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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20강. 고난 속에서 주어지는 구원

by IMmiji 2015. 4. 16.

20강. 고난 가운데서 주어지는 구원 (계 6:1-17)

 

계 6:1-17=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 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7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數)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 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오늘은 노래 한 곡 듣고 시작을 합시다.

이것은 나는 가수다 왕중 왕 전에서 우승한 곡입니다.

 

The one이 부른 “그 사람” 입니다.

 

http://www.imbc.com/broad/tv/ent/sundaynight/common_page/clip/index.html?list_id=5523811

 

꼭 듣고 이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소를 복사해서 들어보세요.

그리하여 그 감동으로 오늘 설교를 보셔야 합니다.

 

노래마다 다 사연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설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아픔을 주시고 그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전에도 하셨고, 이제도 하고 계시며, 장차도 하실 것입니다.

 

저는 음악 프로그램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잘 챙겨보고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 속에서 참 많은 복음적인 영감들을 얻습니다.

특히 가사를 통해서,,, 

가사를 잘 보시면 인간들의 바램들이 잘 드러나거든요.

특히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한(恨)이 많으면 자신들의 아픔과 한(恨)을 소리로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서편제를 보면 아버지가 딸에게 한국의 소리를 물려주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딸에게 한국의 소리는 한(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아버지는 딸에게 한(恨)을 심어주기 위하여 한약으로 딸에 눈을  멀게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죽습니다.

홀로 남은 딸이 소경으로 살면서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한(恨)이 켜켜히 쌓이게 됩니다.

그리곤 그 속에 쌓인 한(恨) 들을 소리로 토해내게 됩니다.

마지막 부분에 어려서 집떠난 동생과 조우하면서 동생이 신분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어렸을 때 함께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어 주던 그 가락을 누나인 송화는 알고 그동안 자기 안에 쌓인 한(恨)을 밤새도록 소리로 풀어냅니다.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도 복음으로 인한 한(恨)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잘 전하지는 못하지만 올 바르게는 전하자고 하면서 여기까지 달려 오면서 좌고우면치 않고 쌓인 한(恨)이 내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에게 복음으로 인한 한(恨)들을 쌓이게 하세요.

그게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저는 율법 아래서 특심한 종노릇을 하다가 복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처음 복음을 깨닫고 엄청 울었어요.

많은 날들을 방성 대곡하고 울었습니다.

지금도 복음 전하다가 울컥 울컥 잘 울어요.

 

그래서 마음으로 다짐 한 것이 내 목회를 복음 증거하는 수단으로 쓰자고 하였습니다.

목회를 위하여 복음을 도구로 쓰지 말고 내가 복음에 도구로 쓰임을 받아야지 하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렵고 힘들 때마다 그 영화를 자주 보면서 힐링을 받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해 오면서 당한 아픔들을 서편제의 소리꾼 송화와 같이 감정 이입을 시켜서 마음이 애잔해 져야 합니다.

촉촉해져야 해요.

세상 산다고 강퍅한 마음들이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긍휼이 나와야 합니다.

 

이 시대 신앙의 비극은 아픔이 없고 눈물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사라지면 강퍅만 남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치고 눈물의 골자기를 통행하지 아니한 사람이 있는가?

없어요.

단 한사람도,,,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은 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걸 상한 심령이라 하고 애통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원통함의 눈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눈물이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되고 그것이 애통함으로 상한 심령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지나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들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고난을 지나게 하면서 눈물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은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자들에게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아픔 속으로 밀어 넣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게 하십니다.

 

천국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너머에 천국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기독교는 세상에 떡을 주는 그런 값싼 종교가 아닙니다.

이 땅에 출세와 부귀영화를 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늘에 영광과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미를 주는 것입니다.

비록 나 가진 것 없지만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에 압도 당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 감사는 아이러니 하게도 고난을 지나 온 후에 나타나게 됩니다.

 

왜? 고난을 통과 하게 하셨을까요?

이는 고난을 통해서 천국이 얼마나 귀한 곳인지를 알게 하시고자 하심입니다.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은 음식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지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천국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율법 아래서 지독한 종 노릇을 해 보지 않고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자유함과 그 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고난 없는 십자가는 허상입니다.

그건 지식이고 관념입니다.

 

설교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에요.

고상한 단어를 나열하여 유식한 척 지식 자랑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설교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간증으로 토해내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고난 가운데 던져서 하나님의 마음을 토설케 하셨어요.

쉬운 말로 북 속에 담긴 소리를 끄집어 내려고 북을 막 두들겨 패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두들겨패서 토해내게 하신 말씀들이에요.

 

그러므로 설교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이 잡힌 자들의 설교 속에는 말이 어눌하고 언어가 정제되지 않아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과 기쁨들이 설교 속에서 묻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희노애락을 공유하여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과, 기쁨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사람” 가사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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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날 웃게 한 사람 그 사람 날 울게 한 사람

그 사람 따뜻한 입술로 내게 내 심장을 찾아준 사람

그 사랑 잊을 수 없는데 그 사랑 잊을 수 없는데

그 사람 내 숨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떠나가네요

그 사람아 사람아 아픈 가슴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사랑했고 또 사랑해서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아 내 사랑아

 

내 가슴 너덜거린대도 그 추억 날을 세워 찔러도

그 사람 흘릴 눈물이 나를 더욱 더 아프게 하네요

그 사람아 사람아 아픈 가슴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눈물 대신 슬픔 대신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줘

그 사람 날 웃게 한 사람 날 울게 한 사람

사랑해

그 사람아 그 사랑아 나의 목숨 같은 그 사랑아

사랑했고 또 사랑해서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아 나의 사람아

내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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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심장이고 숨이고 전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프지만 그를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가슴이 찢어지지만 보내고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 달면서 아들아 그 고난을 지나와야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된단다 라고 하면서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을 고난 가운데 던져 놓고서 그 고난이 바로 너를 참 아들로 받는 징계이고 그 징계가 바로 내게 주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아픈거에요.

그것도 엄청!

하지만 그 사랑이 우리를 존재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아버지 품으로 더욱 파고 들게 하는 사랑이에요.

고난을 지나보면 알게 되어요.

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구나를,,,

 

작년에 중국에 목회자들 세미나를 인도하러 갔다가 두리안이라는 과일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이 과일은 얼마나 냄새가 지독한지 호텔이나 공공장소에서 먹지 못한다고 해요.

그런데 그 과일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면 꼭 고슴도치 같이 생겼어요.

겉에 가시가 뿔처럼 났어요.

그런데 그 속에 들어 있는 과육은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아요.

 

전 그렇게 맛난 과일을 처음 먹어 보았어요.

제가 하도 맛나게 먹으니 우리를 가이드 하시는 목사님이 이걸 이렇게 맛있게 먹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 한 보따리를 사 가지고 와서 호텔 밖에서 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 올 때 두리안처럼 겉으로는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다가와요.

고난으로 다가와요.

그런데 그 고난 속에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이건 맛본 사람만이 알아요.

두리안처럼,,,

 

저는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서 문뜩 이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무슨 연관이 있느냐구요?

연관이 있지요.

 

오늘 본문은 어린 양의 인을 떼자 이 땅에 갖가지 재앙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재앙 속에 자기 백성들이 있습니다.

아프다고 웁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라고 울부짖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천상에 이미 구원 받은 영혼들이 그 아픔을 알고 하나님께 연좌시위를 하겠습니까?

하나님 언제까지 저 원수들을 그대로 둘 것입니까.

빨리 심판을 해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자 하나님의 대답이 압권입니다.

 

아니다!

저 아래 내 백성들이 있다!

그들도 너희들처럼 죽임을 당하고 이리로 와야 된다고 하십니다.

 

왜? 그런 줄 아느냐?

그 길이 내 아들이 걸어온 길이기 때문이다!

내 아들도 저 코스를 걸어 왔고 너희들도 걸어 왔다!

이곳은 저 코스를 지나지 않으면 올 수가 없는 곳이란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자!

저들도 곧 이리로 올 것이다!

저 아래 내 백성들이 재앙 속에서 이겨 내도록 응원하자꾸나!

저 고난을 지나와서 이 자리에서 너희들처럼 마음껏 찬양하게 하자!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목적이 있어서 만드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 아들을 “만유의 주(主)”가 되는 일을 하시고자 하심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주(主)”로서 일을 하시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에게는 “심판의 주(主)”로서 일을 하십니다. 

이 말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는 자와 저주 받는 자로 구분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그렇게 작정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요.

그리고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고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두 부류의 인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와 녹명 되지 않은 자,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와 작정 되지 않은 자 이렇게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을 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를 창세전에 이미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작정이 된 자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땅에 보냄을 입은 자들은 자기가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모릅니다.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면 홍해바다가 갈라지듯이 둘로 쫙 갈라집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와 영접하지 않는 자로 갈라집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와 고백하지 않는 자로 갈라집니다.

 

이렇게 될 때 예수님은 만유의 주(主)가 되는 것입니다.

주(主)라는 말 속에는 심판하는 기능이 담겨져 있어요.

자기 백성들은 책임져 주는 것이 담겨져 있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유기하는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에서와 야곱을 보면 알게 됩니다.

한 아버지 아래서 태어난 형제이지만 에서는 미움 받는 그릇으로, 야곱은 긍휼을 입는 그릇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면 꼭 이렇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럼 에서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에 맞지도 않을 뿐 더러 하나님의 횡포가 아닙니까? 라고 따지는 분들이 있어요.

 

요렇게 따지는 분들이 바로 에서의 계열이에요.

따진다는 것은 자기 주체로부터 출발을 하니까 나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건 너무 합니다 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우린 원래 없던 자들이에요.

없던 자를 만드셨어요.

왜? 만드셨나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려고 만들었단 말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밥그릇과 개밥그릇을 만든 것과 같아요.

토기장이가 필요해서 만든 거에요.

 

토기는 왜?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따질 수 없단 말입니다.

따지면 토기장이가 뭐 이런 놈이 있어! 하고 박살을 내 버려요.

넌 뭔데 라고 하면서,,,,

 

만물은 하나님에게 따지지 않아요.

창조 하신 대로 군말 하지 않고 순종하고 있어요.

그런데 유독 인간들만 따진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인간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에요.

죄가 뭔 줄 아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왜? 라고 토를 다는 겁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왜? 라고 토를 달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만든 것은 피조물을 위해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창조주를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백화점에 가서 TV를 사왔다고 합시다.

TV를 사온 것은 나를 위해서에요.

TV를 위해서가 아니고,,

그런데 TV가 내가 보고자 하는 채널을 트는데 말을 안 듣는 겁니다.

 

그럼 여러분은 그 TV를 어찌합니까?

그 놈이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고장 났다고 하겠지요.

그럼 갖다 버리든가 수리하겠지요.

 

이 비유에서와 같이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날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따지면 그 놈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놈이 이거 죄 지었네! 라고 하여 심판 하겠지요.

맞아요.

심판 받아요.

 

우린 모두가 고장난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의원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고침을 받은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고쳐진 자들은 창조주가 하는 데로 찍소리 하지 않고 알아서 하세요 라고 해요.

 

그런데 꼭 고장이 난 놈들이 이건 아니잖아요.

너무합니다! 라고 지랄을 떠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이렇게 지랄을 떠는 놈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너 왜? 하나님이 하는 일에 토를 다는데,,

이 놈 이거 미친 거 아니야!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 세상은 저주 가운데 있음을 말해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갖가지 재앙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재앙 속에서 신자와 불신 자 간에 극명한 대조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신자들은 주여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데,

불신자들은 대가리를 쳐들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를 박박 갈아요.

마치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전도연’이가 장로님을 꼬셔 간음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이를 박박 갈면서 봐! 보란 말이야! 라고 게거품을 무는 것과 같이 발악을 해요.

 

요한계시록 13장을 봅시다.

 

계 13:1-8=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 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지요.

이건 그 출처가 바다란 말입니다.

성경은 바다를 세상으로 혹은 지옥으로 상징해요.

 

그래서 바다에서 올라온 자를 짐승이라고 하는 겁니다.

짐승은 땅에 속한 자에요.

땅은 지옥을 말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옥에 소속이 된 자를 이 땅에 보낸 것입니다.

그 놈이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방해하는 일을 해요.

그래서 적그리스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놈이 무슨 일을 하는가요?

입을 벌려서 하나님을 훼방하는 말을 하지요.

하늘에 장막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지요.

그리고 성도들과 싸워서 이기지요.

이는 성도들을 핍박한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합니까?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러는 거에요.

밀양에 전도연이가 장로와 간통하면서 왜?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에게 보라고 하면서 발악을 합니까?

왜?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당신이 용서 하느냐 에요.

용서를 해도 내가 해야지 왜? 당신이 하느냐 에요.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세요.

이 시대 기독교의 허구성을 고발하고 있어요.

이 시대 대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전도연이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부흥회를 하면 뭣합니까?

모여서 구역예배 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면 뭣합니까?

전부 자기 소원들어 달라고 하는데,,,

그러다가 전도연이처럼 자기 맘에 안 들면 나 예수 안 믿을래 하고 교회를 안 오잖아요.

 

입술로는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해요.

성경 구절은 잘 외워요.

그런데 그건 주문이지 실제가 아니에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것에도 토를 달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래야 모든 것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좋은 일이 닥치면 주여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멋쟁이십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안하던 감사헌금도 해요.

 

그런데 나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이거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러십니까?

그리고는 교회 안 오잖아요.

나 예수 안 믿을래 라고 하잖아요.

이게 짐승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다 그런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불평하는 그 놈(자기 백성) 앞에서 예수님을 그 놈(성도) 대신에 죽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보는 면전에서 갈갈이 찢겨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을 들고 그 모습을 보라고 합니다.

 

그리곤 예수님이 자기 피를 가지고 와서 내가 너 때문에 죽었는데,

그래도 불평 할래,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하세요.

 

그럼 성도들은 그 피 앞에 주둥이를 닫게 되어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피 앞에 주둥이를 안 닫는 인간은 성도가 아니에요.

 

이걸 알고 사도 바울은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당하는 핍박을 당연한 것이라고 하였어요.

성도는 다 이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바울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는 다 하게 되어 있어요.

 

바울이 우리보다 잘나서 한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바울 속에서 그런 고백을 하게 하셨어요.

그러니 우리도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속에 계신 성령이 지금 저와 여러분 속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와 계신 성도는 전도연이처럼 자기 뜻대로 인생이 안 살아진다고 하여서 하늘을 향하여 악다구니를 쓰지 않는단 말입니다.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러지 않는단 말이에요.

다 주의 뜻이라 여기고 순순히 받아 들여요.

아! 하나님께서 나를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려고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구나 라고 여기게 되어요.

 

이런 사람이 성령을 받은 성도에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에요.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동일한 재앙을 당하는데 하나님을 향하여 악다구니를 쓰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믿음으로 이겨내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두 부류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는 자들은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믿음으로 이겨낸 자들에게는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마다 이기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기는 자들이 바로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을 창세기 1장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깊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깊음을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이에요.

 

구원이 뭐냐?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흑암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럼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상관이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이 무엇인가요?

이 땅에서는 재앙들이 일어나는데 그 속에서 구원받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재앙은 신자나 불신자에게나 다 일어나요.

다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신자들은 그 재앙 속에서 구원을 받지만, 불신자들은 멸망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에게는 재앙이 심판으로 나타나지만, 성도들에게는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하여서 감사로 나타나게 하는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지옥 속에서 건져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환란 속에서 이기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엄청난 박해를 당하고 있는 교회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사도 요한을 하늘로 올라오게 하셔서 역사 속에 놓여 있는 교회의 실상과 그 종말을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여도 하나님께서 정한 시나리오는 교회는 구원을 받고 세상은 멸망하게 되어 있다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봅시다.

 

살후 1:5-9=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잘 보세요.

환난 당하는 자가 있고,

환난을 행하게 하는 자들이 있지요.

즉 핍박 하는 자와 핍박당하는 자가 있지요.

 

그런데 뭐라고 하나요?

환난당하는 너희는 장차 안식으로 갚아 주시고,

너희를 환난케 하는 자들에게는 형벌을 주신다고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나라에서 합당한 자로 여겨기 위하여 환난 속에 둔다고 하잖아요.

그러므로 환난이 성도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가 당하는 환난을 복이라고 하지 저주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을 봅시다.

 

렘 29장 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지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고서는 하시는 말씀이에요.

속된 말로 병주고 약주는 것입니다.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재앙을 당하고 있잖아요.

고난 속에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게 평안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재앙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을 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서 신앙이 회복이 되어서 돌아 와요.

이건 대 반전이에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가 언제 신앙이 가장 좋은지 아세요.

고난당할 때에요.

그리고 가장 신앙이 나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배부르고 평안 할 때에요.

인간은 등 따습고 배부름을 이기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등 따습고 배부르는 환경을 주지 않고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는 사랑 법이에요.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비밀을 알 수가 없어요.

이 비밀은 오직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들만이 알아요.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밧모 섬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하는 요한을 천상으로 올라오게 하셔서 성도가 당하는 환난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퍼뜩 이 소식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다가 알려 준 것입니다.

너희가 그 어떤 환난에 처한다 할지라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겨내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모두가 구원을 위한 수순(手順)이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수순(手順)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 기사에서 보여 주셨어요.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하지요.

그런데 2절에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의 깊음 위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건 죄 아래 있는 모습을 말해요.

요한계시록 식으로 말하면 환난 속에 있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1장 3절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속에서 빛을 불러냅니다.

그러자 빛과 어둠이 분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둠을 밤이라 칭합니다.

 

성경은 빛의 세계를 천국이라고 하고, 어둠의 세계를 지옥이라고 해요.

그럼 지옥 속에서 천국 백성을 건져낸 것이 되겠지요.

맞아요.

이게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환난 속에 있는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과 같은 것입니다.

영적 의미는 동일해요.

 

다시 말해서 창세기의 흑암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이나, 요한계시록에서 환난 속에서 성도를 구원하는 것은 영적의미로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세상에 큰 환난이 일어나고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 구원을 받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생명은 죽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죄 아래 있다가 구원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은 성도가 구원을 받을 때 우리 힘으로 구원을 쟁취해 내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희생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왜? 구원을 이러한 구조로 두셨는지 아세요.

이는 구원이 예수그리스도가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그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꺼내 와서 자기 백성 삼고자 하심이에요.

 

이렇게 될 때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는 예수님이 전쟁에서 이기고 얻은 전리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전리품이 실일조에요.

이걸 구약 마당에서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해 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서 자기가 전쟁에서 이기고 포로로 잡혀 있던 자들인 전리품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럼 구원 받은 자들은 모두가 어린 양의 공로 안으로 귀속이 되어지게 되겠지요.

그래요.

예수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구원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주여! 라고 고백을 하게 되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시나리오를 세우셨습니다.

그 시나리오대로 자기 백성들이 지옥에 던져져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 아래서 태어나게 하신 거에요.

이 죄와 사망이 곧 지옥인 겁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구원자 모세를 통해서 구원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걸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에 있다가 새 언약으로 옮겨짐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는 율법 아래서 있다가 은혜 아래로 부르심을 입는 것이고, 행위에서 믿음으로 나아온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 포로 된 것이나 율법 아래 종노릇한 것이니 영적인 의미에서는 동일해요.

애굽도 죽음이고 율법도 죽음입니다.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태어난 것이나,

성도가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나 동일한 의미에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1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아버지께서 유업을 이을 아들을 정한 때까지 청지기 아래 두셨다고 하지요.

아들이 청지기 아래서 어떻게 지냈나요?

종으로 지냈지요.

 

종이란? 율법이고 죽음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진노 아래 가두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는 일을 합니다.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심판 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을 봅니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하는 일이 뭡니까?

우리 죄를 깨닫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입을 막고 심판 아래 가두는 일을 하지요.

이걸 갈라디아서에서는 아들을 청기지 아래 잠시 종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그 청지기가 누구인가 하면 율법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래 아들이에요.

종이 아들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들이 잠시 종처럼 버려짐을 당하였다가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에요.

 

이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보세요.

 

갈 4:6절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아들에 영을 보내 주셨다고 하지요.

종에게 아들에 영을 보내준 것이 아니에요.

원래 아들이에요.

그런데 종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원래의 자리로 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야곱과 에서로 보세요.

야곱은 어미 뱃속에서 장자가 될 것이라고 예정되고 태어났어요.

그런데 차자로 태어났어요.

 

에서는 차자가 될 놈이 장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엄마 뱃속에서 작정된 그 위치로 돌아가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야곱이 장자권 축복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삭의 장자는 원래 야곱이에요.

엄마 뱃속에서 그렇게 작정이 되었다니까요.

그런데 죄 아래서 태어나다가 보니까 차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구원이 뭐냐?

청지기 아래 있다가 아들의 자리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다가 의 아래로 옮겨진 것입니다.

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진 것이에요.

자기 행위로 살던 동네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행위를 믿음으로 사는 동네로 옮겨진 것입니다.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어떻게 옮겨진 것입니다.

 

누가 옮겨주었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옮겨준다고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 아래 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율법 아래 나셨는가 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십니까?

이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십자가에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도 사망 안에 가두어짐이 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사망 안에 있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긴 자가 됩니다.

이걸 창세기에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뱀을 상징하는 사단을 이긴 것입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단의 권세인 사망을 뚫고 부활로 나온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기신 자로서 사단에게 청구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으니까 사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청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러주었으니까 이젠 죄가 없이 된 것이잖아요.

그래서 마귀가 무덤 속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토해낸 것입니다.

이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있다가 토해냄을 당한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그럽니다.

야! 사단아!

내 백성들을 내어 놓아라!

내가 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었으니 그들은 죄가 없느니라!

그러자 사단이 무덤 속에 붙잡아 두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토해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러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을 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립니다.

이것은 사망 권세가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사망에 가두어져 있던 성도들이 살아납니다.

그리곤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사망 권세가 깨어지고 성도들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성도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었기 때문에 사망이 더 이상 성도들을 붙잡아 둘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가 남의 차를 박살내서 감옥에 가두어져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우리가 망가뜨린 차 값을 대신 물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더 이상 우리를 가두어 둘 수가 없으니까 방면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대신 지불해 준 차 값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키기 위하여 먼저 죄 아래 가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방법을 동원하시는가 하면 우리의 구원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두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가두어지게 됩니다.

그럼 구원을 받은 자들은 자연히 그 은혜를 찬미하게 됩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7=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창세전이라는 말은 만물이 창조되기 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근거로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만물 속에서 이 언약을 이루어가십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어떤가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무리를 택하지요.

왜? 택하셨는가 하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자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게 되나요?

그 아들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지요.

이렇게 그 아들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습니다.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자신들이 살아난 것은 그 아들 때문임을 알고 하나님 나라에서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4장 5장의 모습이에요.

 

죄가 지배하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죄가 지배하는 이 세상은 지옥이에요.

우리가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다가 구원자로부터 빼내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홍해바다에서 올라온 것은 무덤에서 나오는 것과 동일해요.

 

출애굽기 15장을 봅시다.

 

출 15:10-13=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이것은 홍해 바다를 건너고 난 후 미라암이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무엇이라 노래합니까?

땅이 그들을 삼켰다가 토해낸다고 하지요.

 

홍해바다에서 올라 온 것을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묘사하여서 말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들이 성결한 처소에 들어갔다고 하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 무덤에서 나온 자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간 것과 같은 의미에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신약의 성도의 구원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구약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건너 온 것을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고전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바울은 구약의 사건을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재 해석을 해 주고 있어요.

홍해 바다 사건을 세례라고 하잖아요.

 

세례란? 옛 사람의 죽음을 의미해요.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누구와 죽었다고 합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었다고 하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였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누구랑 홍해를 건넜습니까?

 

모세와 함께 하였지요.

바울은 이걸 “모세에게 속하여” 홍해바다를 건넜다고 합니다.

여기서 “속하였다”는 말은 모세가 안고 건넜다는 말이에요.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해요.

 

죽음의 강을 어떻게 건너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건너요.

그러니까 성도는 죽는다고 하여도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났으니까 그 안에 있는 자들도 자연히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성도가 비록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다고 하여도 이긴 자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면 이긴 자들이 나오지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긴 자들이에요.

구원이 뭐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에요.

그리스도가 이기신 분이므로 우리도 그 분 안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사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도 우리가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믿어지게 만들어서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으니까

예수가 믿어지는 거에요.

예수가 믿어지니까 예수 안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참 쉽지요.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지요.

맞아요 없어요.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하나도 없어요.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그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도 성령이 하세요.

 

그래서 바울이 나의 난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예수님이 바울 속에서 하신 거에요.

 

그러니 바울을 본 받자고 하면 안 되어요.

성경은 누구를 본 받으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들을 그들 되게 하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모세가 안고 건넜어요.

비록 자기들 발로 건너 왔지만 진정으로 홍해 바다를 건너 온 의미를 아는 자들은 우리가 건너 왔다고 말하지 않아요.

모세가 건너게 해 주었다고 하지요.

다른 말로 하나님이 건너 주셨다고 해요.

 

이걸 아니까 홍해를 건너오고 난 후 즉시로 소고치고 하나님께 찬송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건 모세가 시키지 않았어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했어요.

이 모습이 바로 요한계시록 4-5장의 천국의 24 장로들이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모세와 함께 홍해바다에서 올라 온 것은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나온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현장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홍해 사건은 곧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자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무덤 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 그들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성도들의 구원은 반드시 죽음을 바탕으로 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나와 홍해바다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갔듯이 신약의 성도들도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교회로 부르심을 입고 극심한 환난을 통과하고 천국에 가게 되는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이 코스는 성도라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코스에요.

필수 코스에요.

선택 과목이 아니고 필수 과목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구원 받은 영혼들이 하나님에게 빨리 세상을 심판하고 자기 원수들을 갚아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이 세상에 너희들처럼 죽임을 당하고 구원을 받아야 할 동무들이 있다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다 죽음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하늘에 있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죽음에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봅니다.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죽는 것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함이라고 말씀 하시는 겁니다.

쉬운 말로 땅에 목숨을 내어주고 하늘에 목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땅에 목숨은 하늘에 목숨을 얻게 하는 씨와 같은 것입니다.

땅에 목숨이 죽어서 하늘에 목숨을 싹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목숨을 심고 하늘에 목숨으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하늘에 목숨을 얻기 위하여 땅에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도 말했어요.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35-44=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을 말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면서 사람이 죽으면 끝이지,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야~! 이 사람아!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그 씨 속에 있는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함이 아니더냐!

씨가 죽어서 새로운 생명을 낳지 않느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이 이 땅에 몸을 심고 하늘에 몸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농부가 씨를 땅에 뿌려서 죽게 하는 것은 저주가 아니고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아버지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은 하늘에 목숨을 얻기 위하여 땅에 목숨을 버리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가 이 세상에서 환난에 넘겨지는 것은 저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이 아버지의 손에 있는 책을 취하여서 인을 떼니까 이 땅에 환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에게는 이 환난이 곧 하늘에 몸을 입기 위하여 땅에 몸을 죽음에 넘기주는 수순과 것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사망이 두려울까요?

반가울까요?

당연히 반갑지요.

 

여러분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천년만년 살고 싶으세요.

만약에 세상에서 오래 살고 싶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가 추상이에요.

천국도 관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과 짝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믿음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이 세상을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천국을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성도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그렇게 반응을 하게 되어 있어요.

성도의 본능이에요.

 

이건 억지로 각오하여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자연적이에요.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성도는 세상에서 환난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요.

복음 전하면 핍박 받는다는 것을 알아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는 지옥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예수로 인하여 지옥을 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십자가 너머에 있어요.

죽음 너머에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천상의 영혼들이 빨리 세상을 심판해 달라고 하니까 잠시 기다려라 너희 동무들도 너희들처럼 죽음에 과정을 지나고 나면 그 때 심판을 단행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지옥 같은 환난을 통과하고 데려 오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코스가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코스에요.

 

성도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코스를 걸어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다가 알려주는 것입니다.

얘들아!

너희가 예수 믿다가 환난을 당하거든 놀라지 말아라!

그것은 모두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수순(手順)이라는 것이란 걸 알아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약속하지 않았어요.

예수 믿으면 환난을 당한다고 했어요.

이걸 히브리서 11장을 통해서 알려주셨어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이는 믿음이 이들을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누구는 어떻게 되었고, 믿음으로 누구는 어떤 일을 당하였다는 식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어(主語)에요.

그러니까 모두가 믿음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끌고 다닌 것입니다.

믿음이 모두를 이 땅에서 버려지는 삶을 살게 만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버려지는 삶이야말로 환난이고 지옥인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 본문의 개요를 잠간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말들에 대하여는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어린 양이 인을 뗍니다.

그러자 이 땅에 갖가지 재앙들이 일어납니다.

쉬운 말로 감독이 큐 싸인을 준 것입니다.

그러자 만물이 배우들이 되어서 대본에 나와 있는 대로 대사와 몸짓으로 연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아요.

 

어린 양의 책을 떼니까 재앙들이 일어나지요.

이는 재앙들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째서 창세전에 이 땅에 재앙이 일어날 것을 예정해 놓았는가요?

왜? 자기 백성들이 재앙을 당하도록 하셨는가요?

 

이는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구원이 되려면 버려짐이 선재되어야 합니다.

구원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 할 필요가 없어요.

구원을 하려면 구원 바깥에 있어야 해요.

 

그 구원 바깥이 죄 아래에요.

율법 아래에요.

옛 언약 안이에요.

아담 안이에요.

 

그럼 구원 된 자는 자기가 있던 곳으로부터 빠져나옴을 입겠지요.

이 빠져나옴이 곧 죽음인 것입니다.

그 쪽 세계에서 보면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죽음에서 건짐 받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천국과 지옥으로 이해해 보세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무얼 준비해 놓았습니까?

천국이지요.

 

그럼 자기 백성들이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천국에 있는 자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구원이 될 수가 없잖아요.

천국으로의 구원이 되려면 지옥에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지옥에 두신 것입니다.

이 지옥이 구약에서는 애굽으로 나타났고,

언약적으로는 옛 언약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자 흙으로 돌아가라고 저주 하십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죽으라고 하신 말씀이 인간들에게 역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죽음이 쫓아오자 죽지 않으려고 달음질하는 것으로 나타나더란 말입니다.

이게 죄의 성향이에요.

 

이 죄의 성향이 우상 숭배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우상숭배란? 내가 살고자 신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건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신을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우상숭배를 하게 되어 있어요.

 

죄를 범한 인간들에게는 자기 몸뚱이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요.

내가 있고 신도 있어요.

죄인들에게 있어 신은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시다바리에요.

 

이건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육신은 밥을 먹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소욕은 신앙과 상관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우상숭배 하는 식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신앙과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었어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죽이는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난 자를 죽이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환난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이 환난을 성경에서는 믿음에 시련이라고 합니다.

이건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과 같아요.

이게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가 고난 가운데서 구원 받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같은 시련이 닥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어린 양이 인을 떼자 이 땅에 재앙이 일어나지요.

이는 이 세상의 본질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떤 곳이냐 하면 재앙 덩어리에요.

멸망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불러 올려서 이 세상은 재앙 덩어리이니까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고 살라고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다가 알려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럼 사도 요한으로부터 편지를 제대로 받아서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떤 자세로 살겠습니까?‘

 

천년만년 살 것이라고 땅에 코 박고 살까요?

아니면 떠날 준비하고 살까요?

당연히 떠날 준비하고 살지요.

이걸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잠간 후면 예수님이 오세요.

지금 오시고 계세요.

만물이 말을 하고 있어요.

세상이 말을 해 주고 있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세요.

 

이게 어디 인간들이 사는 세상입니까?

짐승들 세상이지,,,

인간들 스스로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고 있어요.

 

지금은 짐승이 사람보다 대우를 더 받고 있어요.

지금은 짐승들의 천국이에요.

이건 영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커요.

의미적으로 말이에요.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 참 사람이 만들어지기 전에 짐승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창조를 보면 짐승이 만들어지고 난 후 사람이 만들어져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지요.

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진짜 사람이 오는데 그가 누군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이 땅에 서 입었던 피 묻은 옷을 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 양처럼 죽임을 당하신 그 분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임 당한 그 어린 양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참 사람이 오시면 안식일이 주어져요.

그 안식일이 언제인가 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에요.

천국에서 영원토록 사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의 창조는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지옥에서 천국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환난 속에서 구원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환난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녁이 온다는 것은 곧 아침이 온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지금 우리 환경이 밤처럼 어둡더라도 곧 아침이 오니까 낙심하지 말고 이겨 내세요.

예수님이 오시면 지옥이 사라지고 천국이 주어져요.

그 날이 일곱째 날인 안식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창조를 하실 때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저녁이 되매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고 하고,,, 둘째 날이라고 하고,,,,,

저녁이 되매 아침이 되는 수순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은 저녁이 되매 아침이 되는 것이 없지요.

이는 일곱째 날은 이 역사 바깥의 날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녁과 아침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날을 오늘 날이라고 해요.

항상 있는 날,,

이를 영원한 날이라고 하고 영생의 세계라고 해요.

천국이 영원한 나라에요.

영생의 세계에요.

 

이 세계가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시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사라진 그 하늘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감추어진 그 에덴을 예수님이 몰고 오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날이 곧 가까웠어요.

그러니 조금 힘들더라도 이겨 내세요.

세상 가치를 버리면 이길 수 있어요.

그리하여 이긴 자들이 들어가는 그 천국에서 어린 양을 찬미하면서 사십시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창조를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순서로 하셨듯이 우리의 구원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심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알게 하여 주어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긴 자로서 이 세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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