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열매를 맺으라
(김성수 목사)
(엡 5:6-11) “6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헛된 말로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이런 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과 짝하지 마십시오. 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9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10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11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3절과 4절, 5절에 걸쳐서 신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 입에 올려서도 안 되는 모든 것들, 흉내도 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 것들을 나열하고 그 것들을 전부 “헛된 것”이라고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6절을 한번 보세요.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우리 성도들이 입에도 올려서는 안 되는 것들을 해도 괜찮은 것처럼 속이는 것이 바로 헛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과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하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이라는 게 6절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헛된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는 점점 인간들의 쾌락 지수에 맞춰서 변해가고 있습니다.
1957년 영국에서 발표된 (Wolfenden report)울펜덴 보고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영국의 동성애 범죄 및 매춘 위원회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이 보고서는 심리분석과 사회 과학이론을 인용해서 공공사안에 관한 제정법은 도덕성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성행위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합의를 거친 인간의 사적인 동성애 행위는 형법의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되고 정확히 10년 뒤에 유럽의 대다수의 나라는 성 관련 범죄 법을 뜯어 고쳤습니다. 간통죄를 폐지했고 동성애자 보호법을 발효했고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교회가 주례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도덕과 윤리의 담을 자기들의 쾌락지수에 맞게 수시로 낮추며 거기에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낮추어진 도덕과 윤리에 익숙해지면서 점점 더 엽기적인 괴물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한 쪽에서는 인간의 범죄 행위는 다양성의 결과이며 내분비선들의 이상으로 오는 질병의 차원에서 보아야지 그 자체를 형벌로 고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는 더 이상 감옥이 늘어나서는 안 되고 좋은 시설을 갖춘 치료기관과 상담 기관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죄를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무식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치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잘 가르치고 치료를 하면 죄를 안 짓는 존재들입니까? 단순히 내 분비선의 문제만을 해결해 주면 인간은 사회적으로 별 문제없이 행복하게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는 존재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단순히 내 분비선들의 집합정도로만 생각하는 아주 우매한 발상인 것입니다.
인간이 유일하게 죄를 보고 역겨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은 거듭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만이 타락한 인간을 새 것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제 죄의 문제도 스스로 고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포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건 전부 “헛된 말“들입니다. 세상은 모두 그러한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점점 세상이 죄에 대해서 관대해 지고 죄를 가벼이 여기게 되는 것입니까? 세상은 인간의 죄악 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에 추호도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 어떠한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분이 요구하시는 법을 다 지켜내야만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게 안 지켜졌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우리가 전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우리가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죄에 대한 분노“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죄와 악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이며 반응인 것입니다”“그 것은 죄를 불쾌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며 하나님께서 죄를 향하여 가지시는 고정된 혐오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형벌로 다스리겠다고 하는 “선언된 결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대로 즐겁게 살다가 가면 된다.“라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 우리 스스로 구원과 해탈에 이를 수 있다“라고 헛된 말을 지껄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세상은 내세를 부인합니다. 이 세상이 끝이니까 여기서 최선을 다해 부를 쌓고 자랑거리를 만들라고 부추깁니다. 아니 혹 내세가 있다 하더라도 그 것은 인간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그러한 헛된 말로 속이는 속임수가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바로 그러한 세상 사람들의 세계관이 그대로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깁니다. 그것을 보편 구원론(Universalism)이라고 합니다. 유수의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겉으로 큰 소리로 말하지 않지만 그 보편 구원론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생겨났던 이단 사상입니다. 당시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이 육신은 더러운 것이고 버리고 갈 것이기 때문에 이 육신으로 짓는 죄는 나의 영혼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무 율법주의도 나오고 보편 구원설도 나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무 율법주의나 보편 구원론에 빠진 사람들이 “어차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잘 못된 희망을 품고 거룩을 경주하는 길에서 게으름을 피웁니다. 그게 바로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악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분입니다.
6절을 잘 보시면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서 ”이를 인하여”는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그 앞에 열거한 모든 죄의 목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앞으로 임할 것이다”가 아닙니다. 거기에 쓰인 “엘섹타이”라는 동사가 현재형입니다. 그 불순종의 아들들에게는 지금 현재 진노가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 중에서 지금 그러한 헛된 말에 속아서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현재 그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진노는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는 진노와는 다른 차원의 진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공부한 것처럼 그 진노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할 때는 “징계”“파이데이아”가 되지만 죄인들에게는 영원한 진노의 연장인 것입니다.
(1) 여러분이 죄를 지었을 때 여러분에게 죄책감이 들지요? 후회가 일어나지요? 우리 양심이 우리를 정죄하지요? 괴롭습니다. 그게 아주 작게나마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입니다.
(2) 여러분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시고 제일 많이 들어보셨던 의사의 진단 내용이 뭡니까? “신경성입니다“
그건 우리의 마음 상태가 우리 몸을 물리적으로 망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후회, 갈등은 우리 몸을 정말 물리적으로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것 또한 우리가 아주 작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입니다.
(잠 13:15) “15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여기서 “궤사“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바가드“는 ”약탈, 범죄, 위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험 하니라“”에탄“은 ”거칠다, 험난하다”라는 뜻입니다. 죄는 반드시 우리를 험한 길로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민 32:23) 23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 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우리가 짓는 죄는 절대 우리를 그냥 놓쳐버리지 않습니다. 심판 날에도 그 죄는 반드시 우리를 찾아 올 것이지만 현재에도 반드시 그 죄에 대한 징계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전 11:29-31)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 교회에서 성찬 예식 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엄히 경고하는 구절입니다. 너희 중에 성찬 예식 때 너희를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 때문에 “약해지고 병들고 심지어 죽은 자들이 적지 않다.“ 라고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것은 우리들이 세상과 함께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다.” 라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도 반드시 있다? 없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욱더 힘써 죄를 멀리 하자는 것입니다.
(롬 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여기서도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아포칼립테타이“가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 현재도 우리에게 임한다는 말입니다.
(사 1:1-6)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머리는 온통 병이 들고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밖에 안 보이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누가 때리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패셨듯이 우리도 패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시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기어코 고쳐 내고야 마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분명 하나님의 진노는 현재에도 임하고 있고 앞으로 이 세상이 끝나게 되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진노의 불길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자연재해나 전쟁, 질병 같은 것들이 다 뭐라고 했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어서 돌아오라는 회개의 나팔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용서하실 것이다” 이런 헛된 말에 속지 마십시오.
(렘 6:14-15)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속이는 자들은 이렇게 평강을 외칩니다. “다 잘 될 거야. 모두 다 천국에 가게 될 거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살후 1:7-11) “7 환난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니, 이 일은,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8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9 그들은 주님의 앞과 주님의 권능의 영광에서 떨어져 나가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10 그 날에 주께서 오셔서, 주님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증거를 믿었습니다. 11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또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그의 능력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향해 외치신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라”“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죄 속에 빠져있던 우리가 거룩을 경주하며 결국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처음에는 프쉬키코스 였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살키코스가 되고 점점 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이해하게 되어서 나중에 프뉴마티코스가 되는 과정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서를 공부할 때 배웠죠? 육신에 속했던 사람이 어떻게 어린아이로 탄생이 되고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그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된 자가 이 땅에서도 그의 삶 속에서 진노를 벗어난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게 되는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룩에 관한 내용은 뒷전으로 밀어 놓고, 무조건 예수만 믿으면 병이 낫고 예수만 믿으면 부자가 되고 예수만 잘 믿으면 자식이 잘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은 정말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진노가 뭔지도 잘 모르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말씀을 맡은 자가 교회 안에서 외쳐야 할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며 얼마나 큰사랑을 입은 분들이라는 것을 밝히 설명해 드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하게 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는 바른 삶을 살면서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을 기다리자“ 이게 이 땅의 교회에서 선포되어져야 할 바른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목사는 욕먹을 거 각오하고 순교할 거 각오하고 강단에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이는 자들은 양을 잡아서 자기의 배를 불려야 하기 때문에 양들이 듣기 싫은 말은 안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도움으로 부자 만들어 줄 테니까 당신들은 그 것의 십분의 일을 예배당에 두고 가라“ 이게 속이는 자들입니다. ”나눠 먹자“ 이거죠.
(미 3:5-6) “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속이는 자들은 자신들의 먹을 것을 위해서 평강을 외쳐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22장에 보면 미가야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미가야는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은 BC931년에 여로보암의 북 이스라엘과 르호보암의 남 유대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는 앙숙으로 지내게 되었죠. 그런데 바벨론의 전신인 아람이라는 나라가 계속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 때 남 유대의 여호사밧이 북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에게 찾아와서 우리 연합해서 아람을 공격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아합은 흔쾌히 동의를 했습니다. 그 때 여호사밧이 “우리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보고 쳐들어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선지자를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 400명한테 내가 지금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 때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왕이여, 올라가소서 하나님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하고 왕이 듣기 좋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왕상 22:11-12) “11 그 예언자들 가운데서,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가 만든 철 뿔들을 가지고 나와서 말하였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철로 만든 이 뿔을 가지고, 너 아합은 사람들을 찌르되, 그들이 모두 파멸될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 하십니다." 12 다른 예언자들도 모두 그와 같은 예언을 하면서 말하였다. "길르앗의 라못으로 진군하십시오. 승리는 임금님의 것입니다. 주께서 이미 그 성을 임금님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이게 다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왕상 22:7-9) “7 여호사밧이 물었다. "이 밖에 우리가 물어 볼만한 주의 예언자가 또 없습니까?" 8 이스라엘 왕은 여호사밧에게 대답하였다. "주의 뜻을 물어 볼 사람으로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고 하는 예언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나는 그를 싫어합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인가 길한 것을 예언한 적이 없고, 언제나 흉한 것만 예언하곤 합니다." 여호사밧이 다시 제안하였다. "임금님께서 예언자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9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신하를 불러서 명령하였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빨리 데려 오너라."
드디어 미가야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미가야 선지자는 왕에게 한 번도 길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그래서 나는 그를 싫어한다.”라고 아합이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여호사밧은 그 미가야에게도 물어봐야 한다고 그를 데려오게 합니다. 그런데 미가야에게 간 신하들이 미가야에게 미리 귀 뜸을 해 줍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왕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좋은 말을 해 주었으니 당신도 좋은 말을 해 주시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을 선지자들을 통해 듣고 싶은 것뿐이었습니다.
(왕상 22:13) “13 미가야를 데리러 간 신하가 미가야에게 말하였다. "이것 보시오. 다른 예언자들이 모두 한결같이 왕의 승리를 예언하였으니, 예언자께서도 그들이 한 것 같이, 왕의 승리를 예언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아합 왕이 미가야를 보자 묻습니다. “내가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을 하러 올라가려 하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미가야가 건성으로 “왕이 이긴답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합이 “진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말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러니까 미가야가 대답합니다.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미가야는 자신이 본 환상을 아합왕에게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왕상 22:20-23) “20 주께서 물으십니다. '누가 아합을 꾀어내어서, 그로 길르앗의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하자' 또는 '저렇게 하자' 하며, 저마다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데, 21 한 영이 주 앞에 나서서, 말합니다. '제가 가서, 그를 꾀어내겠습니다.' 그러자 주께서는 그에게 물으십니다. '그를 어떻게 꾀어내겠느냐?' 22 그러자 그는 대답합니다.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겠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를 꾀어라.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가서, 곧 그렇게 하여라.' 23 그러므로 이제 보십시오.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여기에 있는 임금님의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게 하셨으니, 주께서는 임금님께 이미 재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헛된 말로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속아서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는 자들은 전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가야가 여기까지 이야기했는데 아합에게 입에 발린 좋은 말만 해 주었던 옆에 있던 시드기야를 비롯한 가짜 선지자들이 미가야의 뺨을 때리면서 “언제 나한테 있던 성령이 너한테 넘어갔냐?” 하고 모욕을 합니다. 그리고 아합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게 합니다. 분명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재차 미가야를 재촉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미가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해 주니까, 그게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를 감옥에 쳐 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미가야를 속이는 자로 몰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면 세상 사람들은 “저 놈이 이단이라고, 저 놈이 속이는 자”라고 거꾸로 몰아세웁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이단 취급을 받았습니다.
(고 6:8-10)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도 바울이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기술하는 대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근심하는 자라고 하지만 자기는 항상 기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가난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실상은 자기는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사도 바울더러 뭐라고 평가했다고 나옵니까? “속이는 자” 오히려 사도 바울을 “이단이다, 속이는 자다“ 이렇게 몰아세웠다는 것입니다.
로이든 존스 목사님의 책에 보면 당시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영국의 목회자들이 이단으로 몰아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그 분의 글을 인용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저보고 어리석은 설교를 하고 있는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내 버려두십시오. 그들은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 앞에서 롯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을 비웃었습니다. 저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마지막 날에 우리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우셨겠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 집이나 책을 읽어보면 그 분이 얼마나 호되게 성도들의 바른 삶을 강조하시는지 모릅니다. 저는 댈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 분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이단으로 몰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해 주면 무조건 ”저 놈은 이단이다.” 라고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가야를 속이는 자로 몰아세웠던 아합,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했던 아합은 적진에서 개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많은 목사들의 입에 속이는 영이 들어가서, 만사형통, 소원성취 이런 좋은 말만 해 주고 그 것을 듣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헬렐레 하다가 다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땅의 교회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 너희들이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죽는다.“ 이거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기를 요구하십니다.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성숙하라고 하십니다. 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럼에도 그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엉뚱하게 자기가 듣기 좋은 말이나 찾아다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사도가 너희는 그러한 속이는 자들과 함께 참예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엡 5:7) “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RSV같은 곳에는 “do not associate with them" “사귀지 말라“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 “참예하다”“수메토코이”는 단순히 “사귀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수메토코이“는 ”협동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절대 그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에게 협동하고 협조해서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8절에서 사도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에 관해 강조합니다.
(엡 5:8)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렇죠? 또 “너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하고 못을 박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죤 캘빈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서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별반 되새겨 보지 않고 쉽게 지나쳐 버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바울이 그의 서신 초두에서 천국의 기업을 말하면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기업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아울러 우리의 눈이 밝히 열리어 장차 우리의 것이 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신다고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을 그 기업을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는 것처럼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단순한 추측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타락한 삶과 탐욕과 부도덕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닌 우상 숭배자일 뿐이며 순종하는 자가 아닌 불순종하는 자일뿐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은 천국이 아닌 지옥을 기업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바울의 엄숙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손발을 움직여서 우리의 거룩을 경주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부터 11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엡 5:9-11)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사도는 “빛의 열매”의 목록을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나열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9절의 빛의 열매와 대조해서 “어두움의 일”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잘 보시면 사도가 빛의 결과물은 “열매“라고 하는데 어두움의 결과물은 그냥 “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두움의 일“”엘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문명, 그리고 문화를 포함한 모든 시도들 우리가 열매라고 부르는 그 모든 인간의 작품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열매가 아니라 전부 “엘곤”“일”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도 똑같은 단어들을 사용해서 열매와 일을 비교하고 있지요?
(갈 5:19-23)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19절의 “육체의 일“과 22절의 ”성령의 열매”를 확실하게 구분해서 쓰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으로 가보면 조금 더 그 비교의 의미가 확실해 집니다.
(롬 6:19-22)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보세요. 모든 인간들이 구원받기 전에 도모하는 것들은 전부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라고 묻지요. 그리고 계속해서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라고 하면서 그들이 도모하고 만들어낸 것들은 전부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그 “일”의 결국은 “사망”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 반면에 22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종들이 맺는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것들“인데 그 결국은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무슨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거룩함에 이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대단한 업적이라고 차곡차곡 쌓고 있는 것들은 전부 허깨비 같은 것들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아시죠? 그 탕자가 아버지를 떠날 때 그의 수중에는 많은 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아무 것도 없는 빈 털털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친구들도 다 떠나갔습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죄의 결국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오직 빛의 열매를 맺으셔야 합니다. 그 빛의 열매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피고 오늘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9절을 보시면 빛의 열매로 처음 등장하는 것이 “착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 “착함“ ”아가또쉬네“라는 단어는 ”이기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며 모나지 않아서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촉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원수들까지도 보듬어 안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 5:43-47)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자기에게 잘 하는 사람 뿐 만이 아니라 원수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것, 이게 바로 “아가또쉬네“”착함”입니다.
(롬 15:14)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의로움”입니다. “의“라는 것을 제가 어떻게 정의해 드렸지요? 어떤 존재“네페쉬”가 다른 존재들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의로움”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자기의 선입견이나 충동이나 자기의 생각에 지배를 받아 남을 판단하거나 옳은 일을 정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 나와 올바른 관계로 회복이 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어떤 삶을 원하시는가를 깨닫고 거기에 맞춰서 사는 것을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의로움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지 않은 자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롬 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경건치 않음이 먼저 나오고 불의가 두 번째로 등장합니다. 이 말은 경건치 않음이 불의를 불러온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인 경건함이 없이도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잘 살아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성경을 기각하고서 성경이 가르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회복이 되어야 의로운 삶을 경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이라는 것은 속이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는 빛입니다. 빛은 모든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빛은 모든 것을 다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추거나 숨기는 것이 없는 열려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감추고 숨긴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의도적으로 감추고 숨기고 할 필요가 없는 진실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자신을 가리고 숨었지요? 그게 바로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죄인들은 가리고 숨습니다. 그리고 속입니다. 우리가 6절에서 어두운 세력들의 특징을 무어라고 공부했습니까? “헛된 말로 속이는 자”입니다. 우리는 속이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롬 3:13)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맺혀야 할 빛의 열매를 세 가지로 요약을 하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한 가지로 요약을 한다면 어떤 말로 요약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타적인 삶”입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남을 위해 사는 삶을 이타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만을 생각하던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도록 바뀐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그렇게 원수를 위해 자기를 불 태워 버린 빛이신 예수님께서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당연히 이제 우리는 그 이타적인 삶, 거룩한 삶을 소원하고 그리고 끌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10:24)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열매여야 합니다. 참 힘든 삶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 목표지점을 향해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사도는 왜 우리가 그렇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고 요구합니까? “하나님의 진노” 그렇죠? 죄와 악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임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이유입니다. 사도는 보다 적극적인 이유를 10절에 이렇게 기술합니다.
(엡 5:10)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여기서 “시험하여 보라”“도키마조”는 “분별하다, 구별하다, 자세히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금속을 시험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게 금인지 은인지 시험할 때 “도키마조”라는 단어를 씁니다. 똑같은 단어가 로마서 12장에 쓰였습니다.
(롬 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시험하고 분별하고 열심히 조사해서 그 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서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었기에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하고 두드려보고 또 두드려보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과 우리가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과는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물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모든 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평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웃에게 악평을 듣는 것이 무섭고 창피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무시합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하나님이 지금 나의 이 행동을 기뻐하실까“로 우리의 행위를 선택합니다.
(고전 4:3-5)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초점은 하나님께로 모아지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 암송해 보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 제 1번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왜 사세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거 힘드시죠? 압니다. 저도 많이 힘이 듭니다. 우리는 이제 나방이나 곤충들이 빛을 보게 되면 저절로 빛이 비추는 쪽으로 근육이 수축이 되어서 불 속으로 들어가 타 죽는 것처럼 그러한 광극 성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습관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육신이 그 소원을 따라주지 않아서 늘 갈등하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갈등하고 고민하고 슬퍼하는 것 자체가 바로 여러분이 구원들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힘을 내십시오.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또 해 보자고요.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서 우리를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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