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되어 주기
(김성수 목사)
(엡 4:25-32)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다는 것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묵은 잎을 떨어내기 위해서는 새순이 돋아나야 하듯이, 우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벗고 입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속에서 가시적인 벗고 입음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생활을 통해서 매일 매일 우리 마음의 영,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울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으며 이미 우리의 심령은 새롭게 되었지만 우리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옛 사람을 벗어야 하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하며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는 100%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100%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사도는 이제 25절부터 좀 더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실천 강령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가 “거짓을 버리라”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24절에서 공부했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속한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반대말이 뭡니까? “거짓”이죠. 그러니까 진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경계의 목록으로 주시는 첫 번째 것이 “거짓을 버리라“인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가 무엇 때문에 기인한 것입니까? 거짓말의 결과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는 하나님처럼 될 거야” 라는 사단의 거짓말 때문에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사단의 세력을 “거짓말하는 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요 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며, 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짓“이라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대표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거짓 속에서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 인간들은 저마다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면을 쓰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남들에게 자기를 드러 내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점점 더 큰 거짓말을 해야 하고 결국에는 거짓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가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본인은 압니다.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를 스스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는 자신을 교묘하게 위장합니다. 그 위장은 교만으로도 표출이 되고 때로는 겸손으로도 표출이 됩니다. 때로는 수줍음으로도 표출이 되고 때로는 경건함으로도 표출이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존경과 인정과 부러움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정의해 놓은 자기 스스로의 힘을 쌓아서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죄에 대한 욕구나 탐욕, 정욕 같은 것들을 다른 종교 행위들과 거짓 관용으로 그럴싸하게 위장을 하며 사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입니다. 누가 발을 밟아도 “no problem"이라고 웃으며 지나가지만 그 마음속에는 ”many problem"이라는 분노를 숨기고 있는 것이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교양 있고 매너 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죄인들은 거짓 미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인사하고 참아주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참아주고 웃어줘야지요.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게 온통 거짓 속에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 이런 예를 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뉴욕에 계신 어떤 목사님께서 저희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이민 초기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시는데, 미국에 오니까 웬 서울대 출신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더래요. 특히 자기가 처음 간 그 뉴욕의 교회에는 서울대 출신 아니면 대화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답니다. 그래서 기죽기 싫어서 궁여지책으로 자기도 서울 상대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슷한 또래의 진짜 서울 상대 출신이 그 교회에 출석을 했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 사람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셨는데 어느 날 막다른 복도에서 딱 마주치셨답니다. 그 서울 상대 출신 집사님이 “서울 상대 몇 학번이세요?”라고 물으시더래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제가 말하는 서울 상대는 서울에서 상당히 먼 대학”을 말하는 겁니다. 라고 얼버무리셨답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런 거짓말들이 왕왕 우리 주변에 있지요? 왜 그런 거짓말들이 난무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잃은 죄인들이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사회는 거짓말로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는 그 거짓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사도는 단호하게 그 “거짓”을 버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스스로 우리의 힘을 축적해서 우리를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겸손을 떨고 다른 이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기 위해 종교적 열심을 부리고 하는 가면에서 벗어나서 이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서 진심으로 친절해 지고, 진심으로 용서를 하고, 진심으로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하면 단순히 거짓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광범위한 죄의 형태입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모든 삶, 그 것을 우리는 거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남기신 유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남선녀를 속인 것으로 나는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있었다.” 산 속에서 속세의 사람들을 별로 만난 적도 없는 그 분이 뭘 그렇게 속였다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철 스님은 분명 진리를 알고 있고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진리가 뭔지를 모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보면서 그렇게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을 본인이 “속였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그럼 내가 거짓 속에서 사는 사람인지 진리 속에서 사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구별 할 수 있을까요?
(요일 2:4-6)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 할지니라”
거짓을 버리는 사람들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게살기 위해 노력하고 나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내는 사람이 거짓을 버려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짓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25절 말미에 나옵니다.
(엡 4:25)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우리가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듯이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에게 거짓말을 하는 병이 있지요? 아픈데도 안 아프다고 거짓말하는 병이 뭡니까? 문둥병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과장하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해롭게 만드는 일이니까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한 거짓말이 언젠가 커다란 흉기가 되어서 나를 치게 되는 것을 여러분,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체들에게 거짓과 과장으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복음 안에서 참된 것만을 말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진리를 나누세요. 예수 이야기를 하십시오. 쓸데없는 세상일들로 잡담하지 마세요. 항상 그러한 잡담은 자기 자랑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것, 진리를 나누십시오. 두 번째로 지적하는 것이 “분노”입니다. 26절과 27절을 보겠습니다.
(엡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올기제스떼 카이 메 하마르타네테“ 이 구절을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분을 내라, 그러나 그 분으로 인해 죄를 짓지는 말라“라는 뜻입니다. 분을 내라?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분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분노와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앞에 쓰인 “올기제스떼”는 의로는 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내려오셔서 분노하신 적이 있지요?
(막 3:5)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여기서도 “올게”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거룩한 분노“
(눅 13:15)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마 23:33)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요 2:15)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하나님도 분노하십니다.
(롬 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계 6:17)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렇게 하나님도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는 의로운 분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도 그 의로운 분노를 심어주셨습니다.
(고후 7:10-11)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표준새번역] “10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11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 분노해야 합니까? 우리는 진리에 반하는 것들을 대할 때 분노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외식을 볼 때 분노해야 합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보면서 분노할 수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렘 8:11-12) “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죄인들은 자신들이 죄를 짓고도 그게 죄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버젓이 죄를 짓고 있는 자신들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죄와 악 앞에서 의분을 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분을 내십시오.”
(시 97:10) “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이게 분을 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전혀 저항감이 없는 세상이 만들어 낸 것들이 뭡니까? 살인과 간음과 전쟁과 사기와 폭력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우리조차도 너무나 세상의 악에 대해 관대했습니다. 우리는 분노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죄로 연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26절을 다시 보세요.
(엡 4:26)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분을 내라’ ‘그러나 그 분노로 인해 죄를 짓지는 말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의분 말고 악한 분노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분노, 거룩한 분노는 악에 대해 의분과 수치를 느끼는 것이지만 ‘악한 분노, 죄가 되는 분노’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를 무시하고, 나를 공격하는 무리에게 같은 힘으로 대항하는 것을 악한 분노라 합니다.
(약 3:17-18)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우리는 악에 대해서는 분노해야하지만 그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삶을 요구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6절을 보시면 거기에는 두 가지 분이 나옵니다.
(엡 4:26)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6절을 다시보시면 첫 번째 “분”은 “올기제스떼”입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의 “분“은 ”파롤기스모스”입니다. 이 “파롤기스모스”는 “격앙되고 이미 고정되어 버린 복수심“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한 유의 분노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분노도 물론 안 되지만 자신이 의로운 분노를 내었다 할지라도 그게 그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이나 미움이 되어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죄인은 용서를 해주고 사랑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악한 자리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12:19-21)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요일 2:9-11)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일 3:10-18)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는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는 의분을 내야 하지만 그 죄와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긍휼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과 용서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의분이라는 것은 사랑을 근거로 나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 저 죄, 악 때문에 저렇게 망가져야 하는가? 하고 죄와 악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분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마 5:22-24)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가 악을 미워하고 악에 의분을 내며 형제를 계도하고 충고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악에 빠진 형제까지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죄인이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일어서도록 하는 데 우리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분을 내십시오. 의로운 분노를 내십시오. 그러나 혈기는 안 됩니다. 복수심을 품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렇게 악하게 대한 분들을 사랑하고 용서해 주세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용서하셔야 합니다. 하루를 넘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미움과 분노가 지속이 되면 그게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고 우리는 그 것을 “파롤 기스모스”“악한 분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분노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가 치밀 때마다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들어주신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이야기를” 떠올리세요. 일만 달란트는 인간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 빚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사람에게 주인이 그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서 사정하는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그를 감옥에 쳐 넣습니다. 그 주인이 다시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부릅니다. “내가 너의 빚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고작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저 사람을 감옥에 넣었느냐? 이 악한 종아, 너도 감옥에서 썩어봐라”
여러분, 우리가 어디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인지를 늘 생각하세요. 그리고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한 분들이 있으시면 어서 용서하십시오. 혈기, 악한 분노, 복수심은 안 됩니다. 그러한 자기 지체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은 전부 자기 자신을 테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일생을 망가뜨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분노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분을 내되 그게 죄가 되지 않게 하고 해지기 전에 풀어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을 보시면 도적질에 관한 경고가 나옵니다.
(엡 4:28)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지금 사도는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적질하던 자들은 도적질하지 말라“ 라고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도 도둑질을 한다는 말이지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구원받는 순간 거룩한 성자로 뒤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도적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적질이라는 것의 정의가 뭡니까?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사용하는 것을 도적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물건을 훔칠 수도 있고, 돈을 훔칠 수도 있고 남의 시간을 훔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생각도 훔칠 수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한창 부흥집회에 불려 다니실 때 어떤 공무원이 공무로만 써야 하는 공용 용지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합니다. “목사님 이번 봄에 저희 교회에 오셔서 부흥 사경회를 인도해 주십시오.” 그 목사님께서 뭐라고 답장을 하셨는지 아세요? “이 공용 용지는 이렇게 사적인 용도로 써서는 안 되는 종이로 알고 있습니다. 귀하는 지금 국가의 재산을 도둑질 한 것입니다”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실제로 그렇게 사셨다니까요. 그렇게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쳐 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사소한 것부터 지키며 사신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당신들 직장에서 월급 받으면서 신우 회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대노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직장 신우(信友)회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안 하는 것 보다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직장에서 직장 동료들에게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 뭔가 달라”라는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냥 모여서 “신우 회”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때우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데 삶은 여전히 개판이고 “신우 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자기는 괜찮은 신앙인인 것처럼 뻔뻔스럽게 산다는 것이죠.
그리고 직장에서의 시간은 자기 것이 아니라 이미 돈 받고 팔아버린 회사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돈 받고 판 회사의 시간을 도둑질해서 신우 회 같은 거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열심히 부지런히 회사 일을 하라는 설교였습니다. 일과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점심시간에 하는 건데요?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어라. 밥을 열심히 먹고 휴식을 취해서 오후 일과 시간에 열심히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좀 지나치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맞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종교행위로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삶 속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사람 보면 자기 직장과 직업에 대해서 상당히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직장은 너무 사람을 많이 부려먹는다. 우리 직장은 돈을 너무 적게 준다. 우리 직장 상사는 날 너무 들볶는다. 그럼 집에서 쉬세요. 왜 그런데 나가세요. 그 직장을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으세요? 그럼 당장 때려 치우세요. 그럴 생각 없으시면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해주세요.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들 다 야근하는데 “난 수요 예배 가야 돼.” 이러고 나오지 말란 말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는 여러분도 남들처럼 야근을 하세요.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내 종교 행위를 위해서 남의 시간을 도적질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겠습니까?
세금, 정당하게 내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바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로또? 사지 마십시오. 자기가 열심히 부지런히 일해서 번 돈이 아닌 것은 도적질입니다. 28절에 보세요. “제 손으로 수고하여 일을 하라”고 사도는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 같은 것 바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도둑놈 심보입니다. 왜 사람들이 도박을 합니까? 수고하지 않고 수확을 거두려고 하는 도둑놈 심보입니다. 절대 그런 거 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수고 하셔야 합니다. 절대 게으름 피우지 마세요. 부모님들은 아이들한테 돈 너무 쉽게 주지 마세요. 이 사회에 도둑놈 심보를 만연하게 키워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해서 갖게 하셔야 합니다. 28절에 나오는 “수고하다”“코피아테”는 너무 열심히 일해서 “피곤하여 기력이 쇠약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열심히 수고하여야 합니다.
(행 20:34-35)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여러분, 직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생계의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되기까지 이 우주를 존속시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성시켜 가십니다. 이 강대 상위에서 설교를 하는 것만이 성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는 것만이 경건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열심히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이가 필요합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힘을 내기 위해서는 저는 먹어야 합니다. 제가 밥을 먹기 위해서는 우리 아내가 쌀로 밥을 해야 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고 제 옷을 빨아 주어야 하고 옷을 다림질을 해 주어야 비로소 여기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뭐가 성직이고 뭐가 상스러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시는 바로 그 일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성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셔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시고 장사를 하시는 분들은 최선을 다해서 장사를 하세요. 식당에서 서빙을 하시는 분들은 늘 밝게 웃는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하시고, 직장인들은 최선을 다해 회사 일을 보십시오. 우리는 수고해야 합니다. 수고하는 그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져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에 우리가 일을 하는 목적이 나오지요? 목적이 뭡니까?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벌어서 자기 배를 불리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빈궁한 자를 도울 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돈을 버는 목적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나의 야망을 위해 돈을 벌었고 직업을 가졌다면 이제 우리는 빈궁한 자들을 돕기 위해, 남을 돕기 위해 피곤하도록 수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세요. 그리고 부자 되십시오. 그래서 그 돈으로 여러분의 이웃을 도와주세요.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못 먹고 있는 내 백성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들을 잘 관리하시고 전달해 주십시오. 자기 배만을 위해 쌓고 쌓아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후 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나를 비워서 남을 배불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 영적인 도적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신앙생활 속에서 struggle하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렇게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안수 한번 받고 훌쩍 추월하려는 사람들 있지요? 무슨 기적 같은 것 체험해서 하루하루를 쌓아 올려가야 할 신앙생활을 단번에 지름길로 가려는 사람들, 도둑놈 심보입니다. 신앙은 수고하며, 노력하며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이지 기적이나 체험하고 안수나 받아서 단번에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적질하지 마시고 수고하여 힘써 일하십시오. 29절에는 말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엡 4:29)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사도가 25절에서 제일 먼저 던진 권면이 뭡니까?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입니다. 그리고 지금 29절에서도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말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도 떠드는 것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그리고 5장 3절에서 말에 대한 권면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엡 5:3-4)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왜 이렇게 우리의 말에 대한 권면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까?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내 뱉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마 12:34-37)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좋은 말, 선한 말을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게 여러분의 내면을 선한 것으로 채워 가십시오. 아울러 사도는 우리에게 말로 덕을 세우라고 권고합니다. 말로 남에게 상처 주지 말고 말로 남에게 유익함을 끼치라는 것입니다.
(사 50:4)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여러분 주변에 곤핍하고 곤고하고 고단한 삶을 사는 분들이 계십니까? 선한 말로 위로해 주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병들어 고통 받고 계신 분들이 계시지요? 그 분들에게 여러분의 격려의 말이 필요합니다. 선한 말로 덕을 세우세요. 우리 그리스도인 들 만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을 보시면 계속 권면의 내용이 나오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엡 4:30)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헬라어 원문에 더 충실하게 번역을 하면 “성령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입니다. 성령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 사도가 나열한 그리스도인의 실천 강령들과 또 앞으로 나열 할 내용들 모두가 어떤 한 가지 목적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매일 아침 기상하면 부대원 전체가 연병장을 열 바퀴씩 뛰었습니다. 왜 뛰게 하는 것입니까? 강인한 체력을 키워서 훌륭한 전투병으로 키우기 위함입니다. 연병장 구보는 그 자체가 일이요 목적이 아니라 체력 단련이라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여러분이 거짓말을 안 하고 분을 안 내고 선한 말을 하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어떤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목적지가 뭡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는 것, 거짓말을 안 하는 것, 분을 안내는 것, 도둑질을 안 하는 것 그것이 불변의 선은 아닙니다. 분명 성경에는 선한 거짓말도 있고 선한 살인도 있습니다. 선한 탈옥이 있는가 하면 선한 불륜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선한 것들, 새사람을 입는 것들과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악한 것들, 옛 사람을 벗는 일은 전부 우리 안에 와 계신 성령하나님과의 화목의 차원에서 실행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김홍전 목사님께서 예전에 기독교에 가장 피해를 준 인물 세 사람을 ‘간디,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로 꼽으셨습니다. 그들은 분명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선의 극치를 이루어 낸 사람들이지만 신앙이 요구하는 것은 그 ‘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디처럼 슈바이처처럼 마더 테레사처럼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기에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목적과 이유와 근거가 다른 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짓말하라” 하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인하라” 하면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까지 다 죽여라” 하면 다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가 말하는 선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믿어지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성령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 것입니다.
그 성령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게 믿겨지십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와 계신 것이 믿겨 지세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서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끊으신 그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새사람을 입고 옛 사람을 벗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족들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치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해 버린다면 그보다 더 모욕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구역 모임이나 조 모임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해 구역장님이나 조장이 죽 돌아가면서 한사람씩 의견을 묻다가 자기만 건너뛰고 일을 결정해 버렸다면 그 얼마나 모욕적인 일이겠습니까? 성령하나님은 분명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면서 전혀 성령 하나님을 개의치 않고 산다면 이 어찌 불경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성령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데도 아무 때나 분을 발하고, 아무 때나 거짓말을 하고, 아무 때나 더러운 말을 하고 아무 때나 도적질을 한다면 그게 바로 그 분을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 안 하기로 하고, 분을 안 내기로 하고, 도적질을 안 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31절과 32절에서 우리가 공부한 25절부터 29절까지의 권면을 보다 더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풀어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엡 4:31-32)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러분, 지금까지 사도가 우리에게 권고한 내용들이 전부 내 이웃과 관계된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거짓말을 하지 마라, 선한 말을 하라, 더러운 말을 피하라, 분을 내지 말라, 용서해라, 불쌍히 여겨라, 악독을 버려라. 전부 내 이웃과 관계된 권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로하고 이웃의 곤핍함을 나누고,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고, 이웃을 따뜻하게 포용해주고 이웃을 사랑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교회에서 올바른 가르침 아래 열심히 이웃과의 관계를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가 실패한 것이 수도원 운동 아닙니까? 혼자 산에 올라가서 도 닦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struggle하면서 훈련하고 성숙되어지는 것이 훨씬 힘들고 어려운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웃과의 교제, 교회 안의 형제자매와의 교제를 깨는 모든 일은 그게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성 프란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기로 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우리 이왕 금식할 거면 방 가운데에다가 죽을 끓여 놓고 금식을 합시다.“ 하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방 가운데에다가 맛있는 죽을 보글보글 끓이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 한사람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죽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고 합니다. 그 때 제자들이 모두 벌떼처럼 그 제자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인내심도 없는 배신자로 몰아세웠다고 합니다. 그 때 성 프란시스가 죽 사발을 들고 그 죽을 전부 마셔 버렸답니다. 그렇게 형제를 몰아세우는 것으로 자기의 경건함을 증명하려고 금식을 한다면 그건 아무 소용없는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에베소서를 공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사도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통일, 하나 됨, 한 지체, 한 몸“입니다. 여러분, 제발 부탁입니다. 여러분끼리 제발 다투지 마세요. 여러분끼리 제발 미워하지 마세요. 여러분끼리 제발 험담하지 마세요. 에베소서 내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뭡니까? 하나 됨을 지키라는 것 아닙니까? “네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절대 형제자매 사이의 교제는 깨지 말라“ 그게 훈련 아닙니까? 나를 무시하고 나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최선을 다해 섬겨 줌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 땅에 구현해 내는 것이 바로 교회 아닙니까?
왜 안 될 거라고 지레 겁을 먹으세요.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시도도 안 해보고 미리 포기해 버립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고 가야 할 일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형제자매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 됨을 깨지 마십시오,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하나님의 선택과 장자들의 삶 (김성수 목사) (0) | 2013.10.06 |
---|---|
[스크랩] 왜 숨으신 걸까? (김성수 목사) (0) | 2013.10.05 |
[스크랩]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김성수 목사) (0) | 2013.10.04 |
[스크랩]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자들 (김성수 목사) (0) | 2013.10.04 |
[스크랩] 나그네의 귀향 (김성수 목사) (0) | 2013.10.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