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근심이 기쁨이 되리라
(김성수 목사)
(요 16:13-33)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 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 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지금 여러 주에 걸쳐 주님의 다락방 강화를 공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다락방 강화는 오늘로 끝이 나고 17장부터는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 이 다락방 강화의 결론 속에 다락방 강화의 전체 주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잘 들어 보세요. 주님은 다락방 강화의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 그 보혜사 성령의 오심에 관한 내용을 강조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성령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고소를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서두에 기록된 것처럼 성령께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내용이 모두 제자들의 근심에 대한 내용과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임을 고지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다락방 강화의 결론 부분인 16장 전체의 내용을 간략하게 줄여서 요약을 해 보면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6) 그것을 보시고 주님이 제자들을 위로하시는데, 당신께서 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는 말씀을 하시고(7) 당신이 가셔야 성령이 오셔서 그 분의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리고는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이며(14) 그 일은 성도들의 근심과 환난으로 나타나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니 절대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그 다락방 강화의 마지막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로 끝을 내십니다. 16장 처음 세절이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성도의 환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요 16:2)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마지막이 어떻게 끝이 납니까?
(요 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처음과 끝이 모두 성도의 환난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들어있는 샌드위치 속이 ‘성령의 오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오심과 성도의 근심과 환난이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귀를 하시게 되면 성도들에게 근심과 환난이 닥쳐 올 터인데 그들의 그 근심과 환난은 세상에 비해 형편없이 연약하기만 한 성도들의 무력함과 연약함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근심과 환난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러한 성도들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도우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떤 힘을 제공하여 그들이 겪게 되는 근심과 환난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것을 기쁨과 평화로 바꾸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끝 부분을 보면 제자들의 무력함과 믿음 없음이 극명하게 폭로가 됩니다.
(요 16:30-32)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제는 믿습니다.’하고 너스레를 떠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제는 믿느냐?’라고 하신 주님이 ‘너희는 곧 다 흩어지고 나를 혼자 내버려 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왜 제자들이 흩어지지요? 두려워서 흩어집니다. 근심에 싸여 흩어집니다. 그런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불어 넣어 승리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는 일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근심이 되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는, 예수님이 풍랑도 잠잠케 해 주셨고, 오병이어나 칠병이어로 수시로 배를 채워 주셨습니다. 병이 나면 병도 고쳐주셨고,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때면, 언제나 예수님이 그들을 가로막고 나서서 제자들을 변호하고 옹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려내셨고, 물 위도 걸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본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재는 허탈과 허망의 현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이 될 것이고, 자연재해와, 질병과, 굶주림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환난과 근심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뜬금없이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십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나는 가지만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너희를 도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분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일을 하시는 분이시라 보이지가 않습니다.(요3:8) 그런데 성경은 그 성령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부릅니다.
(롬 8:9)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면 당신이 보내시겠다고 하시는 성령은 곧 누구라는 말입니까? 당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사상이 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삼위일체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요 16:16-17)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이제 성령으로 내려오실 당신의 천상사역의 관점에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무튼 성령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일체이십니다. 그렇다면 뭐 굳이 그렇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해야 합니까? 그냥 함께 계시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승천을 하셔야 합니다. 내려온 곳으로 다시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승리가 확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정죄하여 죽여 버린 세상이 틀렸고, 당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은, 당신이 사망을 이기시고 살아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의 당신 자리로 복귀를 하셔야 하기 때문에 주님은 하늘로 올라 가셔야 합니다. 아울러서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신 상태로 이 땅에서 가시적 육신을 갖고 살아가신다면, 제자들과 함께 3년 반을 생활하신 때처럼 편재나 무소부재의 사역이 아닌, 한정된 장소에서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역사를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성령의 모습으로 내려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령으로 오셔야 하는 정말 중요한 이유는, 이제 믿음의 시대가 도래(到來)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14장으로 가면 왜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으로 오시는 것이 믿음의 시대를 여는 것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14:16-19)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오늘 본문하고 흡사한 구절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가 첨가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는데 세상이 보지 못한답니다. 세상은 보지 못하는데 제자들은 본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믿음의 눈은 주님을 볼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해석을 할 수 있는 탁월한 눈입니다.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근심거리고 염려할 것 밖에 없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는 세상살이에서 남는 것은, 근심과 염려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을 의지하고 그것으로만 성패(成敗)를 판단하기에 근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늘로 가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볼 수 있어질 때, 그들에게서 근심 대신에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하늘을 소망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때,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져 가고 있는, 그 일이야 말로 나를 살리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보증임을 깨달을 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기쁨인 것입니다. 믿음은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근거로 성도와 세상을 가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성령으로 성도들에게 오신다는 것은, 이제 주님이 가시적 육신으로 계실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어 가시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질병도 고쳐 주시고, 굶주림도 해결해 주시고, 풍랑도 잔잔케 해 주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구원하심과 보호하심과 지키심을 직접 몸으로 경험케 해 주셨지요? 그러나 그 사역은 아주 제한된 지역에서,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행해진 제한된 사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육신으로서의 주님의 지상 사역은 단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상징하고 설명하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지상 사역을 통하여 제자들과 교회들에게 구원의 내용과 본질을 친절하게 그림으로 설명을 해 주시고, 이제 십자가를 통하여 전 역사를 아우르는 우주적 구속사역을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림책으로서의 구약시대가 마감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성령으로 오시게 되는 그 때부터는, 엄밀히 말해 눈에 보이는 현상과 기적들이 나타나면 안 됩니다. 이제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보이지 않는 믿음을 통하여,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는 요원해 보였던 근심과 환난이 제자들에게 닥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가시적 지키심과 보호하심에서 불가시적, 영적 지키심과 보호하심으로 하나님 사역의 패턴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구약 내내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시겠다고 반복하여 말씀을 하셨는데 그 능력이 이 세상에서 힘 있는 모습으로, 기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성도들의 삶속에서 믿음의 발휘라는 측면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성도들이 인내를 하고, 사랑을 하고, 용서를 하고, 섬겨내고 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을 보이시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에 성도는 그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바의 반대 방향에서의 경험들을 자주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자리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고, 신실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성도란 말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 중에 아 주 중요한 일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 16:14)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그렇지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어서, 근심과 걱정 속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 곳으로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들은 마귀도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마 24:23-26)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계 13:12-14)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마 7:22)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보세요. 귀신들도, 거짓 선지자들도 기적을 행합니다. 애굽 왕 바로의 술객들이 지팡이로 뱀을 만들고 강을 피로 만든 것은 다 아시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게 당신의 권능을 보이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 등을 택하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건 마귀도 하니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은 마귀는 절대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사람들은 절대 견뎌낼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고,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신을 인정하며,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을 용서해 내고,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을 해 내는 것을 통해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그릇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예수님이 승귀를 하신 후의 상태에서 이 세상 관점으로 보게 되면, 그들이 근심과 환난 속으로 던져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 43:7)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그렇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가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독사’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나님의 능력, 하늘의 것이 가시적으로 계시된 상태를 영광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귀신도 할 수 있고 세상도 할 수 있는 그런 류의 현상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과 능력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의 능력으로 맺어내시는 열매를 한 번 보고 가지요.
(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 즉 성령이 오셔서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고, 희락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며, 화평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평화로울 수 없는 현실이 주어질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는 일이 있어야 하며, 온유와 절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인내의 현실이 수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이 오신 후, 환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도 극한의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소망으로 희락과 화평 속에서 행복해 하고 계시는 분들 계시지요? 여러분에게서 지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잘 참고 계신 분들,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셨습니까? 여러분 안에서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도저히 절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절제를 해 내고 계신 분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지요?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나타내는 하나님의 영광은 기적이나 소원성취나 문제해결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그 분의 은혜만을 붙드는 기적 중의 기적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빌 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한 말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니까 주님의 처사가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감옥도 견뎌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의 진의인 것입니다. 본문 20절 이하로 가보겠습니다.
(요 16:20-22) “20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 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잘 보세요. 제자들의 근심이 어디서 온 것이었지요? 예수님의 부재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삶에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지키심이나 기적이나 보호하심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근심이 기쁨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왜요?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여기서의 다시 오심은 부활도 아니고 재림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22절에서의 다시 오심은 성령으로 오실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바람 같은 성령으로 오실 주님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그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게 될까요? 믿음으로 그렇게 됩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예수는 부재합니다. 그래서 근심의 상태여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고 믿음이 오니까 여전히 예수는 부재하신데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현실을 16장의 결론인 마지막 33절이 이렇게 요약을 해 줍니다.
(요 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낼 테니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평안까지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평안을 약속하시는 그 어절에 환난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재로 제자들이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지만, 성령의 오심으로 믿음이 주어지게 되면, 그들이 그 환난의 상황 속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환난이 올 때에도 당신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 즉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성령께서 명쾌하게 가르쳐 주실 것이므로, 너희는 그 환난 속에서도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환난을 막아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새로운 세상에서, 너희는 가시적 보호나, 체험이나, 성취 등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예를 들어 사업이 망해도, 극한의 가난을 통과하면서도, 괴로운 질병을 통과하면서도 절대 담대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패배의 현장, 절망의 현장 같아 보이는 그 현실 속에서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 세상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평안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질병에 걸렸을 때 질병이 나를 이긴 것 같아 보이잖아요? 내가 굶주리고 있을 때 돈이 나를 이긴 것 같아 보이지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시적 보호와 지킴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지 않는 믿음의 세대에서는 그게 패배처럼 보이지만, 절대 패배가 아니니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패배의 현실, 실패의 현실, 무너진 현실 속에서 승리의 삶을 선포하는 이들이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인으로 보이며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 21절과 22절에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 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는 아이 낳는 고통으로 인해서 근심을 하게 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그러한 고통과 근심은 다 잊어버리고 다만 아이를 낳은 기쁨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를 낳았을 때의 기쁨은 보지 못하고, 다만 고통만을 생각하고 근심을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 고통도 낳았을 때의 기쁨을 얻기 위한 잠시의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심으로써 근심을 하게 되지만 이것은 빼앗기지 않는 하늘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시기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 기쁨은 알게 되면 그 근심과 환난 속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기쁨이 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너희는 나를 버리고 다 흩어질 것이다’라는 질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모르는 그 기쁨이 뭔지 우리는 이제 압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떠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영원한 생명, 하늘의 생명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산고의 고통에 비유되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태어난 아이를 미리 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묵시를 보는 하나님 백성들의 그 탁월한 특혜를 여러분은 감격 속에서 인정하고 계십니까?
얼마 전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GMF 소속의 한 선교사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GMF 소속으로 코소보에서 선교를 하시던 그 분은 안식년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가 1년의 휴식을 취하시기로 결정이 나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코소보에서의 가족 소풍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정말 몇 년 만에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던 딸이 급류에 휘말렸습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딸이 급류에 휘말려 아빠를 불렀습니다. 선교사님은 평소에 수영에 자신이 있으셨기 때문에 급히 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선교사님의 발이 물속의 바위틈으로 떨어져 그 자리에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 바위에 끼어버린 선교사님은 꼼짝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꼼짝달싹 할 수없는 자기 앞에서 딸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두 눈을 뜨고 다 보셔야 했답니다. 아무도 안 가려하는 코소보에서 십 수 년 간, 목숨을 걸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 분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사역에 반항 한 번 안하고 묵묵히 따라 준 순종의 가족에게 왜 그런 일이 생겨야 합니까? 그런 순간에는 하나님이 좀 기적적으로 살려 내시는 것이 드라마틱하지 않아요?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딸을 구하러 들어간 아버지의 다리까지 부러지게 놔두십니다. 구해주지 않을 거면 구하도록 도와주시기라도 하시지 왜 그것도 안도와 주셨을까요? 그 바위만 좀 피하게 도와 주셨더라도 그 과년한 딸이 아버지의 눈앞에서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죽어가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끝까지 붙드는 당신의 백성들의 믿음 속에서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세상에 보이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나의 위기의 상황에서 나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 그런 하나님, 내가 뭐 하러 믿어?’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 상황 속에서 오래 참음과 인내와 평안과 희락을 붙듭니다. 그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성도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선교사님은 그 즉시 안식년을 반납하시고 여전히 코소보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믿음으로 근심과 환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떻게 공급을 받아야 할까요? 주님은 본문에서 친절하게 그렇게 근심에서 기쁨으로, 환난에서 평화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믿음을 공고히 하는 방법으로 말씀과 기도를 제시하십니다. 본문 13절로 올라갑니다.
(요 16:13)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모든 진리’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테스 알레떼이아스’입니다. 진리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13절에서의 그 진리는 어느 특별한 진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진리란 세상이 내어놓는 여러 가지 진리들 가운데 진짜 진리인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에게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내는 데에 유용한 방법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에게 성령이 오시면 성도가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요 16:23-27)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 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23절에 보면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께 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묻다’로 번역이 된 ‘에로타오’는 24절의 ‘구하다, 아이타오’와 혼용해서 써도 무방한 단어입니다. 즉 23절의 ‘아무것도 묻지 아니하리라’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23절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애매한 구절이 돼 버립니다. ‘그날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시고 뒤에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께 구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즉 성도는 결국에는 아무것도 기도할 필요가 없는 자로 완성이 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다음에 무엇이든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말씀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23절의 말씀은 신자가 기도에 있어서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23절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해 보면 신자는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며 동시에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며 동시에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6장으로 가겠습니다.
(마 6:31-32)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도는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 등의 이 세상의 필요를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신자는 분명 구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즉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대로 주실 것이기 때문에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 좋지 않은 반응을 보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이렇게 쓰여 있는데도 절대 수긍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 것이고, 세상 것만큼은 넘치도록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의 것을 적게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모두 응답하시어 각자에게 그 구하는 것을 모두 주신다면 세상의 모든 질서는 무너지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은 하나님의 필요대로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고 우리의 계획과 요구에 의해 우리의 필요가 주어지게 된다면 이 세상은 삽시간에 망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애써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필요를 위해 아무 기도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 밑에서는 무엇인가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 6:33-34)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 하니라”
무엇을 구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로 성숙시켜 달라는 기도는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신자는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면서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의 문제를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육신의 문제를 육신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빨리 해결되는 것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기도에 앞서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더 선명하게 알게 되기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이 있지요?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지금까지 제자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기도를 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의미이겠습니까? ‘지금껏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을 자신의 육신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기도라는 행위가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라는 행위는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드린다는 뜻인데, 정말 우리가 그러한 의미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를 우리의 기도에 붙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말씀을 생각한다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부지런히 했는데 정작 예수님 앞에서는 ‘너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는 말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했음에도 ‘너 기도 하나도 안했어’라는 꾸중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결코 내 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내 열심을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너무나 연약함을 알기에 믿음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욕심을 가진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기에 나를 아버지께 부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육신에 대해서는 점점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게 된 사람입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문제 해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자연히 기도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구할 필요가 없는 성도로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는 무엇이든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 ‘무엇이든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시고 기도에 담겨 있는 신자의 기쁨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뜻에 맞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하지 않으시지요? 마음과 생각을 지켜 그 속에서 평안과 기쁨을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근심이 환난이 기쁨이 되는 기적이 여러분 인생에도 반드시 경험이 될 것입니다. 힘드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내고 계시는 여러분을 뵐 때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신 우리 주님 꼭 붙들고 잘 참고 인내하며, 결국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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