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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17강. 일곱 영과 네 생물

by IMmiji 2015. 3. 12.

17강. 일곱 영과 네 생물 (계 4:5-11)

 

계 4:5-11절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짝입니다.

어떤 짝인가 하면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어나는 성도의 구원이나 적그리스도 세력들을 심판하는 것을 구약에서 이미 예표적으로 보여 주셨어요.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신약의 교회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을 사는 우리들은 구약 이스라엘의 그림을 통해서 신약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건은 신약을 이해하는 길라잡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은 이미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네 생물도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신 그림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능통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 요한이 말하는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을 들으면서 아 그거 하면서 척하고 알아들었습니다.

우리도 쉽게 이해 할 수가 있어요.

 

알다시피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네 생물도 예수그리스도와 연관해서 해석하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네 생물을 보았어요. 

우리는 에스겔이 설명한 것을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해석하면 되어요.

그럼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구약의 에스겔에게 신약에 일어날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을 보여 주셨을까요?

이는 에스겔이 처한 상황이 지금 사도 요한이 처한 상황과 똑 같기 때문입니다. 

영적 상황은 시대를 초월해서 동일합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핍박을 당하였어요.

 

에스겔은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간 에스겔에게 천상의 모습을 보여 주셨어요.

이는 포로로 잡혀 갔어도 하나님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밧모섬에 포로가 되어서 유배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밧모 섬에 유배당한 사도 요한에게 천상의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이는 에스겔이나 사도요한이나 그 처지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에스겔을 읽고 있고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도 곧 에스겔 시대나 사도 요한 시대나 영적 상황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모두가 고난을 당하고 있어요.

적그리스도 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어요.

 

어느 시대고 교회는 마귀로부터 공격을 당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교회들은 항상 이 땅에서 죽음에 넘겨지는 동일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주제가 뭔가요?

한 마디로 말하면 죽은 백성들을 성령이 살려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을 시작하면서 바벨론에 포로 잡힌 이야기를 하고 중간에는 성신이 성전을 짓는 긋으로 말하고 마지막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업을 얻고 살아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포로 잡힌 이스라엘을 해골로 표현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위에 생기가 불어서 죽은 해골들을 살려냅니다.

죽었다 살아난 자들과 새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곤 성신이 성전을 짓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생기로 살아난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고 성신이 지은 성전에서 여호와가 거하는 “여호와 삼마”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란?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뜻이에요.

 

이건 천국을 말해요.

그래서 에스겔에서도 요한계시록의 맨 마지막인 22장의 생명수 강 이야기가 에스겔 47장에서 성전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줄기 하나가 온 세상을 다니면서 치료하고 죽었던 자들을 살려내는 생명수 강 이야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하늘 예루살렘 성의 열두 문 이야기가 에스겔 마지막 장에서도 12 지파들이 성읍의 문들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본 그 천국을 구약의 믿음에 선진들은 에스겔을 통해서 보았어요.

 

구약의 성도들은 에스겔을 통해서 장차 도래할 천국을 보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장차 오실 예수님을 모형(模型) 하는 인물로 세워둔 것입니다.

이를 인자(人子)라고 해요.

인자(人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이는 묵시에 속한 인물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자를 말해요.

 

에스겔은 인자로서 포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이루는 여호와의 사자(使者)로 일을 하였어요.

여호와의 사자(使者)를 다른 말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나타나요.

 

예수님이 인자(人子)에요.

예수님을 인자(人子)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던 일을 하시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선취(先取)적으로 살았어요.

반면에 신약의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삶을 완성으로 풀어내셨어요.

 

에스겔은 구약의 요한계시록이에요.

물론 묵시 문학 기법으로 기록이 된 여타 선지서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선지서에서 나온 묵시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요한계시록을 귀담아 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 요한이 말하는 천상의 이야기들을 쉽게 이해하였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약 성경에 능통한 유대교로부터 나온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나와서 은혜 안에서 율법을 재해석하는 것과 같아요.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율법의 진의를 몰랐는데 은혜 아래로 빼내심을 입고 나서는 율법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진의를 분명하게 아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도 사도 요한이 말하는 네 생물의 이야기들이 구약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다 알아먹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에스겔을 통하여 말씀하신 네 생물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조명해 보면 우리도 다 알아 먹을 수가 있어요.

성령이 알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는 성경이 절대로 어렵지가 않아요.

이는 성령이 그 안에서 깨닫는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곱 등불이 되어서 계시해 주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이거 모르면 어쩌지 라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지금 모르면 나중에라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미제로 남겨 두세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알게 해 주실 것이니까요.

 

성경은 머리 싸매고 쥐어짠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은 성령이 깨닫게 해 주세요.

자기백성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세요.

 

한 가지 알 것은 사람마다 깨닫는 것도 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요.

이건 마치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자라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동일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가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듯이 신앙도 자람의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람이란? 성장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깨달음의 개념이에요.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알아간다는 앎에 의미에서의 자람을 말합니다.

앎이란? 많은 부대낌을 통해서 체득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믿음의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게 하십니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점진적으로 더 깊이 더 많이 알아가게 하세요.

 

모른다고 한다면 지금은 때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일 뿐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면 세상의 이치(理致)를 자연히 알아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요한계시록도 깨달아질 때가 있어요.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덮어 두세요.

요한계시록 모른다고 지옥가지 않아요.

 

만약에 반드시 요한계시록을 알아야지만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요한계시록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 뭐가 아까워서 훈장님 꿀단지같이 접근 금지케 하겠어요.

다 알게 해 주세요.

그러니 조급해하지도 말고 염려도 하지 마세요.

 

제가 그 증인이에요.

저는 잘난 놈이 아니에요.

똑똑치도 않아요.

제가 늘 하나님께 푸념하는 것이 그래요.

좀 잘나게 해서 사용하시든가 하지 이렇게 모자라게 해서 사용하느냐고 궁시렁 거려요.

 

어디 말을 잘합니까?

목소리가 좋습니까?

좋은 학교를 나왔습니까?

세상 말로 스펙이 없어요.

하나도 내 세울 것이 없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성경을 알아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그냥 성경이 보여지고 깨달아져요.

성경을 묵상 하다가 보면 아! 이게 이런 뜻이구나! 라고 깨달음을 주세요.

깨달음을 주시니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길가다가도 깨닫게 해주시고,

목욕하다가도 깨닫게 해주시고,

밥 먹다가도 깨닫게 해주시고,

잠을 자다가도 깨닫게 해주세요.

무시로 순간 순간 깨닫게 해주세요.

하나님 맘대로에요.

 

사도 요한이 언제 천국 보여 달라고 했나요.

안 했어요.

어떤 분들은 사도 요한이 기도 많이 해서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성경 어디에도 사도 요한이 기도 많이 해서 요한계시록을 받았다고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이 임한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어서 본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요한에게 어떤 조건을 찾지 마세요.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아요.

그냥 하나님 맘대로 해요.

은혜 줄 자에게는 은혜주고 강퍅케 할 자는 강퍅케 하세요.

하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하나님 맘대로 에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세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시고 성경이 깨달아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걸 믿으세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라고 한다면 반드시 다 깨달아지니까 염려 붙들어 매시고 지금 받은 그 은혜 속에서 감사하며 사세요.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고시 공부 하듯 하지 마세요.

 

어린 아이가 어른의 인생을 알고자 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 다울 때가 가장 아름다워요.

그러니 신앙의 조급함은 버리시고 현재 속에서 주어진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고 사세요.

그것이 가장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그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해요.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인생이 가벼워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우리 뜻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감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하늘로 올라오게 하여서 장차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하늘에 의하여 조정당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조차도 말이에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차 될 일에 대하여 보고 듣고 한 것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성도들의 운명과 또한 이 세상을 어떻게 운행을 하실 지에 대하여 알려 주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하늘에 보좌가 베풀어진 것에 대하여 상고해 보았습니다.

 

보좌가 베풀어졌다는 것은 회의를 한다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걸 구약의 예레미야와 열왕기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의 천상에서는 무슨 회의를 하였나요?

악한 자는 징벌하고 자기 백성들을 지켜내는 일을 회의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에요.

천상에 하나님이 24장로들과 보좌를 베풀고 있다는 것은 적그리스도 세력은 멸하고 성도는 지켜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천상에서 논의된 것들이 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적그리스도 세력을 멸망하고 성도는 반드시 구원을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구원과 심판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수종 드는 종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네 생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좀 어려운데 잘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네 생물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수종 드는 일을 하지요.

계시록 6장으로 가면 인봉된 책들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네 생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네 생물은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드는 종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에서는 천사로 나타나고 있고, 지상에서는 자기 종으로 나타나요.

천상의 세계를 일컬어 영의 나라라고 하고, 이 세상을 육의 나라라고 합니다.

 

영의 나라에서는 영적 존재가 수종을 들고, 육의 나라에서는 육적 존재가 수종을 들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할 때 아시아의 일곱 교회 사자(使者)들에게 편지를 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자(使者)를 일컬어 “엥겔로이”라고 하는데 언어적 의미로는 천사를 말해요.

그런데 이 천사가 지상의 교회에서는 주의 종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종이라 함은 어느 특정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각 교회 안에서 말씀을 수종드는 자들을 말해요.

 

1차적으로는 말씀 전하는 목사를 말하지만 크게는 모든 성도들을 말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을 동등하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네 생물은 단수이면서 복수이기도 해요.

 

이건 에스겔 1장의 네 생물을 풀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오늘본문을 보면 네 생물들이 하나님의 보좌 주위를 진치고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모양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고,

이들에게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에스겔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것들은 이미 구약에 언급이 된 것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에는 구약의 배경을 모르면 해석 할 수가 없어요.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이 실상입니다.

그림자와 실상이라는 말은 구약의 사건들을 가지고 신약에서는 영적인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약은 외국 영화의 그림과 같고 신약은 그림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자막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외국영화를 보려면 그림만 가지고는 온전하게 이해 할 수가 없어요.

반드시 그 그림을 설명하는 자막이 있어야 해요.

우리는 자막을 통해서 그림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은 이미 구약에서 말씀 하셨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22장의 생명수 강 이야기가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의 실상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 47장에서도 말해주고 있어요.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은 요한계시록 22장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성경의 순서를 보면 창세기가 먼저이고 요한계시록이 나중입니다.

그럼 창세기의 에덴동산이 먼저이고 요한계시록의 천국이 나중이 됩니다.

성경적 순서로 보면 그래요.

 

그럼에도 제가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요한계시록의 천국을 근거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이 창세전 언약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 천국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천국이 창세기의 에덴동산보다 앞선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연대기 순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성경 속에서는 그림자인 에덴동산이 먼저 나오고 실상인 천국은 나중에 나타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이런 구조로 말하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세전 언약이 완성 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하신 그 언약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이 세상의 역사를 내려다보면 이 역사는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이끌려가고 있음이 되어요.

이걸 묵시가 역사를 앞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가 묵시라는 창세전 언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이 어디서 나왔나요?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어요.

창세전 언약 속에는 요한계시록 22장의 천국이 있어요.

그 천국을 역사 속에 모형(模型) 적으로 그려 놓은 것이 창세기의 에덴동산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에덴동산이 먼저이고 천국이 나중으로 나타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창세전 언약 속에 담긴 구원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되찾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그림자로 나타나고 신약에서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식으로 일을 하실까요?

이는 구원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구약은 실패하고 망하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되찾아지고 완성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아담이 잃어버렸던 실낙원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되찾아주는 복낙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 아담이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을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되찾아 주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되찾음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하는 것은 자기 백성들 속에 예수의 공로를 담아서 구원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뭐라고 했나요?

자기 백성은 구원하고 적그리스도 세력을 멸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이걸 역사 속에서 누군가가 집행을 하여야 하잖아요.

누가 집행을 하는가 하면 네 생물들입니다.

 

네 생물에 대한 해석들이 다양해요.

 

어떤 분들은 천사들이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어떤 분들은 사 복음서이다.

어떤 분들은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다 라고 합니다.

 

모두 성경적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단수적으로 이것이다 라는 것에는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네 생물 속에는 위에서 말한 것들이 다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 아마도 아 그렇구나 라고 고개가 끄덕여질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요한계시록은 상징 언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딱 부러지게 이것이다! 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상징으로 말하는 것은 복수적인 의미를 두고 있어요.

그러므로 상징으로 말하는 네 생물 속에도 다양함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어요.

말씀을 듣는 청자들 입장에서는 다양한 해석들을 들으면서 어느 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 중심 사상과 가깝느냐 로 판단하여야 해요.

 

특히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것에는 겸손함이 필요해요.

다 아는 척 해서는 안 되어요.

그래서 제가 말씀을 전하시는 분들에게 당부 드리는 것은 어떤 말씀을 전할지라도 자기의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하지 말고 “저는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네 생물의 이야기도 제 해석이 절대적일 수 없어요.

다만 저는 이렇게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다른 분이 깨닫고 그것이 더 성경적이라 하면 언제든지 제 해석을 철회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은혜를 받고 있으므로 제가 은혜 받은 방식으로 풀어 나갈 것입니다.

제 해석에 동의가 되는 분들은 수용하고 안 되는 분들은 버리시면 됩니다.

 

성경을 해석 하실 때 창세전 언약으로 해석하여야 해요.

창세전 언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에요.

 

새 언약은 옛 언약을 통해서 드러나고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드러나요.

이를 그림자와 실상이라고 합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이에요.

그러므로 신약에 나타나는 이야기들은 구약에 이미 언급이 된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네 생물도 구약을 배경하고 있어요.

 

그럼 에스겔이 보았던 네 생물을 통하여서 요한계시록의 네 생물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에스겔 1장입니다.

 

겔 1:1-28절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2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3 갈대아 땅 그발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4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 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 그 속에서 네 생물(生物)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6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같이 빛나며 8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生物)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9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12 신(靈)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生物)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3 또 생물(生物)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生物)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14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 같이 빠르더라 15 내가 그 생물(生物)을 본즉 그 생물(生物) 곁 땅위에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16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 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7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18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19 생물(生物)이 행할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행하고 생물(生物)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도 들려서 20 어디든지 신(靈)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靈)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生物)의 신(靈)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21 저들이 행하면 이들도 행하고 저들이 그치면 이들도 그치고 저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生物)의 신(靈)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22 그 생물(生物)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23 그 궁창 밑에 생물(生物)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生物)은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고 저 생물(生物)도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으며 24 생물(生物)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生物)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25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生物)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에스겔에게 하늘로 올라오게 합니다.

지금 에스겔은 갈대아 땅인 그발 강가에 서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이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밧모섬에 유배당하고 있는 사도 요한을 하늘로 올라오게 한 것과 같아요.

왜? 에스겔이나 사도 요한을 하늘로 올라오게 하여서 하늘나라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보여주셨을까요?

 

이는 에스겔 시대나 사도 요한 시대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핍박이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도 모세 언약에 의한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면서 언약을 어기면 그 땅에 쫓겨나서 이방의 객이 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집행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를 모르고 예레미야를 이단으로 취급하였어요.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에스겔도 그들 중에 있었어요.

 

하나님이 포로 잡힌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전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지은 성전에 그들을 두신다는 이야기에요.

그 성전은 성신이 지어요.

이는 지상의 성전이 아니고 천상의 성전이에요.

 

에스겔이 성신이 지은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12 지파가 분깃을 받고 산다는 것을 결론으로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하늘을 열고 장차 되어질 일들을 보여주신 것은 포로로 잡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에스겔이 보았던 그 환상을 보았어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그 환상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는 에스겔 시대나 사도 요한 시대나 그 영적 상황은 동일하다는 의미에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백성들은 에스겔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어요.

그럼 사도 요한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신약의 성도들도 위로를 받아야 해요.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주신 말씀이니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단련시키시다”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다” 라는 뜻이에요.

 

에스겔은 지금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에스겔의 이름이 뜻하는 것과 같이 강한 힘으로 붙잡고 단련시키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단련시킨다” 라는 말은 목적한 바를 이루어 내신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목적한 바는 자기 백성 구원하는 것이에요.

이는 반드시 해방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포로 잡혀 있는 성도들에게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비록 고난 가운데 처하여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긴 자로 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겔은 하나님의 힘에 의하여 이끌림 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에스겔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늘을 열고 이상을 보게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세요.

 

겔 1:1절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기서 삼십년이라는 말은 어느 기점에서 삼십년인지를 확실치 않아요.

다만 하나님이 에스겔을 인자(人子)로 대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참 인자(人子) 되신 예수님께서 삼십세에 공생애를 시작을 하실 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난 후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과 같은 의미로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구약에 제사장들이 직무를 수행할 때 나이가 삼십세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하늘을 열어서 보여 주신 것은 하나님이 에스겔로 하여금 하늘나라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이 30세에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 되셔서 직무를 수행하신 것과도 같아요.

 

에스겔이 30년에 그발 강가에 서 있지요.

 

“그발” 이라는 말은 “경계”라는 뜻이에요.

경계란? “두 사이”란 뜻입니다.

즉 옛 것과 새 것의 경계를 말하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말합니다.

 

이건 예수님이 요단강에 서 계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는 사생애는 그치고 공생애로 접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면 요단강이 사생애와 공생애의 경계지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자 하늘이 열리지요.

이는 곧 예수님이 서 계신 곳이 하늘과 땅의 경계가 된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은 마치 야곱의 사닥다리와 같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경계이세요.

 

그러니까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린 것은 신약에서는 예수님에 의하여 하늘이 열린 것을 모형하고 있는 그림이에요.

사도 요한도 이 경계에서 하늘을 보았어요.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죽음의 길목에 서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도 요한의 밧모섬은 에스겔 식으로 말하면 그발 강가가 되고,

예수님 식으로 말하면 요단강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요.

 

하늘이 언제 열리느냐?

죽음의 길목에서 열려요.

하나님은 왜? 죽음의 길목에서 하늘을 열어 주실까요?

이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보게 하고서 죽음을 이기게 하심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은혜에요.

 

그럼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그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십시다.

 

겔 1:4-5절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 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북방에서 폭풍과 큰 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빛이 나오고 불이 번쩍 번쩍거립니다..

에스겔이 번쩍 거리는 불을 가만히 보니까 그 속에서 “단 쇠” 같은 것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단 쇠가 무엇인가 가만히 보니까 그 속에서 네 생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단 쇠가 네 생물을 낳은 것과 같아요.

그런데 단 쇠에서 나온 네 생물의 모양이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이에요.

 

먼저 북방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북방”이라는 말은 “짜” 라고 하는데 이는 “은밀한 곳, 감추어 둔 곳”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들에게는 “감추어진 세계”라는 뜻입니다.

인간들에게 감추어진 세계가 어디인가요?

하나님 나라에요.

 

그러니까 북방은 묵시 세계를 말해요.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이 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보여 주셔야지만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의 눈을 열어서 하늘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의 눈을 열어서 보여 준 곳이 북방이에요.

이름 하여 하나님 나라인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북방에 계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14장을 봅시다.

 

사 14:12-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본문은 바벨론 왕을 계명성이라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베벨론 왕은 곧 사단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영적으로 이해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사단을 계명성으로 은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고 하지요.

왜? 하나님이 사단을 땅으로 쫓아냈는가요?

이는 하나님의 보좌를 탐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하나님과 비기고자 하였어요.

이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남과 같습니다.

뱀이 선악과로 미혹 할 때 뭐라고 하였나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였지요.

이게 교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쫓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보좌가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북극 집회의 산”이라고 하지요.

고대로부터 인간들은 신이 북방에 있다고 믿었어요.

그러니까 북극 집회의 산이란? 신들이 거처하는 산이라는 뜻이에요.

성경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하여서 시온산으로 끝이 나요.

 

시편 48편을 봅시다.

 

시 48:1-2=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이 북방에 있다고 하지요.

그 산을 일컬어 시온산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구원 받은 성도들을 상징하는 144.000명이 시온산에 서 있어요.

시온산을 다른 말로 예루살렘이라고 해요.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나요?

하늘에 있어요.

그러니까 북방에 있는 시온산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에스겔서에서 말하는 북방에서 오는 사람의 형상을 가진 네 생물은 낳은 단 쇠 같은 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오는 어떤 한 사람을 말하고 있음이 됩니다.

단 쇠 같은 것에서 네 생물이 나온다는 것은 네 생물이 단 쇠 속에 복속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단 쇠”라는 말은 “하쉬말” 이라고 하는데 “혼합된 금속”을 뜻합니다.

이는 두 가지 재료가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단 쇠를 원문에서는 청동으로 말하고 있어요.

청동은 구리와 주석이 합해서 만들어진 쇠붙이에요.

 

이것은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요.

예수님이 불꽃같고 빛난 주석으로 나타나셨어요.

이건 네 생물의 모습과도 같아요.

 

단 쇠를 의인화(擬人化) 하면 단 쇠와 같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걸 구속사 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 속에 심판하는 것과 구원하는 기능이 담겨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단 쇠는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단 쇠에게서 네 생물이 나옵니다.

여기서 “생물”이라는 말은 “하이”라고 하는데 이는 “힘이 센 어떤 인격”을 말해요.

그런데 네 생물이 사람의 형상을 가졌어요.

이것은 단 쇠와 같은 분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네 생물처럼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인가요?

단 쇠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의 일입니다.

단 쇠가 예수님을 지칭한다고 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나요?

구원과 심판하는 일을 하십니다.

 

다시 살펴봅시다.

 

겔 1:4-5절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 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북방에서 어떤 분이 오시는데 폭풍과 구름을 몰고 옵니다.

폭풍과 구름을 몰고 오시는 분의 모습이 단 쇠와 같아요.

단 쇠란? 두 가지 재질로 된 단단한 쇠라는 뜻입니다.

 

“단 쇠”가 무엇인지 26-28절에서 해석해 주었어요.

 

26-28절을 봅시다.

 

겔 1:26-28=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27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보좌에 한 형상이 있다고 하지요.

그 모양이 남보석 같다고 하지요.

이건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단 쇠 같은 그의 모습이 사람의 모양과 같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을 가진 그의 모습이 허리 윗 모습이 단 쇠와 같고 허리 아래는 불같다고 합니다.

 

정리해 봅시다.

북방에서 단 쇠 같은 분이 오십니다.

에스겔이 단 쇠 같은 분을 정의하기를 그는 하나님이면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있다고 했어요.

그럼 단 쇠 같은 분은 하나님이면서 사람인 것입니다.

 

북방은 하나님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면서 사람의 형상을 가지신 분이 이 세상에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오셨어요.

그 분이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두 가지 속성이란?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신이면서 인간이란 말입니다.

 

사역론 적인 의미에서는 구원과 심판입니다.

이 두 가지 존재로 두 가지 상반 된 일를 하신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속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구원과 심판이라는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단 쇠의 모습을 보여 주셨어요.

그래서 그가 폭풍과 구름을 몰고 오는 것입니다.

 

“폭풍”이라는 말은 “싸아르” 라고 하는데, 이것은 강한 태풍으로서 “심판의 바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구름”이라는 말은 “아난”이라고 하는데, 이는 피조 된 생명들에게 “생명을 주는 비를 몰고 다니는 구름”을 말해요.

여기서 비를 몰고 다니는 구름은 “은혜”를 의미해요.

그러니까 단 쇠 같은 한 사람이 오는데 그가 폭풍과 구름을 가지고 심판과 구원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직역하면 이러해요.

북방에서 단 쇠 같은 분이 폭풍과 구름을 몰고 옵니다.

그런데 그 단 쇠와 같은 분 속에서 네 생물의 각기 다른 형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단 쇠 같은 분 속에서 나온 네 생물들도 사람의 형상을 가졌어요.

이는 단 쇠와 같은 분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네 생물과 같은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네 생물의 모습이 각각 다르지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은 하는 일의 성격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네 생물의 모습을 봅시다.

 

겔 1:10절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계 4:7절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앞 모습은 사람의 얼굴이고,

우편 모습은 사자의 얼굴이고,

좌편 모습은 소의 열굴이고,

뒷 모습은 독수리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 쇠 같은 분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네 생물과 같은 사람으로서의 일을 하고, 사자로서의 일을 하고, 소로서의 일을 하고, 독수리로서의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네 생물과 같이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의 일을 하셨어요.

 

이것이 “4 복음서”로 나타났어요.

 

4 복음서는 제자들이 썼어요.

그런데 다 달라요.

예수님을 바라본 시각들이 달라요.

그러니까 4 복음서를 의인화 하면 예수님의 네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12제자들은 예수님하고 똑 같이 동거동락(同居同樂)을 했어요.

한 솥밥을 먹었어요.

그런데 4 복음서를 통해서 다르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성령께서 다르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각 복음서마다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달라요.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향한 말씀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언급할 때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서 열 왕들의 반열에 올려놓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네 생물로 비유하면 사자와 같아요.

그래서 마태복음을 사자 복음이라고들 합니다.

 

마가복음은, 시작부터 예수님께서 종처럼 일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마태나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 기사와 족보가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없어요.

이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족보가 없어요.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족보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네 생물 중에 소와 같아요.

그래서 마가복음을 말할 때 소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포카스가 맞추어져 있어요.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족보가 인류의 시작인 아담으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인 누가가 기록을 했어요.

그래서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수신자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철저하게 인간의 눈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추적하여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네 생물 중에 사람과 같아요.

 

요한복음은, 땅에 이야기가 없고 시작부터 하늘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전부 영적 이야기에요.

요한복음은 땅에 속한 자들은 해석 할 수가 없어요.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있는 자들에게만 열려져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을 일컬어 독수리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네 생물 중에 독수리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 모두가 누구 이야기를 합니까?

예수님 한 분 이야기에요.

서로의 이야기는 다르지만 하나를 말하고 있어요.

이것은 마치 단 쇠 같은 한 분 속에서 네 생물이 나온 것과 같아요.

네 생물을 합치면 단 쇠가 되고 단 쇠 안에 있는 것을 쏟아내면 네 생물이 나와요.

 

이건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와도 같아요.

예수님 속에서 우리가 나왔어요.

그런데 우리를 합치면 예수가 되어요.

 

이러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단 쇠와 네 생물의 관계와 같아지지요.

그런 단 쇠와 네 생물의 이야기가 누구이야기가 됩니까?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러므로 네 생물의 이야기는 하늘나라에서는 천사들 이야기가 되지만, 이 땅에서는 주의 종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네 생물이에요.

이건 잠시 후에는 이해가 될 것입니다.

 

중요하고 어려우니까 다시 설명합니다.

 

북방에서 단 쇠와 같은 분이 옵니다.

그 속에서 네 생물이 나오는데 사람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생물들이 각각의 얼굴들을 가지고 있어요.

 

이는 한 사람 속에 다양한 모습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후(前後) 좌우(左右)로 다양한 얼굴의 모습들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각각의 모습들이 담고 있는 일들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네 생물의 모습이 어떠한가요?

 

앞 모습은 사람의 얼굴이고,

우편 모습은 사자의 얼굴이고,

좌편 모습은 소의 열굴이고,

뒷 모습은 독수리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에게 적용하면 네 생물의 특징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습과 같아요.

 

예수님은 사람처럼 일을 하셨고,

예수님은 사자처럼 일을 하셨고,

예수님은 소처럼 일을 하셨고,

예수님은 독수리처럼 일을 하셨어요.

 

네 생물이 단 쇠에게서 나왔지요.

그럼 네 생물과 단 쇠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넷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넷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과 같아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는 온전하게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게 하나님의 신비에요.

 

성경에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이 없어요.

이건 철학적 용어에요.

인간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연구해 보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는데 이 세 분이 모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들의 이해로 뱉어낸 이야기에요.

 

성경은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 셋이라고 하면서 또한 이 셋은 하나라고 해요.

그러니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인 겁니다.

이건 마치 단 쇠에서 네 생물이 나온 것과 같아요.

단 쇠와 네 생물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에요.

이건 신비(神秘)에요.

해석하고자 하지 말고 그냥 믿을 일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에 의하여 해석당하지 않아요.

지음을 받은 자가 지으신 분을 해석 한다 이건 어불성설이에요.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온전하게 해석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걸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되어요.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이렇다 혹은 저렇다 라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차라리 말을 아니 한 것만 못해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은 그냥 믿을 일이지 해석하고자 하지 마세요.

그 어떤 인간도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이렇다 라고 명확하게 해석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또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러면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있어요.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합니까?

못해요.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하나라는 말은 연합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연합이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 속에 여럿이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요.

 

이게 교회에요.

교회는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에요.

단 쇠와 네 생물이 이와 같아요.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에요.

 

이걸 예수님의 여러 가지 사역적 속성으로도 볼 수가 있어요.

 

예수님은 선지자이고, 제사장이고, 왕이세요.

이는 다양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네 생물과 같아요.

 

네 생물이 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있을까요?

 

이는 사람으로 해야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구현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수종을 들게 되어 있어요.

이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중요한 이야기인데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는 일을 천사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는 것은 타락한 천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한 사람을 구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펼치는 일은 창세전 언약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천사가 아니고 사람이에요.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어요.

그래서 천상에서는 네 생물이 천사로 있지만 지상으로 올 때는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을 한다고 언약 하셨나요?

이는 의로운 한 사람이 죽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럼 구원자로 오시는 분은 천사로 오면 안 되겠지요.

자기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어줄 사람으로 와야 해요.

왜냐하면! 사람의 죄 값을 대신 갚아야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육신을 입었다는 말은 원래 예수님은 육신이 필요가 없는 분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계실 때는 인간의 몸도 필요가 없고 인간의 이름이 필요가 없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세요.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어요.

그런데 그 말씀도 하나님이에요.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는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셨어요.

그런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 오실 때 인간의 몸인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왜? 육신이라는 몸을 입고 오셨는가요?

이는 육신에 속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이건 양치는 목동들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양이 들판에 홀로 잃어버려져 있어요.

그러면 목자는 양의 탈을 쓰고 접근을 한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가면 도망을 간다고 해요.

그래서 목자가 양의 탈을 쓸 때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을 구원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이게 육신을 입게 된 배경이에요.

죄인을 구원하고자 죄인의 세계에 오셨어요.

 

그게 죄인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죄인 속으로 연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하실 일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가요?

이는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이에요.

 

어떻게 구원을 하십니까?이는 창세전 언약에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수종 드는 종으로 계셨어요.

이건 천사들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셨어요.

그 수종 드는 종의 모습을 천상에서는 네 생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이나 요한계시록에서의 네 생물은 천상에서는 천사들이 맞아요.

 

에스겔 10장을 봅시다.

 

겔 10:1-22=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 형상 같더라 2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3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우편에 섰고 구름은 안 뜰에 가득하며 4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5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 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6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자에게 명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7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취하여 가는 베옷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8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났더라 9 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 모양은 황옥 같으며 10 그 모양은 넷이 한결 같은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1 그룹들이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되 돌이키지 않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행하며 12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13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칭하며 14 그룹들은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세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네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15 그룹들이 올라가니 그들은 내가 그발강 가에서 보던 생물이라 16 그룹들이 행할 때에는 바퀴도 그 곁에서 행하고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땅에서 올라가려 할 때에도 바퀴가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17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올라가면 이들도 함께 올라가니 이는 생물의 신이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19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목전에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20 그것은 내가 그발강 가에서 본바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래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들인 줄을 내가 아니라 21 각기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으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형상이 있으니 22 그 얼굴의 형상은 내가 그발강 가에서 보던 얼굴이며 그 모양과 몸둥이도 그러하며 각기 곧게 앞으로 행하더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1장에서 보여준 네 생물을 10장에서 다시 보여 주셨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1장에서 보았던 것을 해석하는 차원에서 보여 주십니다.

1장에서는 네 생물들로만 나타났어요.

 

에스겔이 궁창 위를 보니까 보좌에 보석 같은 분이 나타나지요.

그 분은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에게 숯불을 손에 움켜쥐고 성읍 위에 흩으라고 합니다.

이는 심판을 단행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수종을 드는가 하면 네 그룹들이에요.

네 그룹들이 바퀴를 타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네 그룹이 누군가 보니까 바로 1장에서 보았던 네 생물인 것입니다.

 

1장과 10장의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한 가지 다른 것은 1장에서는 단 쇠 같은 분에게서 네 생물이 나왔는데, 10장에서는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을 돕는 그룹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는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죽음의 자리에 앉아서 회개를 촉구하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백성들이 죄를 고발하다가 죽임당하는 것을 상징해요.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 증인들이 가는 베옷을 입고 성전에 들어가서 척량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지요.

 

그러니까 에스겔 10장에서 말하는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은 이 땅에서 두 증인들처럼 자기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다가 죽임 당하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1장에서는 단 쇠 같은 분으로 나타났고 10장에서는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네 생물들은 그를 돕는 그룹으로 나타났어요.

그룹이란? 천사에요.

그래서 에스겔은 그 그룹들은 전에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그 네 생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에스겔 1장에서는 단 쇠와 네 생물이 나타났어요.

이게 10장에서는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과 네 그룹으로 나타났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어린 양과 네 생물로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단 쇠나,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이나, 어린 양은 다 같은 사람이에요.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이해가 되지요.

 

성도들이 누구로부터 나왔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나왔어요.

이건 단 쇠 같은 분에게서 네 생물이 나온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단 쇠와 네 생물들은 한 몸과 같아요.

때로는 한 몸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개별적으로 나타나요.

그러나 다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수종 드는 종이에요.

 

이들이 어디서 수종을 듭니까?

성전이에요.

성전에서 어떤 일에 수종을 듭니까?

이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해요.

그래서 그들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란 무엇인가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24장을 봅시다.

 

출 24:10절 “그 앞에서 먹고 마셨는데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이 모습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모습이에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올라오게 합니다.

이것은 에스겔과 사도 요한을 하늘로 올라오게 한 것과 같아요.

 

모세가 보니 하나님의 발 앞에 푸른 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의 모습인 것입니다.

에스겔도 이 모습을 보았어요.

 

겔 1:22절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에스겔이 네 생물들 위에 펼쳐진 세계를 보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나님 앞에 청옥을 편 것 같고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유리 바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모세가 본 청옥과 같이 펼쳐진 하늘이나,

에스겔이 본 수정 같은 궁창이나,

사도 요한이 본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는 다 같은 의미에요.

 

그런데 이것이 성막에 나타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실 때 하늘에 식양을 본 따서 주셨어요.

그럼 성막에 나타난 유리 바다는 어떤 것일까요?

이는 성막의 뜰에 있는 물 두멍을 뜻합니다.

 

모세는 성막의 뜰에 물을 담는 그릇을 만들었는데 여인들의 놋 거울을 가지고 만들었어요.

 

출 38:8절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이게 솔로몬 성전에서는 놋 바다로 나타납니다.

 

왕상 7:38-39= “또 물두멍 열을 놋으로 만들었는데 물두멍마다 각각 사십 밧을 담게 하였으며 매물두멍의 직경이 네 규빗이라 열 받침 위에 각각 물두멍이 하나씩이더라 39 그 받침 다섯은 전 우편에 두었고 다섯은 전 좌편에 두었고 전 우편 동남에는 그 바다를 두었더라”

 

솔로몬이 성막의 원형인 성전을 짓지요.

그리곤 그 뜰에 물 두멍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을 바다라고 했어요.

그 바다인 물두멍을 무엇으로 만들었다고 했나요?

여인들이 거울로 만들었다고 하였잖아요.

그럼 그 바다는 유리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요.

 

물두멍을 바다라고 하지요.

그리곤 그 바다에서 무얼 하는가요?

제사장들이 손발을 씻지요.

 

놋이란? 심판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그 물두멍은 심판 당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막에서의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는데 사용하였어요.

 

이것은 신약으로 오면 세례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의 세례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홍해바다를 건넌 것으로 해석하였어요.

 

고전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는 옛 사람의 죽음을 말해요.

이는 곧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골 2장 12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유리 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심판이 일어나요.

이게 요한계시록 15장으로 가면 유리 바다가 불이 섞인 유리 바다로 나타납니다.

 

계 15:1-4절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하더라”

 

2절을 보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가 나오지요.

불이 섞인 유리 바다라는 것은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무엇으로 비유합니까?

모세의 노래로 비유하고 있지요.

이 노래는 홍해바다에서 애굽에 군대를 수장시키고 부른 노래에요.

 

그러니까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서 일어나는 심판을 애굽에 군대들이 홍해 바다에서 심판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 바다는 애굽에 군대는 심판을 당하는 곳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이 베풀어지는 곳이에요.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난 곳이에요.

 

그러니까 유리 바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 군대에게는 심판의 바다로서 피가 섞인 유리 바다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바다로서 수정과 같은 청명한 바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도 심판과 구원을 바다에서 받아야 해요.

두 세례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입니다.

물 세례는 옛 사람의 죽음의 세례이고,

성령 세례는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세례에요.

그런데 이 두 세례를 누구로부터 받습니까?

예수로부터 받아요.

 

물 세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받고,

성령 세례는 죽었던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것으로 받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행사하는 것입니다.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서 우리를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시는 단 쇠와 같은 분이 두 가지 속성의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어디서 합니까?

구약에서는 성막에서 일어나고 신약에서는 교회에서 일어나요.

예수님은 초림 때 구약 교회에 오셔서 심판하고 구원하는 일을 하셨어요.

율법주의자들을 심판하시고 그 속에서 12 제자들을 구원해 내셨어요.

12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나온 자들이에요.

이건 마치 단 쇠와 같은 분 속에서 네 생물이 나온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12 제자들에게 맡기셨어요.

12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합니다.

이 모습이 에스겔에서는 네 생물들이 일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네 생물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바퀴에 실려 다니면서 일을 하지요.

이는 12제자들이 자기들 힘으로 일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천상에서 네 생물들이 바퀴에 의하여 일하는 것은 이 땅에서는 예수님에게서 나온 자들인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유리 바다인 성전 뜰에서 행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에스겔을 보면 단 쇠와 같은 분은 네 생물을 낳고는 자취를 감추어 버려요.

 

실제로 일하는 것은 네 생물들이 해요.

이것은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12 제자들을 낳고는 그들에게 일을 맡기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것과 같아요.

그래서 제가 네 생물들은 하늘에서는 천사이지만 이 땅에서는 주의 종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이 이해가 되는가요?

 

그룹이란? 하나님께 수종 드는 천사들을 말해요.

그룹들이 어디서 수종을 드나요?

하나님 성전이지요.

천상의 성전에서는 네 생물들이 그룹이라는 천사로 나타나고 있어요.

 

자 이걸 신약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하나님은 하늘에 식양을 따라서 이 땅에 성전을 세워주셨어요.

이 땅의 성전이 어디인가요?

교회에요.

 

그럼 교회에서 수종 드는 종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에요.

그럼 묻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드는 사자(使者)들이 사람입니까?

천사입니까?

사람이에요.

 

그럼 하늘에 성전을 모형하고 있는 이 땅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드는 종들인 네 생물이 천사입니까?

사람입니까?

사람이지요.

 

천상에서는 천사들이 수종을 들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천상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부려요.

그래서 성경은 장차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천사들을 부려요.

그래서 성경은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부리는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수종드는 종들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란 말입니다.

그럼 우리들은 네 생물들처럼 하나님의 일에 수종드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수신자가 누구입니까?

각 교회의 사자(使者)에게 편지하지요.

하지만 그 편지를 실제로 받는 자들은 성도들이에요.

그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되는 것입니다.

 

각 교회의 감독자들을 사자(使者)라고 하지만 감독자는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존재이므로 모든 성도가 사자(使者)가 되는 것입니다.

사자(使者)란? 종이에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에 수종드는 종들인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12 지파에게 내 가지 깃발로 말해주었어요.

 

민수기 2장을 봅시다.

 

민 2:1-34=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 3 동방 해 돋는 편에 진 칠 자는 그 군대대로 유다의 진기에 속한자라 유다 자손의 족장은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 10 남편에는 르우벤 군대의 진 기가 있을 것이라 르우벤 자손의 족장은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요 ~ 18 서편에는 에브라임의 군대의 진 기가 있을 것이라 에브라임 자손의 족장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요 ~ 25 북편에는 단 군대의 진 기가 있을 것이라 단 자손의 족장은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요 ~ 32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 종족을 따라 계수함을 입은 자니 모든 진의 군대 곧 계수함을 입은 총계가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이었으며 33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수되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 3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가족과 종족을 따르며 그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진행하기도 하였더라”

 

민수기는 여호와의 군대를 계수(計數) 하는 책이에요.

무엇을 위한 군사인가 하면 성막을 지키는 군사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동서남북(東西南北) 네 편으로 나누어서 각각의 깃발을 세워서 행군하도록 하셨어요.

 

하나의 깃발 속에 3 지파씩 모여서 군호를 짜게 됩니다.

 

동쪽에는, 유다 지파가 두령이 되고 잇사갈과 스불론 지파를 그 수하에 두었어요.

서쪽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두령이 되고 므낫세와 베냐민 지파를 그 수하에 두었어요.

남쪽에는, 르우벤 지파를 두령으로 하여 시므온과 갓 지파를 그 수하에 두었어요.

북쪽에는, 단 지파를 두령으로 하여서 아셀과 납달리 지파를 그 수하에 두었어요.

 

그런데 깃발에 새겨진 형상들이 천상의 네 생물들의 형상들이에요.

 

동쪽의 유다 진영을 대표하는 깃발은 “녹색으로 사자”의 모습을 그려놓았어요.

서쪽의 에브라임 진영을 대표하는 깃발은 “황색으로 소”의 모습을 그려 놓았어요.

남쪽의 르우벤 진영을 대표하는 깃발은 “홍색으로 사람”의 얼굴을 그려 놓았어요.

북쪽의 단 진영을 대표하는 깃발은 “백색과 홍색이 섞인 것에 독수리”를 그려 놓았어요.

 

그러니까 성막을 사자와 사람과 소와 독수리 문양의 네 깃발 즉 네 생물이 지키고 있고, 또한 네 생물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막의 원형인 천상의 교회에 네 생물이 수종드는 것과 동일해요.

하나님께서 12 지파에게 네 깃발을 통해서 장차 천국에서 수종드는 네 생물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12 지파는 네 패로 나누어서 각자의 깃발 아래 모여서 성막을 중심으로 모여서 진행하였어요.

이 모습을 에스겔에서는 네 생물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바퀴에 실려서 움직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네 생물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살펴봅시다.

 

겔 1:19-21= “생물이 행할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행하고 생물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도 들려서 20 어디든지 신(靈)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靈)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靈)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21 저들이 행하면 이들도 행하고 저들이 그치면 이들도 그치고 저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靈)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네 생물들이 바퀴에 실려서 움직이지요.

그런데 그 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신(神)이에요.

신(神)이란? 영(靈)을 말하는데 이는 성령(聖靈)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네 생물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전에 수종 드는 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영이 네 생물과 함께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영이 에스겔에서는 네 생물을 움직이는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에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말해주셨어요.

광야 이스라엘은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 하에 움직였어요.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행진을 하였고 멈추면 섰어요.

 

광야에서 성막을 움직이게 하는 구름 기둥 불 기둥이 곧 에스겔에서는 성신(聖神)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영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일곱 영은 성령이에요.

바퀴에 눈이 가득하듯이 일곱 영은 일곱 등불이 있어요.

일곱 등불은 눈과 같아요.

이는 성령이 온 세상을 다 살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그 중앙에 성막을 두고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해서 네 생물의 그림이 그려진 깃발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네 생물이 움직이는 것과 같아요.

 

이들이 누구의 호령에 따라 움직입니까?

구름 기둥이지요.

구름 기둥이 이들을 싣고 다니는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서는 네 생물을 움직이게 하는 신을 일컬어 바퀴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성령이 자동차와 같이 네 생물들을 태우고 이러 저리 다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곧 네 생물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다는 말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에스겔의 그림을 삼위 하나님 이야기로 살펴보고 마칩시다.

 

이것은 그냥 지나치기가 아까워서 이렇게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니 참고적으로 들으세요.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뜻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단 쇠와 같은 분이 있는데,

그 속에서 네 생물이 나왔어요.

이건 단 쇠가 네 생물을 낳은 것과 같아요.

 

이걸 아버지와 아들로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서 나온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단 쇠에서 나온 그 네 생물을 성신(聖神)이 싣고 다니지요.

 

단 쇠는 아버지와 같고 네 생물은 아들과 같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아들과 같은 네 생물을 성신이 싣고 다니지요.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 속에 오셔서 구원을 지켜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단 쇠와 같은 분”과, “네 생물”과, “바퀴 같은 성령”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되지요.

 

이걸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으로 적용해 봅시다.

그럼 단 쇠는 네 생물을 낳은 성부(聖父)와 같고,

단 쇠에서 나온 네 생물은 성자(聖子)와 같고,

네 생물을 싣고 다니는 바퀴는 성령(聖靈)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창세로부터 아버지께로 난 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일을 하세요.

이 일을 어디에서 합니까?

역사 속에서 하세요.

이것은 곧 삼위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이 역사 속에서 구현해 가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사람을 창조 하실 때 삼위(三位) 하나님이 나오지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잖아요.

여기서 우리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 하나님을 말해요.

 

그럼 에스겔서에서나 요한계시록에서 삼위(三位)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는 일을 하신다는 뜻이 되겠지요.

창조를 다른 말로 구원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에스겔서에서나 요한계시록에서 삼위(三位)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을 창조 하신다는 말입니다.

 

에스겔에서 자기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한가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그럼 요한계시록에서의 자기백성들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적그리스도 세력에게 핍박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뭔가요?

잃어버린 자들을 되찾는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게 잃어버림 당했어요.

적그리스도 세력에게 빼앗긴바 되었어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뜻으로 에스겔이나 요한계시록에서 성 삼위 하나님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 하나님은 에스겔에서 보여주셨듯이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빼내 오셨어요.

이건 역사적 사실이에요.

 

그럼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그 당시 대부분 유대교로부터 나온 자들이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 능통한 이들은 요한계시록 4장에서 말하는 하나님 보좌와 일곱 영과 네 생물들이 나타난 것을 보고서 이들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대번에 알아먹어요.

 

그러므로 우리들도 구약 때 하나님이 네 생물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바벨론에 포로 잡힌 자기 백성들을 위로해 주었듯이 지금도 적그리스도 세력들에게 핍박 받고 있는 자기들을 위로해 주시는구나를 알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난해한 공부를 하였는데 잘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워낙 해석들이 분분한 것이라서 다 다루었어요.

분명한 것은 네 생물은 하나님 나라에 수종드는 자들이라는 것이라는 것만 알고 계세요.

하나님께서 수종드는 자들을 두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심이에요.

 

성도는 망할 수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위나 땅 아래나 성도의 구원을 취소 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하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으로 보내서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기어이 자기 백성들을 다 살려 내시는 일을 하신 분이세요.

그러니 우리의 구원도 끝까지 지켜내세요.

 

우리의 구원이 실패가 되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 죽음이 되어요.

하나님은 그 아들의 죽음을 헛 것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구원을 해 내십니다.

 

그러니 현실을 보지 말고 언약을 믿으세요.

그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자리로 무사히 안착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에 있는 24 장로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보시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을 열어서 천상을 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긴 자로 살게 하옵소서. 북방에서 단 쇠 같은 주께서 이 천한 땅에 오셔서 네 생물처럼 아버지의 뜻을 수종 들어서 우리가 이렇게 구원의 자리에 앉게 되었음을 깨닫게 하여서 예수 믿음이 기쁨이 되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자로서 자족하면서 세상을 넉넉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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