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을 세우고 당을 짓는 자들,
지붕을 벗기고 흩으시는 하나님 (I)
(김성수 목사)
(롬 2:6-11)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 하심이니라”
‘Fiddler on the Roof(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원래 원작의 제목은 ‘테비에와 그의 딸들(Tevye and his Daughters)’입니다. 테비에라는 유대인 아버지가 러시아 혁명 등의 외부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전통, 그리고 가정을 지켜나가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지붕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삶에서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는 선택받은 인간의 생존의지를 함축적으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깥 환경이 아무리 요동을 쳐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과 종교 위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인 샤갈의 그림에도 지붕들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샤갈의 ‘죽은 남자(The Dead Man)’라는 작품을 보면 지붕 위에 이미 죽은 남자가 바이올린을 켜며 서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유대인이면서 독실한 유대교도였던 샤갈이 유대인들의 자존심이자 전통을 상징하는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이를 죽은 자로 그렸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저의 자의적 해석이긴 하지만, 인간의 전통과 종교와 그것을 다 아우르는 선행체계와 지식체계들로 덮어씌운, 인간들의 자존심이라는 지붕은 죽은 자들의 것이지 산 자들에게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임을 샤갈이 그려 낸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원래 인간은 스스로를 규합하여 한 지붕 아래에서 세력화 되는 것을 금지당한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지붕을 만들고 그 아래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하늘에 대항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당을 짓다’라는 단어가 바로 그러한 인간들의 타락상을 잘 지적하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에리데이아스’라는 헬라어 명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단어는 ‘고용된 자’라는 뜻의 ‘에리또스’라는 단어에서 파생이 된 단어이면서, ‘이기심, 이기적 야심’이라는 의미의 ‘에리떼이아’라는 단어의 소유격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는 이기심에 근거한 무리지음을 가리키는 단어인 것입니다. 무리를 짓기는 짓는데 진정한 하나 됨을 목적으로 무리를 짓는 것이 아니라 각 개체가 자기의 이기심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무리를 짓는 그런 형국입니다. 사도는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단어를 종종 쓰곤 했습니다.
(고후 12:20) “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갈 5:19-20)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여기에서 쓰인 단어들이 정확하게 오늘 본문과 똑같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을 짓는 것은 현저한 육체의 일이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일이 확실합니다. 영어성경 RSV는 그 단어를 마치 여러 당으로 나누어 서로를 헐뜯는 당파 싸움의 의미로 그 단어를 번역을 했는데 그 해석은 좀 가난합니다. 이 단어는 인간들끼리 당을 지어 싸우는 것 정도가 아닌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구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과신하며 스스로의 자존심을 걸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지음을 시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당을 짓는 것입니다. 그건 역사 내내 멈추지 않고 흐르는 인간 군상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당을 지음이라는 것을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것이라고 명시를 한 것입니다. 그게 죄의 본질이요 대표적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들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인간무리의 대척점에 하나님을 세워 놓고 그 하나님을 무력한 종이호랑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에리떼이아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한 지붕 밑의 무리지음이 진짜 공익을 위한 하나 됨이 아니라 각자의 이기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무리지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든 내용을 다 담고 있는 단어가 ‘에리떼이아스’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종적으로 하나가 되어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하나 됨을 자연스럽게 획득하게 되는 그런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 말은 이합집산의 자발성이나 주도권이 인간에게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게 묵시 속 하나님 백성들의 존재 양식입니다. 그러한 천국의 존재양식이 제일 먼저 원시적으로 기술된 곳이 창세기 2장입니다.
(창 2:24)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성경의 한 몸 사상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는데 그 남자와 여자, 즉 최초의 인류가 한 몸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각자 따로 독립성을 확보할 수 없고 개체적 존재성이나 주체성을 챙겨 가질 수 없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아담이 없이 하와가 사람일 수 없고 하와가 없이 아담이 사람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는 어떤 기준점으로서의 기호 주위로 부름을 받은 집단적 존재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한 몸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함으로 이루어지는 한 몸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자신의 죽음으로 여자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여자는 그러한 남자의 은혜 앞에서 ‘나는 당신 없이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던 그런 자입니다’라는 자기 부인에서 비롯된 순종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올바른 하나 됨인 것입니다. 둘 다 상대방 앞에서 자기의 존재성을 부정당하는 그런 방식입니다. 그러한 하늘 백성들의 존재 양식을 예수님과 교회가 크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고(종적 하나 됨) 그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한 양식으로 횡적 하나 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늘의 하나 됨에는 오늘 본문의 ‘당을 지음’ 안에 들어가 있는 이기심과 다툼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게 다른 것입니다.
어떤 공동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향해 하나로 모인다고 해서 그게 다 하나 됨이 아닌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피조물 됨을 올바로 인식하고 수긍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연합이 될 때 이루어지는 하나 됨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하나 됨에는 지붕이 하나님의 장막으로 덮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세운 전통이나 열심, 종교성, 선행 등의 지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장막이 덮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위로 하나님의 장막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지붕이 벗겨지고 하늘의 지붕이 얹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의 하나 됨입니다. 그러한 창세기의 최초의 하나 됨에 대한 부연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엡 5:22-25)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 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는 아내를 교회로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로 비유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 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됨은 순종에서 비롯된 하나 됨이요, 상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희생에서 비롯되는 하나 됨인 것입니다. 예수의 희생에 의해 우리가 존재가 되었고 하늘의 백성이 되었다는 복음의 내용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은혜의 샘 앞에서 납작 엎드리는 것이 하나 됨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앞 장에 나옵니다.
(엡 4:3-6)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빌립보서에서는 사도가 어떻게 권면을 하는지 보세요.
(빌 2:1-4)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바울은 교회에게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고 하십니다.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 됨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에서 나오는 하나 됨입니다. 그런데 이게 잘되던가요? 하늘의 하나 됨은 자신이 은혜 앞에서 전적으로 무력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에서 시작이 되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니 나보다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고백에서 성취되는 것인데 그게 쉽냐는 거지요. 잘 안 되지요? 하나가 되고 싶어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전부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하나 됨을 추구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쟤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라는 비교 의식이 좀처럼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그게 당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에리떼이아스’위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그럼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가 성경에서 저주와 분노로 멸망시키겠다고 하시는 그런 종류의 인간으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하나 되려는 시도를 역사 속에서 부수고 흩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 된 자들을 만들어서 역사와 공간을 초월한 하나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새 창조입니다. 그러니까 새 창조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은 이 역사 속에서 자기 존재성과 주체성에 철퇴를 맞고 부수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잠 13:24) “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 하느니라”
자식에게 채찍을 아끼는 자는 자식을 미워하는 자요,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채찍을 찾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건 몬테소리나 프로이드가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말이지요?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지금 자식 교육에 대한 교훈을 주고 계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 역사 속에서 채찍으로 우리를 부수어 내시는 것이니 당황하지 말라는 구속사 속에서의 성도의 자세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8:6)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 아버지가 누구세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승천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시지요? 당신께서 우리의 아버지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우리를 목숨 걸고 사랑하세요. 그렇다면 우리 삶 속에 당연히 아버지의 채찍이 가입을 하겠지요? 무얼 책망하시기 위해? 우리의 지붕 짓기를 부수시기 위해.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 테니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창세기에서 보셨다시피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는 여자를 위해 희생한 남자와, 그러한 희생에 대한 감사로 그 남자의 뜻에 순종하는 여자에 의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부정되고 부인되는 가운데 하나 됨이 이루어지는 형국입니다. 그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 성취되는 연합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남자가 여섯 째날 잠이 들고 그 속에서 여자가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은 안식일 전 날이지요? 금요일입니다. 그날 예수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 바로 전의 남자의 잠듦은 예수의 죽음을 비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인 남자와 여자에게로 넘어가자 그 즉시 하나 됨이 깨집니다. 그건 인간 측에서는 절대로 하나 됨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타고 넘어 버리고 남자는 여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켜 버립니다. 거기에 마귀라는 존재가 가입이 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의존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마귀의 세력의 본질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여자가 남자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선악과를 준 것이지요? 인간 측에서의 당 짓기가 시작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그 여자의 제안에 동의를 하고 여자의 손을 잡았습니다. 하나가 된 것입니다. 마귀가 거기에 함께 손을 얹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됨의 속은 책임 전가와 월권과 다툼과 시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게 인간들의 당 짓기입니다. 자기들의 뜻을 좇아 서로 손을 잡고 하나가 되었는데 결국 그들의 당 짓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당을 지었던 사람들이 있지요? 바리새인, 사두개파, 헤롯당, 로마, 이 사람들은 원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한 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진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무리로 하나가 된 것인가요?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 후로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인간들의 당 짓기는 이렇게 감추어진 의도를 품은 저급하고 치사하며 더러운 하나 됨인 것입니다.
왜 정치인들을 철새라고 하지요? 인간들은 사실 이념과 사상 같은 거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의 유익과 체면을 따라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는 거예요. 그 중심에는 항상 ‘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 됨이 아닙니다. 하나로 모여 있기는 하지만 하나하나가 전부 모래알처럼 자기의 자존심을 챙기려는 야망으로 모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안전핀이 이미 뽑힌 폭파 직전의 수류탄 같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뭉쳐 있기는 한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인간 군상들이 하나님의 대척점에서 손을 잡아버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어버리십니다. 에덴에서 쫓아 버리시지요? 그러나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버지의 초달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처음 내리신 명령이 뭡니까? ‘생육과 번성과 충만’이었습니다.
(창 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생육과 번성과 충만’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마레, 라바, 파라’는 전부 ‘확장, 흩어짐, 확산’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모으다, 하나 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전혀 상반이 되는 의미인 것 같은데 그 상반된 의미가 같은 단어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간들을 한 곳에 무리지어 정착하게 만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으로 흩어져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모으는 것이며, 그게 바로 하나가 되는 길이라는 것을 그 단어들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시며 흩으시는 대목이 창세기 3장 24절에 나옵니다.
(창 3:24)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쫓아내시지요? 여기에서 ‘쫓아내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히브리어 ‘가라쉬’인데 그 단어는 원래 ‘이혼하다, 흩어지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이혼하게 된 사람이 하나님과 헤어져 흩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과 이혼을 하고 땅에 흩어져 자신들의 근본 된 토지를 갈며 ‘난 하나님과 이혼한 자이며,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자기의 처음 자리 확인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하나님과 혼인 관계에 놓여 질 수 없는 자임을 깨닫고 자인하는 것이 진짜 하나 됨의 시발점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의 처음자리를 올바로 인식을 하게 된 그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어디에 들어 있다고 해요? 예수 안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혼을 하고 이 땅으로 흩어진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절실하게 깨닫고 ‘난 예수 없으면 죽은 자’라는 고백을 진심으로 하게 되는,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부인이고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 됨의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쪽으로 쫓겨나 한 가족을 이루고 삽니다. 거기에서 그들이 하나가 아님이 또 폭로가 됩니다. 형이 동생을 때려죽인 겁니다. 이기심 때문에, 질투 때문에 하나라는 가족을 때려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하나의 가족을 또 흩어 버리십니다.
(창 4:11-12)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저주를 내리십니다. 가인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의 삶 전체가 땅의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땅에 정착할 수 없도록 하십니다. 너는 유리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 ‘유리하다’라는 단어는 ‘누드’라는 히브리어 인데 ‘방랑하다, 슬퍼하며 떠돌다, 흔들어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와 16절의 ‘놋(노드)’이라는 땅 이름이 의미가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들끼리 하나가 되어 한 곳에 정착하여 무리지음을 시도하자 그 하나 됨의 실체가 하나님에 의해 폭로가 됩니다. 사실은 하나 됨이 아니라 각자의 개체가 이기심이라는 낟알로 흩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시도와 추구를 부수시며 흩어 버리십니다. 그랬더니 가인이 ‘맞습니다. 저는 유리방황하게 될 겁니다’하고 하나님 앞에서 엄살을 떱니다.
(창 4:14)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지라”
그렇지요?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는 지 보세요.
(창 4:16-17)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여기에 나오는 가인이 정착한 놋 땅은 ‘노드, 유리, 방황’이라는 의미의 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정착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쓰인 단어 ‘야솨브’는 ‘정착하다, 결혼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라쉬’ 이혼 하여 쫓아내 버렸는데 쫓겨난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다시 결혼관계를 주장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리고는 아예 성까지 쌓습니다. 그 성 이름이 ‘에녹’입니다. 그 뜻은 ‘나에게 바치는 성’이라는 뜻입니다. 그 가인의 후예들이 문명과 예술과 문화와 과학의 주인공들이 되어 역사에 정착하는 모습이 창세기 4장 말미에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진짜 유리방황이라는 걸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성을 쌓는 행위가 유리방황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 뿌리박고 정착하여 안정을 찾는 것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가인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일갈이 무엇이었습니까? 땅에서 네가 이루는 모든 것이 다 저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후예들이 이 땅에서 일구어낸 모든 것이 다 저주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잘된다고 너무 재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당 짓기를 이번에는 홍수로 흩어 버리십니다. 그 홍수 후에 창세기 1장에서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똑같은 명령이 노아에게 주어집니다.
(창 9:1)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들끼리 한 데 뭉쳐서 인간들의 자존심과 자율성을 챙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에 충만하게 흩어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흩으시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들이 아예 작정을 하고 덤빕니다.
(창 11:1-4)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나님은 계속 흩어지라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시는데 인간들은 스스로 하나가 되어 하늘에 이르자고 결의를 다집니다. 이게 당 짓기입니다. 인간들이 서로 힘을 합쳐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로 가는 길을 건설하겠다고 나서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의 저주 받을 당 짓기인 것입니다. 하늘로 가는 길은 ‘내가 길이다’라고 하신 예수에 의해서만 열립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늘에 이르려고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하나 되어 하늘에 이르러 보겠다는 인간들의 추구가 하나님에 의해 산산이 부수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 됨이 이루어 질 때 그때 선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어 하늘을 쟁취하자는 것이 세상 종교라면, ‘하늘은 내가 너희에게 선물로 주기 전에는 절대 너희 손으로 쟁취 될 수 없는 것이다’를 주지시키신 후 선물로 내리 꽂으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걸 확실하게 그림으로 보여준 사건이 오순절 사건입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방언을 했습니다. 그건 그곳에 모여 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들이 나고 자란 곳, 적어도 15개 나라 이상의 각국의 언어였습니다.
(행 2:4)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바벨탑 사건의 현장에서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벨탑의 현장에서도 언어가 흩어졌지요? 그랬더니 인간들의 성 쌓기가 중단이 되었잖아요? 확인해 볼까요?
(창 11:5-8)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 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나누셔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 버리셨더니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흩으심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 사도행전에서 밝혀지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에서의 인간들은 또 다시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하나님과 맞장을 뜨겠다는 시도를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바벨론으로, 앗수르로, 애굽으로, 그들을 흩으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그러한 각국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진짜 하나가 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흩으심의 결과가 어떠한 열매를 맺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졌을 때 진짜 하늘 백성의 하나 됨이 성취가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십자가가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인간들의 자기 우상화, 당 짓기를 깨부수십니다. 그래서 승천하시기 전의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흩어져라’라는 명령을 주고 가신 것입니다.
(마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행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건 단순히 흩어져서 전도하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당신의 백성인 사람에게 주어졌던 그 명령이 다시 반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땠나요? 제자들이 정말 흩어졌나요? 제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또 당을 짓고 정착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또 흩으십니다. 거기에 스데반의 죽음이 쓰여 지는 것입니다.
(행 8:1) “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렇지요?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 들 측에서 만들어 내려하는 인류의 하나 됨과 그것을 흩어 버리시며,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먼저 고민하라는, 하나님 측에서의 열심이 서로 충돌을 하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가능성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닿아 보겠다는 자들은 끊임없이 당을 짓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당 짓기를 파 해버리시고 예수를 머리로 한 하늘의 당 짓기를 벌이시는 것이 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렇게 로마서는 1장 1절부터 시작해서 전부 ‘왜 의인은 하나님이 선물하시는 믿음에 의한 의로만 살아 날 수 있는가?’라는 인간 자체의 자격과 공로의 부정이 전제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엡 2:16)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한 몸은 무엇으로만 가능한 것입니까? 십자가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노력과 열심과 자격과 공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각 족속과 방언으로 흩어졌던 자들이 한 곳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이 그 흩어짐에서 하나로 모여지는 곳에서 어떤 노래를 하는지 보세요.
(계 7:9-10)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보세요.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 흩어졌던 이들이 한 곳으로 모여 드는데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만 있도다’하고 찬송을 합니다. 하늘의 하나 됨은 어린양 예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이 그 구원의 현실을 찬송하며 한 곳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흩어짐을 경험하면서 절대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라는 존재 자체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에 의해서만 발생이 가능한 것임을 확인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이 역사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겪게 하시면서 끊임없이 탈주를 시도하게 하시고, 그럼에도 인간들은 또 다시 재 고착화, 재 고정화의 시도를 내어 놓는(노마디즘), 끊임없는 이합집산의 과정 속에서 인간들 측에서의 가능성을 부정해 버리시는 것이 이 역사의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 들은 과학 문명 속에서 기고만장하고 있는 인류의 당 짓기를 흩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측면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자연, 모든 천지 만물은 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소품일 뿐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천지만물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인간이 거하기 알맞은 환경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세상에 드러내고 그 언약 성취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역할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러한 자연과 우주 속에서도 자신들의 생존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려 하는 이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쓰나미나 대 지진 같은 자연 재해가 일어나도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러한 자연 재해를 예방하고 방지할 것인가에 노심초사합니다.
여러분, 정말 인간의 문명이나 과학이 인간을 자연의 재해로부터 지켜 줄 수 있을까요? 이번에 일본에 쓰나미가 닥쳤을 때 쓰나미보다 더 일본을 불안하게 했던 것이 뭡니까? 원자력 발전소였습니다. 인간들의 시나리오대로라면 원자력 발전소로 자연 재해를 이겨낼 수 있어야 맞는 거잖아요? 그런데 쓰나미가 들이닥치니까 원자력 발전소가 인간들을 향해 포문을 열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인간들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외침인 것입니다. 너희들의 바벨탑 쌓기를 어서 그치라는 하나님의 일갈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교회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까지 인간들의 당 짓기는 멈출 줄을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신앙인의 목적지가 마치 이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나 창녀 같은 이 사회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들이 구원을 받은 후 이 사회의 정화와 정의와 거룩에 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목적지가 그것이 되어 버리면 그건 곧 인간들의 자존심 지키기, 아담들의 당 짓기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역사에 유익한 자가 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고 오라고 우리를 이 역사 속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롬 5:20)고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 말은 죄를 많이 지으면 그만큼 은혜가 많이 부어지니까 죄를 더 많이 지으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인식하는 곳에만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게 된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흩으심의 개입이 필연적입니다. 우리가 지붕으로 덮고 있던 것들을 다 부수고 들추어 내 버리신단 말입니다. 거기에서 조금씩 자신의 가치와 유익을 중심으로 살던 자의 삶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힘이 진짜 힘 아니고, 내 지혜가 진짜 지혜가 아님을 점차로 알아갈 때 우리는 ‘나’중심의 무리지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조금씩 깊이 느끼게 됩니다.
저는 사실 꽤 오랫동안 이 서머나 교회는 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악마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수시로 제가 없어진 이 교회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네가 뭔데?’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교회가 너 없으면 곧 무너질 것이라고 착각을 하느냐는 일갈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인간이 중심이 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목자이시며, 하나님이 설교자이셔야 합니다. 목회자나 그 밖의 직분 자들은 그냥 잠시 소리로, 스피커로 쓰이는 것일 뿐입니다. 제 위로 덮여 있던 그러한 교만의 지붕이 조금씩 걷혀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다보니 조금 자유함도 생기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지붕을 빼앗기다가 결국 홀랑 벗겨진 지붕 위로 예수의 은혜라는 지붕이 다시 얹어지는 것을 요한계시록이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를 덮는다고 묘사를 합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를 이사야가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 11:6-10)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나 독사가 자기 이익과 자기 배를 위한 삶을 산다면 어린 아기나 어린양이나 어린 염소는 절대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표범이나 사자나 독사가 어린 아기와 어린양, 어린 염소와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사자 같은 자, 표범 같은 자, 어린양 같은 자, 어린 아기처럼 힘이 없는 자, 등등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붕어빵처럼 똑같은 모양의 똑같은 힘을 소유한 자들이 모여 있는 그런 재미없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기 다른 모양과 능력과 힘을 소유하고 있는 다양성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앞에서 아무런 차이와 구별의 근거가 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성과 차이를 무색케 하는 기호가 섰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깃발인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는 사자나 호랑이나 어린양이나 어린 아기나 모두 죽은 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가 없이 존재 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자기의 이익과 가치를 위해 살 수 없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외양상 평등한 곳이 아니라 십자가에 의해 평등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하나 됨이요, 그게 진짜 하늘의 당 짓기 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신학과 교리를 배우시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칼 바르트가 죽기 얼마 전에 자신의 서재에 있던 모든 책들을 다 불살라 버리고 성경 한 권만 남겨 두었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칼 바르트가 누굽니까?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독서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가 되니까 그 모든 게 다 필요 없더라는 것입니다. 예수와 십자가 이외에 인간이 더 알아야 할 것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전 2:2)고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만 잘 배우시고 가시면 됩니다. 엉뚱한 지적 허영심에 빠져 그거 조금 채운 후, ‘나 이제 성경 다 알아’하며 교만 떨지 마세요. 요한복음 17장으로 가면 그 하늘의 하나 됨이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 성취가 되는 지 잘 나와 있습니다.
(요 17:21-23)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 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주도 되어지는 진짜 하늘의 하나 됨, 하늘의 당 짓기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세요. 23절을 보시면 그 메커니즘이 이러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성도 안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맨 바깥쪽에 있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21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고 하지요? 그러면 그림이 조금 달라집니다. 성도가 맨 바깥쪽에 있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데 그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서로 안에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니까요. 조금 간단해 졌지요? 성도 안에 하나님이신 예수가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부릅니다.
(고후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면 그림이 어떻게 되지요? 맨 바깥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안에 성도가 있고 그 안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는 그림이 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안팎으로 예수에 의해 포위가 되어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라는 존재가 스스로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존재가 되며 그 속도 예수로만 채워져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 백성은 스스로 별도의 존재성이나 독자적 영역을 챙겨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머리로 한 통일체, 하늘의 한 몸인 것입니다. 그 한 몸의 현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한 몸이라는 통일체로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 이외에 피조물이 하나님과 한 몸이 되고, 횡적인 한 몸의 현실 속으로 들어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되어 하늘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점점 맥없이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하고 최후의 항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은 기실 ‘난 죽은 자가 맞습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점점 세상의 가치를 놓는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세상이 죽은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세상에게는 성도가 죽은 자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목숨을 걸고 붙들고 있는 세상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보이거든요. 그걸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갈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표준새번역] “14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비로소 산 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무력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은혜를 찬송하는 이로 살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행위로 지붕을 얹고, 우리 힘으로 기특한 행위를 만들어 내어 하늘에 도달해 보겠다는 그런 인간들의 당 짓기는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성도는 성숙되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던 자들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발견 되어지는 것을 굳이 성숙이라 표현을 한다면 백보 양보해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서는 그 어떤 모양의 선도 나올 수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 변하겠지? 시간이 가면 성숙 되겠지?’ 그런 말씀 마세요. 시간은 객관적 실체가 아닙니다. 시간은 관념이요 허상입니다. 시간은 인간들이 사건들을 하나하나 숫자로 세면서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그런 면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어떤 행위자의 행위가 실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아침밥은 무엇이고 점심밥은 무엇이고 저녁밥은 무엇입니까? 각각이 다른 밥이며 다른 행위인가요? 다 같은 밥이며 다 같이 먹는다는 동일한 행위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 하면 그 속에 시간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요?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밥을 먹는 행위자의 행위의 흔적일 뿐인 것입니다. 그걸 인간들이 숫자로 세어 놓은 것이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연과 우주의 변화는 시간에 의해 변화하고 성숙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행위자가 일을 하신다는 증거가 흔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 인간들이 시간이 간다, 시간이 흐른다, 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와 성도의 탄생이라는 하나님의 일은 이미 창세전에 완료가 되어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타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시간만 주면 내가 뭔가 성숙되고 변화 되어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걸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손대셔서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존재이지 스스로의 됨됨이나 스스로의 살아있음에 조금도 기여를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걸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시간이 갈수록 변화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이 되어 있는 자신을 은혜 속에서 발견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성숙의 모습이나 변화된 모습을 가지고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완성해 놓으신 것을 발견하는 것일 뿐인데 뭘 자랑해요?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의 손으로만 완성시켜 내야 하는 자신의 처음자리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번쩍 손을 드는 항복의 고백을 하는 게 맞는 것입니다. 그걸 ‘죽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시면 됩니다. 다른 거 없어요. 지붕 만들어 인간들의 자존심 챙기려 하지 마시고 지붕을 벗겨 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세요. 그리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자신의 현실을 찬송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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