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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커밍아웃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0. 11.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커밍아웃

 

(김성수 목사)

 

 

(롬 1:18-25)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386 세대로서 시집 하나로 80년대를 박제화 해버렸다는 평을 얻은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첫 도입부입니다. 저는 이 시집이 처음 나왔을 때, 최영미가 이 시집으로 80년대를 통째로 박제화 해 버렸다는 평론가들의 비평을 보면서 비평가라는 사람들의 안목이 참 얕다는 것을 새삼 느꼈었습니다. 최영미는 80년대를 박제화 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치기와 열심을 먼저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간과한 것입니다.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실체를 커밍아웃하면서 다른 이들의 눈에 보였던 투사로서의, 정의의 사도로서의 과장된 자아를 먼저 박제화 시킨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 시보다는 산문을 더 선호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시라는 장르 속에서 작자들의 지나친 작위와 가식과 감정적 오버와 연기가 읽혀지면서부터 그보다는 좀 덜 작위적이며 덜 가식적이며 좀 더 절제된 산문들을 읽습니다. 그런데 최영미의 시는 달라요. 그녀의 시는 직선적이며 솔직하고 가식의 기름기가 쪽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실체를 위장하는 데에 부산을 떨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아는 최영미의 성격이 그렇듯. 80년대 학생 운동의 선봉에서 불의와 불공평에 맞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던 사람이 ‘난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투쟁가 보다는 사랑노래를 더 좋아했다’라는 커밍아웃을 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 줍니다. 우리 성도라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커밍아웃의 자리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백성들에게서 올바른 자아진단의 커밍아웃을 끌어내시는 분이심을 말씀드리기 위해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인용한 것입니다. 엄청난 헌신과 열심으로 자신의 실체를 감추어 오던 사도 바울이 최후에 가서 ‘난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하고 커밍아웃을 한 것처럼 우리도 결국 그 자리로 밀려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거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주석가들이 오늘 본문의 내용을, 자연계시와 일반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의 우매함을 질책하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그렇게 표피적으로만 보게 되면 우리는 그 속에서 ‘너희들 그러면 다 지옥 간다. 그러니까 조심해’라는 협박의 메시지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곧 자기 방어에 돌입을 하게 되지요. ‘난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말 그래요? 여기에 나열된 죄의 목록이 예수를 믿는다는 여러분과 정말 아무 상관없는 것들입니까? 저는 아무리 읽어 보아도 다 제 얘기인 것 같아서 씁쓸한데요. 여러분, 이 로마서가 불신자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진 복음 서신임을 잊으시면 안돼요. 바울은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을 꺼내어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올바로 직시하고 자각하는 교회에게 ‘그래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거야’를 주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하나님의 의가 그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믿음만을 붙드는 자로 만들어 내는지에 관해 아주 명쾌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내 안에 들어 있는 그것들을 발견해 내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심지어 측은하게 여기는 데에 오늘 본문을 끌어다 쓰시면 안 됩니다.

 

바울은 지금 ‘왜 성도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의로만 살아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17절의 로마서 대 주제를 설명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를 오해하여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이들의 실상을 묘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이 교회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너희 안에 그런 경향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똑바로 보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만을 의지하고 붙들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18절의 ‘불의로 진리를 막는’에서 ‘막다’라는 단어가 헬라어 ‘카테코’인데 그 단어는 진리를 ‘덮다, 덧 씌워 억누르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막는 것이 진리와 관계된 어떤 이들이 하는 일이지 진리와 관계없는 이들의 우매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실체 위에 무언가를 덧씌운다는 것은 그 실체와 무관한 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따라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행위는 바로 우리 자신, 즉 복음 이해의 깊이가 여전히 일천하기만 한 우리에게서 나오는 우매함 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그러한 우매의 껍질에 매스를 대셔서 그 껍질을 벗겨내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본문 19절입니다. 본문 19절을 보시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롬 1:19)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이게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누구에게만 보이십니까?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만 보이십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감추십니다.

 

(눅 8:10)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이외의 다른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계시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과 귀를 막아 버리십니다.

 

(사 6:9-10)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그렇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이십니다. 신학자들이 일반계시니 자연계시니 하며 이름을 붙여 놓는 바람에 자연에도, 우주에도 하나님이 계시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버렸는데, 계시라는 것은 하늘의 백성들에게만 제시되고 감지되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단어 자체가 불신자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단어란 말입니다. 물론 자연과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이는 성도밖에 없어요. 그런데 본문 19절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였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저희’는 멸망 받아 죽어야 할 어떤 무리를 가리킨다기보다는 멸망 받아 죽어야 할 자들이 갖고 있는 것을 여전히 남겨 안고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성도들을 일차적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의 ‘저희 속에’라는 어구에 쓰인 전치사 ‘엔’은 ‘in’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among, with’라는 뜻으로도 자주 쓰이는 전치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성도 안에, 성도 가운데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안에 있다’라고 하셨을 때 쓰인 단어입니다. 그리고 ‘보이셨다’라고 번역이 된 ‘화네로오’라는 단어가 과거시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명백하게 선언하다, 명백하게 선포하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리고 ‘알만한’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그노스토스’는 ‘잘 알려진’이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이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떤 무리에게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성도입니다. 성도 이외의 다른 이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의 하나님을 알만한 어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들에게 주어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어떤 것,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 14:9)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렇지요? 이렇게 19절의 ‘하나님을 알만한 것’과 18절의 ‘진리’는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시되고 왜곡되어지는 것을 불의에 의해 진리가 막히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주어졌음에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20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20절 맨 앞 단어가 ‘가르, 왜냐하면’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받은 자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 이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20절을 보세요.

 

(롬 1:20)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 지니라“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보기 드문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 20절에는 특히나 많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만물’이라고 번역이 된 ‘포이에마’라는 단어는 여기와 에베소서 2장에서 딱 두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또 ‘영원하신’이라고 번역이 된 ‘아이디오스’라는 단어도 이곳과 유다서 1장에서 딱 두 번밖에 쓰이지 않는 희귀한 단어들입니다. ‘신성’이라고 번역이 된 ‘떼이오테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특수한 단어들을 일부러 골라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는 이 내용이 보편적인 의미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특수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니 주의를 기울여 해석을 하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일반적으로 잘 쓰던 보편적 단어를 보류하고 특별한 단어들을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대할 때 좀 더 신중하게 그 본문을 exegesis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라는 어구에 쓰인 ‘영원한’이라는 단어 ‘아이디오스’는 유다서 1장 6절과 여기에 딱 두 번 쓰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서둘러 ‘eternal’이나 ‘everlasting’등으로 번역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에 영원이라는 단어가 수백 개가 나오는데 그때 쓰이는 단어는 ‘아이디오스’가 아니라 ‘아이오니오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특별하게 이곳과 유다서 딱 두 곳에서만 다른 단어를 쓰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에서 쓰인 ‘아이디오스’라는 단어는 ‘eternal’이라는 의미보다는 ‘always’의 의미로 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본문 20절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라는 어구는 ‘항상 계신 능력과 신성’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더 적확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 ‘항상 계신 능력과 신성’이 뭘까요? 여기에서 능력이라고 번역이 된 ‘뒤나미스’와 신성이라고 번역이 된 ‘떼이오테스’가 똑같이 나오는 곳이 있습니다.

 

(벧후 1:3)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신기한 능력’이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본문 20절의 ‘능력과 신성’에 쓰인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에게 있는 능력과 신성입니다. 그러니까 능력과 신성은 예수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항상 계신 능력과 신성’을 해석해 보세요. 항상 계신 능력과 신성은 ‘예수’를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어디에 나타난다고 해요? 만드신 만물에 나타난다고 하지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여기에서의 ‘만물’을 자연으로, 혹은 우주로 해석을 합니다만 여기에서 쓰인 만물이라는 단어는 보통 천지만물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는 ‘파스’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여기에 쓰인 ‘포이에마’라는 단어는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딱 한 번 더 쓰입니다. 거기로 가보면 사도가 오늘 본문 20절에서 이 단어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가 보다 선명해 집니다.

 

(엡 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서 ‘만드신 바’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포이에마’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라는 대명사를 받고 있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포이에마’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안에서 선한 일(아가또스), 즉 예수 믿는 일(요6:29)과 새 창조의 일(빌1:6)에 쓰시기 위해 지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하게 하려 하다’라고 번역이 된 ‘페리파테오’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자로 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바인데 그들의 존재 이유는, 그들이 예수 안에서 새 창조의 일에 쓰임을 받으면서 예수만을 믿는 자로 지어져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와 새 창조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는 자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만 숭배하는 자(페리파테오)로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에베소서 2장 10절의 정확한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본문 20절로 돌아와서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는 어구를 풀어보세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즉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이 그 만드신 만물(포이에마), 교회에게 나타나서 분명히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맺어진다고 해요? ‘핑계치 못 할 지니라’로 맺어집니다. 이 단어 ‘나폴로게토스’도 단순히 ‘핑계치 못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방어할 수 없다, 저지할 수 없다, 저항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걸 핑계라고 번역을 해 놓는 바람에 그 어구가 마치 심판대 앞에서 빼도 박도 못 하게 된 어떤 자들의 저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20절을 다시 번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창세 때의 첫 창조 때부터(아포 크티세오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능력과 신성, 뒤나미스 카이 떼이오테스) 그 분의 백성들에게(포이에마) 분명히 나타나게 되므로 그들이 절대 그 분의 일을 방어하거나 저지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나폴로게토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진행 되어지는 역사는 빈틈없이 완벽하게 시나리오대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조물인 인간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저지하거나 변개시켜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교회, 즉 성도들 안에서 직접 일을 해 나가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게 항상 계신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교회에게 분명히 보여 나타난다는 어구가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교회에게 예수가 나타나고 예수가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이겠어요? 교회에게서 예수님의 자기부인의 삶과 십자가의 삶이 그대로 재연이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에서 격발이 되는 일이므로 절대 인간이 방해하거나 저지하거나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18절부터 20절까지를 연결하여 이해를 하면 이러합니다. 제가 설명을 좀 붙여서 의역을 해 드리겠습니다. ‘불의로 진리(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를 막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하게 되어 있는데 교회 안에도 그러한 경향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 즉 창세 때부터 항상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시던 예수를 심으셔서 그 예수로 하여금 그들의 악을 부수실 것이다. 그러므로(에이스) 그들은 저항 하거나 방해하거나 제지를 한다거나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에 의해 해체되고 부인되며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지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이게 18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설명하고 하나님께서 그 분의 능력과 신성으로 당신 백성들의 삶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멸망의 대상을 어떤 식으로 멸해 가실 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단순히 인간들의 죄악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처방까지 담고 있는, 그야말로 복음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단순하게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의의 행하실 일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복음이 되지요. 아니면 이 복음이 무서운 검사의 논고 장으로 밖에 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의 진노에 맞아 멸망당해야 할 세상의 모든 악의 나열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의 목록의 단순나열로만 이 단락을 보게 되면 그러한 죄의 경향과 성향을 여전히 갖고 있는 우리의 지금 현재의 상태가 멸망으로 종결 된다는 희망 없음의 메시지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논고 속에서, 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 안에도 여전히 그러한 죄의 경향과 성향이 존재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우리를 완성해 가시는 지까지 꺼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1장 21절부터 23절까지에서 다시 한 번 불의로 진리를 막는 행위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부연을 해 줍니다.

 

(롬 1:21-23)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구절들도 상당히 오역이 되어 지고 있는 구절들인데 먼저 21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알되’라는 어구가 나옵니다. 그 시제가 과거분사입니다. 과거부터 계속 하나님을 아는 어떤 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과 신성으로 당신을 계시하심으로 그 하나님을 감지하게 된 자들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딱 우리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감사하세요?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고 계십니까? 이러한 모습이 에베소 교회에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엡 4:17-20)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이게 지금 이방인들의 현실만을 지적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사도는 지금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않았는데 왜 그들과 꼭 같은 짓을 하고 있냐?’는 일갈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경계의 의미로 제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방인들의 행사를 예로 들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똑같은 이야기가 본문 21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자기를 만물의 척도요 축으로 삼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만물의 실체(reality)가 왜곡되어 인식이 됩니다. 원래 만물의 척도요 근간은 하나님이시거든요. 그렇게 만물을 인식할 때 올바른 실체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척도요 축이 되어 버리면 모든 게 왜곡되어 인식이 됩니다. 그게 바로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자연인의 상태가 ‘생각이 허망하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상태인데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러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의 교만입니다. 자기들의 판단을 믿고 싶은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도 쉽게 자신의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사는 것이 현명하고 지혜롭고 정의롭고 착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걸 사도 바울이 22절에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된’상태라고 기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헛똑똑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 욕망의 투사(projection)로 제조가 된 엉뚱한 신을 믿습니다. 그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신을 믿기는 믿는데 자기 욕망의 투사로 조작한 신을 믿는 것이 우상 섬기기입니다. 지금 속으로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다 가짜야’하고 정죄를 하시는 분들 계시지요? 정말 우리 안에는 그런 성향이 조금도 없습니까? 우리 안에도 그러한 성향이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신앙생활을 비롯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 있는 아담적 욕망을 투사하여 신을 조작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작된 기독교의 중심은 항상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들의 행위는 지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나도 무언가 했고, 하고 있거든요. 다른 거 없어요. 그게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신, 내 소원을 들어주는 신, 내 병을 고쳐주는 신, 내 자식을 지켜주는 신’ 심지어 ‘착하게 잘 살면 상주는 신, 열심히 헌신 봉사하면 복주는 신, 내가 내 힘을 보태서 나의 구원에 기여를 하겠다고 나서면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신’ 등등 인본주의적 욕망의 투사가 근사한 신을 조작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2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롬 1:23)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기에서 ‘썩어지지 아니하는’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압딸토스’는 ‘변하지 않는, 멸해질 수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내용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게 ‘독사,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문맥상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본질, 그게 뭡니까? 십자가지요. 따라서 23절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홀로,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시작하시고 완료하신 언약 성취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 17:4)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영화롭게 하다’가 ‘영광을 드러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해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서’입니다. 아버지의 일이 아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성취되는 것을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 23절의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의잖아요? 그건 썩어지거나, 변하거나, 부족하거나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변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하며, 썩어지기도 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완료이며 완전한 것임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인간들의 행위로 무언가 보태려고 하는 것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는 바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어절인 것입니다. 원어 성경을 보면 이 어절에 ‘우상’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보통 우상이라고 하면 헬라어 ‘에이돌론’인데 여기에서는 ‘호모이오마’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여기에서 ‘우상’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호모이오마’는 어떤 대상의 대표적 특징을 유사하게 흉내 내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쓰인 곳을 볼까요?

 

(롬 8:3)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빌 2:7)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이렇게 ‘호모이오마’는 대상의 특징을 유사하게 동질성으로 갖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썩지 않고 변개되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어떤 것들의 특징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고 변개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이 뭐냐 하면 ‘사람, 버러지, 금수’입니다. 그것들의 대표적 특징이 뭡니까? 썩어지고 변하고 부족하고 제한적이며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결핍이며 변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정의하고 이해를 해 버리면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이 세상 아담들이 곧바로 어떤 반응을 할까요? ‘내가 도와줘야지’하고 나서게 된단 말입니다. 그걸 율법주의라고도 하고 인본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인간 중심의 기독교를 우상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기에 성경 번역가들이 굳이 우상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그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가졌음에도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진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그렇게 자기중심적 가치관으로 살다가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멸망을 받는다고 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멸망당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 안에도 동일한 자기중심적 세계관과 가치관이 존재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은 절대 하나도 놓치지 않으세요. 그러면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을 부수고 깨내야 하겠지요? 그래야 영원 속에서의 하나님의 진노에 멸망당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인간들은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거나 추악함이 폭로가 되면 자동적으로 방어기제를 발동시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연약함과 더러움을 감추어 버립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겠습니까? 그러한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인간의 체면과 가치와 영광일 뿐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진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그 진노의 불길 아래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선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 하겠어요? 그 방어기제들을 원천 봉쇄해 버리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기 자신을 위장하지 못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내가 죄인 중의 괴수요 예수 죽인 자 맞습니다’라는 고백을 들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당신 백성들에게 인간들의 처음 자리를 직시하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의 행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성도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지요? 아버지의 믿음이, 즉 언약과 실행과 완료의 일이 성도를 ‘아버지만 믿는 자’로 만들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인간에게 가 있던 믿음이 하나님에게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무엇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의 힘으로. 아버지의 믿음의 힘으로요. 그 일을 오늘날 무엇이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의의 말씀이요.

 

(히 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뿐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도 구별하여 발라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의 인간의 처참한 실체를 성도 본인에게 보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제일 먼저 누구에게? 자기 자신에게요. 본문 20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항상 그 만드신 만물에게 보인다고 했지요? 그 능력과 신성이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잖아요? 자기부인과 십자가.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즉 성도에게 늘 붙어 다닌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아무리 저항을 하고 부인을 해도 하나님의 뜻을 저지하거나 변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핑계치 못할 지니라’입니다.

 

많은 분들이, 특히 요즘에 부쩍 ‘왜 목사님의 설교에는 말씀에 대한 해석과 설명은 풍성한데 적용부분이 강조가 되지 않느냐?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헛갈린다’는 문의와 항의를 해 오시는데, 제가 이 자리를 빌어서 분명히 말씀을 드릴게요. 성도의 삶은 목사의 권면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적용 부분에까지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그건 목사가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도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너희들의 지혜나 지식으로 사람들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데 왜 너희가 말씀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냐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골수와 관절과 혼과 마음까지 쪼개고 분별해 낸다고 성경이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가 그 말씀을 올바로 전하면 됐지 무슨 적용 부분까지 손을 대냐고요? 칼빈도 ‘설교자들아, 말씀이 일을 하게 하라’고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열심히 외쳤잖아요?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성도의 삶에 가입을 하게 되면 성도 안에서 자동적으로 실행이 되는 인간 자기 방어기제들이 폭격을 당하게 되고 성도는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인지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기부인의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라고 최종 정의를 내려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가 기특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모든 행위가, 율법이 부정되면서 다 쓰레기가 되어 버렸거든요. 자기 안의 구약이 예수님의 다 이루심 안에서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인간이 내어 놓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하나도 없잖아요? 그때 발가벗은 자신의 처음자리가 인식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예수님의 의만 꼭 붙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고 가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본문 24절은 그렇게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이 도와주어야만 하는, 부족하고 유동적이며 변질 가능한 피조물의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을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루시는 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롬 1:24-25)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동성애를 설명하는 구절로 오해를 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여기에서 정욕이라고 번역이 된 ‘에피뛰미아’는 육체적 욕망이나 성적 욕망 등의 의미보다는 그냥 평범한 ‘desire’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마음이라고 번역이 된 ‘톤 카르디안’도 생각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정욕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 소견에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어 버려 두사’라는 단어도 ‘방치’의 의미가 아닌 적극적인 의지를 담고 있는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넘겨주다, hand over’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24절에는 ‘서로’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욕되게 하다’라고 번역이 된 ‘아티마조’는 ‘부끄럽게 하다, 부끄럽게 대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24절을 보다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넘겨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부끄럽게 하셨다’입니다. ‘어, 난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부끄러운 자구나’라는 시인을 하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사뭇 다르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시고 의지적 결단을 내리셔서 사람들을 불결함과 불순함으로 넘겨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넘겨진 사람이 자신을 부끄럽게 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천상에 완료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완료 이전의 불완전의 상태를 경험하도록 넘겨주셨다는 그런 말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기 이전의 자신들의 처참한 처음자리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분투하게 되는 것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능력만을 간절히 열망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반드시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분투가 있어야 해요. 성공과 실패는 차후의 문제고요. 여호수아서 23장 1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않으면 너희가 그들의 가시에 찔려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겨두시겠다고 하세요. 그건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으시겠다는 말씀이잖아요? 사사기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않으시겠다고 하세요.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서 부르짖음을 격발해 내시는 것입니다. 저들과는 함께 못 살겠다고, 우리를 좀 도와 달라고 부르짖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부르짖음이 바로 분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을 이방 민족들에게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절대 인간을 부끄러운 존재로 인정하지 않아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있는 인간들이 왜 부끄러워요? 자랑스럽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종의 조치를 취하심으로 그들이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자인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당신을 알고 있는, 그러나 오해하고 있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가? 그게 25절입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 즉 엉뚱한 것으로 바꾸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들의 행위나 세상 힘의 가치를 더욱 의지하는 당신 백성들 속의 악을 제해 버리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의 올바른 복음이해를 위해, 당신의 긍휼과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해 당신 백성들을 악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와 긍휼, 영광과 의를 드러내시기 위해 가장 먼저 당신의 아들을 악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 ‘파라디도미’라는 단어가 똑같이 쓰인 로마서 8장32절을 보겠습니다.

 

(롬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여기에서 ‘내어주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파라디도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이 직접 악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긍휼을 만 천하에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쉬운 말로 살려내시기 위해 악에게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드러내고 오직 하나님의 의에 의해 산 자가 되기 위해 악에게 잠시 넘겨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육적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후에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24절과 25절을 보겠습니다.

 

(롬 1:24-25)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 백성들을 더러움에 넘겨주셔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보게 하심으로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의지하는 당신 백성들 안의 악을 제거하심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와 똑같은 이야기가 로마서 11장 말미에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사도 바울의 찬송이 터집니다.

 

(롬 11:32-36)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더러움에게 넘겨주셨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왜 꼭 그런 방법을 쓰셔야 하는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의 일하심을 판단하겠는가?’하고 우리 인간들의 어줍지 않은 지혜와 지식을 모두 부정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확실하게 알아두실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역사 속에서 사건 화되어 밖으로 발생되어지는 몇 가지 종류의 죄들을 얼마나 많이 짓고 혹은 얼마나 줄여 내는 가에 일차적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들 스스로 그러한 죄의 세목들을 줄여 갈 수 있다고 하는 거기에 진노를 하십니다. 그게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는 일입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되지 못하면 존재일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게 피조물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가능성과 능력과 가치에 근거한 행위를 앞세워서 하나님의 의를 마치 부족하거나 변개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피조물의 자기자리 이탈인 것이며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을 이 역사 속으로 내 몰아서 더러움에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 백성들이 그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게 하시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만을 오롯하게 붙드는 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은 불순종에 갇혀있는 무력한 죽은 흙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의만이 나의 살 길임을 알게 된 자에게서 순종의 몸부림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향성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불순종의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 삶인지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인지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그분의 도우심과 긍휼과 은혜를 구하게 되는 데 그 자체를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기들의 힘으로 순종을 해보겠다고 하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그건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기특한 발상인 것 같잖아요? 그래서 자연인들은 절대로 죄를, 불순종의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그 불순종의 상태가 얼마나 더럽고 부끄러운 상태인지를 절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게 성도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점점 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며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서의 삶을 희구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성도의 커밍아웃을 받아내고 마시는 분입니다. 아직 ‘내가 뭐 그렇게 큰 죄인이라고 그렇게 호들갑인가?’하는 생각이 있으신 분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여러분의 실체가 여러분의 눈에 밝히 보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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