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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율법으로 범죄 하는 나, 양심으로 범죄 하는 나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1. 3.

 

 

율법으로 범죄 하는 나, 양심으로 범죄 하는 나

 

(김성수 목사)

 

 

(롬 2:12~16)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자크 엘룰은 그의 책에서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악한 것보다 자기의 선 때문에 더 악해질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간단한 한 문장 속에는, 인간들은 자신의 선행조차도 자신을 드러내는 악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그런 의미와 함께,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선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계되지 못할 때 그건 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잘 지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예 중의 하나로 원자탄을 만든 독일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를 들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탄을 만든 이유는 자신이 악의 화신이라 생각했던 히틀러를 패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원자탄을 맞은 것이 아니라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주민 10만 명이 원자탄에 의해 희생이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악을 무찌르는 선한 무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는 비교도 할 수없는 지옥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는 날까지 가장 많이 중얼거린 말이 바로 그 말이라고 합니다. ‘신이시여 제가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 후 자신이 만든 원자탄을 반대하는 열렬한 핵무기 반대 운동가로 죽는 날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삽시간에 인류 전체를 파괴할 만한 핵무기들이 여기저기에서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고 감추어지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은 뭔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위를 해도 결국 그것이 악으로 결론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너무 원색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날도 과학의 진보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명의 이기들은 곧 악에게 붙들려 정작 인류에게 선한 영향보다는 악한 영향을 더 많이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항상 최첨단의 과학은 살상 무기 제작으로 연결이 되곤 합니다. 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날까요? 왜 인간은 선행이라는 좋은 것을 가지고도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일까요? 모든 인간은 에덴에서부터 시작된 ‘자기애’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그 어떤 선한 것도 자기를 위해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것이 곧 타인을 향한 위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통제도 나의 쾌락이라는 자기애를 통과하게 되면 마약이 되는 것이고 훌륭한 예술도 얼마든지 정욕의 도구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으며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도 사기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자기애입니다. 원래 하나님 나라의 존재 원리는 ‘내가 죽어서 남이 사는’ 이타의 원리, 즉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애가 뽑힌 자들이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런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마 27:42) “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이스라엘이 이렇게 조롱을 했습니다. ‘넌 어떻게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느냐?’ 이스라엘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왕, 하늘의 왕, 교회의 왕의 삶의 방식이며 존재 방식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안 내려 오신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 나라의 삶의 방식이 그러한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안 내려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죽어 남이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이 역사와 우주를 한시적으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최초의 하나님 나라 모형으로 역사 속에 던져진 에덴동산에서 사람에게 주어졌던 선악과는 바로 옛 사람 아담 안의 인간들이 자기애라는 불치병에 걸린 자들임을 폭로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였습니다. 선악과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담이라는 실험 대상에게 가서 닿자 그 실험 대상의 정체가 바로 폭로가 되었습니다.

 

(창 3:6)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선악과라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지자 그것이 내가 보기에 그럴 듯하고, 내가 보기에 먹음직스럽고, 나의 지혜로움에 보탬이 될 것 같은 어떤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이기적인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이기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애의 삶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로 수용이 되지 않음을 가르치시기 위해 인간들에게 옛 자아라는 육을 입혀서 역사 속으로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주시고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라는 것 하나만 절대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그 선악과라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에덴의 원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걸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에덴은 하나님의 처소로 완성이 될 하늘의 성전, 곧 성도 자신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선악과라는 것은 인간은 절대로 자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고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장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으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법이 떨어지자 인간의 자기애라는 죄가 확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삶에 메시아라는 치료제를 던지십니다. 그리고는 자기애로 가득 찬 그 첫 사람 아담과 그 속에 들어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기애를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십니다. 한 마디로 구원은 인간 안의 자기애 빼앗기라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실과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구원의 현실을 설명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받고서 그것을 자기애를 공고히 하는 데에 사용할 때 그게 바로 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선악과를 먹어버린 인간들에게서 생명나무 실과를 감추어 버린 것입니다. 생명나무 실과는 그러한 인간들의 자기애라는 열심에 의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측에서 먹여주는 형국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선악과와 생명나무 실과의 기능적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 율법과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예표 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집니다. 역시 에덴의 아담처럼 이스라엘이 율법을 덥석 따 먹습니다. 자기들이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자기들을 지혜롭게 할 힘이 있는 선악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걸 지키기만 하면 선도, 하나님의 백성 됨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에덴에서의 율법은 ‘선악과를 먹지 말아라’가 아니라 ‘선악과’자체가 율법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 선악과, 율법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자기애에 빠진 인간들의 실체를 폭로하는 기능을 훌륭하게 해 냈고 인간들은 그 선악과와 율법이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존재됨을 챙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을 받은 성도에 한해서입니다.

 

(롬 3:19-20)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렇게 선악과, 즉 율법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지 지켜서, 다른 말로 먹어서, 자기 확장과 자아실현의 도구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3주간에 걸쳐서 구체적으로 공부를 한 것처럼,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자격을 갖추겠다고 나서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을 판단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탄핵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면 그걸 선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악이라고 하면 그걸 악으로 인정해야 하는 피동적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먹게 되면, 다른 말로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하여 율법을 지켜 자신의 존재성을 챙기려 하게 되면 자신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마저도 가르치려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목적은 ‘너는 이러한 존재다’를 가르침으로 인간들 안에서 자기애를 뽑아내기 위한 것이지, 잘 지켜서 ‘난 과연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하며 자기애를 더욱 공고히 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율법의 목적을 이렇게 요약해 주신 것입니다.

 

(마 22:3640)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이니라”

 

보시다시피 율법은 ‘나’라는 존재만을 사랑하며 자기의 존재성과 주체성 확립, 자아실현과 자아 확장에 여념이 없는 인간들의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돌려내는 목적으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지켜서 훌륭하고 멋지게 성숙된 자신을 칭찬하고 자신에게 박수를 쳐 주도록 주어진 것이 율법이 아니라, 자신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율법을 지켜낼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그 지긋지긋한 자기애에서 벗어나도록 주어진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지킴의 수준은 ‘항상’ 그리고 ‘전부’입니다.

 

(갈 3:10)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약 2:10)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요구 수준은 ‘항상’이며 ‘전부’입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그건 불가능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받은 자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율법이라는 것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주받은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던 것입니다.

 

(히 7:1819) “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이렇게 율법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지킴을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존성과 피동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며, 그로 말미암게 되는 항복과 순종과 겸손과 이타의 열매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을 선한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악을 드러내는 선한 도구가 율법입니다. 그런데 자기애에 빠진 인간들은 그 선한 율법으로 자기애와 자아실현, 자기 확장이라는 악을 생산해 내더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으로 가면 이스라엘이 그 율법이라는 것을 가지고 어디로 올라가 버렸는지를 주님께서 잘 지적해 주십니다.

 

(마 23:2-7)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모세의 자리란, 회당 안에 있는 설교자의 자리를 말합니다. 그걸 모세의 자리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걸 비난하시지요? 설교자가 설교자의 자리에 앉아서 설교하는 게 뭐가 나빠요? 그런데 왜 주님께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십니까? 3절을 보시면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그들을 비난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을 지키라는 거지요? 정말 그렇습니까? 말만하지 말고 지켜야 한다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의 요지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주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4절에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도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고 계시는 것이 되는 거니까요.

 

지금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하신 것은 율법의 진의를 아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의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그 율법지킴과 가르침으로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를 차지하는 데에 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는 데에 율법 지킴과 가르침을 오용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주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은 인간들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밝히고 드러내는 것으로 주어진 것인데 어떻게 그 율법으로 상석과 상좌에 올라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는 진짜 성도의 삶에서는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니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러한 일갈과 함께 던지시는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는 명령은 어떤 명령이겠습니까? 진짜 율법의 올바른 기능에 올바로 반응하여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애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그 사랑의 과녁을 옮겨 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율법을 자기를 높이는 데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당한다.’고 한 것입니다.

 

(롬 2:12)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면 살 수 있는데 율법을 안 지키고 범죄를 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경고가 아닙니다. 인간은 율법이 있으나 없으나 다 망하게 되어 있음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인간의 본성과 실체를 고발하는 용도로 주어진 것이지 그것 자체가 대단한 가치가 있어서 지켜내야 하는 바로 주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구경도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이방 사람들도 자기의 본성에 의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바로 밑의 구절을 보시면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마태복음 23장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내용이 나옵니다. 본문 13절 보세요.

 

(롬 2:13)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그렇지요? 이 구절도 역시 율법을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해석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율법을 행하는 것이 뭐라고 했어요? 율법으로 자기의 의를 쌓고 그것을 자아실현과 자기 확장에 사용하여 남들보다 나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무력하고 불가능한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죽은 흙으로 낮아지는 것을 올바른 율법 행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절대로 율법의 세목을 하나하나 다 지키는 것이 율법의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통하여 낮은 자리로 내려가지 않는 것은 전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율법을 듣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율법을 듣기만하는 자들은 절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음 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언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자의로, 그리고 자력으로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율법을 통하여 자기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깨닫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잘 지켜서 그 산술적 횟수나 양으로 다른 이들과의 차이를 유발시켜 자신의 훌륭함과 위대함을 자랑하는 자리로만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율법에 의해 결국 다 심판받아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바울은 율법을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무섭게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고후 3:6-9)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사도가 율법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율법에 닿아서 살아날 수 있는 능력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뜻임과 동시에 율법의 역할과 기능에 제대로 닿은 자들은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직시하고 인정하게 되는 육적 자아의 죽음, 자기부인의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 만이 율법을 통하여 자신들의 실체를 올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성령의 책망이 늘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올바른 기능에 노출이 된 사람은 옛 자아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며 결국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율법을 통하여 자기 확장과 자아실현을 꿈꾸는 자들은 율법 지킴으로 옛 자아를 튼실하게 살찌우다가 결국 그 옛 자아에 속하여 멸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러티브가 이러한 결론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롬 3:21-28)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 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보세요.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고 수긍하고 인정하며 그 자리에서 예수의 의를 붙드는 자로 서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가 없으면, 은혜와 긍휼이 없으면, 인간들은 율법을 가지고도 심판을 당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의 명령을 접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보겠다.’는 기특한 의지의 발휘에 앞서 그 명령 앞에서 무력한 여러분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자리로 일차적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겔 36:26-28,31-32)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 지어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시지요? 그랬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 행하게 된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난 죄인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라는 고백을 하게 만드시는 것이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서 나오는 반응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31절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이 ‘스스로 밉게 보는 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즉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들은 그 말씀을 지켜 행하여 자신들의 가치를 자랑하고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자기애를 들키게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악한 길과 불선한 행위와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를 밉게 보고 자신들의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한탄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인간들의 처음자리를 확인하게 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쏟아 부어지던 자기애를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돌려내는 역할로 주어진 것입니다.

 

(고후 5:14-15)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이 땅에 선 것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기애로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가 섰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오해해서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 자는 다 가짜라는 식의 해석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묵시 속에서나 완성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독한 자기애를 끊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나 사랑이 점점 식어지는 쪽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위해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애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될 때, 그것이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설이 여러분에게 꼭 이해가 가시길 바랍니다. 그건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무력한 죽은 흙이라는 것이 수긍이 되고 더 이상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행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행위 몇 개를 반성하는 차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한 반성은 곧 다시 훌륭한 자아상 회복을 위한 열심으로 격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건 자기를 미워하고 예수를 위해서만 사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범 죄들 몇 가지를 반성하게 하기 위해 골고다에 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성 자체를 미워하게 만들기 위해 골고다에 선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성령을 받은 이들은 ‘어떻게 너 같은 인간이 다 있냐?’라는 자각과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이들에게 있어서 다른 이들이 전처럼 외모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진심으로 알게 되니까요. 그게 우리가 지난 수요일에 공부한 화평이요, 그걸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미워하게 됨으로 해서 이웃이 외모로 보이지 않게 되는 그러한 지향성이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복음에 참예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절대로 믿지 않는 이들과 똑같은 삶을 살지 못합니다.

 

(고전 9:23-24)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성도는 이렇게 자기부인의 지향성 안에서 십자가를 향해 아래로 아래로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도 ‘게으른 자들아 개미를 본받아라, 부지런해라’라고 반복하여 경고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은 지혜가 하는 말이라고 했지요? 그 지혜는 성전을 짓는 지혜라 했습니다. 따라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 일도 없이 밋밋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애를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에 의해 망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의해 이 땅에서 망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들은 영원 속에서 진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있는 자들은 율법으로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이중적 메시지를 잘 간파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이 없는 이들의 문제에 관해 고민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없는 자들은 율법 없이 망한다고 했는데 법이 없으면 죄도 성립이 안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법도 안 준 상태에서 죄를 지적하여 그 죄로 사망 선고를 내린다는 게 좀 억지스럽지 않아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이 인간 안에서 율법의 역할을 하여 그 인간들의 심판의 근거를 착실하게 마련하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걸 인간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롬 2:14-15)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본성이라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데 그 본성은 양심이라는 것으로 서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며 율법의 기능을 훌륭하게 해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양심을 따라 열심히 살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심판받아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선한 양심이 있고 악한 양심이 있지만요. 그런데 보편적 인간들의 양심은 모두 악한 양심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선악 판단을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하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의 판단을 스스로 하면서부터 인간 속에 생긴 도덕과 윤리의 판단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보암직과 먹음직’이라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보편적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화인 맞은 상태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딤전 4:1-4)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 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여기에서 바울이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을 소개하는데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 자기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챙겨 갖기 위해 혼인을 금하고, 다른 말로 지나친 금욕주의를 전파하고, 식물을 폐하는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랍니다. 금욕주의와 율법주의는 인본주의의 측면에서 볼 때 굉장히 기특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의 행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리를 아는 자들과 믿는 자들은 자기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판단을 하여 스스로 선한 것을 추구하고 악한 것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선한 양심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성과 자율성을 다 빼앗긴 상태가 선한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딤전 1:18-19)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

 

바울이 양심을 버린 것과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러니까 화인 맞은 양심은 믿음과 관계없는 모든 인간들의 양심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럼 선한 양심은 어떤 양심을 말하지요?

 

(벧전 3:16,21)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베드로 사도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면서 그 선한 양심의 대척점에 있는 악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선행이라고 번역이 된 ‘아나스트로페’라는 헬라어 단어는 착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도, 대화’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완료가 되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과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그건 성령이 오셔야 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에스겔서나 예레미야서에서 부드러운 마음, 착한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겠다는 말씀을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성령에 의해 자기애를 떠나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되는 성도의 지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그냥 성령으로 이야기를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든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인 것이고 그 양심은 율법의 기능을 하여 그 당사자를 심판과 멸망으로 끌고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여러분이 신문을 보는데 너무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양심이라는 것이 소리를 칩니다. ‘도와 줘, 그건 착한 일이야, 그러니까 네 것을 다 털어서라도 도와 줘’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양심의 송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양심의 송사에 온전히 반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이기적 자기애에서 출발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주긴 줍니다. 자기에게 큰 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리고 가책을 받지 않을 정도의 한도 내에서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는 곧 변명을 합니다. ‘내가 내 소유를 다 털어서 저 사람을 돕게 되면 난 완전히 파산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며,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니까 요 정도만 도와주자. 그래도 이게 어디야?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나은 사람이잖아.’ 그리고는 그러한 일을 한 자신에게 박수와 찬양을 보냅니다. 자기 스스로가 재판관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보세요. 자기 안에서 송사와 변명과 재판이 다 일어나지요? 그게 선악과 따먹은 타락한 죄인들의 선악판단이며 그게 바로 화인 맞은 양심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 정도의 양심을 발휘하여 약간의 선행을 해 놓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 전체를 그것으로 교묘하게 가려버리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악당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묘한 인간들의 위장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세상 사람들을 심판 하실 때에 모두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게 본문 16절입니다.

 

(롬 2:16)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표준새번역] “16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율법을 지킨답시고 위장을 해도, 양심을 따라 살았다고 너스레를 떨어도 십자가가 그 앞에 놓이면 그 어떤 것도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것 자체가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다 악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인데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어떤 행위가 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다 빛을 잃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행위만 오롯하고 선명하게 남을 뿐입니다. 그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십자가의 의만을 의지하고 굳게 붙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그 앞에 그 어떤 행위를 내어 놓아도 십자가는 그 모든 행위를 다 부정해 버리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 어떤 행위로도 인간의 의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 1장18절부터 3장 마지막까지의 내러티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결론 지워지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똑바로 걸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똑바로 걷고 싶었지만 선천적인 장애로 말미암아 자주 넘어지고 구르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주차 되어 있는 자동차나 남의 집 대문이나 담벼락 등을 본의 아니게 훼손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 나라의 왕이었으며 세계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에게 공포를 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있어서 자기가 똑바로 걷고 싶어도 걷지를 못한다. 내가 그 아이의 아비로서 앞으로 그 아이가 그 장애로 말미암아 훼손하는 모든 것은 내가 만족할 만큼 보상을 해 주겠다. 그러니까 내 아이에게 죄를 묻지 말고 나에게 와서 손해 배상을 청구하라.’ 이게 성도의 역사 속 현실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 장애를 고침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장애를 갖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내 아버지가 아들의 모든 죄를 본인 스스로 보상을 하시겠다고 선언을 하신 것이 역사 속 성도의 구원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아버지의 아들은 자신의 현실을 올바로 자각하고 스스로는 고칠 수없는 그 장애의 현실을 아버지가 다 보상해 주신다고 하셨으므로 감사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동네 사람들에게 창피하다고 자기가 똑바로 걷는 연습에만 몰두 하고 있으면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아들이 똑바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에 두 손 들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아들에게 새 몸이 주어지게 될 것이거든요. 그때가 되면 똑바로 걷지 말라고 해도 똑바로 걷게 되어 있어요.

 

아버지께 감사하세요. 그리고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세요. 그렇게 되면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이웃에게로, 나에게로만 향하던 관심과 이해와 사랑이 방향을 돌려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그렇게 십자가 앞에서 정확하게 둘로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골고다에 섰을 때 두 강도가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졌지요? 그건 모든 인류의 마지막 심판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둘 다 강도라는 것입니다. 한 쪽은 무고하게 혐의를 뒤집어 쓴 자였고 다른 한 쪽은 추악한 강도였던 것이 아니라 둘 다 강도였습니다. 그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강도라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서 남의 것을 털어서 사는 강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쪽 강도에게 은혜가 임하자 그의 입에서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터집니다.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가 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부터 구원해 봐라’ 긍휼을 구하는 자와 끝까지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강한 척 하는 자. 여러분은 어느 쪽 강도입니까? 여전히 강도처럼 살고 있지만 그 안에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라는 선한 양심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끝까지 자기의 자존심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하심과 도우심에는 관심도 없는 화인 맞은 양심으로 살고 계십니까?

 

절대로 인간은 변화와 성숙을 사유해 가질 수가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들이닥쳐 접촉점을 이루는 순간 내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 그게 나에게 사유되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드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90% 정도가 필요했는데 예수를 믿은 지 30년 쯤 지났더니 너무 성숙해져서 하나님의 은혜가 30% 정도만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고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성숙과 변화가 인간에게 사유될 수 있는 것이라면 한국 기독교의 성자라고 불리던 한 모 목사님의 말년 생활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그 목사님께서 말년에 치매를 앓으셨다는 것은 다 아시지요? 하루는 그 목사님 수발을 드시던 교회 권사님께서 찬송가를 부르시며 식사를 준비하시는데 그 목사님께서 갑자기 ‘이년아, 아직도 예수를 믿냐? 쓸 데 없는 노래 그만 집어 치우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동안 그 분의 고매한 인격이나 품위 있는 교양, 경건한 삶, 그 순간 그거 다 무효 되는 것인가요? 성숙과 변화는 쌓여서 어떤 결과물을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하는 거라면 그건 뭐냔 말이에요? 단순히 치매라는 병 때문이라는, 설득력 없는 변명 하지 마세요. 성숙과 변화가 성도의 필연적 열매라면 하나님이 치매도 안 걸리게 해 주셨어야지요. 그러면 치매 걸린 성도는 다 가짜인가요? 저희 외할머님이 지금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서 오늘 내일 하고 계신데 근 10년 이상을 치매로 어린아이처럼 사셨습니다. 그 동안에 얼마나 가족들을 괴롭히고 엉뚱한 짓을 많이 하셨겠어요? 그건 하나님이 무효처리 해 주시나요? 치매 걸려서 그런 거니까? 그럼 치매가 아닌 다른 질병으로 너무 고통스럽고 짜증이 나서 저지른 죄도 다 없던 걸로 해 주셔야지요? 십자가 앞에서는 그런 익스큐즈(excuse)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 인간의 한계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면 인간은 어떤 찰나에 어디로 떨어지게 되는지, 그러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어디까지를 덮으시는 것인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과 자격과 조건과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은혜 수혜의 적절함과 적합성 등을 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독 인간만 어미가 젖을 물리는 것입니다. 인간 이외의 모든 포유류는 다 태어나자마자 새끼가 어미젖으로 달려가 자기 힘으로 젖을 빱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 미숙아로 태어나서 어미가 안아서 젖을 물리지 않으면 굶어 죽도록 태어납니다. 왜 그러겠어요?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바퀴벌레가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을 칠 때 순간적 이이큐가 340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원숭이나 돌고래의 아이큐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걸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인간처럼 문명을 만들지 못하는 줄 아세요? 유독 인간의 부모만 아이에게 감탄을 해주고 사랑을 해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감탄과 사랑을 먹고 자란 자가 똑같이 사랑과 감탄을 자식에게 내려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문명의 근간, 인간 문명의 에너지는 부모의 사랑과 감탄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버지의 사랑과 감탄으로 경륜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펄펄 뛰며 스스로 젖을 물겠다는 짐승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아버지가 물리는 사랑과 감탄의 젖을 감사함으로 무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어미의 사랑과 감탄의 젖을 먹고도 다른 짐승들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문명을 이룬 인간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감탄의 젖을 먹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사는 그 나라는 어떻겠습니까?

 

우리 자아를 향해 있는 그 지독한 자기애, 자율성 발휘에의 욕구, 가능성의 주장,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 잊지 마시고,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통곡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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