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와 선한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 (I)
(김성수 목사)
(요 10:1-5)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우리는 오늘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의 특징을 공부함으로 해서 절도며 강도로 불리는 왜곡된 복음의 실체를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선한목자의 특징이 두 가지가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 선한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어 그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간다는 것이고 두 번째가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먼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첫 번째 특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 10:3)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선한목자는 우리에서 양들을 불러내는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냅니다.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선한목자는 양들 각자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기억하며 그 이름으로 불러낸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선한목자는 양을 집단으로 보지 않고 개별적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양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 하는 자들은 양들을 집단으로 봅니다. 양들 각자의 안전과 유익에는 관심이 없고 그 양들의 발육상태와 그 양의 숫자에만 관심을 둡니다. 왜냐하면 그 양들이 살이 쪄야 자기의 수익이 많아지고 양의 숫자가 많아져야 자기의 재산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을 단지 나의 욕심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집단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목자이신 주님은 양을 개별적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아주 훌륭한 예화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 18:12-13)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 가십니까? 주님은 목자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위험에 방치한 채 그 멍청한,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산에 남겨진 아흔 아홉 마리는 뭐가 됩니까? 이 말씀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과 남겨진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모든 백성들을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전에 코스타 공동 대표이신 모 박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의 아버님은 형제가 많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장남이신 큰 아버님이 배를 타고 가시다가 물에 빠진 만년필을 건지려고 물에 들어가셨다가 그만 익사를 하셨답니다. 그 후로 그 분의 할머님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워 하셨다고 하는데 그만 고정하시고 기운을 차리라고 자기를 위로하는 나머지 자식들에게 그 분의 할머니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것이 ‘그 아이가 너희들 중에 제일 나았어.’라는 말씀이셨답니다. 그 말씀은 나머지 자식들이 정말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표현하시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저의 세 아들 중에 하나가 잘못되어 그 중 하나를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저는 아마 그 아이를 따라 죽고 싶을 거예요. 그건 나머지 두 아이가 그 아이보다 덜 사랑스럽다거나 나머지 두 아이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 아이를 나의 목숨과 바꿀 수 있을 만큼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날 사랑하시는데 그 큰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나 하나밖에 없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신다는 어구의 의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신 선한목자는 그 양들 앞에서 그 양들을 인도하여 가십니다. 본문 3절에 나오는 ‘인도하다’라는 단어 ‘엑사고’는 ‘앞에 서서 데리고 가다’라는 뜻입니다. 그 것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도적은 양들을 뒤에서 쫓아갑니다. 그리고 혹시 그 양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양들이 고통 받는 동안 자신은 도망을 칩니다. 그게 절도이며 강도입니다. 마치 야곱이 얍복강을 건널 때 자기에게 가장 덜 소중한 것들부터 앞세우고 자신은 맨 뒤에서 형 에서의 공격을 피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선한목자는 양 앞에서 모든 위험을 자신이 먼저 겪으며 양들을 보호합니다. 그게 ‘인도하다’ ‘엑사고’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그 선한목자이신 예수가 우리를 앞서서 인도하여 가시는지 성경을 통해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막1:2-8)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왜 제가 갑자기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의 이야기가 바로 이 세례 요한의 이야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보내심을 받는 사자가 무엇을 하러 오는 것인지 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2절과 3절의 말씀은 이사야서와 말라기의 말씀을 용해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먼저 말라기의 인용 부분을 보겠습니다.
(말 3:1-5)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 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 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 하였느니라”
여기보시면 그 사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앞서 그 분의 심판을 외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목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눅 3:7-9)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리라”
그런데 이사야서를 보시면 그 광야에서 외치는 자, 다른 말로 주의 앞길을 평탄케 하는 자에게 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 40:1-3) “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렇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심판 뿐 아니라 위로와 죄 사함도 함께 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가 어떤 위로의 말을 했지요? 누가복음으로 가 보겠습니다.
(눅 3:16)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다 죽어야 하는데 그 중 어떤 이들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건져내실 분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위로와 죄 사함이지요. 그렇게 먼저 보내심을 받아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전했던 심판과 위로와 죄 사함이 어떻게 성취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됩니다. 그러니까 먼저 앞서 보내져서 심판과 죄 사함과 위로를 전하도록 되어 있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세례 요한에게서 시작되어 예수에게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말 4: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장에서는 그 먼저 보내지는 사자의 이름을 엘리야라고 명확히 밝힙니다. 그런데 먼저 보내어진 엘리야의 역할이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의 마음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는 역할입니다. 천사가 세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세례요한의 수태고지를 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눅 1:17)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정말 그렇게 되었나요? 세례요한의 사역으로 아비의 마음이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돌아왔습니까? 이 말라기의 예언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언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비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지금 말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타락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심으로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다시 돌이켜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자녀들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그 마음을 돌이켜 아비에게로 향하게 하실 것을 가리켜 엘리야의 사역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 님 앞서 와서 예수님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엘리야 사역은 예수님의 엘리야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시작을 한 것이지 그 요한의 사역 자체가 아비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을 화목하게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삶에 이루어질 심판과 죄 사함과 위로의 선포의 시작이 세례 요한에게서 시작이 되었기에 예수님은 참 엘리야이신 당신의 이름을 세례요한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마 11:13-14)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 17:10-13)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주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먼저 온 엘리야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11절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일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심판과 죄 사함과 위로에 대해 외치다가 간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에 당신의 사역을 연결시켜 성경에서 예언 된 엘리야의 사역을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은 먼저 보냄을 받는 엘리야 사역을 처음 시작한 세례요한과 그 엘리야 사역을 완성하실 당신을 하나로 묶어 엘리야라고 지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인자도 이와 같이, 세례 요한과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삶이 예수님의 삶의 예고편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도저히 임신이 불가능한 태에서 태어나지요? 그리고 천사가 수태고지를 합니다. 그가 광야에 살며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때웠듯이 주님도 공생애를 광야의 금식으로 시작을 하십니다. 그리고 회개를 외치며 물로 세례를 주다가 세상의 왕에게 잡혀 죽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주십니다. 그리고 역시 세상의 왕에게 잡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삶과 사역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축소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심판과 위로와 죄 사함을 완성하실 것인지를 그의 삶을 통해 미리 조금 보여주고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성경에서 광야는 생명 없음과 위험함과 어두움의 대명사임) 짐승 같은 죄인들과 악의 세력에게 둘러 싸여 온갖 시험을 다 겪으시고 결국 세례 요한처럼 세상의 왕에게 처형을 당하는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으나 결국 다시 살아나심으로 심판과 죄 사함을 동시에 성취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심판의 경고가 마침내 우리 주님에게 모두 쏟아졌고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이미 받아 버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진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 앞서 보내어진 사자는 우리에게 심판의 경고만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우리 앞서 오셔서 자신의 몸으로 다 받아내심으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위로라는 하나님 언약의 성취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게 앞서 보내진 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위로가 되신 그 사자는 지금도 우리의 인생을 앞서 가시면서 우리가 겪을 모든 환난과 고난을 다 겪고 계십니다.
(출 23:20) “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그렇지요? 그 사자는 우리를 하나님의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기 위해 우리의 앞에서 우리를 인도하며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항상 제자들보다 먼저 그들이 가는 곳에 가 계셨음을 성경이 이렇게 암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26:32)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여기에서 ‘가리라’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프로악소’라는 단어는 ‘앞서서 인도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단순히 그들이 갈릴리로 가기 전에 먼저 가서 기다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갈릴리로 가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역시 같은 단어가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막 16:7)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우리의 선한목자는 부활하셔서 그렇게 양들 앞에서 양들을 인도하여 가시면서 ‘다 비켜라, 내 양들이 간다’하고 그 양들이 겪어야 할 고난과 고통과 질병과 외로움과 심지어 죽음까지 파하시며 행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파하시는가 하면 자기가 그 모든 것들을 가져가심으로 그것들을 멸하십니다. 그게 십자가의 제사입니다. 원수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원수를 살려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는 역동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이 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한 번 부어지고 만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며 간섭하시는 다이내믹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제가 지금도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계신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앞에서 인도하고 계시는 선한목자의 모습입니다.
(히 4:15)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 선한목자께서는 우리의 질병, 가난, 모함, 시기, 질투 그 어떤 것도 우리 혼자 감내하도록 놔두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십니다. 그 말은 단순히 맛만 보신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다 가져가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 53:4)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서 ‘질고’라고 번역이 된 단어 ‘호리’는 ‘질병, 재난’이라는 뜻의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의 질병을 가져가시고 우리의 재난을 가져가신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고침을 받는 일들이 상징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마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렇게 예수님 당시에 귀신이 나가고 질병이 치유가 된 사건들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기적적인 일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두움을 다 가져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셨을 때 그 문둥병이 예수님에게 옮겨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혈루 병 앓던 여인을 고치셨을 때 그 혈루 병이 예수님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곧 함께 공부하겠지만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왔을 때에 그의 죽음이 주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 말은 주님이 예수를 믿는 사람의 모든 병을 다 고쳐주시고 그들의 재난을 다 없애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음이나 질병, 재난 등은 모두 죄에서 기인한 사망의 증상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사망의 증상들을 자기 것으로 가져 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질병을 겪으며, 재난을 당하며, 고통을 감내하며 하마터면 영원한 사망 속에서 이러한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고통을 영원히 받아야만 했던 우리의 사망을 대신 가져가신 주님을 오히려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겪었고 앞으로 겪어야 할 모든 질병과 재난과 실수와 실패는 모두 우리 주님이 먼저 겪으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양들 앞에서 양들이 감수해야 할 모든 위험을 파하며 그들을 인도해 가는 선한목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선한목자는 이렇게 우리 앞서 우리의 모든 질고와 연약함을 자신이 다 가져가시고 우리의 미성숙함과 실패와 실수를 자신이 완성시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막 1:7)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세례요한의 이 겸손함을 보세요. 그러나 이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됩니다.
(요 13:4-5)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실제로 주님이 제자들의 신 들메를 푸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게 앞서 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목자의 일입니다. 선한 목자의 ‘선함’의 둘째 요소는 11절에 나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선하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 목자가 선합니까? 어떤 양치기가 밤에 자기 양을 물고 달아나는 늑대를 좇아가 싸우다가 그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고 쳐 보자고요. 이 사건을 두고 누가 “아, 그 목동은 참 선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열의 열은 필경 “참, 어리석은 사람이야”하고 혀를 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존재한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 마음대로 양을 대하는 목자는 ‘악한 목자’라고 규정합니다. 양이 행복해지도록 일하고 희생할 줄 아는 목자가 ‘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 연장해 볼까요? 백성이 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을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가 선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제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이 주인을 위해 몸 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종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업원이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종업원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섬김과 헌신과 희생의 방향을 180도 완전히 돌려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혁명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고 누리기 위한 것 아닙니까? 종업원은 사장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고, 부하는 보스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연구원은 교수가 시키는 일이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힘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법칙이 아닙니까? 힘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부리고, 힘없는 사람은 힘 가진 사람을 위해 일하고 대가를 받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사는 것을 ‘악하다’고 규정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우리 인간을 착취하고 부리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당신의 가장 귀한 것까지 기꺼이 희생하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예수님께서 몸소 살아 보이셨던 것입니다. 골고다에 선 십자가는 바로 그 사랑의 법칙의 결정판인 것입니다.
(막 10:43-45)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이게 바로 두 번째 선한목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요건을 갖추셨기에, 즉 나를 절대적 가치로 사랑하시고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기에, ‘선한’ 목자라고 인정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사 28:16) “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 하리로다”
오직 주님만 선한목자의 시험에 합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이들의 앞에 서서 그들의 위험을 내가 막아주고 그들의 질병과 고초도 내가 가져와 그들을 전심으로 섬겨주고, 비워주고, 죽어주는 선한목자의 삶은 제물이 되어 죄인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어린양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선한목자의 삶은 구약에서 제사의 제물로 등장하는 선한양의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목자이신 주님을 성경이 선한 양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두의 어린양의 삶을 그 뒤를 따르는 다른 양들이 좇아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계 14:4)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성경은 이렇게 우리 성도를 어린양의 삶으로 선한목자로 인정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 감사히 좇아가는 자들이며 우리 또한 그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선한목자들이 되어 다른 양들을 인도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딛 2:14)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지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목자의 삶, 선한 양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를 불러내시고 인도하시는 선한목자처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가치로 대하며,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상대방을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뒤집으면 악하게 됩니다. 즉, 사람들을 상대적인 가치로 대하고, 그 사람들을 이용하여 나를 자랑하고 나의 유익을 구하려 하면, 우리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좇아오라고 하셨지요?
주님은 우리더러 선한 목자인 당신을 좇아오면서 선한 목자의 삶을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한 목자에 의해 각각 이름이 불려 진 우리 양들은 앞서 가는 그 선한 목자의 은혜를 깨닫고, 그 분의 삶을 본받으며,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선한 목자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을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확고한 목적이 세워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어린양이 자기를 어디로 이끌고 가든 열심히 불평하지 않고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님을 좇아가던 다윗이 이런 시를 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시를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 하리로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목자와 선한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 (II)
(김성수 목사)
(요 10:1-5,11-15)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우리는 지난주에 본문에 나타난 선한목자의 특징을 통해 양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목자 사역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분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절대적 가치로 사랑해 주시며(각각 이름을 부르다) 항상 우리 앞서 가시면서(인도하여 내다) 우리의 모든 죄와 어두움, 심지어 우리의 사망까지도 다 삼켜 버리시는 참 목자이십니다.(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다)
John owen목사님의 저서 ‘death of death in death of christ’의 그 제목처럼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 삼켜버리시고 당신의 죽음을 자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바로 선한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한목자의 삶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제단의 제물이 되어 죽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선한목자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이고 요한계시록은 성도인 양들을 가리켜 ‘어린양이 어디로 이끌던지 군소리 없이 좇아가는 양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은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이끌고 가십니다. 목자이신 어린양은 자신이 이끄는 양들을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양들로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곳으로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먼저 앞서서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며 전진하는 십자가를 지신 어린양을 좇아가며 그 앞선 어린양의 모습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95:6-7)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선한목자는 양들이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고 온전히 복종을 하는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한 선한목자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심으로 양들을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시는 선한목자의 모습은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반복되어 힌트 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다 들으시면 마치 오늘 본문의 선한목자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성경 전체에 흩어져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온통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제가 몇 사람만 찾아서 소개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목자가 누구입니까? 형에게 맞아죽은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입니다.
(창 4:2)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 이었더라”
인류 최초의 목자 아벨은 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열납된 자였습니다.
(창 4:4)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여기보시면 하나님은 아벨 자신과 아벨의 제물, 즉 그의 삶 전체를 열납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목자인 아벨과 그의 삶을 기뻐 받으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죄 없는 자가 세상을 상징하는, 힘을 소유한 가인에게 맞아 죽어 피를 뿌림으로 그 자신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였던 아벨 자신이 제물이 되어 어린양처럼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창 4:10)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여기에서 ‘호소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짜아크’는 ‘부르짖다, 예배하다’라는 의미의 단어라 했지요? 그러니까 아벨은 살아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와 짝이 되는 신약 성경의 한 구절을 찾는다면 어느 곳이 적합하겠습니까?
(빌 2:8)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선한목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목자인 아벨이 죽고 그 대신 죽음에 의해 이 땅에 탄생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셋입니다. 그의 이름의 의미를 잘 보세요.
(창 4:25)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목자인 아벨의 피 값으로 대신 태어난 사람이 셋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셋에게 ‘씨’라는 단어를 붙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여러 번 살펴 본 것처럼 그 ‘씨’ ‘제라’라는 단어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 안에서 연합되어 탄생하게 되는 교회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이야기는 목자인 그가 제물이 되어 죽음으로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새로운 씨가 탄생하게 되는 요한복음 10장의 선한목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죽었지만 지금도 그가 믿음을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 11:4)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 하느니라”
여기보시면 아벨의 제사와 예물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자라 하셨답니다. 그건 단지 양을 잡아 드린 아벨의 제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던 아벨의 제사가 바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하나님께 복종했던 예수의 제사처럼 그러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의’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동물 제사로도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가 의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10:4)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만 ‘의’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로 아벨과 하나님 사이가 ‘의’로 회복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한 이야기를 아벨의 삶이 담고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이 믿음을 매개로 하여 지금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그 구절을 보면 마지막 후미 부분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받고 있는 ‘아우테스’ 라는 대명사 앞에 ‘디’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단어는 ‘~을 통하여, ~을 매개로 하여’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하여 아벨의 이야기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양을 치는 목자로서 예수님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 요즘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 공부하고 있는 야곱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 상속자로서 인정될 수 있는 안락한 집을 떠나 열심히 일을 하여 그 대가로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선한목자의 모습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고 배신과 모함을 통과하며 라헬과 레아 두 아내를 얻습니다. 그 이야기는 단순히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순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새벽 예배 시간에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첫 번째 신부로 지목하시고 그에게 많은 유익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롬 3:1-2)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 9:4-5)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이스라엘은 구속사 안에서 하나님의 첫사랑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편이 되시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사랑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구속사의 순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는데 실패하셔서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모델로 삼으셔서 인간들은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자격과 조건과 노력과 열심으로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마디로 죄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오로지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순서적으로 표현을 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순서로 볼 때 하나님께서 두 번째 아내, 즉 이방인들을 아내로 먼저 맞으시고 나중에 처음 사랑했던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으시는 순서로 구속사를 완성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처음에는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셨다가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배신을 당하시고는 화가 나셔서 이방인들을 덤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 구속사의 순서를 양치기 야곱이 라헬과 레아라는 두 아내를 얻는 과정을 통해 힌트 하시는 것입니다.
(렘 31:32)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상징적 첫사랑이었던 이스라엘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은 첫 아내로 첫 사랑 라헬을 얻지 못하였고 첫 번째 아내로 이방인을 상징하는 레아를 얻었습니다. 그러한 구속사의 순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들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신명기에 가보면 모세가 그 순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신 32:21)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 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이 모세의 말을 바울이 로마서에다가 인용해다 씁니다.
(롬 10:19-21)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 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성경은 지금 교회에게, 이스라엘이 먼저 선택되어졌다가 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림으로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는 그러한 순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측에서의 어떤 노력이나 열심으로도 주어질 수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순서를 택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유대교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이스라엘이 샘이 나는 때가 올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유대교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다스리는 다윗 왕국이 건설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 그렇게 시대마다 분산되어 각자의 역할을 하며 구원으로 돌아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양치기 야곱이 그의 삶 속에서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선한목자가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 보세요.
(창 31:38-42) “38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 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한목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지요?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양들을 보살피며 양들이 낙태하지 않도록 보살폈고 아무리 배고파도 삯군목자들처럼 양들을 잡아먹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목자인 이삭이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지극 정성으로 잘 보살펴서 결국 신부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지금도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보살피시며 결국 어린양의 신부로 완성시켜내시는 것과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러한 목자 야곱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요 17:12)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 이니이다”
이사야는 선한목자이신 예수께서 당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어떻게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인지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40:11)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 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게 바로 야곱의 그림에 나타난 선한목자이신 메시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야곱의 수고에 의해 값이 지불되고 산 바 된 신부와 양떼들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야곱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양의 우리에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 밖으로 불려나와 목자가 인도하는 곳으로 좇아가는 교회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으세요? 그 야곱의 모습은 영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가신 그 목자를 좇아 십자가를 지고 역시 영문 밖으로 몰려 나가는 양들의 모습과 동일한 그림인 것입니다.
(히 13:12-14)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렇게 자신을 따라 나온 양들, 신부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시 45:10-11) “10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 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 지어다 11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 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 지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구원은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지 이 저주받은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신부를 온갖 수고를 무릅쓰고 얻어내어 그 신부들이 오랫동안 정들어 살던 아비의 집에서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의 신부들은 절대 이 세상에 뿌리박고 머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릴게요.
(마 4:18-22)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여기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데에 그들을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물고기가 물에서 낚여 올려지면 그 물고기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아 올려서 죽이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 낚아 올린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 아모스서 4장입니다.
(암 4:2)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 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이 아모스서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해 물 속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여러 번 설명해 드렸다시피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저주와 사망과 심판에 푹 젖어서 익숙하게 살던 자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 올라와 심판 받아 죽는 것이 사람을 낚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으로 가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하시는 그 에피소드 바로 아래에 이런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막 1:21-27)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 하는도다 하더라”
지금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 사건이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하는 일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유대인들의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그 속에 섞여 있는 귀신들린 자를 건져내십니다. 낚아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귀신들린 사람은 분명 한 사람인데 24절을 보시면 그 귀신들린 사람이 ‘우리’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귀신들린 사람은 지금 자기와 함께 회당에서 예배를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로 ‘우리’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회당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귀신들린 자로 부름으로 해서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유대주의에 빠진 모든 이들을 가리켜 ‘귀신들린 자’라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귀신들린 자들 앞에 주님이 서셨더니 귀신들린 자의 대표가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하고 외칩니다. 여기서 상관이라는 단어는 전쟁 용어입니다.
(삿 11:12) “12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그러니까 지금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왜 나를 공격하러 왔느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귀신들린 자를 공격하여 심판하시러 그 앞에 서신 것입니다. 그게 사람을 낚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 귀신들린 자의 외침과 비슷한 대목이 구약에 나옵니다.
(왕상 17:17-18)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하고 외치지요? 하나님의 거룩이 죄인 앞에 서게 되면 그 죄를 공격하기 때문에 죄인들이 그 앞에서 ‘왜 나를 공격하느냐? 왜 내 죄를 생각나게 하느냐? 왜 내 아들을 공격하여 죽게 했느냐?’는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사람들 낚아 올리라 하신 것은 그들을 물속에서 꺼내어 심판하고 공격하여 죽여 버리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지요?
여러분, 복음이 죄인들에게 떨어지게 되면 그 즉시 그 자리에 죄가 폭로됩니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경외의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속에서 나온 물고기에게 떨어질 저주와 심판이 주님에게로 떨어져 주님이 죽고 물고기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고기는 이제 다시는 저주의 물과 심판의 홍수와는 아무 관계없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며 그게 사람을 낚아 올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낚아 올리라는 말씀 바로 다음에 귀신들린 자들 틈에서 낚아 올려져서 이제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귀신들린 자를 상관하셔서, 다른 말로 공격하셔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죽이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이시고 그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그 유대교의 회당에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유대주의라는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완전히 뽑아내시고 힘의 원리에 젖은 옛 사람을 온전히 죽여 버리심으로 그를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이야기는 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사역으로 신부가 되어 세상에서 나오게 되는 어린양의 신부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양들의 이야기를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요셉의 삶도 선한목자의 삶을 힌트 하는 삶입니다. 요셉은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 애굽 백성들과 함께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 백성들과 함께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는 선한목자로서의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무죄한 주님이 은 삽 십 냥에 팔리신 것처럼 무죄한 요셉도 형들에 의해 팔렸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고소를 당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요셉도 거짓 고소를 당하고 무덤과 같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찬란한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무덤에서 나오셔서 만유의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요셉도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실세인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애굽을 다스립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풉니다. 요셉이 7년간의 풍년 기간 동안 양식을 비축하는 선견지명을 보이지 않았다면 애굽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애굽 사람들까지 돌보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속사가 완성이 되기까지 악인과 선인에게 일반은총을 골고루 내려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 5:45)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구속사가 완성되기까지 애굽 사람들에게도 일반은총으로 함께 하십니다. 부와 명예, 건강 등은 모두 일반은총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앞서 보내신 것은 애굽 사람들을 구하려 하심이 아니라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만을 구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특별 은총입니다.
(창 45:5)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렇지요?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앞서 내려오셔서 수난을 당하시고 결국에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선한목자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던 애굽 사람들은 목자를 아주 싫어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목자를 좇아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 46:33-34) “33 바로 임금께서 형님들을 부르셔서 '너희의 생업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거든, 34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집짐승을 길러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이 다 그러합니다' 하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들이 고센 땅에 정착하실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세상의 특징은 자신들을 위해 은혜로 십자가를 지시는 선한목자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지요. 왜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 하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요셉의 삶을 묘사하면서 목자이신 예수님이 도우셔서 그가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22절부터 24절까지를 쉬운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창 49:22-24) “22 요셉은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샘물가에서 자라는 풍성한 포도덩굴과 같다. 요셉은 담 위에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와 같다 23 사람들이 그를 화살로 맹렬히 공격하고 무섭게 활을 쏘아댄다 24 그러나 요셉의 활이 더 잘 맞고 요셉의 팔이 더 힘세다. 요셉의 힘은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오고 그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바위이신 목자에게서 온다” [쉬운 성경]
이렇게 요셉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참 목자의 모형으로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도 역시 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목자의 모형으로 모세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목자로 임명을 받았을 때 그는 애굽에서 하나님의 양들을 인도하여 이끌어 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히 11:24-25)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예수님도 세상의 왕이 되게 해 주겠다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지요? 그리고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마 4:8-10)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모세는 하나님의 양들을 애굽에서 모두 이끌고 나왔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데리고 나왔습니다.
(출 10:26) “26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예수님도 아버지의 양들을 한 마리도 잃지 않고 다 데리고 나가십니다.
(요 18:9)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리고는 마치 목자가 양들을 먹이는 것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였습니다. 그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들이 목이 마르다고 하면 반석에서 물을 내어 그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 떼를 훈육하고 가르치는 목자처럼 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야단치기도 하고 징벌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바로 선한목자의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도 역시 양들을 각각 불러내어 그들 앞서 가며 그들을 주인이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여 가셨던 선한목자이신 주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중요한 목자의 모형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는 즉시 고난을 겪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왕이 그에게 눈을 부라리며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뒤를 좇습니다. 군사를 동원하기도 하고 창을 집어 던지기도 합니다. 세상 왕은 자신이 죽음을 맞을 때까지 목자인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결국 세상 왕이 죽고(신약의 표현을 빌리면 ‘결박당하고’)다윗은 왕위에 등극합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참 왕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서 자기의 양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다가 결국 왕위에 오르시게 되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품고 있는 것입니다.
(겔 34:22-24)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 지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 이니라”
다윗을 가리켜 목자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가 왕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다윗 왕보다 400년 쯤 뒤에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언이 다윗에 대한 예언일 수는 없습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분을 다윗이라 이름 하는가? 그 왕으로 등극하실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바로 다윗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그 어떤 것도 해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목자이십니다. 선한목자의 모형인 다윗이 어떻게 양을 쳤는지 볼까요?
(삼상 17:33-35)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를 지키시는 선한목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입을 찢어버리고 수염을 잡아 뜯어내면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결국 모두 그 다윗이라는 목자에게 굴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짐승 같은 세상에서 건지시고 지키시는 선한목자 예수님이 지금 왕으로 등극해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자의 이빨에서 곰의 발톱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튼실하고 멋진 양만 보살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약하고 병들고 보잘것없는 양에게 더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겔 34:16) “16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보세요. 우리의 목자는 잃어버린 자와 쫓긴 자, 상한 자, 병든 자에게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나 같은 것도 하나님이 사랑하실까?’라는 불경한 말은 절대 가당치 않습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연약한데, 나는 아직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신앙생활에 성실하지 않는데, 그런데도 하나님이 날 지켜주실까?’ 네, 주님은 병든 자를 위해, 약한 자를 위해, 상한 자를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그래서 우리가 양 아닙니까? 각기 제 길로 밖에 갈 수없는 양이요. 그 천방지축 양들을 위해 목자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양들을 목자로 완성하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목자이신 주님을 선한목자, 큰 목자, 목자 장으로 부른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건 아주 중요한 점진적 표현입니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한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십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의 생명을 탄생케 하신 분입니다. 그게 선한목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큰 목자이시기도 합니다.
(히 13:20-21)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선한목자이신 우리 주님은 각기 제 길로 가던 천방지축 같은 우리 양 떼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큰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이제 선할 뿐 아니라 크신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이제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왕의 자리에 앉으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21절을 보시면 성경은 그 큰 목자가 우리를 선한 일에 온전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목자의 삶을 살도록 만드시기 원하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큰 목자를 목자장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벧전 5:2-4)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그렇지요?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목자장이라 부르십니다. 그 말은 그 목자를 따르는 양들도 그 목자의 삶을 좇아 선한목자로 큰 목자로 다른 이들을 섬기며 사랑하며 먹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한목자가 나중에는 목자 장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또 다른 작은 목자들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선한목자이신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각각 절대적 가치로 사랑해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거나 나에게 유익이 될지 안 될 지로 그들의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그들 앞서 나가며 그들의 위험과 손해를 내가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완전한 자기 부인의 자리로 우리는 힘써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렇게 완성해 놓으셨고 목자이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선한목자를 좇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선한목자가 어디로 여러분을 인도하든지 기쁘게 따라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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