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무덤으로 넘겨지다(II)
(김성수 목사)
(롬 1:26-32)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향수’나 ‘좀머씨 이야기’로 우리에게 친숙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중에 ‘깊이에의 강요’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어느 평론가의 무심한 말을 듣고 고뇌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선택하는 예술가와, 그녀의 죽음 후, 관점을 바꾸어 그녀의 그림에는 삶을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 깊이에의 강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평론가를 대비시켜 인생의 아이러니를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깊이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그 깊이를 강요하는 평론가나 그러한 평론가에게 죽음으로라도 그 깊이를 증명해 보고 싶어 하는 예술가의 모습 속에서 힘의 원리 속 아담 군상들의 마귀적 실체가 보이는 듯 하지 않습니까? 최근에 본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블랙 스완’이라는 영화 속에도 죽음으로 자신의 나음을 입증하는 똑같은 인물이 하나 등장합니다. 역시 깊이에의 강요에 반응하여 죽음으로라도 그 깊이를 증명해 보이려 하는 우매한 인간 군상의 본성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생겨 버린, 저 높은 곳을 향해서만 올라가려 하는 굴고성의 본성으로 서로를 향해 깊이를 강요하고 또 깊이에의 강요에 부응하여 자신의 깊이를 자랑하고자 일생을 고단하게 살고 있는 자들이 이 세상 아담들인 것입니다.
저는 미술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미술 작품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대학 때에는 동 서양 미술사를 교양 과목으로 택해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대학 학보에 짧은 작품 평론도 몇 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떤 작품을 보면 항상 그 속에서 의미와 메시지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건 거의 강박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제 머리 속의 정보들을 주관적으로 꿰어 맞추어 그 작품의 의미를 작위적으로 해석을 하여 다른 이들에게 설명까지 해 주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대를 다니던 친구의 졸업 작품 전에 가서 조형물들을 보며 그 의미를 이리 저리 찾고 있는데 문득 ‘난 지금 내 안의 누군가로부터 이 작품의 깊이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내라는 강요를 받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과연 이 작품을 만든 그 사람도 내가 생각하는 그러한 의미와 메시지를 이 안에 담으려고 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원통 모양의 철제 부조를 세 개나 만들어 졸업 작품으로 낸 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넌 이 작품에 어떤 의미를 담은거야?’ 그 친구가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냥’
전 순간 너무 뜨악했습니다. 그냥이라니요? 저는 그 의미를 알아내고 분석하기 위해 장시간 그 작품을 보면서 고민 하고, 고민 하고, 또 고민하다가 질문을 한 것인데 그 친구는 ‘그냥’이라는 한 마디로 제 모든 분석과 고민을 한 방에 묵사발 내 버린 것입니다. 그 친구는 저에게,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은 그 작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분석하려고 하는 것보다 그냥 자기의 느낌을 의미로 챙겨 가지면 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작자는 작품을 만들고 의미는 보는 이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쥐스킨트의 작품에 나오는 그 평론가처럼 자기가 상정해 놓은 자기만의 깊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다른 이의 삶의 작품들을 평가하고 그 엉터리 깊이라는 것을 강요하고 있으면서 또 자기들도 타자들로부터 그러한 깊이에의 강요를 당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리고는 저마다 목숨까지도 걸어서 자신의 깊이를 내 보여 증명하려고 이토록 힘든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엄친아, 엄친 딸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엄마 친구 아들, 엄마 친구 딸을 줄여서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엄마 친구 아들은 이런데, 엄마 친구 딸은 그 정도인데, 왜 너는 이 모양이냐는 엄마의 불호령 속에 항상 등장했던 유령 인물, 엄친아, 엄친 딸입니다. 그래서 남다른 재능과 학벌과 외모와 배경을 두루두루 겸비한 이를 가리켜 엄친아, 엄친 딸이라 부릅니다. 그건 선악과를 따먹고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처럼’이라는 고지를 향해 일로 매진하고 있는 모든 아담 군상들의 로망이요 목적지이기도 합니다. 사회는 항상 최고를 추켜세우고 최고를 칭찬하며 고지를 점령한 자에게만 박수를 보냄으로 해서 암묵적으로 깊이를 강요하고 있고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 당사자들은 자기들이 쳐 놓은 올무에 걸려 어딘지도 모르며 끝도 모르는 고지 점령의 전투를 매일 매일 치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지 죽음으로라도 그 고지를 점령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이 세상 아담들인 것입니다. 죽어서라도 타자의 칭찬과 박수를 기어이 받아내고 싶어 하는 ‘하나님처럼’의 병에 걸린 불쌍한 아담들. 왜 제가 저를 포함한 이 세상 아담들을 불쌍하다고 표현을 하는가 하면, 이 세상 아담들에게 그들이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고지가 왜 좋은가를 물었을 때 거기에 대해 명쾌한 답을 가진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뭐에 홀렸는지 마치 아프리카의 양떼 스프링복스들처럼 무조건 그 사회가 요구하는 깊이를 향해 달리다가 물에 전부 빠져 죽는 그런 모습이 그 속에서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에 나오는 그 평론가처럼 깊이라는 것의 실체가 뭔지 모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그 깊이를 확보하려 했던 그 예술가 또한 그 깊이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작품을 죽음이라는 값진 재료로 마무리해서 세상에 내어 보임으로 세상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물론 제가 쥐스킨트의 작품의 행간을 읽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은 본인 들이 추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그 깊이라는 고지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기들 스스로 그 모호한 깊이를 스스로에게 강요할 뿐 아니라 그 강요에 처절한 반응까지 하면서 그야말로 사투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를 강요하고 강요당하면서 비교 우위의 우월성이라는 근사한 영광을 챙겨서 자신의 존재성과 가치성을 확보해야 하는 아담들의 세계에 인간 존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참을 수없는 가벼움을 폭로하며 그들이 정해놓은 목적지의 허황됨까지도 까발리는 복음이 폭격을 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이해되어지는 사람에 한해 그들의 삶 속에 대 공황과 변혁이 일어납니다. 내 육이 추구하는 목적지는 동쪽의 고지인데 나를 침노해 들어온 복음이 나를 서쪽의 골짜기로 끌어 내리는 것을 몸으로 삶으로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도덕과 윤리와 양심까지도 동원을 해서, 아니 하나님까지도 동원을 해서 ‘나’라는 인간 존재의 깊이를 증명하고 자랑하고 싶은데 복음은 나의 껍데기를 자꾸 벗겨 내어 십자가로 밀고 내려가 ‘나’라는 옛 사람을 거기에 꽁꽁 묶어 끝내 사살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진짜 가치가 뭡니까? 인간 존재의 가치가 어디에서 극대화 되는 것이지요? 가치라는 것은 지어진 목적대로 온전히 존재 할 때 그 진짜 가치가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골프채는 타이거 우즈의 손에 들려 골프공을 때릴 때 그 진짜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골프채가 패싸움하는 고등학생의 손에 들리게 되면 비록 그 골프채가 그 아이의 손에 들려 대적의 섬멸이라는 목적에 잘 쓰였다 할지라도 그건 골프채의 가치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과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 지어진 존재가 인간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창세전 언약이라는 것을 그려내기 위해 인간과 구원이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지 인간을 위해 언약과 작정이 세워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인본주의적 관점으로는 절대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니까요.
‘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내 백성을 오게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창조 목적을 충분히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러한 원래의 목적대로 살지 않고 자기 존재의 영광과 가치와 깊이를 위해 존재하게 될 때, 성경은 그걸 ‘죽었다’라고 합니다. 그 자체가 사망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하나님은 공평한가를 물으십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유기를 하시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인간의 구원은 아담이 저질러 놓은 죄의 문제를 하나님 측에서 수습하는 차원의 저급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새 창조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설명용 도구인 것이지 우발적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수습책이 아닌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든 존재가 흙, 즉 먼지로 지어졌다는 것은 존재의 재질이 먼지임을 밝히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無)였던 것들이 어떻게 유(有)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님의 대표적 소재가 동원 되어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님, 즉 사망의 상태에서 어떤 먼지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생기를 부여 받게 되고 ‘살아있음’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창조잖아요? 그게 산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죽은 것입니다. 그 죽은 것들의 영역을 지옥, 땅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생기가 가입이 되지 않은 모든 존재는, 비록 그 존재가 움직이고 생각하고 숨을 쉬고 있다 할지라도 죽은 것입니다. 먼지입니다. 흙인 것입니다. 거기엔 그 어떤 가치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몇 명을 들어 올려 생기를 부어 ‘이게 바로 내 나라 백성들의 창조의 메커니즘이며 존재 양식이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을 구원이라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유기시키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존재는 다 살아있는 귀한 존재인데 왜 누구는 사망으로 밀어 넣느냐라는 인간 측에서의 불쾌함과 서운함이 담긴 질문이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존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시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것들 중에 얼마를 선택해서 산 자들의 울타리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첫 창조로 그 구원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먼지를 사용해서요. 죽어 있던 먼지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산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 생기에 의해 장악되고 통치가 될 때 비로소 존재는 산 존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존재하는 것들은 자기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챙겨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모양으로, 하나님은 은혜로 통치를 하시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즐겁게 순응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아담들이 전부 자신의 가치와 영광과 깊이를 추구하고 쌓기 위해 삽니다. 아예 날 때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날 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지 않고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성과 주체성, 가치와 영광과 깊이를 챙기려 하는 모든 인간들은 죽은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존엄성? 그런 거 없어요. 그래서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의인만이 산 자인데 의인이 없다는 것은 모두 다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선택이 되어 산 자의 영역에 창조가 된 자들이 있습니다. 그 곳은 이미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창조가 된 곳입니다. 그 안에 들어갈 백성들이 바로 산 자의 영역에 창조가 된 자들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지요? 그 하늘들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공존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 부터는 하늘이 숨어 버립니다. 그리고 땅에서의 창조가 그려지고 있지요? 그것은 묵시 속에 완료가 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이성의 수준에 맞게 다시 재설명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 내려와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모두 묵시 속에서 이미 완료가 되어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분명 그들은 산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들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기며 사는 죽은 무리 속에서 그들이 배태하고 생산해 놓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산 자로 살아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경험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속으로 잠시 파견이 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떤 상태로 이 땅에 와야겠습니까? 죽은 자들의 경우처럼 자신만을 위해 사는 자로 일단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그렇고 바울도 자신이 죄 중에 잉태 되었고 모태 중에서도 죄인이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1장 말미에서는 그것을 ‘정욕에 버려두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도록 죄에 넘겨주다(파라디도미)’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산 자의 영역으로 창조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음의 영역에서 사는 자들의 행사를 하며 살게 됩니다.
그 때 산 자들은 고민과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달려가는 방향이고 추구하는 목적지인데 이상하게 편치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죄라는 것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 죄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그들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철장이 개입을 합니다. 그리고는 당신 백성들 안의 죽은 자의 행사, 즉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성과 가치와 영광과 깊이를 챙기기 위한 모든 시도와 노력을 부수시는 것입니다. 안팎으로 폭격이 퍼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성도들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망이라는 영원한 무덤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사망이라는 무덤을 먼저 경험함으로 해서 영원한 무덤의 공포스러운 현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고, 누군가 자신을 거기에서 건져주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 터지게 되는 것이며, 믿음 안에서, 자신을 거기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엡 1:6,12,14)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그 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에 있는 것이지 자신의 영광을 챙기거나 주체성이나 존재성을 챙겨 갖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창세기1장에서부터 줄곧 명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장 4절이 같은 단어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익히 아실 것입니다.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 이러한 단어들이 샌드위치 빵이 되어 그 안의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한 구조를 인클루지오(inclusio) 구조라 한다 했습니다. 그건 샌드위치 속이 양쪽 빵을 강화 하거나 양쪽의 빵이 샌드위치 속을 설명하는 그런 히브리 문학 기법입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이 그 중간에서 설명이 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기술된 내용이 뭡니까? 모든 창조물들이 인간이라는 버금 왕에게 다스려지고 정복되어져서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그 분의 영광을 찬송하는 상태, 안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들의 창조의 목적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다스려서 하나님께 순종시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돈에 다스려지고, 명예에게 다스림을 받고, 자식에게 휘둘리고, 자기 이름에 벌벌 떠는 모습 아닙니까? 그래서 이 세상을 무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 죽은 겁니다. 그런데 시체들이 자기들이 죽은 걸 모릅니다. 유일하게 성령에 의해 눈을 뜬 하나님 백성들만 이 세상이 무덤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을 무덤 속처럼 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점점 이 무덤에 미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겔 37:12-13)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스라엘이 나온 곳이 어디입니까? 애굽이며 바벨론입니다. 힘의 세상입니다. 이스라엘이 늘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곳이고, 남아 있고 싶어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을 무덤이라고 하시고 그 곳에 있는 당신 백성들을 포로 된 자라 칭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빼내셔서 산 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 합니다. 따라서 성도라는 사람들의 이 세상살이는 자기 존재성과 주체성과 가치와 깊이를 빼앗기고 털리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이 무덤이라는 자각과 함께 고통 받고, 아울러 그 무덤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비전이 죽어가는 또 다른 무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도는 이 땅에서 육의 죽음, 세상에서 죽어 무덤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통하여 진짜 무덤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무덤 됨을 폭로하시고 ‘여기가 무덤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라’고 외치시다가 이 세상 무덤 속으로 들어가시고 결국 사흘 만에 무덤을 파괴하고 그 속에서 나오신 것과 같은 그림으로 성도가 이 땅에 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림이 이스라엘의 절기 안에 다 들어가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봄 절기와 여름 절기, 그리고 가을 절기와 안식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봄 절기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고 여름 절기는 그로부터 50일 후인 오순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을 절기로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겨울의 안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가 모두 1년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은 이 이스라엘의 절기 안에 인류의 역사 전체가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 예수의 인생이 들어 있고 교회의 인생이 들어 있으면 역사의 시작과 끝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절기에 관하여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를 내려 줍니다.
(골 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 이니라”
보시다시피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설명용 교보재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절기를 잘 살펴보면 그 속에서 예수를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의 인생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용한 점쟁이나 예언자 같은 사람들을 찾아갈 필요가 없어요. 이 안에 다 들어 있다니까요.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장자’라고 하시지요? 이스라엘의 인생 속에 아들의 인생을 담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가 오신 이후인 신약의 시대에 절기나 안식일 등을 챙겨 지키는 행위는 종교적 열심으로 칭찬을 받을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갈 4:10-11)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지금도 성탄절이나 부활절 등을 마치 무슨 큰 명절인 양 절기 화하여 지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물론 어느 한 날을 정하여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 등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기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한 날을 지킴으로 그것이 기특하고 특별한 종교 행위가 되고 다른 날들은 그보다 못한 날이 되어 버린다면 안 지키는 만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한국교회는 7월 첫 주를 맥추절로 정해 놓고 그것까지 지킵니다.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열심입니다.
성탄절로 지키는 12월 25일은 로마의 태양신 미투라의 축일이었던 날인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원래 행하던 잔치를 성탄절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이고 부활절(easter)도 이스라엘이 섬겼던 이방의 우상 바알과 아스다롯 중 아스다롯, 이쉬타르트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건 여자라는 의미의 ‘이쉬’라는 단어와 탑이라는 단어인 ‘타르트’의 합성어입니다. 바벨론의 여신의 머리에 탑이 있었고 그 여신이 달걀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있어서 고대 바벨론 인들은 달걀을 부활의 의미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교회로 들어와서 부활절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도 부활절을 이스터라고 부르고 바벨론에서 부활의 상징으로 쓰였던 달걀을 삶아서 교회에서 나누어 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제 레위기에 명시된 이스라엘의 절기 속에 어떻게 예수와 교회의 인생이 담겨 있는지 살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레 23:5-6) “5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6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먼저 정월 십사일의 유월절과 십오일의 무교절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의 정월은 이스라엘의 히브리 력에 의한 것입니다. 히브리 력의 정월은 양력 3월과 4월 사이를 말하는 것이고 그들이 애굽에서 쓰던 민력에 의하면 7월입니다. 왜 굳이 그 때를 정월로 삼으셨는지는 나중에 가을 절기 부분에서 밝혀집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의 달력은 이 유월절 때문에 바뀌게 된 것입니다.
(출 12:1-3)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모세에게 달력을 바꾸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부터 1월로 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유월절이라는 절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시지요? 유월절에는 흠 없는 생축 중 초 태생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출 13:2-3) “2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에서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유월절 당일 날 어린양을 잡는 것은 기본이었고 첫 번째 유월절 이후에 다가오는 유월절에는 모든 생축의 초태생 들을 다 잡아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당신의 장자이신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어린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다 살아난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왜 생축 중에서만 제물을 골라야 했을까요? 사자나 호랑이 혹은 곰 같은 것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면 좀 더 폼이 나지 않나요? 왜 하나님은 굳이 생축만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레 1:2)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 지니라”
생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것만 다시 받으십니다. 소제의 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그것을 다시 내 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너 네가 생명으로 붙들고 있는 그거 내가 네 생명 유지하라고 준 거라는 거 알아?’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사람만 흔쾌히 ‘이거 하나님 주신 거 맞습니다.’하고 그걸 다시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자나 호랑이나 곰은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먹 거리로 주신 생축만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먹거리는 신약에서 떡으로 함축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생축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하늘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엡 5:2)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보세요. 왜 예수님을 맹수가 아닌 가축에 비유를 하는 지 아시겠지요? 왜 제물이 이스라엘이 먹고 살아야 하는 생축에 한하는 지 아시겠지요? 그 유월절 제사의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생명의 근거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유월절 어린양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이 흠 없는 초 태생이어야 하지요? 그래서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 예수님은 점도 없고 흠도 없고 죄도 없는 하나님의 장자라는 구절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벧전 1:19; 히 4:15, 9:14; 마 27:19,24; 눅 23:4, 13-15) 그리고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으셔야 하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만찬을 드시고 그날 밤에 잡히셔서 유월절에 죽으셨습니다. 심지어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춰 죽으셨습니다.
(출 12:6) “6 이 달 십 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유월절 어린양이 죽어야 할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해 질 때’라고 번역이 된 ‘에레브 벤’은 ‘두 저녁 사이에’라는 뜻입니다. ‘에레브’라는 히브리어가 쌍수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저녁이 두 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저녁은 오후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이고 두 번째 저녁은 6시부터 시작되는 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에베르 벤, 두 저녁 사이’라고 하면 오후 3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몇 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흑암이 임했습니다. 세 시에 ‘다 이루었다’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구약의 절기는 이렇게 정확하게 오실 메시아와 그 분이 하실 일을 가리키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거저 살아나게 된 하늘의 장자들은 이제 엄친아, 엄친 딸만이 대접을 받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닌,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유월절을 시작으로 그 해의 첫 달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고후5:17) 그런데 절기 속에 숨어 있는 예수의 생애는 누구의 생애라 했지요? 교회의 생애입니다. 따라서 유월절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교회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유월절을 살아내야 합니다. 유월절은 하늘의 장자가 역사 속에서 죽는 것이잖아요?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교회는 그 시점부터 역사 속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린도 후서로 가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후 5:15)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신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를 위하여 살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역사 속 유월절 살기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절기인 무교절입니다. 이 무교절은 유월절 양 잡는 날부터 시작이 되는 7일간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봄 절기 전체를 무교절로 부르기도 합니다. 무교절 기간 동안에 유월절과 초실절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교절과 초실절이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유월절에서 비롯된 절기라 하여 봄 절기 전체를 유월절이라고 통칭하기도 합니다. 이 무교절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크 함 마짜트’입니다. ‘하크’는 ‘축제일, 기념일’이라는 뜻이고 ‘함’은 ‘그’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짜트’는 ‘장례지내다, 묻어두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교절은 ‘장사 지낸 것, 묻어 둔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 이라는 뜻입니다. 그 무교절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만들어서 그것을 보자기에 싸 사흘간 땅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 먹어야 합니다. 뭐가 연상이 되세요? 예수님의 죽음(유월절)과 무덤 속에서의 사흘(무교절)이 연결되지 않으세요?
(막 14:12)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이렇게 무교절은 유월절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시작된 그 시각에 무덤이 덮쳐 오는 형국인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생애에서 경험이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일은 곧 누구의 생애이기도 한 것이라고요? 우리의 생애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이 역사 속에서 곧 무덤으로 넘겨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무교절의 무교병이 죽음의 떡이요 고난의 떡으로 기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 16:3) “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 이니라”
그렇지요? 무교병은 고난의 떡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념하는 떡입니다. 무교병은 이스라엘이 유월절 저녁에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을 때 급히 그 애굽에서 나오느라 시간이 없어서 누룩으로 발효도 시키지 못한 떡을 만들어 급히 먹고 떠난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도 그 누룩없는 반죽으로 떡을 해 먹어야 했습니다. (출12:33-34, 39) 그러니까 무교병은 이스라엘이 ‘나도 거기서 죽었어야 하는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아났다’라는 것을 기억하는 떡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교절 안에 홍해 사건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 저녁에 어린양을 잡아서 저녁을 잘 먹고 나와서 무교병만을 짊어지고 광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앞을 홍해라는 저주의 바다가 가로 막고 있지요? 그 홍해 사건이 무교절의 핵심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홍해 사건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면 하나님 백성들의 역사 속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홍해에 빠져 죽은 자들은 애굽 군대가 아니라 애굽 군대로 상징이 된 애굽 화된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릴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시면서 그들을 ‘군대’라고 부르세요.
(출 12:17) “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 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군대라고 부르신 후 그들에게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시지요? 무교절은 무교병을 사흘 간 땅에 묻어 두었다가 먹는 절기라 했습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역사 속 무덤 경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무교절 가운데에 홍해 사건이 있지요? 유월절부터 일주일간이 무교절이니까요. 그 홍해에 애굽의 군대가 빠져 죽습니다. 애굽 군대의 무덤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이스라엘의 집단적 세례로 이야기를 합니다.
(고전 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 세례의 의미를 좀 더 알기 쉽게 풀어 줍니다.
(골 2:11-12)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뿐만이 아니라 로마서 6장 3절 이하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두 군데 다 공히 세례를 구약의 할례와 연결을 시키면서 그 세례가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사는 성도의 이야기임을 확실하게 명시를 합니다. 그러니까 가장먼저 세례를 받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고 그 세례 안에 동참하여 은혜의 세례로 죽임을 당한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눅 12:50)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세례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그 세례를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것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출애굽 하여 무교절에 건넌 홍해 사건은 정확하게 이스라엘의 어떤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430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성취를 위해 애굽(세상)으로 보내졌던 하나님 백성들에게 덕지덕지 붙어 버린 애굽의 수치를 죽여 버리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의 인생 전체를 한 마디로 축약을 하면 이스라엘의 홍해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전체에게 할례를 행하게 한 후 그 일을 뭐라 지칭합니까? 애굽의 수치가 굴러간 사건이라고 하지요? 그걸 다 연결시켜 보세요. 유월절, 즉 구원 이후에 성도에게 찾아오는 세상 속 현실은 홍해요 무덤이요 누룩 들지 않은 맛없는 떡의 삶인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올바른 역사인식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출 13:17-18)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보시다시피 지름길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홍해로 인도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왜요? 애굽의 수치를 제거하시기 위해서요. 그런데 애굽의 수치가 어떤 식으로 물러가게 되나요? 세례, 할례를 통하여, 즉 이스라엘이 무덤에 묻힘으로 물러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간 무덤 속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요나의 표적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 12:39-40)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스올)에 갇혀 있음으로 일어난 사건이 뭡니까? 풍랑으로 다 죽어야 할 배가 안전하게 구출이 되고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의 모형이었던 앗수르의 니느웨가 살아납니다. 그러니까 요나의 사흘간의 스올 체험은 죽어야 할 자들의 죄를 몽땅 품어 안고 지옥으로 들어간 메시아의 내포적 대신의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무덤이 갖는 메시지거든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의 사흘간 하나님 나라의 틀을 세우시고 나머지 사흘간 그 곳에 내용물들을 채우시지요? 그게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장에서 가나의 혼인잔치까지의 사흘을 열 두 제자를 모으시는 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타락을 함으로 해서 그 백성들의 자리가 비게 되었지요? 예수님은 당신 안에 그 백성들을 품으시고 사흘간의 새 창조 사역을 다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무덤 속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어내시고 죽어야 할 사흘 동안의 창조물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절에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사흘 간 땅에 묻는 것입니다.
누룩은 언제나 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행위를 거기에 보태려 하는 것을 누룩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와 힘의 원리, 성공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 자연주의 그 모든 것이 다 누룩입니다. 누룩의 용도가 빵을 화려하게 부풀리는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주신 돌과 진흙이 아닌, 벽돌과 역청이라는 인간 측에서의 재료를 가지고 바벨탑을 지었던 그 패역한 인간들의 모습이 누룩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누룩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존재는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이 땅을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하나도 섞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가 사흘간 땅에 묻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들 안의 누룩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떡이 사흘간 땅에 묻혀 있다가 밖으로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교절입니다.
(요 6:51)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사흘간 무덤에 묻혀 있다가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백성들 심장 안으로 침투하게 될 하늘의 떡,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게 예수의 역사 속 인생이었다면 그 인생 속에 연합된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 것이 되겠습니까? 교회는 원래 누룩 없는 자로 묵시 속에 완성이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이 역사 속에서 사흘 간 무덤에 갇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룩 없는 자로 완성이 되어, 다른 말로 자기부인이 된 자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육적 자아가 죽어지는 곳이 이 역사이며 인생이기에 성경이 이곳을 성도들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진짜 무덤 속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계 11:8-11)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두 증인, 즉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선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하여 사흘 반을 지냅니다. 사흘 반이라는 역사를 무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나자 생기, 즉 성령이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부활을 합니다. 이게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의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이 무교절에 해당하는 인생 동안에 그 맛없고 멋없는 무교병을 먹으면서 ‘난 애굽에서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이었는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거저 살아난 사람이야. 그리고 홍해에서도 빠져 죽었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야. 따라서 난 이 죽음의 땅에서 여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선 안 되는 사람이야.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육을 이렇게 죽여 가고 계신거야’라는 올바른 인생과 역사인식, 올바른 신앙고백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흘 간 무덤에 묻혀있던 예수님이 사흘째 되는 날 부활을 하시지요? 그날이 초실절입니다. 첫 열매가, 맏아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절기입니다. 레위기는 그 날이 안식 후 첫날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혀 줍니다. 그 초실 절에는 첫 이삭 한 단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서 제물로 드립니다. ‘흔들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누프’는 ‘자고 있는 것을 깨운다’는 뜻과 함께 ‘들어 올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무덤 속에 계시던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 올려 지시는 부활의 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안식 후 첫날 부활을 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는 단어를 써서 묘사를 합니다.
(고전 15:20)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어때요? 레위기에서 초실절을 묘사하던 단어들이 그대로 다 등장하지요? 우리도 그렇게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무덤 속에서 죽임 당함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실절 날 하나님께 드리는 첫 이삭은 하나가 아니라 ‘한 단’입니다. 그 한 단은 첫 열매와 묶인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실 때 무덤 속에 잠자던 자들이 함께 살아나는 기묘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 27:52-53)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무덤 속에 있던 또 다른 자들, 성도들이 함께 일어납니다. 그건 종말에 일어나게 될 예표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레위기의 초실절이 신약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서의 성도의 초실절은 아직 새 몸을 입기 전의 부활이므로 믿음으로만 누릴 수 있는 초실절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았다는 말을 완료적 표현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 속에서는 이미 부활하여 살고 있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는 믿음으로만 그 현실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초실절은 역사 속 성도들의 소망이라고 표현을 해도 무방합니다. 그 초실절로부터 7주가 지난 50일 째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이제 본격적인 추수가 시작이 되는 때입니다. 그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온전히 익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시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7주라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보리가 본격적으로 추수가 되는 때라 하여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이 맥추절을 지키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 맥추절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 참 의아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공로로 출애굽을 한 후 50일째 되던 날 도착한 곳이 어디인 줄 아세요?
(출 19:1-3)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세 번째 달이 되었습니다. 그때 도착한 곳이 보시다시피 시내 산입니다. 좀 더 아래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출 19:10-11)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 19:15-16) “15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 16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그럼 이제 계산을 해 보자고요.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유월절이 정월 14일이니까 정월에 17일이 남습니다. 그리고 둘째 달 30일 셋째 달 3일 총 며칠입니까? 50일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한 때가 언제입니까? 절기로 오순절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율법을 주시지요? 율법은 왜 주신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알던 하나님이 잘못 안 하나님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작정 이스라엘 편만을 들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완전한 율법지킴을 요구하시는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내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오해 사건’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소문으로 섬기던 하나님은 애굽과 가나안의 풍요의 신이었던 금송아지처럼 이스라엘의 풍요와 안전에 도움을 주는 그런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당당하게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멸망입니다. 그래서 그 시내산 아래에서 3,000명이 도륙당하는 것입니다.
(출 32:28)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신약 때는 어떻게 되나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똑같이 하나님이 오해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속 메시아사상을 근거로 이 땅에 회복될 다윗 왕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자신들의 율법지킴과 제사 행위가 근거가 된 것이고요. 구약의 시내산 아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지요? 그럼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역시 3,000명이 죽어야 합니다. 그건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다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정확하게 50일째 되는 오순 절 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와 똑같이 바람 소리와 불로 강림을 하십니다.
(행 2:1-4)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유월절 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무교절 동안 무덤 속에 계시다가 초실 절 날 부활하신 후 오순절 날 성령으로 다시 오십니다. 구약 때 같으면 여전히 자기들의 유익만을 위해 살고 있는 죽은 자들을 그렇게 사망으로 밀어내셔야 맞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이들이 무언가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3절의 불의 혀가 ‘글롯사’입니다. 그리고 4절의 방언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도 ‘글롯사’입니다. 불의 혀는 성령이지요? 그런데 그 성령의 혀가 교회에게 임하여 성령의 혀로 교회가 무언가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무엇에 대한 말이겠어요?
(요 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불의 혀, 글롯사는 예수에 대해 증거 하시는 하나님의 혀인 것입니다. 그 불의 혀를 교회가 받아서 예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열다섯 나라 이상에서 모인 디아스포라들이 그 말을 다 알아 들었습니다. 언어가 일시적으로 통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구약의 어떤 저주가 해결이 된 것이지요? 바벨탑의 저주가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죽어야 할 자들의 바벨탑 쌓기 문제가 해결이 되고 그들이 거저 살아나게 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돌격했던 하나님의 철장을 예수가 맞아내고 이스라엘이 살아나는 그런 구속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벨탑의 저주가 풀리는 그림이 나타난 것이고 그 자리에서 3,000명이 살아나는 은혜의 장면이 연출이 되는 것입니다.
(행 2:38-41)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성령의 혀를 받은 베드로가 그 성령의 혀로 예수를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는 그 예수의 세례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권고를 합니다. 예수께서 나 대신에 십자가에서 쪼개지셨다는 그 예수의 세례를 믿는다는 고백이 세례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세례를 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 당하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의 세례만이 나의 구원의 근거라는 고백은 나의 모든 행위와 사유가 하나님 앞에서 다 헛것이라는 고백이니까요. 그걸 나의 세례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부인되고 쪼개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무덤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성도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열되어 있는 죄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극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맞다’는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 묻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나는 매일 죽노라’하며 탄식을 했는지 아시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매일매일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 세상에서 무덤 속 현실을 경험해 본 자만이 가을 절기,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의 절기 속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을 절기가 7월1일, 10일, 15일입니다. 7은 안식의 수지요?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이 전부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그로 말미암은 안식을 상징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1월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7월에 안식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삶의 내용입니다. 이 안에 역사의 처음과 끝이, 인생의 시작과 끝이 다 들어 있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열심히 죽으시면 됩니다. 이곳이 무덤임을 잊지 마시고 무덤답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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