는 시험들이 성도를 성숙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완성해 내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흉년을 맞아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 세상의 물질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결코 안전할 수 없겠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물질이 부족한 지경에 처하자마자 냉큼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애굽으로 향하는 자신의 믿음 없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과연 하나님께 복을 받은 언약의 후손이 맞나?’하는 자괴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랄 왕 앞에서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리브가를 너무도 쉽게 팔아먹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발견하면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자가 맞는가?’하고 괴로워했을 것이고,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도 그랄의 목자들과 아비멜렉에게 이리 저리 쫓겨 다니며 자기가 파놓은 우물까지 빼앗기는 그런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살면서 ‘나의 힘과 방패는 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 바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경험이 그의 삶 속에서 브엘세바에서의 순종의 제사를 격발해 낸 것입니다. 이게 다 우리 성도가 우리의 인생 동안에 겪어야 할 흉년이요 시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직시해야 하며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잘 배워서 자기와 이 세상을 부인하고 하늘의 풍요를 그리워하며, 하늘의 부요를 소망하는 삶을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인 영생을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때때로 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이 폭로되는 고난과 시험이 허락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영광을 취할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는 자신을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부인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 자신과 자기가 이루어 놓은 세상의 영광을 자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 고린도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자랑하다’라는 단어입니다. 특히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에는 ‘자랑하다’ ‘카우카오마이’라는 단어가 무려 열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이 세상의 힘과 풍요와 번영을 자랑거리로 삼았던 고린도 교회에게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계속 자랑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당시 고린도 교회가 아주 잘못된 자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그 ‘카우카오마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였는가 하면 당시 로마의 문화가 자랑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레이스게스타이’라는 자기 이력서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자기의 업적이나 장점, 훌륭한 경력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한 로마의 문화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사람들도 이 세상의 힘으로 자기를 자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신앙을 그러한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 시켜버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던지는 사도의 일갈이 고린도서의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면 당시 고린도 교회가 자기들의 자랑으로 삼았던 것이 무엇인지 고린도 전서 4장으로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전 4:7-13,16) “7 누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별다르게 보아 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놓고 왕이라도 된 듯이 다스리려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처럼 다스리면 좋겠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미말)가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신 것 같습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으나,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11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12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13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16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보시다시피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배가 불렀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처럼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힘을 얻어 유명하고 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 교회의 목표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해서 얻어낸 세상의 힘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세상의 왕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강함과 자기들의 영광을 자랑하며 그게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것인 양 살았습니다. 오늘날 조엘 오스틴 식의 번영의 신학( theology of prosperity, health & wealth gospel)과 너무 흡사하지요?
반면에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마치 사형수처럼, 찌꺼기처럼, 쓰레기처럼 살았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고된 노동을 하고 얻어맞기도 하고 아주 보잘것없이 살았습니다. 본인이 자기와 다른 전도자들의 삶을 가리켜 쓰레기, 찌꺼기, 구경거리라고 거침없이 말하면서 너희들이 자랑하는 것과 우리들이 자랑하는 것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이 힘과 부와 번영과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며 그것을 누리고 살았던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그렇게 쓰레기 같고 찌꺼기 같은 자기의 삶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샘이 나서 그런 것이라면 이해를 하겠습니다. 자기는 고생고생하고 있는데 자기가 개척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떵떵 거리며 살고 있는 것이 질투가 나서 그런 것이라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지금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로 그들에게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으라.’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에서 사도는 본격적으로 바로 그러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고후 11:18,23-30) “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사도는 지금 자신의 치부를 몽땅 드러내 놓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30절에서 ‘부득불’이라고 번역이 된 ‘데이’라는 동사는 ‘must'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반드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자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하고는 완전히 반대지요? 12장으로 가면 더 가관입니다.
(고후 12:1-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 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사도바울이 자기가 세 째 하늘에 불려 올라갔던 것을 자랑하는듯하더니 결론은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 때문에 자신이 너무 교만해 질까봐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사단의 가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없애달라고 한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고통스러운 가시를 허락하신 것이 자신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7절에 나오는 ‘자고하다, 휘페라이로마이’라는 단어와 ‘자랑하다, 카우카오마이’는 ‘높이다, 올라가다’라는 뜻의 ‘아이로’라는 동사를 같은 어근으로 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를 의역을 해보면 ‘엉뚱한 것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처럼 엉뚱한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사단의 가시를 그의 몸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처사로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게 된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의 유일한 목적임을 사도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길에 자기의 몸을 뚫고 들어온 사단의 가시가 선용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쁘고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사단의 가시라는 어구에서 ‘가시’라고 번역이 된 ‘스콜롭스’는 전쟁에서 쓰이는 고문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대시대 때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사로잡은 적군을 사슬로 묶고 1미터가 넘는 뾰족한 꼬챙이로 한 쪽 옆구리에서 찔러 다른 쪽 옆구리로 관통을 시켜 아군 진영으로 끌고 다니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꼬챙이가 ‘스콜롭스’입니다. 바울이 몸에 지닌 사단의 가시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스콜롭스’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엉뚱한 세상의 것들로 자랑하는 삶을 살까봐 우리 하나님께서 나에게 날카롭고 거대한 꼬챙이를 내 육신에 찔러 넣으셨다. 그게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므로 나는 이 꼬챙이를 자랑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상태에 의해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기뻐하고,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자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으로 가면 그게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고전 1:24-31)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세상의 모든 힘을 다 모아도 하나님의 약함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로 너희들의 위로를 삼으려 하느냐는 것이지요. 왜 부자가 되어서, 혹은 높은 벼슬을 얻어서 하나님의 일을 도우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방법은 연약하고, 미련하고, 학벌도 별로 안 좋은 그런 약한 자들을 택하여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어 보이는 방법으로 일을 하신 다는 것입니다. 27절에 명기되어 있는 것처럼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우리의 약한 모습이 드러날 때에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을 ‘약할 때 강함 되심’이라 합니다.
(고후 12:9-10)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하나님) 능력이 (우리의)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내가 나의 인생 속에서 겪는 흉년과 수시로 나를 절망시키는 여러 가지 시험들을 통해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나의 야심과 비전의 허망함을 직시하며 나의 지혜와 명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놓지 않으시고 성숙시키시며 완성시키시는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 그것이 자기 부인이며 그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핵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부인이 되면 그 안에 살아계신 예수가 비로소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나를 자랑하는 삶에서 빠져나와, 다른 말로 자아중심 적 자아를 죽이고 내 안에 임재 해 계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으로 삶의 방향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자기 자신에게 자꾸 실망하고 절망해야 하는 것이며 아울러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고도 ‘저 사람 원래 저런 인간이었어?’라는 반응보다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어 자기를 부인시키고 세상을 포기 시키고 있구나’하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에 대해 절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힘이 얼마나 허망하고 공허한 것인지를 배우셔야 합니다. 죄인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만들고 쌓은 이 세상의 힘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배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그러한 가시들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잘 참으세요.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안에 여러분의 가시도 포함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 가시는 여러분의 최종적 선을 위해 잠시 동안 허락된 것일 뿐입니다. 그 가시를 통하여 이 세상의 불가능함과 어두움과 처절한 무력함을 배우세요. 그런데 그 모든 인생의 가시들을 다 모아서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머리에 쓰시고 결국에는 그 모든 가시들을 다 도말해 버리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제 여러분에게 약속된 영생의 나라에서는 그 모든 가시들이 다 사라지고, 저주받은 이 땅이 토해내는 모든 가시와 엉겅퀴가 다 사라지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와 행복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잘 참으세요.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가시를 경험하며 그 가시가 모두 사라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지 이 땅에서 가시를 빼내어 이곳에서 천년만년 살고픈 욕망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의 목적을 뚜렷이 확인하세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 때 가장 행복하게 지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뚜렷한 삶의 목적이 있으면 현재의 흉년과 시험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 강수진씨의 발입니다.
강수진씨의 인생의 목적이 발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그 아름다운 발을 자랑하는 것이었다면 발이 이렇게 될 때까지 훈련과 연습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발이 저렇게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연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이 세상에서의 편안한 삶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 허락하시는 흉년과 시험들을 이겨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목표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이 이 여인의 발처럼 만신창이가 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넉넉히 견딜 수 있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니까요. 잘 이겨 내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의 한 구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롬 8:37)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주 (II)
(김성수 목사)
(창 26:1-13) “1 일찍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 적이 있는데, 이삭 때에도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이삭이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다. 2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3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5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6 그래서 이삭은 그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7 그 곳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를 보고서, 그에게 물었다. "그 여인이 누구요?" 이삭이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누이요." 이삭은 "그는 나의 아내요" 하고 말하기가 무서웠다. 이삭은, 리브가가 예쁜 여자이므로, 그 곳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8 이삭이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산 지 꽤 오래 된 어느 날,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애무하는 것을 우연히 창으로 보게 되었다. 9 아비멜렉은 이삭을 불러들여서 나무랐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의 아내인데, 어쩌려고 당신은 그를 누이라고 말하였소?" 이삭이 대답하였다. "저 여자 때문에 제가 혹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10 아비멜렉이 말하였다. "어쩌려고 당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하마터면, 나의 백성 가운데서 누구인가가 당신의 아내를 건드릴 뻔하지 않았소? 괜히 당신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될 뻔하였소." 11 아비멜렉은 모든 백성에게 경고를 내렸다. "이 남자와 그 아내를 건드리는 사람은 사형을 받을 것이다."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13 그는 부자가 되었다. 재산이 점점 늘어서,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난주에 왜 하나님은 약속의 자손의 삶에 흉년을 허락하시고 여러 가지 시험을 두시는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진 인간이 타락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자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그 속에서 구원하심으로 그들이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새롭게 창조해 내셨고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이 자기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도록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그들을 성숙시켜 가시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의 삶 속에 그들이 이 세상의 힘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도록 하게 하기 위한 인생의 흉년과 자신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이 폭로되는 여러 가지 시험들이 허락되는 것이라 했지요? 심지어 성경은 그러한 모든 인생의 흉년과 고난과 시험들을 하나님의 은사라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롬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여기에서의 ‘모든 것’에는 환난과 고난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에는 모든 것이 합력이 되어 선, 즉 새 창조의 완성에 기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단 택해진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합력시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다른 말로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만드시는 데에 도구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성도의 선에 기여하는 모든 것 안에 포함된 선물로서의 고난과 시험 등을 가리켜 ‘연단’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잠 17:3) “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이게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여기서 연단이라는 말은 시험이라는 말과 혼용해서 쓸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친히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키드너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주시는 고난과 시험 등이 finding out을 위한 것이 아니라 sorting out을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주시는 고난과 시험은 누가 잘 견디는지 시험하여 합격한 사람을 찾아내어 상을 주시려는 의도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하는 우리 성도 안에 부족한 부분을 가려내셔서 그 부족한 것을 채우시기 위해 고난과 시험을 주시는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통과 환난과 시험을 포함하고 있는, 합력하여 성도의 선을 이루는‘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롬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사도는 지금 28절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의 그 ‘모든 것’이라는 단어를 32절에서 똑같이 반복하여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인생의 모든 사건과 정황과 인물들이 다 예수와 같은 은사, 즉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비중의 선물인 것입니다.
(빌 1:29)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여기에 분명히 나오지요? 은혜의 내용이 믿음과 고난입니다. 믿음이 선물인 것처럼 고난도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저주니, 심판이니’하면서 악다구니를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힘이 좀 든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우리 아버지의 선물(은사)이라 생각하고 잘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 중 이런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요?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쉬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멍에와 당신의 짐을 지라고 하시면서 그 멍에와 짐은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인생에 허락하시는 흉년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과 지금 읽은 주님의 약속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지요?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까지도 약속을 하십니다.
(요 8:32)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쉼과 자유,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우리 성도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구절들만 보면 우리 성도는 예수를 믿는 순간 만사형통에 일사천리로 평생을 자유와 쉼 속에서 살아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정말 그런가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나서 정말 여러분에게 찾아온 것이 쉼과 자유입니까? 아마도 다윗은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시 23:1-3)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다윗은 그야말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뒤 무려 십 칠년간을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심지어 미친 사람 흉내까지 내어야 했던 사람이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신도 못 신고 도망을 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복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편 51편 같은 처절한 시를 써야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부르시고 이끄시는 여호와를 가리켜 자신을 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그러한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속에서도 그의 인생 속에서 놓치지 않았던 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을 때가 더 살기 쉬웠습니까? 아니면 율법에서 해방되어 예수님께로 나아온 이후의 삶이 더 쉽습니까? 함부로 대답하지 마시고 잘 생각을 해 보세요. 제가 간단한 예를 들어 드릴게요. 십계명 중 제 6계명인 ‘살인을 하면 심판을 면치 못 하리라’는 명령과 ‘형제를 향해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도 지옥에 보내버리겠다’라는 예수님의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지키기 쉽습니까? 어떤 게 더 무거운 짐인가요? 십계명 중 제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와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에게 주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들마다 이미 간음한 자’라는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지키기 쉽습니까? 십계명 중 8계명인 ‘도적질 하지 말라’와 ‘네 오른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는 예수님의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지키기 수월한 명령인가요? 구약 때는 7일 중 안식일만 지키면 되었는데 주님은 7일을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구약 때는 십일조만 하면 되었는데 주님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주고 당신을 좇으라하십니다. 율법에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는데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이 지키기 쉽습니까? 예수님의 요구가 지키기 쉽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당신의 짐이 쉽고 가벼우며 당신의 목적은 우리에게 쉼을 주는 것이라 하셨는데 보시다시피 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너무나 어렵고 힘이 든 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거짓말쟁이 이시든지 아니면 성경의 기록이 잘 못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성도에게 약속된 쉼이라든지 가벼움 같은 단어들은 상태나 여건을 가리키는 언어가 아닙니다. 제가 전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어절을 설명해 드리면서도 똑같은 설명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우리 성도에게 약속된 이 땅에서의 복은 상태나 환경이나 현실적 여건 등에 관한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단어인 것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다시 마태복음 11장으로 가 보시면 우리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을 쉬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대목에서 당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을 굳이 밝히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렇지요? 이 말은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예수를 믿자마자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문젯거리가 다 사라지고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들이 다 녹아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실 뿐 아니라 겸손하신 분이신데 너희들에게 그러한 고난과 고통의 짐들을 허락하셨을 때에는 무슨 까닭이 있으실 것 아니냐? 그러니까 너무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하는 경박스러운 생각도 말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상태나 환경이나 조건이 변화되거나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그 짐들이 그리 무겁고 버겁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오면 너희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무거운 멍에들이 벗겨지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의 멍에를 지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멍에는 항상 소 두 마리가 함께 지게 되어 있다고 했지요? 주님은 지금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가 지고 있는 짐을 너희 혼자 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그 멍에를 함께 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전능자이고 나의 마음은 겸손하고 온유한데 나와 함께 지고 가는 멍에가 어떤 목적이 없이 그냥 지워진 것이라면 내가 그 멍에를 가만히 두겠느냐는 것이지요. 너희가 지고 가는 멍에는 ‘선’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전능자이며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한 내가 너희와 함께 지고 가는 짐이므로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자폭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가 지는 짐이 전혀 힘이 들지 않다거나 세상 살기가 너무 쉬워진다는 그런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똑같은 상태를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되어 마음이 쉼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은 죄에 묶여서 죄밖에 지을 수 없었던 우리가 이제 자유롭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의 자유이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의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진리에 의해 자유케 된 자들은 세상에서 유쾌하게 짓던 죄를 지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간섭을 해 오시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세상 적으로 볼 때 어떤 것에 의해 속박되고 제한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의 후손으로 지목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자유, 쉼, 가벼움, 평안 등은 아무런 일이 없이 편안한 상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암울하고 어둡고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아 알게 된 자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는 소망의 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겪고 있는 모든 사건과 정황들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작품임을 인정하십니까? 물론 그러한 일들이 우리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도 있으며, 세상을 향한 우리의 체념을 유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일 수도 있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명을 전달하시기 위한 도구로 주시는 것일 수도 있으며, 욥처럼 세상에게 하나님 백성들의 믿음과 소망을 과시해 보이시기 위해 주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다 우리의 연단과 성숙을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의인인 욥이 아무런 잘못 없이 시험과 고난을 통과했다할지라도 그의 종국에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유익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성도가 그러한 올바른 목적의식을 가지게 될 때 성도는 고난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무거운 짐을 더 이상 무겁게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연유로 나에게 고난을 주셨다 할지라도 더 이상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냄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오는 하늘의 풍요를 맛볼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신앙생활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파렴치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흠뻑 받는 삶을 살면서 거기에서 오는 하늘의 풍요를 경험하는 삶인 것입니다. 비록 자신을 부인해 나가는 과정이 고난과 시련으로 우리에게 닥치게 되지만 그러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자각하고 인식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난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님을 누리고 즐기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적이라면 예수를 일찍 믿는 것이 이익입니까? 아니면 실컷 놀다가 죽기 바로 전에 예수를 믿는 것이 이익입니까? 많은 분들이 평생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예수님 옆 십자가에 달렸다가 막판 뒤집기로 구원을 얻은 강도를 부러워합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천국가기 위해 이 땅에서 하기 싫은 하나님의 명령을 억지춘향 식으로 지켜내는 자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미리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이 세상의 삶은 억지로 통과해 내야 하는 지옥 같은 용광로가 아니라 영생의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목적을 완전하게 발견한 이들에게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이 세상의 것들을 끌어 모으고 인기와 명성을 얻어 자신을 자랑하고 상대적인 우월감과 상대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그야말로 고해(苦海)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들의 가슴에 뻥 뚫린 공허를 메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거기에서 오는 희열과 기쁨을 배우고 경험하며 추구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힘들이 자신의 인생에 채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하늘의 삶을 누리며 영생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올바로 믿게 된 이들이 ‘조금 더 세상의 것들을 누리고 해볼 것 다 해보다가 나중에 예수를 믿을 걸’이 아니라 ‘조금 더 빨리 예수를 믿고 이 하늘의 풍요를 더 많이 맛 볼 걸’이라는 고백들을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안 자 들은 세상의 쾌락이 더 이상 즐겁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볼 거 다 해보고 조금만 더 있다가 예수를 믿을 걸’이라니요? 하늘과 하나님을 안 자 들은 하늘의 풍요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달은 이들은 이 땅에서 문득문득 하늘의 삶을 경험하며 그 인생여정을 기쁘고 행복하게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교회에게 ‘너희의 삶의 목적을 발견하여 알라’고 외친 것입니다.
(전 12:1) “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공동번역] “1 그러니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 하는 탄식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기 전,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어지기 전에, 그러니까 어떤 목적과 야망을 가지고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너를 창조한 이가 계시다. 그리고 그 창조자는 너를 심심해서 우발적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창조자가 너를 무슨 목적으로 지었는지를 생각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엉뚱한 목적을 향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들 그게 확인이 되셨습니까? 내가 왜 이 세상을 이렇게 아무런 선택 없이 살아가야 하는지 정말 아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분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 그 분의 유일한 명령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성숙되어지고 완성되어지는 그 길에서 하늘의 풍요와 행복을 맛보는 자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세상의 힘이나 육신의 건강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그게 행복이니까요. 성도의 행복은 그의 삶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잘 맞추어졌을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하와이 모라카이 섬에서 죽는 날까지 나병 환자들을 섬기다가 가셨던 다미엔 신부님은 16년간 그 곳에서 한센 병 환자들을 돌보시면서 하나님께 단 한 가지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들을 섬기고 돌본다고 하면서 정작 이들의 고통과 사정을 몸으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좀 더 이들을 잘 섬길 수 있게 이들의 고통과 사정을 제 몸으로,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예배당으로 급히 나가던 다미엔 신부님은 그만 난로 위에 있는 뜨거운 물 주전자를 자기 발에 쏟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뜨거운 물이 전혀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천천히 다시 그 주전자를 들어 그 안에 펄펄 끓고 있는 물을 확인 한 뒤 자기의 발 등에 그 물을 부어 보았습니다. 여전히 뜨겁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모라카이 섬에서 사역을 한지 12년 만에 그만 한센 병에 감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 즉시 ‘할렐루야’를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길로 예배당으로 달려가 ‘좋은 아침입니다. 나의 한센 병 동료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선물을 주셨습니다.’라고 아침 인사를 했답니다. 혹자는 그 분이 일부러 한센 병에 걸렸을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분은 그 한센 병을 가리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고 기대도 없던 사람에게 한센 병이 찾아오면 그건 아마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미엔 신부에게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한센 병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 한센 병 환자들이 자신에게 거리감을 두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자기 자신도 한센 병 환자들의 고충이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한센 병을 허락하셔서라도 그들과의 거리감을 없애주시기를 원했고, 그들의 아픔과 고충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한센 병의 고통은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육체에 한센 병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힘들었을 것입니다.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그에게 있어서도 한센 병은 고난이요 시험이었음에 분명하지만 그러한 질병이 자신이 하나님과 다른 이웃을 좀 더 깊이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방법이요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미엔 신부는 그의 한센 병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고 오히려 자기에게 찾아온 한센 병을 기쁨으로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행복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잘 맞추어졌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준비하고 심지어 자신의 성숙을 위해 고난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을 세상은 절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성도의 고난에 관해 설교를 하는 것은 우리 성도의 삶이 고난으로만 점철될 것임을 말씀드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못 삽니다. 우리의 삶에는 기쁨과 행복과 평화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필요와 목적에 의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을 때에 우리가 아무런 준비나 기대를 하고 있지 않으면 그 고난의 충격은 너무나 크고 엄청나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미리 각오를 하고 준비를 하자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눅 14:26-33)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 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자기를 좇는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이 땅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으로 연결을 시키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평판과 소유를 위해 평생을 허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자아 숭배 교에서 내려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세상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삶을 살아야 주님의 제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이 땅에서 겪어내야 할 것들이 있음을 암시하시면서 그것들을 준비하고 각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전쟁을 하면서, 혹은 망대를 지으면서 계획도 없이 아무런 각오도 없이 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를 믿는 것은 결연한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가 각오해야 하고 기대해야 하는 성도의 고난에 관해 자주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삶에 닥치는 흉년이나 시험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 흉년과 시험에 대한 각오가 결연히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감당할만한 시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뚜렷한 자기 삶의 목적지를 확인하고 그 목적지에 안착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인생의 흉년과 여러 가지 시험을 치를 각오를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포로를 억지로 굶기는 것은 고문입니다. 그러나 한 달 동안에 20파운드를 빼고야 말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루에 우유 한 잔 토마토 한 개로 연명하는 가련한 여인의 배고픔은 전자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배고픔인 것입니다. 다이어트를 위해 굶는 여인은 하루하루 줄어가는 체중계를 보며 기쁘게 밥을 굶습니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 억지로 굶고 있는 포로의 굶주림은 고통의 굶주림인 것입니다. 그처럼 삶의 목적을 확인하는 일은 성도에게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영국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었습니다. ‘위험한 여행에 동참할 사람을 모집합니다. 우리와 합류하여 여행을 할 사람은 여러 날 굶주리게 될 지도 모르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견뎌야 합니다. 잠을 잘 때에도 모든 옷을 입고 자야하고 항상 텐트에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안전한 귀가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속되는 위험과 익사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오랜 시간 밤만 지속되는 곳을 지나야 하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보수는 아주 적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여행을 선뜻 나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신문 광고를 보고 영국에서 젊은 청년들이 수천 명이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그 신문광고는 북극 탐험대를 모집하는 광고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춥고 배고프고 위험한 여행을 선뜻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극 탐험이라는 목적과 명분을 그 앞에 달면 사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적이 고난을 이겨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성도의 삶에 닥치는 모든 흉년과 고난과 시험은 전부 합력이 되어 우리의 선을 이루는 데에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인생의 흉년과 고난,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들을 통과하고 있을 때만큼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고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날리고 거의 알거지가 된 우리 교인 하나가 ‘목사님 제가 하나님보다 그 돈을 너무 의지하고 있는 걸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나 봐요.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라고 그 돈을 다 치워 버리셨네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제 삶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해 내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저의 말이 아닙니다.
(고후 12:9-10)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하나님) 능력이 (우리의)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사도바울이 자신의 고난이나 약함을 자랑하면서 그러한 자신의 고난과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는 증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머물다’라고 번역이 된 ‘에피스케노’라는 단어는 ‘장막을 치다, 거주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를 요한복음 공부할 때 이미 보셨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서 ‘거하다’라는 단어가 ‘에피스케노’입니다. 그 단어는 요한계시록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계 21:3)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함께 거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스케노오’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단어를 구약에서 한 군데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 25:8-9)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 지니라”
이렇게 성도의 삶을 관통하는 인생의 가시들은 우리의 자기중심적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손길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시고 온전히 거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온전한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처소로 삼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옛 자아를 환난과 고난과 흉년과 시험 등을 통해서 자꾸 죽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온전히 죽게 될 때 나는 비로소 작은 예수로 완성이 되는 것이고 온전한 브엘세바의 순종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복 받은 자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여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힘이 강하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적 자아가 부인되어 죽고 내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이 오롯이 드러나 우리가 작은 예수로 완성되는 그 목표지점을 꼭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그 목표지점 안착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난과 시련들을 잘 감당해 내십시오. 여러분, 나방이 고치 안에서 그 고치를 찢고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방이 고치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고치 아래로 바늘구멍만한 구멍이 납니다. 도저히 나방이 나올 수없는 그런 구멍입니다. 나방은 그 안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고치를 찢고 창공을 나는 나방이 됩니다. 그런데 그 몸부림치는 나방의 수고가 안쓰러워서 가위로 고치를 조금 찢어주면 나방은 날개를 펴 보지도 못하고 이내 죽습니다.
나방은 고치 안에서 작은 바늘 구멍 속으로 보이는 세상의 찬란한 빛을 기대하고 사모하며 몸부림을 치면서 날개의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나방이 고치 안에서 몸부림을 칠 때, 그 때 몸에서 날개로 성장 액이 전해져서 날개에 힘이 가게 되고 비로소 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방의 고난을 외부의 힘이 덜어주게 되면 그 나방은 잠시의 고난은 피해갈 수 있을지언정 곧 죽게 되는 것 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식들이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정말 안쓰러우실 것입니다. 도대체 비상구가 없는 것 같고, 도대체 돌파구가 없는 것 같은 우리의 상황을 보시면서 우리가 갇혀있는 흉년과 고난의 고치를 찢어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게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 훈련시키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흉년과 고난의 고치가 찢어지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성숙되고 완성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겪는 인생의 흉년과 고난과 시험은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의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므로 기뻐하며 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약 1:2-3)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벧전 4:12~16)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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