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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보이는 팥죽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26.

 

 

보이는 팥죽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김성수 목사)

 

 

(창 25:28-34)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29 한 번은,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는데, 에서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와서, 30 야곱에게 말하였다. "그 붉은 죽을 좀 빨리 먹자. 배가 고파 죽겠다." 에서가 '붉은' 죽을 먹고 싶어 하였다고 해서, 에서를 3)에돔이라고도 한다. '붉은' 31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은 먼저,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나에게 파시오." 32 에서가 말하였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 33 야곱이 말하였다.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 그러자 에서가 야곱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판다고 맹세하였다. 34 야곱이 빵과 팥죽 얼마를 에서에게 주니,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나갔다.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

 

우리는 2주 전에 창세기 25장을 개괄적으로 훑어보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 있는 장자권의 소중함에 대해 충분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계로 흐르는 장자 권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야 했음에도 에서는 그 장자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야곱에게 넙죽 넘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한 에서의 행동을 ‘망령되다’라고 질책을 합니다. 그 ‘망령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베벨로스’는 문지방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라 했지요?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문지방 짓밟듯 밟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야곱이 배가 고파 죽겠다는 에서에게 이 팥죽을 줄 테니 형이 잡아온 곰이나 사슴을 한 마리 달라고 했다면 에서가 바꾸었을까요? 아니면 이 팥죽과 형의 활과 칼을 맞바꾸자고 했다면 에서가 주었을까요? 아마 유약한 동생을 흠씬 패주고 팥죽을 빼앗아 먹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장자 권은 그렇게 쉽게 줘 버렸을까요? 그것은 그 장자 권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주 경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그건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항상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체하라고 미혹하거든요. 사람들은 그러한 마귀의 미혹에 아주 쉽게 넘어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감각적으로 인지가 가능한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쉽게 감지가 안 되니까요. 오늘은 그런 경솔한 에서의 소행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성도가 된 사람이 이 땅에서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성경은 믿음과 소망이라 합니다.

 

(벧전 1:21)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골 1:22-23)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살전 5:8)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 자”

 

그렇지요? 우리 성도는 믿음과 소망으로 이 세상과 싸울 수 있고, 존재할 수 있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유일한 힘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소망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음이 전제된 단어입니다. 먼저 믿음이라는 것을 한 번 보지요.

 

(히 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요 증거라 합니다. 쉬운 말로 믿음은 지금 감각적으로, 물리적으로 체감하거나 인지할 수 없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은 다만 인식을 할 뿐이지 눈에 보이는 것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계속 가보지요. 그런데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엡 2:8)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믿고 구원을 얻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전에 하늘의 회의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안에다가 우리를 연합시키시고 우리의 죄를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이셨으며, 그 제사가 온전한 제사였다는 보증으로 죄에 대하여 이미 주님과 함께 죽은 우리를 품에 품으신 주님을 다시 부활시키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으며 우리도 그렇게 하늘의 권세와 영광을 상속받게 될 것을 믿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는,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을 실상이요 본체로 받아들이는 소망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격발해 냅니다. 아직 가시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우리 눈앞에 완성체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약속이 된 하나님 나라와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등을 확신 속에서 기대하는 것을 소망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소망은 사실 뗄 레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소망이 없을 수 없고 다가올 세대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이 믿음을 근거하지 않고 그 소망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소망을 격발해 내고 소망은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유일한 힘인 믿음과 소망 둘 다 지금 현재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롬 8:24)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고전 2:9)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렇지요? 믿음과 소망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군에 간 이등병이 사회에 두고 온 자기 애인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첫 휴가를 기다렸습니다. 첫 휴가 때까지 그에게는 ‘반드시 첫 휴가는 온다. 왜냐하면 군법에 모든 군인은 첫 휴가를 가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때 내 사랑하는 순이를 만나야지’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드디어 첫 휴가가 왔습니다. 그의 믿음이 실현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오매불망 보고 싶어 하던 순이를 만났습니다. 소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소망하던 것이 현상으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소망을 성취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말로 소망을 잃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성취된 소망은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우리 주님과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우리 눈으로 보고 만지는 그 때까지 믿음과 소망으로 기대하며 고대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까지 항상 믿음과 소망 속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고전 13:12-13)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항상 있어야 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우리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를 온전히 알게 될 때에 믿음과 소망은 사라지고 사랑만이 영원히 남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바울이 말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소망으로 기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자꾸 하나님께 이 땅에서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복으로, 기적으로 , 기가 막힌 현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믿음과 소망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때부터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니까 그런 줄 아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게 될 것을 어떻게 소망하시지요?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그렇게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언약이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과 소망으로 기대하고 바라고 확신하며 오늘의 현실을 이겨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성숙시키시고 완성시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넣어 함께 살 것이라는 그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계에 바로 그 하나님의 언약이 흐르고 있었고 그 언약은 장자 권을 타고 상속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성취가 너무 더디게 보였고 심지어 그 언약의 성취의 기미는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에서는 그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장자 권을 팥죽만도 못한 것으로 여겨 짓밟아 버린 것입니다. 그걸 불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믿음과 소망, 그리고 가짜 믿음과 소망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어요?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선물로 주시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믿음과 소망이 있다고 우기는 이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내어놓는 믿음과 소망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치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짜 믿음과 소망은 눈에 보이는 힘이나 쾌락이나 편안함이 없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가짜들이 내어 놓은 가짜 믿음과 소망은 그러한 환난이나 고난이 닥치면 금방 사라집니다. 주님이 그들을 가시떨기, 돌 짝 밭, 길가 밭으로 표현 하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진짜 믿음과 소망을 소유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는 상관없이 항상 믿음과 소망을 굳게 붙듭니다. 왜냐하면 진짜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의 성취로 우리에게 주어질,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주어질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의 배를 부르게 하는 팥죽이나 떡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기적들이 잘 안 나타나는 것이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힘들이 빠져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언약을 신뢰하는 믿음과 소망을 가진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기다림이며 인내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8장으로 가겠습니다.

 

(롬 8:24-25)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보세요. 믿음을 근거로 한 소망을 소유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뭡니까? 참음과 기다림입니다. 여기 ‘참음으로’라는 어구의 ‘으로’라는 전치사 ‘디’는 ‘~으로 말미암아, ~을 방편으로’라는 의미의 전치사입니다. 어떤 행동이 완성을 기하도록 하는 동인(動因)을 지적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참음이라는 것을 방편으로 하지 않는 소망은 진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망에는 반드시 참음이라는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간을 고난이라고도 표현하고 하나님의 침묵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다른 곳 한 곳만 더 볼까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로마서 5장으로 가보지요.

 

(롬 5:3‐4)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에도 소망을 견고케 하는 요소 중에 참음과 그 참음을 낳게 하는 환난이 있습니다.

 

(시 130:5‐6) “5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여기보시면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기다리는, 소망을 가진 이들이 그 소망의 끝을 기다리는데 마치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린다고 합니다. 해가 떠야 자기의 임무가 끝나니까요. 기다림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파수꾼이 밤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이 소망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밤과 방불한 삶임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참음입니다. 이렇게 소망은 항상 환난과 인내를 통과하여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참으며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도피주의나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패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참음이나 인내의 의미는 아주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딛 2:13)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여기에서 성도는 복스러운 소망이 나타남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그 ‘기다리다’라는 단어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열심히 기다린다, 열심히 고대 한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벧후 3:12)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여기에서도 기다림의 내용이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함’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소망하며 기다리며 참는다는 것은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 적극적인 면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그 기다림의 시간을 이렇게까지 표현합니다.

 

(빌 3:10‐14)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사도는 부활이라는 소망을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에 이르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 달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러한 소망의 적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산 소망, 살아 있는 소망(벧전 1:3)’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진취적이며, 발전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도는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소망 사이를 화해시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이 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적극적으로 달려가야 하는 일은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일까요?

 

(벧후 3:13-14)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보이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이들이 이 땅에서 힘써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하나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이 기다림의 시간, 참음의 시간동안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거든요.

 

(엡 1:4-5)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이유가 뭡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룩한 자로 만드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여보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유일한 목적지는 거룩입니다.

 

(살전 4:3)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된 장면이 등장합니다.

 

(계 14:1‐5)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 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 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 들이더라”

 

어떠세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십 사 만 사천이 하늘에 있는데 그들에게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완성해 내신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그 목적지로 힘써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부활에 이르려고 힘써 행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권고를 합니다.

 

(요일 3:3)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온전한 부활의 몸,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당신의 아들로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그렇게 만드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선물로 주셔서 그 믿음과 소망을 견고케 하심으로 진정으로 소중하고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셔서 그 소망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의 성숙을 도모하십니다. 거기에는 강압과 폭력과 억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설득하시고, 환경과 사람들을 사용하여 우리의 눈을 점차 하늘로 옮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현재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체념이나 도피로 내세를 소망하는 소피스트들과 영지주의자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 스위스에서 시계 산업이 발전했는지 아세요? 스위스가 시계의 나라가 된 것은 16세기 제네바에서의 시계산업의 부흥 때부터입니다. 16세기 스위스 제네바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요?

 

바로 종교개혁을 한 존 칼빈이 살던 도시입니다. 그 때 개혁주의 신학이 정립이 되면서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무기력하게 천국만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며 진취적으로 자신의 현재를 살아내며 거룩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제네바를 강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것이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현재는 성실과 근면으로 소중하게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 자신의 거룩을 위해서요. 거기에 고난이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현재는 때론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난으로 채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그 고난은 성도에게 반드시 유익이 됩니다. 성도는 그러한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조금씩 지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눈을 돌려 영광스러운 하늘 소망으로 가슴을 채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 8:17-18)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래서 소망이 있는 성도들은 삶의 질곡을 통과하여 점점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완성이 될 위의 것으로 자꾸 관심의 초점을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골 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런 사람들은 절대 이 세상의 흉흉함이나 어두움을 경험하며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승리자는 우리 성도일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시 112:6‐9) “6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7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8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9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보세요. 그렇게 하늘 소망을 품은 자들은 이 세상의 흉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들의 공격에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위 엣 것을 열심히 찾는 이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힘의 대표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재물을 털어 빈궁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더란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나의 배를 채우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팥죽만도 못한 이 세상의 힘과 바꿔 먹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내 배를 채우는데 유용한 세상의 힘을 털어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으로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6:25-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 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 하니라”

 

이 강화가 어떤 말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볼까요?

 

(마 6:19-20)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이 말씀은 교회에 헌금 많이 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땅의 배설물 같은 위장된 보물을 좇느라 진짜 하늘의 보물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무엇이 중요한지 잘 분별하여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위엣 것인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는 사실 같은 것입니다. ‘의’로 번역이 된 ‘짜다크’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완성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들 사이가 완전히 회복이 되어 그 관계가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를 상호 온전히 수행하는 상태를 의의 관계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모든 피조물이 그 분께 온전히 순종하여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발산해 내는 하나님 나라와 의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먹을 것과 입을 것보다 먼저 구하라는 것은 단순히 행위나 선택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나중에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보상해 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먹을 것 입을 것이 조금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워도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하나님 나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나의 상황과 환경과 처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거나 염려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질이나 양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백합화가 솔로몬의 영광을 좇아갑니까? 어떻게 공중의 새가 먹고 마시는 것이 왕궁의 수라상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지금 주님께서 새와 백합화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공중의 새와 백합화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간섭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걸 영광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먹는 것과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이 너희가 가진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초라하지만 그게 바로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질이나 양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 함께 계시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앉아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확인 된 사람은 감옥에 앉아서도 소망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들 조금이라도 염려하면 내가 믿음이 없는 자로 간주하여 벌을 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가 정말 이 땅의 보이는 것들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있다면 너희는 하나님과 항상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므로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랑의 권고 인 것입니다. ‘아들아, 염려마라 내가 있잖아’그게 염려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권고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의 영광, 즉 그들이 지어진 목적은 하늘을 날고 , 먹고 싸며, 화려한 꽃으로 옷 입는 것에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영광은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그 분의 영광을 반사해 내면서 영생을 누리는 것에 있는 것이니까 보이는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바라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길이 너무 힘이 들고 고단하기만 한 길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그 길에 즐거움과 기쁨도 함께 공존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 여정은 고난과 탄식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입니다.

 

(롬 8:22‐23)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렇게 성도는 자기 몸의 구속이 완성되는 날까지 탄식과 고통 속에서 적극적인 기다림과 참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 즐거움과 기쁨이 함께 주어진다고도 합니다. 그게 소망의 힘입니다.

 

(롬 5:2‐3)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빌 4:4)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후 6:10)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진 paradox입니다. 성도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반복하여 확인하게 되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비참함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불합리와 억지와 불행과 슬픔과 전쟁과 질병 등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대한 실망과 절망, 그리고 탄식과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거기서 눈을 들어 그러한 모든 악이 사라지고 참된 선과 안식과 행복과 평안이 가득 차있는 소망의 나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망이 다스리는, 힘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이 땅에서 성도가 기뻐할 수 있는 길은 하늘 소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땅의 힘을 축적하여 행복에 이르고, 인기를 얻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려 했던 과거의 야망은 다 내려놓으시고 하늘 소망을 바라보시면서, 우리 몸의 온전한 구속과 부활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 땅의 팥죽과 냉큼 바꿔 먹는 그런 불경하고 경솔한 일에서 떠나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삶을 체념하거나 도피주의에 빠져서 대충대충 살라는 말이 아니라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정말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삶을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삽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나의 거룩에 필요하여 허락하신 삶이며 환경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 소망을 가진 자들은 절대 ‘이 더러운 세상 얼른 불타버리고 새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식의 소피스트들이나 영지주의 자들, 혹은 공산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부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 소망과 하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 목숨 바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위대한 신앙 고백이지 현실에 대한 체념이나 도피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난 당신을 위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난 당신을 위해 내 목숨도 아깝지 않으니까요’하고 사랑고백을 했다면 지금 현재도 그 상대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고백을 해 놓고 지금 현재는 그 상대방에 대하여 무례하고 책임감도 없고 아껴주지도 않는 삶을 살면서 ‘지금은 이렇지만 정말 죽어야 할 상황이 닥치면 그 때는 반드시 죽어줄게’한다면 그게 진정한 사랑 고백이겠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늘 소망과 부활 소망을 소유한 성도들은 그 소망의 종착역을 향해 오늘을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부활의 몸을 입고 살 그 삶을 오늘, 나의 현재에서 분투하며 연습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 가서 하나님 죽도록 사랑하겠노라고, 그러니 지금은 이 땅의 팥죽 좀 실컷 먹여달라고 사기 치지 마시고, 정말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죽도록 사랑하신다면 그 언약을 굳게 붙들고 지금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시고 지금 하나님 나라를 죽도록 고대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 삶이 여러분을 변화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변화입니다.

 

내 상황이 변하고 내 주변 사람들이 변하고 내가 속해 있는 나라가 변하여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기대는 어서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내가 변하여 내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내가 변하여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 지는 것이며, 내가 변하여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나라가 나의 영향을 받게 사는 것입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집시 스미스가 성도들에게 던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도는 기도할 때 자기 주변에 분필로 원을 그리고 ‘주여 이 원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변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원안에 있는 모든 것들 안에 부흥이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둘레로 원을 그리고는 전부 그 원 밖에 있는 것들이 변하여 나를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지요? 아닙니다. 바꾸세요.

 

진정 하나님의 언약을 소망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환경이나 상황이나 자기 주변의 인물들이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것으로 바뀌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먼저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절대 하나님의 언약이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팥죽 같은 세상의 힘과 그 언약을 바꿔 먹지 않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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