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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아브라함과 야곱 그리고 은혜의 사람 이삭의 삶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0. 2.

 

 

아브라함과 야곱

그리고 은혜의 사람 이삭의 삶

 

(김성수 목사)

 

 

(창 24:62‐67) “62 그 때에 이삭은 이미 브엘라해로이에서 떠나서, 남쪽 네겝 지역에 가서 살고 있었다. 63 어느 날 저녁에 이삭이 산책을 하려고 들로 나갔다가, 고개를 들고 보니, 낙타 행렬이 한 떼 오고 있었다. 64 리브가는 고개를 들어서 이삭을 보고, 낙타에서 내려서 65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었다. "저 들판에서 우리를 맞으러 오는 저 남자가 누굽니까?" 그 종이 대답하였다.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너울을 꺼내서, 얼굴을 가렸다. 66 그 종이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이삭에게 다 말하였다. 67 이삭은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었으며, 이삭은 그를 사랑하였다. 이삭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위로를 받았다.”

 

 

지난주에는 창세기24장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하나님 백성들의 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과 적용,(아브라함이 계획을 하고 종이 보냄을 받아 가서 아들의 신부를 데려와 혼인잔치를 치르는 것) 즉 하나님 자신의 열심과 주권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 홀로 완성하신 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 24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한 아버지의 부름에 신부된 자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려 행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서정은 소명‐칭의‐성화‐영화(혼인잔치)의 순서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명이나 칭의 앞에 성화가 먼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는 아버지의 부르심에 의한 신부의 반응의 과정일 뿐인 것입니다. 잠깐 복습을 해 볼까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신부인 교회가 신랑이신 약속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24장의 이삭의 혼인 잔치를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계획을 하지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신랑의 지체, 즉 교회라는 신부의 준비를 언제부터 계획하셨는지 이렇게 기술합니다.

 

(엡 3:6,11)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 성도들을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들어 그 둘을 하나의 상속자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준비는 이미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 신부도 그 때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신부를 불러 오기 위해 아브라함이 자기의 종을 보낸 것처럼 성부 하나님은 그 일의 실행을 위해 성령 하나님을 보내십니다. 물론 그 성령의 강림 사건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행되었지요.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령의 적용이 없이는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마치 창세기 1장의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에 의해 첫 창조가 일어났던 것처럼 또 다시 그 혼돈의 수면 같은 예수님의 무덤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며 그 첫 열매이신 예수를 새롭게 창조하여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처럼 역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사망의 상태인,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신부인 우리 교회 또한 그 하나님의 신의 강림과 그 실행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의 적용에 의해서 새롭게 새로운 창조물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고후 5:17)

 

중요한 것은 그러한 아버지의 준비와 실행에 리브가가 즉시 응답을 한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즉시 종을 통한 아브라함의 부름에 응답하고 이삭에게 가기 위해 종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게 되면 우리는 성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신랑이 기다리고 계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롭게 눈을 떠 새로운 차원인 오는 세대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소중하고 귀한 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부요와 풍성함과 신실함을 소유한 우리의 신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내진 성령의 보증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래 우리의 육적 본성은 즉시로 주님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결국 그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성자 하나님의 필요와 성령 하나님의 강력하고 틀림없는 역사의 결과로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서정에 등장하는 신앙이며 성화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거기에 필연적으로 수반이 되는 교회의 반응과 교회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세 사람의 삶 속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 빚어지는 거룩한 새 사람의 구약 적 전형입니다. 그 말은 쉬운 말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삼대에 걸친 세 사람이지만 그들을 따로 존재하는 세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자들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한 인격을 세 측면에서 나타내고 있는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우리 성도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람이고,(소명, 중생, 신앙) 이삭은 그리스도가 이루시고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거저 물려받아 누리는 은혜의 측면에서의 성도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람이며,(영화) 야곱은 성도가 자신의 행위나 노력이나 육신적 특성에 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부르심과 목적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다루시는 손길에 의해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변화되고야마는 특성을 보여주는 사람인 것입니다.(성화, 견인) 이해가 가세요. 이것을 잘 이해를 하면 우리가 이미 공부한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몇 주간에 걸쳐서 공부할 이삭의 이야기 그리고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의 맥이 일관성 있게 잘 연결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하시는지도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그 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성도들의 영적 신분과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신앙생활의 본질 및 구원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모두 합쳐보면 성도의 구원의 내적 외적 내용, 다른 말로 성도의 이 땅에서의 현실과 영적인 현실의 이중적 국면을 모두 간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 우리는 이삭의 이야기에 당도해 있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삭이 보여주는 면은 ‘은혜’로 모든 것을 받아 누리게 되는 성도의 영적본질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삶은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칭의의 구원에 대한 알기 쉬운 그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 누리는 그런 사람으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이삭은 탄생부터 결혼,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개척하여 무엇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몇 번의 경계와 배척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방패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삭은 그렇게 은혜로 말미암은 복된 후사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상속자로서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한 것입니다. 구원의 영적 측면은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고 하나님에 의해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것을 누리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보탤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칭의의 구원은 백번 옳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인간의 교만이 내어놓은 죄였음을 여러분은 익히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앞에서 완전히 두 손, 두 팔을 다 펴고 온전히 자신을 부인하며 항복하여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당신이 맺으시는 열매를 맺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연합의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노력하여 우리가 열매 맺는 그런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게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죄였으니까요.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지난 수요 성경 공부 때 자세하게 다루었으니까 그 설교를 참조하세요. 그런데 하나님의 방문도 없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즉각 기각시키시고 당신의 방문에 의해 불가능함 속에서 태어나는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이삭은 그렇게 인간의 무능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탄생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바로 그러한 구원의 영적 측면을 보여주는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은혜로 태어나고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삭이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도대체 젖을 뗄 나이의 이삭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해 주었기에 아버지가 대연을 베푼 것일까요? 그냥 아들이기에 큰 잔치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은혜 아래에서 자라났습니다. 우리 성도가 바로 그렇게 은혜로 태어나 은혜 안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벧후 3:18)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 지어다”

 

[표준새번역]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여러분이 자라나기를 빕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의 은혜로 혼인을 하여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 받습니다. 이삭의 삶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입니다. 성경에 이삭이 특별히 부지런한 사람이거나 야곱처럼 성취욕이 강했다거나 집요한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이삭이 은혜의 사람이었음을 드러내어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삭은 그렇게 아버지의 기업을 무상으로 상속 받았고 그 자신이 아버지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이삭의 이야기에 그려져 있는 은혜의 복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엡 1:11)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아버지의 계 획) 그 안에서 기업(상속자, 상속 물)이 되었으니”

 

(엡 2:4-9)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은혜 안에서 거저 우리의 목적지까지 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요람에 누워서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구원에 속한 모든 것은 은혜로부터 시작하여 은혜로 종결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칭의의 구원은 반드시 순종이라는 성화의 단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삭의 순종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경험한 이삭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탄생부터 자라남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을 하신 하나님과 자기를 죽이기 위해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도록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 오직 은혜로만 나를 키워주신 나의 아버지가 나를 제물로 드리려 할 때에는 무슨 계획이 있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가 믿음과 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번제 단에서 순종의 제물로 기꺼이 자신의 몸을 드렸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자신에게 부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지하고 자각하게 될 때 그에게는 믿음이 생깁니다. 나의 상황과 처지가 어떠할 지라도 어차피 은혜의 왕 노릇(롬5:21)에 의해 이끌려가는 인생이라면 절망하거나 좌절할 수 없다는 믿음이 은혜의 감지 속에서 격발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 은혜의 아버지가 나를 이끌고 가시는 길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 어느 것도 나에게 해 될 것이 없다는 순종과 신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는 순종을 낳고 순종은 더 깊은 은혜를 낳으며 그 깊은 은혜는 더 깊은 순종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삭의 삶이 함의하고 있는 성도의 신분과 구원의 본질에 대해 올바로 이해를 하게 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삶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진 우리 아버지의 은혜가 어떠한 것인지를 배우고 또 배워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에 잘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부지런히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만 우리는 깊은 순종의 자녀로 성숙되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딤후 2:1)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이렇게 사도 바울도 아들같이 아꼈던 디모데에게 성도는 은혜를 아는 만큼 강하게 되어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단하고 외로웠던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선택과 인도하심을 배웠다면 아무 일도 한 것 없이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유업을 거저 상속받아 누리는 이삭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풍성하게 자라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상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역사할 때 그 은혜는 반드시 상실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마치 불이 더러운 찌끼를 걸러내듯이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하여 죄인들이 그들 자신 속에 쌓아놓은 더러운 것들과 이 세상의 힘들이 처리가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상실과 손해를 수반합니다. 그래서 영화로 향하는 성화의 과정은 고단하고 힘이 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자신을 가리켜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고 한 것과 야곱이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나그네 인생길이라 칭한 것처럼 고단하고 외롭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것이 유익입니다. 그 것을 알기에 성도는 그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삭의 순종이 나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삶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은 자꾸 상실해 가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실해 가다가 결국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고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로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의 특징은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기 위해 세상과 이전 것들을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그 익숙한 모든 것들을 두고 생면부지의 땅으로 이사를 가 장막에 거하며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야곱 역시 하나님과 그 약속을 누리기 위해 자기를 잃어야 했으며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 버려야만 했습니다. 이리 저리 쫓겨 다니다 결국에는 나그네 인생길 130년에 그가 험악한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죽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삶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야곱이 나중에 알거지가 되어 애굽으로 이주한 것을 기억하시지요?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고향을 잃고 조카를 잃고 아내를 잃고 결국 손바닥만 한 무덤 속에서 그의 생을 끝마치는 삶 아닙니까? 바로 그러한 삶이 성도가 이 첫 창조의 영역에 속한 역사와 공간 속에서 통과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에 비해 이삭의 특징은 얻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을 통과한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당도하여 얻게 되는 놀라운 복이 이삭의 삶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삭에 대해서는 죽음의 이야기나 상실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는 오직 얻는 자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자였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종국의 삶이며 현재에도 문득 문득 경험하게 되는 이 땅에 침투해 들어온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무언가를 상실하고 잃는 것은 사실은 찬란한 하늘의 것을 얻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두 가지 국면을 모두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상실, 즉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목적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찰나의 삶 속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십자가의 삶을 감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상실도 따르며 자기부인의 과정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 누리는 것, 즉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누림에 있어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세상과 우리 자신이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십자가, 즉 상실과 자기부인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육적 자아가 하나님에 의해 다루심을 받은 후에 이삭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 17:15‐19, 18:10‐14, 21:1‐7) 그렇게 상실과 자기부인의 과정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이며 그 것을 통과하여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완성된 성도의 모습을 예표 하는 것이 이삭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는 반드시 먼저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을 받고 믿음을 발휘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과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야곱처럼 다루심을 받아서 부서질 것들은 다 부서지고 버려야 할 것들은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체험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객관적 믿음을 주관적 믿음으로 발휘해내야 하는 과정이 없이도, 혹은 고난을 통과하며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인정해야 하는 자기 부인의 과정이 없이도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면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는 필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아 누리게 되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이 역사 속에서 성도가 겪어내고 통과해 내야 하는 믿음의 발휘와 고난을 통한 자기 부인의 과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아브라함과 야곱이 이삭의 앞뒤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누리는 은혜의 삶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휘 과정 후에 붙어서 나와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에 의해 성숙되어져 가고 완성되어져 가는 야곱의 삶으로 뒷받침 받아야 하는 것이지 그 것 하나만 저절로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없이 이삭이 있을 수 없으며 야곱이 없이 이삭의 은혜의 삶은 온전해 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두 국면이 아주 잘 대조되어 설명되어 있는 것이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팔복입니다.

 

(마 5:3-10)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예수님이 강론하신 팔복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의 삶이 이 땅에서 어떻게 투영되어 나타나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상황과 환경과 사건이 우리에게 닥치게 될지라도 당황하지 말고 잘 이겨내라는 것이지요. 그 팔복에 관한 구절들을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성도의 현실과 영적 실존으로 나누어 보면 이러합니다. 먼저 우리의 영적 실존과 궁극적인 완성의 자리에서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이 뒷부분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게 누구의 삶입니까?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거저 상속받은 은혜의 후손 이삭의 삶입니다. 반면에 그 앞부분은 어떠합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처참하지요? 이게 무슨 복 받은 사람의 삶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것이 복 받은 사람의 현세에서의 삶이랍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도 복을 주셨고(창 12:2‐3) 이삭에게도 복을 주셨으며(창 25:11) 야곱에게도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창 28:3‐4) 그런데 이삭이 누리는 것과 아브라함과 야곱이 살아내야 했던 삶이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already, not yet의 tension인 것입니다. 분명 우리가 누릴 것은 후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성도는 반드시 전자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자의 삶 속에서 후자의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의 아이러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 받은 자들의 삶이 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 살펴보면서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천국의 주인이 될 복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게 된다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천국을 소유하는 데 있어서 내가 보탤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삶을 심령이 가난한 삶이라 합니다. 나의 실력과 업적과 지식과 재능과 지혜, 그리고 내가 나를 보호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쌓은 세상의 힘 등이 나를 구원하는 데에 조금도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도우심을 구하는 삶을 심령이 가난한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것이 전혀 없네요. 저는 하나님께 조금도 보탬이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저는 그렇게 무익한 종입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며 살 수 있는 그런 피조물일 뿐입니다.’라는 항복의 삶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삶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던 그 자기 존재의 부인의 삶, 그 삶이 쉽습니까? 자연인의 상태에서 나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부인은 천국의 삶을 맛보게 해 주는 복된 것입니다. 나는 저 부정하고 못난 세리와 같지 않게 해 주셔서 다행이라는 그런 바리새인 적 교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음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철저하게 부인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는 복 받은 사람의 삶은 애통하는 삶이랍니다. 애통하는 삶이 뭡니까? 예배 시간만 되면 무조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우는 것을 애통하는 것이라 하나요? 아니면 자신의 삶이 너무나 힘겹고 어려워서 늘 가슴을 치며 고통스러워하는 삶을 애통하는 삶이라 합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는 말인가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애통하는 삶이란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삶과 연결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죄의 영향 아래에서 갈팡질팡 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을 정직하게 내어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을 애통하는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있는가? 나는 왜 여전히 이렇게 나의 배만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의 성숙은 왜 이다지도 더딘 것인가?’이러한 올바른 자기 인식 속에서 참된 애통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애통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실수와 허물을 보면서도 애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스스로의 부족함과 불가능함과 더러움과 성숙의 더딤으로 애통해 보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실수나 더딤이나 허물이나 더러움이 발견 될 때 정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심정으로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자기 안에서 발견되는 죄의 무서움과 집요함을 발견하고 그 죄를 미워하게 되면 그 죄에 휘둘리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연민의 마음과 동병상련의 마음이 그 죄 속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드는 죄를 사무치게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애통한 사람의 삶입니다. 그 삶이 쉬울까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삶인 것입니다. 나 자신의 지혜와 능력은 절대로 나의 위로의 근거가 될 수 없음과 이 세상 그 무엇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이 부정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땅을 기업으로 받을 복 받은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랍니다. 온유함은 단순히 연약하고 유약하여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온유라는 것은 힘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힘을 자신을 위하여 쓰지 않고 마치 재갈 물린 말처럼 주인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것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버리고 손해 보는 것을 온유라 합니다. 구약에서 온유함의 대명사하면 누구를 떠 올리시겠습니까? 모세입니다.

 

(민 12:3)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런데 그 모세가 어떠한 삶을 살았지요?

 

(히 11:24‐30)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그 온유하다는 모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삽니다. 그러한 삶의 끝에 마침내 여리고가 무너집니다. 약속의 땅이 모세에게 주어진 것이지요. 그게 온유한 삶입니다. 팔복의 세 번째 항목이 모세에게서 정확하게 드러나고 있지요? 그렇게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온유함은 내가 가진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더욱 소중한 것이기에 그것을 붙들지 않고 언제든지 손해보고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자기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여 다른 이들의 유익을 챙기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그 사람이 밟는 모든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십자가로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늘 만족한 포만감으로 배고픔을 모르는 삶을 살게 될 복 받은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 삶은 오직 하나님만이 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음을 알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나의 갈증과 배고픔을 채우려 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인기 등으로 자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직 하나님과의 올바른 회복된 관계인 ‘의’로만 우리의 공허와 허무함이 채워진다는 것을 올바로 깨달아 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 참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힘을 나의 힘으로 삼지 않고 사는 삶이 쉽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삶이 바로 진짜 배부름으로 가는 삶이랍니다. 야곱의 삶을 보세요. 야곱은 온갖 사기와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말년에 그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년을 먹을 것이 없어 애굽으로 자식들을 보내야 하는 지경까지 낮추셨습니다. 어떤 삶이 진정한 배부름의 삶인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복 받은 사람은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게 된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닥친 사망의 증상들로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도는 인간의 죄가 쏟아 놓은 자연재해, 전쟁, 질병, 기아, 살인, 폭력, 거짓, 사기, 미움, 시기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프리카 케냐에 눈이 와서 그 곳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북극은 녹고 있고 오존층은 뚫려 버렸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지진으로는 놀라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는 살인과 약탈과 자살과 방화와 기아 등으로 매일 매일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자연재해와 전쟁 등으로 수 만 명 수 십만 명이 죽어나가는 데도 전혀 놀랍지 않은 무감각증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그러한 사망의 증상들로 고통당하는 우리 이웃을 긍휼이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우리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습니다.

 

(행 17:26)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렇게 인류는 원래 하나의 연대성 속에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각자가 자기의 배만을 위해 살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이렇게 전쟁과 다툼 속으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연대성의 파괴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인류는 하나님을 머리로 하여 한 지체로 지어진 것입니다. 내 이웃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고 험담의 대상도 아니고 다툼의 대상이나 전쟁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건 타락한 죄인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성도는 그 속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다시 연대성 속으로 들어오게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모든 인류에게 일어난 일은 바로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칼 막스의 말처럼 연대성 속에서 우리 이웃을 긍휼한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독교의 정신이 그러한 공산당 선언문에 나오는 정신보다 못 한 것이 되었습니까?

 

감동적인 예배를 드리고, 멋진 찬양을 하고, 가슴이 절절한 설교를 듣고 만족해하면서 나가는데 홈리스가 냄새를 풍기며 교회 정문 앞에서 자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너무 좋았어, 오늘 찬양은 너무 감동적이었어, 난 오늘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어.’하면서 예배당을 나서는데 거기에 지저분한 홈리스가 구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코를 막고 그냥 지나가면서 혹시 자기 몸에 냄새나 배지 않을까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는 그 사람의 모습이 과연 감동적인 예배를 드린 사람의 모습과 어울립니까?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감동스러웠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죄인인 자신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인지하고 자각하여 감사하고 감격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기 앞에 놓여있는 긍휼을 필요로 하는 이를 마치 귀찮다는 듯이 그냥 지나쳐 가 버린다면 그가 정말 감동적인 예배를 한 사람이 맞습니까?

 

(약 2:14-17)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긍휼을 아는 이는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쉬울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복을 준 사람들을 반드시 그 자리로 끌고 가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하나님을 보게 될 복 받은 사람은 마음이 청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기서 청결함이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전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마음은 여전히 자기의 배 만을 위한 그런 신앙생활, 그것이 바로 청결함을 잃어버린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섬긴다고 하면서 저는 것, 흠 있는 것들 가져다가 제사를 드리고 자기들은 할 것 다했으니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1:22,25) “22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5 내가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 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해 있기를 질투하시기까지 바라십니다. 우리는 복음에 물을 타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복음을 싸구려 복음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이 세상의 힘인 맘몬을 섬기는 그런 청결치 못한 신앙은 절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주님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실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이 다른 대상으로 향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론 남편이나 아내에게 퉁명스러울 수도 있고, 때론 결혼기념일이나 배우자의 생일을 까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용서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배우자가 겉으로는 참 잘해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 없이는 못 살아요’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 신인 맘몬에게 사랑 고백을 하면서 여전히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질투하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기분이 어떠실까요? 그렇게 하나님을 볼 사람들은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그 마음에 찌끼를 섞지 말라는 것이며 물을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 분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돈, 명예, 인기 이런 것들 의지하지 말고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이 흠도 없고 티도 없이 청결한 상태가 되려면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데 우리는 하나님을 못 보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요. 우리 하나님께서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고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께 붙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다 한 눈을 팝니까?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지요. 그게 마음의 청결함입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일곱 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복 받은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삶을 산다고 합니다. 화평한 삶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평화가 뭡니까? 그저 아무 일 없이 무사 안일한 상태를 평화라고 하나요? 언제 깨질지 모르는 그 평온한 상태 속에서 전전 긍긍하며 불안해하는 그 삶을 평화라 하나요? 그렇다면 그 삶은 시체의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은 변화와 성숙과 진보와 깨어짐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고 성숙함도 없으며 깨어짐과 거듭남 없이 이 땅을 평화롭게 살다가 가게 된다면 그 것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란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등을 돌리고 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을 부둥켜안은 상태를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될 것이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뭡니까?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들을 화평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 세상에 오자 오히려 세상이 시끄러워졌습니다. 고요하고 평안하던 유대 땅이 커다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그 소동을 감수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온 나라가 난장판이 된 것입니다. 그게 화평케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전도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지 않는 여러분의 가족이나 이웃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 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그들과 평화롭게 사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화평케 하는 자는 아닙니다. 그건 겁쟁이의 삶이며 시체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느 것이 더 편안한 삶인가가 아닌 어느 것이 화평케 하는 삶인가를 삶의 기준으로 삼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소란이 일어나고 이웃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들과 하나님을 화해케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 산상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 여기다 초막 셋을 짓고 평화롭게 살자고 했을 때 예수님은 질병이 있어 아픔이 있고, 문제가 있어 소란이 있으며, 죄가 있어 다툼이 있는 산 아래로 끌고 내려오셨습니다. 성도는 홀로 평화를 누리며 숨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는 상처 주는 사람도 많고 사람들 상대해 봤자 골치만 아프니 그냥 조용히 숨어서 신앙생활 하겠다.’는 어떤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이 겸손하고 욕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화평케 하는 삶에서의 도피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이들이 하나님과 화해하여 화평한 삶을 살도록 열심히 기도하며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 지긋 지긋한 세상 빨리 끝내시고 저 악한 인간들 다 지옥가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하나님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저 들이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 저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겠습니다.’ ‘저 가정이 아직 주님을 모릅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오세요.’라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되겠지요. 그게 팔복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에는 이렇게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첫 창조의 영역인 역사와 인생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paradox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삭의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그 삶을 문득 문득 맛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이 있음도 잊지 마시고 열심히 그 삶을 살아내십시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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