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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22강. 죽임당하기 위하여 남겨진 자들

by IMmiji 2015. 5. 2.

22강. 죽임당하기 위하여 남겨진 자들 (계 6:9-11)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數)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오늘은 성도의 죽음이 주는 의미를 살펴볼까 합니다.

사는 게 복일까요?

죽는 게 복일까요?

시작부터 도발적인 질문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 있는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처럼 순교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이란? 어떤 일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에 결과로 주어지는 것은 삯이지 복일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성도는 주 안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의 구조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성도들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의인 아벨로부터 사가랴의 죽음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을 보면 천상과 지상 두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있고,

땅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도록 순번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2층에는 죽음 너머 영생하는 동네에서 사는 자들이 있고

1층에는 죽음 아래서 종노릇하는 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두 동네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하늘과 땅에 모습을 교차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의 천지(天地) 창조와 같은 이야기에요.

 

천지(天地)가 뭔가요?

하늘과 땅이잖아요.

하늘은 천상(天上)을 말하고, 땅은 지상(地上)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마치 1층과 2층처럼 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지(天地)는 이질적으로 다른 둘인데도 항상 함께 운행하고 있습니다.

천(天)은 하늘에서,

지(地)는 땅에서 운행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어요.

분명히 하늘과 땅을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의 깊음 위에 있습니다.

그 속에서 빛을 불러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 기사를 땅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은 어디 갔을까요?

이는 감추어버린 겁니다.

왜? 감추어 버렸을까요?

 

이는 하늘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인 묵시를 설명하고자 함입니다.

천(天)은 보이지 않는 세계인 묵시를 예표하고,

지(地)는 보이는 세계인 역사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묵시와 역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천지(天地)를 창조한 것입니다.

 

또 하나 간과치 말아야 하는 것은 성경은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천지 창조를 그냥 하늘과 땅 이야기로만 보면 안 되어요.

천지를 의인화 하여서 하늘 백성과 땅 백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지(天地)를 의인화(擬人化) 하면 두 종류의 사람이 됩니다.

그럼 이 세상에는 천(天)에 속한 자와 지(地)에 속한 자가 있음이 되겠지요.

천(天)에 속한 자는 영(靈)에 속한 자라고 하고,

지(地)에 속한 자를 육(肉)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치관이 달라요.

영(靈)에 속한 자는 하늘나라 가치로 살고,

육(肉)에 속한 자는 세상 가치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도 두 부류의 인간들이 세상에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두 지평으로 흐르고 있어요.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이라는 지평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과 땅에 속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흐름은 6장 이후부터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6장 이후로는 어린 양이 봉인 된 책의 인을 떼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천상에서 계획이 된 일들이 어린 양이 하늘에서 인을 떼자 지상에서 사건화 되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곱 인 속에 일곱 나팔이 있고, 일곱 나팔 속에 일곱 대접이 들어 있어요.

이는 모두가 점진적이면서 점층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동시적이면서도 역사 전반에 시차를 두고서 일어나고 있어요.

 

일곱 인이 일곱 나팔로 조금 더 구체화 되어서 나타나고,

일곱 나팔이 일곱 대접으로 더 구체화 되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 재앙 따로 있고, 나팔 재앙 따로 있고, 대접 재앙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모두가 혼재되어 있어요.

 

쉬운 말로 합니다.

창세 이래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재앙은 항상 있어 왔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항상 늘 있었습니다.

이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이 세상은 장차 멸망당할 것으로 창조가 된 곳입니다.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마치 모델 하우스와 같이 실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했습니다.

실상이 다 설명이 되어지면 철거가 되어요.

그래서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가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주만 영존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은 예수그리스도를 주(主)가 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주(主)의 자리에 앉게 되면 더 이상 존속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일을 하십니다.

이 일이 다 끝나면 이 세상을 철거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주와 그리스도가 됩니까?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주가 되게 하셨나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셨지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주가 됩니까?

 

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의 심판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주이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에게는 심판의 주가 되어요.

결국 예수님은 모두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들로 갈라지게 되어요.

이렇게 갈라지는 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을 누가 행사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세요. 

이걸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해 주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내고 심판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찍 죽임을 당하시고 살아난 어린 양이 아버지의 오른 손에 있는 책을 취하셔서 그 인들을 떼면서 이 세상 속에서 하늘 백성과 땅 백성들이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있어요.

이건 마치 우리 인생과 같아요.

우리 인생이 태어남과 죽음이 있잖아요.

 

모든 인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걷게 되어 있어요.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이 길을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럼 묻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우리 몸은 어떻게 될까요?

후패해 지겠지요.

낡을 대로 낡아지겠지요.

즉 몸이 못 쓰게 될 것이지요.

 

이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끝을 향하여 간다는 것은 점점 망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인간들 세게에 적용하면 죄악이 관영해 진다고 합니다.

세상이 점점 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악해지는 것은 곧 세상이 악해지는 것과 같아요.

 

이 시대는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에요.

인간이 짐승이 되었어요.

이걸 종말의 징후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철거 할 준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갖가지 재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하여 가면서 재앙의 강도가 점점 더 세게 나타나고 빈번하게 다발성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네팔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었고,

페루에서는 화산이 폭발하여 온 도시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건 지구가 스스로 멸망의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고 자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싸인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 세상의 모습이에요.

 

한 쪽에서는 전쟁으로 난리이고,

다른 한 쪽에서는 기근으로 난리이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전염병으로 난리를 치는 것과 같아요.

이 모두가 지구라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 시대를 일컬어 말세지말 이라고 합니다.

이는 말세 중에서는 끝에 다다랐다는 말입니다.

지구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삶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지금 이 세상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 되어가고 있어요.

인간들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어요.

인간들이 돈에 노예가 되었어요.

지금은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세상이에요.

물질에 가치가 세상을 뒤덮어서 너나 할 것 없이 물욕을 좇아가고 있어요.

 

절간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현세적(現世的) 가치에 올인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종교를 찾는 인간들이 현세적인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돈입니다.

 

과거에는 어떤 사람을 논 할 때는 그 사람의 직업을 가지고 논하였어요.

어떤 직업으로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로 판단했어요.

돈에 가치보다 직업에 가치를 우선하였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치 않아요.

돈으로 판단해요.

돈의 가치만 있어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여서 어떻게 돈을 벌었든지 따지지 않아요.

오로지 돈만 많으면 성공한 사람으로간주해요.

이는 돈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고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 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백화점에 가 보세요.

당신 직업이 무엇이고 무슨 일을 하느냐는 묻지 않아요.

오직 하나 돈 있습니까? 만 물어요.

돈 많은 사람은 VVIP 대접을 받고 온갖 혜택을 다 누려요.

 

모든 사회 전반에 이 가치관으로 통용이 되어요.

사회 모든 전반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가치관이 통용되고 있어요.

교회도 절간도 동일해요.

이건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겁니다.

결국 인간들 스스로가 우리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재앙이란? 달리 재앙이 아니고 인간성이 말살되는 것이 재앙인 것입니다.

재앙이 누구에게 닥치는가요?

인간들에게 닥쳐요.

이는 인간들이 재앙 받을 짓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는 구원하고 세상은 심판한다는 양면성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천상에서는 구원 받은 무리들의 찬송이 흘러나오고 지상에서는 저주 받을 자들의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고통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온 세상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교회 안에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6장 이후로는 하늘에서 어린 양이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하나씩 떼면서 이 땅에서는 그 책의 내용들이 사건화 되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의 역사는 독자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뜻에 따라서 다스려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 위에서 인을 떼니까 땅 아래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결정 된 것이 아래에서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거에요.

이건 마치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보았던 그림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봅시다.

 

출 17:8-16=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알다시피 에서는 야곱의 형이에요.

 

그런데 에서의 후손이 지금 누구를 공격하고 있습니까?

야곱의 후손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형제간에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인류 역사 전체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인류가 시작이 되면서부터 형제간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서로 싸웁니다.

 

이 싸움이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 형제들,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종말에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전쟁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싸움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에 나타난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광야에서 치른 전쟁은 종말에 나타날 교회의 전쟁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도 보여주신 것이 교회 안에 참 성도와 거짓 무리들과 싸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을 잠시 살펴봅시다.

 

먼저 이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난 후 광야에서 치른 전쟁입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백성들과 모세가 다투고 난 후에 나타난 전쟁입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서 광야를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전쟁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전쟁을 합니까?

신앙의 노선으로 하는 전쟁이에요.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해 봅시다.

 

출애굽기 17장을 봅시다.

 

출 17:1-6=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路程)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잘 보세요.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를 통과 합니다.

이 일을 성경은 “그 노정(路程)대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냥 아무런 노정이 아니고,

“그 노정(路程)”입니다.

“그 노정(路程)대로” 라는 말은 이미 “정해진 코스”란 뜻입니다.

 

그래서 노정 앞에 "그" 라는 정관사를 붙여서 "그 노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노정(路程)이란? 이미 정해졌다는 말입니다.

언제 정해졌습니까?

창세전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 시나리오대로 구속사라는 영화를 찍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노정대로 간다는 말은 감독이 배우들에게 대본대로 갑시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대본이 뭐냐?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

 

그러니까 지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언약대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코스가 사람을 죽이는 코스에요.

원망 할 수밖에 없는 코스에요.

 

어떤 코스에 집어넣었습니까?

물이 없어 갈함을 당하는 건조한 땅이에요.

뱀과 전갈이 있는 곳이에요.

물이 없는 사막으로 인도했다는 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죽이고자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6장의 네 말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나타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을 추수하려고 적그리스도 세력을 일으켜서 진리에 속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추수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증거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진리 전쟁 즉 영적 전쟁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이 치르는 모든 전쟁은 신약에서는 영적 전쟁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의 속한 자간의 싸움을 내포하고 있어요.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에서는 모세에게 속한 자들과, 모세에게 속하지 아니하는 자들 간의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두 패로 나누어서 장차 교회 안에서 일어날 싸움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을 일컬어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차 교회가 겪어야 할 일들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청각 교제로,,

 

그럼 아말렉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봅시다.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모세를 찬양했습니다.

우리 모세 최고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를 따라 신 광야까지 왔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널 때는 모세가 자신들을 좋은 길로 인도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생각과 다른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마실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목이 말라 죽게 생겼습니다.

참다가 참다가 드디어 성질이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모세를 찬양하던 것이 이제는 원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급기야 모세에게 돌을 던지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왜? 자기들을 힘들게 하느냐 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본성입니까?

이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서 따라 나선 것입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은 능력 있는 분이란 걸 보았어요.

그래서 야! 저 신을 따라 가면 팔자 피겠구나 하고서 따라 나온 것입니다.

 

이게 죄인들의 속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몸뚱이 편하고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죄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몸뚱이가 불편한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 내기 위함입니다.

죄를 끄집어 내서 너희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고발키 위함입니다.

내가 저주 받아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때 비로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려 주시려고 원망할 수 밖에 없는 노정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입니다.

이 언약은 400년 전에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언약의 후손들이 이방의 객(客)이 되었다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가나안에 기근이 들게 하고 야곱의 12 아들들이 요셉을 따라 애굽에 내려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곤 애굽에서 400년을 살게 만든 겁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그 400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을 애굽에 왕으로 세워서 요셉의 치세 아래서 호의호식하고 살던 히브리인들을 종살이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12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 간 것도 언약에 의한 것이고,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룬 것도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이제 그 언약에 의하여 출애굽 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케 하시려고 더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너무 힘이 드니까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과 2장을 봅시다.

 

출 1:6-8=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먼저 1장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났다고 하지요.

이 의미를 알자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유언한 내용을 알아야 해요.

창세기 50장을 보면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즉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에 살아서는 안 되고 언약의 땅에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이를 거역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요셉이 총리로 있으면서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에 기득권층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영화를 맘껏 누리고 살았어요.

그 영화에 미련이 남아서 애굽을 못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을 모르는 왕을 세운 겁니다.

애굽은 원래 함 족으로서 바로 왕조가 세워졌어요.

그런데 요셉의 때에는 셈 족이 바로 왕조가 되었습니다.

즉 셈 족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함 족을 몰아내고 셈 족의 왕조를 세운 겁니다.

 

그런데 요셉이 죽고 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의 때가 가까워서 함 족이 셈 족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함 족 왕조를 세운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요셉의 일가인 히브리인들을 좋게 볼 리가 없지요.

그동안 요셉의 후광을 입고 호의호식하면서 살았거든요.

 

힘족 입장에선 히브리인들이 눈에 가시처럽 보였어요.

그런데 요셉을 따르던 정권이 무너지고 함 족이 차지한 겁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정적들을 사정하는 일들을 단행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아서 노역을 시키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졸지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게 출애굽기 2장 내용이에요.

 

여기서 잘 보세요.

인간들이 어떤 존재들인가?

얼마나 이기주의자들인가를 보세요.

이스라엘이 고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지요.

이 말은 평안 할 땐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힘드니까 살려달라고 찾고 있잖아요.

 

여기엔 중요한 신앙의 팁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러해요.

우리도 편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고난이 닥쳐야 하나님을 찾아요.

 

죄가 뭔가요?

하나님을 떠나는 거지요.

독자적으로 사는 거에요.

 

그럼 묻습니다.

인간들이 언제 하나님을 떠나던가요?

하나님을 찾지 않았는가요?

등 따습고 배가 부를 때였지요.

 

아니 이스라엘이 그랬잖아요.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 그 후광을 입고 잘 살 때는 애굽을 떠나라고 해도 안 떠났어요.

애굽에 총리였던 요셉의 프리미엄을 다 누렸어요.

그러다가 요셉을 모르는 왕이 일어나서 고난을 가하니까 그동안 하나님 앞에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들이 자진해서 찾아 와서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얍삽하지요.

이게 인간이에요.

 

하나님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을 왜? 일으켰을까요?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요?

배부름일까요?

아니면 배고픔일까요?

배고픔이지요.

 

이를 고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동의하지 않아요.

우린 여전히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을 복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으로 밀어넣으세요.

그리하여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이에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 품으로 파고들어요.

도망가지 않고 가까이 해요.

평안하면 멀리 갔다가도 힘들면 가까이 찾아 와요.

이게 육에 속한 자들과 달라요.

역설적이에요.

 

육에 속한 자들은 평안하면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고 하다가도 고난이 닥치면 도망가요.

그런데 영에 속한 성도들은 평안 하면 하나님을 몰라라 하다가 힘들고 어려우면 찾아와요.

이게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들이 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평안과 재앙을 가지고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시험하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 안에 환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럼 두 부류로 쫙 갈라져요.

홍해바다 갈라지듯이 갈라져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고 살려달라고 더 기도하고 매 달려요.

그러나 하나님 백성 아닌 자들은 교회를 떠나요.

환란을 당하게 되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나요.

 

암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것은 그 언약을 기억하여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여서도 언약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몸뚱이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관심이 있고!

이스라엘은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몸뚱이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백성들이 신 광야에서 더 이상은 못 가겠다고 하면서 물을 달라고 데모를 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여서 마시게 합니다.

그리곤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니 계신가 시험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시험하는가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는지 안 하는지를 환경을 가지고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자기들에게 잘 해주면 하나님으로 인정해 주고, 잘 안 해주면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자기들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형적인 애굽에 신관이에요.

애굽에 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름만 이스라엘이지 실상은 애굽 사람들입니다.

 

애굽은 떡으로 사는 곳입니다.

떡이 자기들에겐 신입니다.

떡이 신이라는 말은 자기 몸뚱이가 신이란 말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언약의 후손임을 모릅니다.

언약의 후손이라는 말은 언약이 그들을 존재케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후손이 나중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난 이스라엘에게는 자신들이 먼저이고 언약은 나중입니다.

내가 있고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너희가 나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출애굽을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아말렉 전쟁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가지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백성들이 가는 길이 험하고 고통스럽게 한다고 하나님이 맞네 아니네 따지니까 아말렉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산 꼭대기로 올라오게 합니다.

그리고 산 아래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서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이상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가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여호수아가 집니다.

산 꼭대기에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여호수아의 능력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늘에서 결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간 쪽에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나타난 환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지금의 환경이 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가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환경 가지고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를 창세전에 계획했던 그 언약대로 잘 다스리고 게세요.

 

하나님은 언약대로 그 노정 길을 가게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걸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걸 알려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아말렉 전쟁이에요.

 

산 꼭대기는 하늘을 상징합니다.

이는 곧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하늘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란 뜻입니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언약에 의하여 다스려져진다는 뜻입니다.

 

지금 요한계시록 6장이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천상에서 결제가 떨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성도는 환경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의식하고 살아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요.

 

어려우면 어떻게 한다구요?

아까 말했잖아요.

신자는 어려우면 하나님 품을 파고들고,

불신자는 하나님을 떠난다고,,,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數)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다섯째 인을 떼니까 천상의 세계가 보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가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 믿다가 죽임당한 순교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죽임 당한 영혼들 앞에 어떤 수식을 붙이지요.

어떤 수식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가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 말씀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증거”란? “마루튀리아” 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한 경험을 말해요.

지식이 아니고 경험이에요.

경험!

이 경험을 가진 자들을 증인이라고 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된다고 하지요.

증인은 어떤 자라고 했나요?

예수의 고난을 경험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을 몽땅 예수의 고난 속에 집어넣어서 예수의 고난을 경험케 하시고는 이들을 증인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천상에 있는 흰 옷 입은 무리들은 이 땅에서 예수로 살던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뭐라고 하는가요?

빨리 자기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지요.

 

이는 세상을 빨리 끝장 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기다리라고 하는 이유가 압권입니다.

 

11절을 봅시다.

 

11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數)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왜? 기다리라고 합니까?

세상 속에 있는 너희 형제들이 너희처럼 죽임을 당하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수(數)가 차야 된다고 합니다.

 

무슨 이런 고약한 경우가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우리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잖아요.

이건 이 시대 교인들에게 날 벼락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 한마디에 이 시대 교회는 전부 마귀의 소굴임이 드러납니다.

목사들의 가르침이 전부 뱀의 말임이 드러납니다.

이 시대 교회와 목사들은 예수 믿고 고난 없이 잘 살라고 하잖아요.

이 땅에서 부귀영화로 천국을 누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합니까?

죽을 자리로 밀어 넣는다고 합니다.

편안한 물침대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가시 방석을 주시겠다고 하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남겨진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신다고 합니까?

죽이기로 작정을 하셨다고 합니다.

죽을 자리로 넘겨준다고 하잖아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 하셔야해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허상으로 흐르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랑이에요.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 올 때는 아픔으로 다가와요.

이것은 하나님의 안목이 없으면 실족해요.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성도들을 죽음에 넘겨주는 것이 사랑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저주로 보여요.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왜? 성도의 죽음이 복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왜?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걸 알라고 주신 책이에요.

 

지금부터 왜? 죽음에 넘겨주는 것이 복인지 살펴봅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기 위하여 구원을 하셨어요.

어려운 말이니 잘 이해하세요.

 

아니 죽이려면 애당초 죽음에 놓아두지,

왜? 죽음에 있던 자를 살려 놓고서 또 죽음에 넘기 웁니까?

우린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습니까? 라고

얼마든지 항변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이 그래요.

죽은 자를 살려 놓고 다시 죽음에 넘겨주어요.

 

고린도후서 4장을 봅시다.

 

고후 4:7-11=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뭘 담아 놓았다고 하지요.

뭘 담아 놓았다고 합니까?

보배를 담아 놓았다고 합니다.

 

보배가 뭔가요?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담고 있어요.

 

마귀는 이 보배를 알아요.

그래서 빼앗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 빼앗기려고 해요.

 

쉽게 말해서 우린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해요.

그리고 무병장수하면서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예수를 이용해서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예수를 준 것은 예수처럼 빨리 죽어서 천국에 오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예수를 가지고 안 죽고 이 땅에서 코 박고 오래 오래 살려고 한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육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본능적으로 예수를 이용해서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의 본성이에요.

이 아담의 본성이 죽지 않는 한 우린 예수를 계속하여서 이용을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 안에서 난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는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죽음이 주는 의미에요.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를 앞두고 있습니다.

죽음에 넘기우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근심에 찬 얼굴들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정의해 주십니다.

얘들아!

내 말 잘 들어라

 

난 원래 하늘에 있었단다.

하늘에 있을 땐 하늘에 몸을 입고 살았단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희들을 구원하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하늘에 몸을 벗기고 땅에 몸을 입혀주셨단다.

 

이걸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형체를 입고 사셨어요.

그런데 이 세상으로 오시면서 이 세상에 맞는 몸을 입고 오셨어요.

그 몸이 종의 형체인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종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계시는 한 예수님도 종의 형체를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종의 형체를 입고 계시는 한 종으로 살아야 해요.

이 종의 형체를 벗는 길을 종으로 사는 목숨을 버리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이 세상의 육신이라는 목숨을 버리는 것은 하늘에 있는 목숨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에 죽으심은 종의 형체를 벗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살아갈 하나님의 형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내가 죽는 것은 다른 목숨을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얻을 목숨은 무엇이고,

버릴 목숨은 무엇인가요?

얻을 목숨은 하늘에 목숨이고,

버릴 목숨은 땅에 목숨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목숨을 바꿔치기 당하는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축복이지요.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떤 식으로 간섭을 하실까요?

예수님처럼 간섭을 하시겠지요.

 

그럼 묻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저주입니까?

복입니까?

복이지요.

 

이는 아담 안에서 난 자가 죽고 예수 안에서 난 자로 살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죽음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되어요.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바로 사망을 이긴 부활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다시 봅시다.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가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지요.

성도들 안에는 예수가 있어요.

이 예수는 우리 몸이 깨어질 때 나타나요.

 

우리 몸은 마치 호두와 같아요.

겉은 단단한 각질로 되어 있지만 그 속은 맛있는 알맹이가 있어요.

속에 있는 알맹이를 먹으려면 반드시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단단한 각질을 깨트려야 해요.

그 알맹이가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예수라는 알맹이를 빼내려고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 안에서 산 자들이에요.

이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을 예수님과 같이 취급을 하세요.

예수님처럼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늘에서 살아갈 목숨이 있어요.

우리 안에 그 목숨이 있어요.

성령이 보증으로 와 계신 이유에요.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우리가 죽으면 부활을 시켜주세요.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 죽음은 새로운 하늘에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인 것입니다.

죽음이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늘에 장막을 덧입는 수순(手順)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죽음에 넘겨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법을 한번 봅시다.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을 예수 안으로 옮겨 주시지요.

이게 일차(一次) 구원이에요.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옮겨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법 아래 있던 자를 은혜 안으로 옮겨주셨어요.

 

은혜 안으로 옮겨진 자들은 모두가 예수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의 생명 가진 자들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세요.

어떤 일인가 하면 세상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세상에 보내서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을 색출해 내세요.

무슨 말인고 하니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성도들을 가지고 고발하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게 하세요.

그러니까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은 세상 속에서 죽여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세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건 예수님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예수님이 죄인들 세계에 오셨습니다.

 

근데 죄인들이 자기들이 죄인인 줄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가지고 이 세상이 죄 아래 있고 인간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는 미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죽임으로서 이 세상은 하나님과의 원수임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가지고 세상의 악을 고발하였듯이 성도들을 가지고서도 악을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이 세상을 사는 자들이에요.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의 것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성도를 공격하면 예수가 공격당하는 것으로 간주해요.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 하나님이 핍박을 당하는 것으로 간주해요.

그러니까 교회와 성도는 이 세상의 악을 고발하기 위한 미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잘 보세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예수 때문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예수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온 세상을 지칭하는게 맞아요.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 주어진 것이 아니고 교회에 주어졌어요.

그러므로 예수를 미워하는 교회가 있는 겁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 초림 때는 유대교였어요.

율법주의자들이었어요.

 

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합니까?

이는 자기들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걸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이 유대교 율법주의 아래 있던 자들을 빼내 온 것입니다.

유대교 입장에서는 자기 것이 빼앗긴 것이 되어요.

그러니 뿔따구가 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편이 아니면 모두가 적이에요.

이게 세상의 구조에요.

그래서 인간들은 눈만 뜨면 편 가르기를 합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어린 아이한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선택을 강요하게 만들어요.

아이는 누구를 택하여야 해요.

엄마가 좋다고 하면 아빠가 삐지고,

아빠가 좋다고 하면 엄마가 삐져요.

 

그러니까 아이는 집에서부터 세상 사는 처세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지 계산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이 세상의 구조에요.

 

지금 유대교와 예수교가 그래요.

서로 앙숙인 겁니다.

이 세상은 법 아래 놓였어요.

즉 율법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과 전혀 다른 성질인 은혜를 몰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율법에서 빼내서 은혜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보면 자기들 세력이 줄어드니까 예수 믿는 자들을 가만 둘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핍박하는 것입니다.

 

핍박은 누가 하는가 하면 형제가 해요.

이삭을 이스마엘이 핍박을 했고,

요셉을 그 형제들이 핍박을 했어요.

 

다윗을 사울이 핍박했어요.

북쪽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를 핍박했어요.

표면적 이스라엘이 이면적 이스라엘을 핍박해요.

 

이 시대도 마찬가지에요.

새 언약을 전하면 옛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발끈해요.

그리곤 자기들하고 다르다고 하면서 이단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새 언약 안에 있다고 이단이라 하지 않아요.

세상은 새 언약이 뭔지 옛 언약이 뭔지 관심이 없어요.

이건 교회들만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이 땅에 인간들이 세운 교회는 모두가 육이에요.

옛 언약에 속하였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바로 옛 언약에 속한 육이에요.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영이세요.

그러자 육이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하고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냥 다르면 괜찮은데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난단 말입니다.

그럼 자기를 틀린 것으로 드러내는 옳음을 없애야 해요.

옳음이 있는 한은 계속하여서 자기가 그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이걸 못 참아요.

그래서 옳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틀린 것을 고치기보다는 옳은 것을 없애려고 해요.

우리가 그렇잖아요.

자기 잘못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남 잘못으로 돌리고자 하잖아요.

 

이번에 어느 기업인 한 분이 자살을 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이 분이 왜? 자살을 했습니까?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자살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자살을 하면서 왜? 정권 잡은 자들을 물고 들어갑니까?

자기 편 안 들어주기 때문이에요.

왜? 돈 받아 쳐 먹고 모른 척 하느냐 입니다.

 

왜? 돈 갖다 주었습니까?

자기가 잘못한 일이 드러나면 봐 달라고 주었어요.

잘못 할 일이 없으면 돈 줄 필요가 없어요.

돈을 준다는 것은 잘못을 하겠다는 뜻이에요.

 

모두가 자기가 저지른 일이에요.

일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선 자기 뜻 안 들어 주니까.

너희들 나쁜 놈들이야 라고 하면서 죽은 것입니다.

 

난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내 돈 쳐 먹은 놈들이 나쁘지

그러고 죽은 겁니다.

 

누가 나쁜가요?

둘 다 나빠요.

뇌물을 준 사람이나 그걸 받아먹은 사람이나 도낀 개낀 이에요.

그런데 주고선 난 아니야 하고 저 놈들이 나빠하고선 죽은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예전에 전직 대통령이 자살 했지요.

그 분이 왜? 자살 했나요?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일순간에 무너지니까 죽은 겁니다.

그건 자기가 용납이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난 억울하다는 표현으로 자살을 한 것입니다.

그가 자살한다고 해서 있는 사실이 없어지는가요?

아니에요.

그 사실은 없어지지 않아요.

그냥 덮어 둔 것 뿐이에요.

 

자살은 절대로 정의로운 것이 아니에요.

자기를 방어하는 최후의 수단이에요.

죽음으로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건 악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못 참아요.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긍정하고 싶어 해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살을 자기 긍정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난 잘못이 없다고 죽음으로 항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진실해진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그건 인간들이 인간들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만든 이야기에요.

 

인간들은 죽음 앞에서도 진실하지 않아요.

죄를 회개하지 않아요.

이는 죄가 인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어느 개인을 폄훼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이 이런 자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의 죽음을 가지고 진실이 어떻고 저떻고 운운하지 말란 말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진실스러운 자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진실스럽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살을 악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자살 했나요?

자기 생각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안 죽여도 되는 사람을 죽였다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괴로워서 자살을 하였습니다.

 

자살로서 자기의 잘못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난 자살로 내 죄값을 치루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인의 교만이에요.

 

하나님은 죄인이 죄값을 치르는 것을 원치 않아요.

죄인의 죄값은 죄 없는 분이 치루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해 보세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빤히 보는데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행동이 더 악질이에요.

둘 다 예수님 앞에서는 죄 짓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가룟 유다는 자기 잘못을 자기가 담당하겠다고 하면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쪽팔리면서 살았어요.

난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놈이야 라고 하면서 수욕을 감내 하면서 살았어요.

베드로는 자기의 잘못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았어요.

예수님 처분에 맡겼어요.

 

여러분 자기 자존심 지키기 위하여 자살하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자기 자존심 다 뭉개지고 수욕을 참고 사는 것은 자살보다 더 힘든 형벌이에요.

베드로는 예수 앞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에요.

아픈 일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아픔을 믿음으로 이겨냈어요.

 

쉬운 말로 창피한 일이 있어서 교회 옮기는 것은 쉬워요.

아무도 모르는데서 안 그런척 하기는 쉬워요.

그러나 쪽 팔리는 일이 있음에도 교회를 옮기지 않고 꾸역 꾸역 나오는 것은 엄청만 믿음이에요.

이건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지금 베드로가 창피함을 무릎쓰고 사는 겁니다.

베드로는 그래 난 이렇게 못난 놈이다.

내가 뭘 내세울 것이 있겠느냐.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용서하심 때문이다 를 삶으로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안 믿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를 믿었어요.

누가 믿음으로 살았나요?

베드로에요.

이게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에요.

신자는 예수님에게 자기 죄를 맡기지만 불신자는 자기가 자기 죄 값을 치루고자 해요.

 

믿음이 뭔 줄 아세요.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겁니다.

마치 탕자가 재산 다 털어 먹고 뻔뻔스럽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거에요.

자기 정당성을 다 버리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곳에 긍휼을 부어 주십니다.

용서가 주어집니다.

잘못한 것을 알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자기 안에 의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죄 값을 해결하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상반된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로 나왔고 세리와 창기들은 주의 긍휼을 구하고 나왔어요.

 

세리와 창기들은 감히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있어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어요.

이는 자기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걸 겸손이라고 해요.

긍휼을 구하는 이러한 모습이 바로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고개를 바짝 쳐들고 기도했어요.

이걸 목이 곧다고 합니다.

성경은 목이 곧다고 하는 것은 자기 의로 가득 차 있다는 뜻으로 이야기해요.

지금 바리새인들이 뱀처럼 모가지를 바짝 쳐들고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라도 의지 할 만한 것이 있으면 그걸 힘을 삼아요.

그 힘을 의지하고 교만을 떨어요.

이게 예수님 초림 때에는 바리새인들에게 나타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의 외식과 위선을 확 까발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어요.

독사 새끼라고 했어요.

그러자 종교인들과 정치가 합세 하여서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예수를 살려 두었다간 자기들 정체가 드러나니까 얼른 죽인 겁니다.

 

그들은 예수만 죽이면 되는 줄 알았어요.

예수만 사라져 주면 자기들의 정체가 영원히 감추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수많은 예수를 끄집어낸 것입니다.

예수가 죽어서 자기 새끼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들이 성도들이에요.

 

하나님은 예수가 낳은 예수의 후손들을 가지고 세상의 악을 고발하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예수쟁이들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놔두면 자기들의 악함이 고발당하거든요.

그래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 이들을 죽입니까?

이방인들인가요?

아니에요.

 

예수를 유대인들이 죽였듯이,

성도들도 자칭 형제라고 하는 자들이 죽여요.

즉 육적 신자들이 영적 성도들을 죽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순교자들의 열전인 아벨로부터 사가랴 까지 모두가 예루살렘 성에서 죽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죽임당하기로 작정이 된 남아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종말의 거짓 교회로부터 순교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죽임을 당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이 땅에서 예수로부터 사랑을 입게 되면 육에 속한 자들로부터 미움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아픔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구약 야곱의 집안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자식들과는 다르게 대우합니다.

 

그게 채색 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요셉에게 꿈을 줍니다.

꿈이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꿈대로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요셉이 받은 꿈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만유의 주가 되는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은 요셉의 버림을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꿈이 요셉의 인생을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급기야 버려지는 운명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의 버려짐이 주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형제들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였는데 애굽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자기백성들로부터 버려진 것을 아버지께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지금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요셉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머리에 면류관이 써졌다는 것은 왕 같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럼 이 땅에 죽임당하기로 작정이 된 성도들도 장차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수순으로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이 걸어 가셨던 그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처럼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서 그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영문 밖이 바로 천상으로 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 나아가자 거기에 하늘로 가는 문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문을 광야에 두셨습니다.

그 광야가 바로 십자가 너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너머로 갈 자들을 대기시키고 있습니다.

각 자 번호표를 주고서 기다리게 하십니다.

이제 그 순번대로 십자가 너머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름하여 죽임당함입니다.

 

그 죽음의 문을 너머로 들어간 자들이 새 노래를 부릅니다.

아래의 가사를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음률에 맞추어서 불러보세요.

그럼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될 겁니다.

 

할렐루야 ~ 할렐루야 ~

할렐루야 ~ 할렐루야 ~

할렐루야 ~ 할렐루야 ~ 할렐루야! 아멘

 

아멘 찬송 존귀 영광

부와 지혜 능력

힘이 우리 어린양께 세세토록 아멘

 

아멘 찬송 존귀 영광

부와 지혜 능력

크신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아멘

 

이 노래는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고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부를 수가 있어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만이 부를 수가 있어요.

예수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성도들만 부를 수가 있습니다.

 

어린 양만이 아멘이시고,

어린 양만이 찬송이시고,

어린 양만이 존귀하시고,

어린 양만이 영광 받으실 분입니다.

 

어린 양만이 부요이시고,

어린 양만이 지혜이시고,

어린 양만이 능력이시고,

어린 양만이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에게만 세세토록 찬송을 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 노래를 부를 그 수(數)가 다 차갑니다.

하나님께서 앞서간 믿음에 선진들에게 말합니다.

이 땅에 남겨진 너희 동무들도 너희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數)가 차기까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 수(數) 속에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그 세계를 바라보시고 이 세상의 아픔들을 이겨 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새 노래로 어린 양을 찬양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열어서 천상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사도 요한이 보았던 그 천상이 믿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앞에 놓은 죽음이라는 그 강을 두려워하지 말게 마시고 그 강 너머에 우리의 영원한 도성(都城)이 있음을 알게 하셔서 그 강 건넘을 소망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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