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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7강.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by IMmiji 2014. 11. 24.

7강.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2:1-7)

 

계 2:1-7=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예수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한 것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만물인 이 세상 역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죄로 인하여 인간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를 알려 주시려고 하나님이 간섭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이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너는 너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내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라고 알려 주십니다.

지금까지는 너를 위하여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내 언약을 위하여 살도록 간섭하시겠다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실패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를 가지고 왜?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만유의 주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주께서 왜? 오셔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건 사사기를 통해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사기의 주제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들에겐 왕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왕이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떠나게 되면 인간은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결국 구약 이스라엘은 참 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오셔야하는지 그 당위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 이스라엘을 품에 안아 버립니다.

그들의 죄를 자신이 대신 담당을 하십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모습은 구약의 성막 제도에서 속죄일에 대 제사장이 흠 없는 제물의 피로서 전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을 죄 없다고 간과 해 주십니다.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란 실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림자를 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육적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시청각교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은 신약의 예수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구약 마당에서는 대 제사장이 흠 없는 제물의 피로 온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 하였듯이 신약 마당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자기 피로 온 세계에 흩어진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여 주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영적 이스라엘이 탄생 했습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이는 교회의 근원은 예수그리스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신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된다는 사실을 공표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를 말해주는 행복 지침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예수그리스만이 유일한 가치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이 요한계시록에서는 편지라고 합니다.

편지 속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 하신 후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영적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진짜 이스라엘이 탄생을 한 것입니다.

이제 신약의 역사는 성령으로 세워진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계시하십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신약의 전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상징하면서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 교회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일곱 교회 모두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곱 교회를 통해서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일곱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일곱 교회의 모습은 곧 그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사를 흔히 초대교회사, 중세 교회사, 현대 교회사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합니다.

이는 각 시대마다 교회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시대 마다 교회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도 시대별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을 할 때는 시작의 모습이 나타나고, 끝이 날 때는 끝물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재림의 때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을 하던 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가치관이 세속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모습을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 의미를 세상에서 먹고 사는데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이야 세상 가치로 사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에 가치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에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가치관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로지 현세적이고 육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게 결국에는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하나가 되어서 심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타난 홍수는 육적 심판의 모습이고, 실제 영적 심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이 재림 때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가까워지면 교회가 극심하게 타락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성도들이 사람의 딸들인 세상의 가치관에 함몰이 되어서 영적인 홍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알면 교회를 알 수가 있고, 교회를 보면 세상을 알 수가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는 거울입니다.

지금은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무너졌어요.

가치관이 혼돈되어 있어요.

 

그럼 우리는 일곱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 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곱 교회는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교회를 총칭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제일 먼저 등장한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어느 한 시대를 의미하는 교회사 적으로 해석하면 초대 교회를 상징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과연 그러한가? 에베소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과 같은지 살펴봅시다.

 

에베소란? “에페소스” 라고 하는데 이 말 속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어요.

“인내”와 “완만하다”와 “미끄러지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면으로는 “인내” 라는 뜻과,

중도적으로는 “완만하다” 라는 뜻이 있고,

나쁜 면으로는 “미끄러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인내하면서 싸우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될 대로 되라” 는 식으로 적당주의가 되다가,

급기야 “미끄러지게” 되는 것이 내포되어 있어요.

 

이건 에베소 교회의 신앙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로서 엄청난 시련을 겪었어요.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권세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내부적으로는 이단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건 신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교회들의 모습과 같아요.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이단과 싸우는 일들을 하였어요.

사도행전을 위시하여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보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온 이단의 세력들이 몰고온 거짓 진리와 싸우고 성도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그 만큼 교회마다 이단 세력들이 창궐했다는 뜻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에베소 교회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로서 특히 사도 시대를 상징해요.

시간적으로 딱 잘라서 어디서 어디까지다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시대적으로 보면 사도들이 살아서 일을 할 때를 나타내고 있어요.

 

이건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나타난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교회 사이로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주께서 친히 주의 종들을 붙잡고 교회를 세우고 지키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곱 교회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모습이 달라요.

이는 예수님께서 그 시대상에 맞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타나신 모습 속에는 그 시대 교회의 신앙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어요.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계 2:1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계 2: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먼저 편지의 수신자를 봅시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使者)에게 편지를 합니다.

눈여겨보면 처음에는 사자에게 편지 한다고 하면서 끝에는 교회들에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를 사자 속에 포함 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 한 사람 속에 온 인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편지는 사자를 포함해서 그 교회 구성원 전부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합니다.

사자는 교회를 대표해서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사자를 통해서 교회에 말합니다.

 

먼저 1절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계 2:1절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께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신다고 합니다.

별은 사자라고 했습니다.

사자는 일차적으로 그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종들입니다.

 

이제 막 교회 세워졌어요.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곤 성도들을 돌보는 감독자들을 세웁니다.

이들을 사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각 교회의 사자들을 오른 손으로 붙잡고 계신 겁니다.

 

오른 손으로 붙잡고 있다는 것은 승리의 표시입니다.

이는 너희는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이긴 자”로서 세상에 던져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역설적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교회는 예수님과 연합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긴 자에요.

그런데 어떻게 이기셨는가 하면 죽음으로 이겼어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인간의 상식은 산 자를 이긴 것으로 보고, 죽은 것은 진 것으로 보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런데 부활 하셨어요.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서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이긴 것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이 일곱 별과 교회들을 붙잡고 있어요.

이기신 예수님이 오른 손으로 붙잡고 있으니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밀(秘密)이 있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관접에서 보면 진 자에요.

세상 권세에 힘없이 잡혀서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이겼다고 해요.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로 이 세상에 심어서 많은 열매를 얻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 준 것은 씨를 땅에 심어 준 것과 같아요.

 

하나님 입장에선 성공인 것입니다.

세상이 안 죽였으면 한 알 그대로 있어요.

이건 실패에요.

그런데 세상이 다행히 예수님을 죽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씨앗처럼 땅에서 죽으면서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퍼트린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교회들이에요.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는 이긴 결과물인 겁니다.

 

이긴 결과물에 속하였으니까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면서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얘들아! 내가 이긴 자로서 너희를 붙잡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의 환난에 동참을 하였어요.

예수 믿음 때문에 가산을 적몰 당하고 죽음에 쫓기는 삶을 살았어요.

세상 관점에서 실패자로 살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실패자로 보시지 않고 이긴 자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환난에 동참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천상으로 올라 오게 하셔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 하신 예수님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봐라! 나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내가 죽음을 이긴 자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나 처럼 이긴 자들이다!

비록 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 속에 나와 같이 죽었다 살아나는 부활 프로그램이 심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신앙이 뭐냐?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역사 속에서 이제 교회가 막 시작이 되었어요.

첫 걸음마를 띠기 시작하였어요.

그런데 뱀이 강같이 물을 토하여서 떠내려가게 하려고 해요.

사단이 거짓 선지자들을 교회 안에 심어서 이단들이 일어나게 만들었어요.

 

요한계시록 12장을 봅시다.

 

계 12:5-17=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 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깨트렸어요.

죄와 사망 권세를 깨트렸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긴 자가 되셔서 하늘나라로 복귀하십니다.

 

그러자 뱀이 화가 나서 교회들을 핍박하기 시작을 합니다.

뱀이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게 들어가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 당시 로마 황제는 적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었어요.

초대 교회들은 정치적으로는 세상 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신앙적으로는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시련을 겪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서는 오른 손으로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는 친히 교회의 주인이 되셔서 간섭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모습은 마치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막의 성소 안에서 매일 일곱 등대를 간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참 제사장이 되셔서 교회를 돌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사단의 권세를 이기신 분으로서 지키시고 간섭을 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긴 자로서 간섭을 하니까 우리도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하신 칭찬과 책망을 들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칭찬을 하십니다.

무엇을 칭찬하는지 살펴봅시다.

 

2-3절을 봅시다.

 

계 2:2-3=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먼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합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으로서의 삶 전부를 관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의 삶을 관찰하고 있는가요?

이는 그 당시 이단 사상들이 난무하였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자기의 사고와 가치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열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였어요.

이는 나무가 열매로 표현이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믿음이 삶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음으로 인하여 엄청난 고난을 당하였어요.

이는 그들 속에 복음의 가치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도 있지만 예수님의 삶도 있어요.

그러므로 복음을 받으면 그 복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 삶이 바로 하늘나라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이를 외국인과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처럼 살았어요.

모두가 예수 이름 때문에 로마가 주는 혜택을 하나도 입지 못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참아 낸 것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그리고 교회 안에 성도가 아니면서 성도인체 하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너희는 사도가 아니라고 드러낸 일과,

그들이 전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비 진리라는 것을 밝히 드러낸 것을 칭찬합니다.

 

초대 교회 안에는 거짓 사상들이 난무했어요.

그러다 보니 복음이 심각하게 훼손을 당했어요.

갈라디아서나 여타 서신서들을 보면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의 율법주의로 복음이 심하게 왜곡되었을 볼 수가 있어요.

얼마나 심했으면 바울이 자기를 포함해서 설령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으라고 했겠어요.

 

고린도교회 같은 곳에서는 영지주의자들 때문에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이원화 되어서 입술로는 복음 복음하면서 삶은 이방인보다 더 악한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데살로니가 교회 같은 곳에서는 이제 예수님이 곧 오시는데 일할 것이 뭐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면서 게으름을 피운 자들도 있었어요.

에베소 교회 같은 곳에서는 방탕과 방임과 방종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이러한 것들은 사도 바울이 예견을 했던 것들이에요.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함께 3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교회로서 바울이 3년이나 사역한 곳이에요.

어쩌면 사도 바울의 마지막 사역지 와도 같아요.

 

사도행전 20장을 봅시다.

 

행 20:17-38=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용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3년간 유대인들의 간계와 맞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사역을 하였어요.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고정된 기간으로서 가장 오랜 기간 머물면서 사역한 곳이에요.

31절을 보면 삼년이니 밤낮으로 가르쳤다고 하니 엄청난 성경 공부를 하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 에베소 교회는 교리적으로 완벽한 교회였어요.

 

이제 성령께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의 마음에 한 가지 근심이 앞서는 겁니다.

그것은 교회마다 유대인 거짓 선생들과 복음을 헬라 철학과 혼합하여서 가르치는 영지주의자들이 창궐하였기 때문입니다.

 

29-30절을 보세요.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흉악한 이리는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을 말해요.

이들은 바울이 사역하는 곳마다 쫓아다니면서 방해를 하였어요.

이들이 전한 사상은 예수 믿기에다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이에요.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가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막아서고는 구원은 예수도 믿고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시비를 거는 겁니다.

 

이에 교회가 시끄러워졌어요.

왜?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 구성원들이 유대인들도 있고 이방인들도 있었기 때문이에요.

유대인들은 비록 복음을 받아 들였지만 아직까지 습관처럼 율법 지킴과 할례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예전에 교회에 처음 들어 왔을 때 세상 방식을 다 버리지 못하고 그 관습대로 예수를 믿었던 것과 같아요.

그래서 교회 차원에서 이건 우리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문의해 보자고 합니다.

이에 교인 중에서 몇 사람을 뽑아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서 사도들에게 물어 보라고 합니다.

 

바울이 사도 앞에서 자신들이 전도 여행 중에 십자가 도를 전하자 이방인들이 구원 받는 일들이 일어난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그곳에서도 바리새파 중에서 개종한 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바울의 말을 가로 막습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

구원은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신이 고넬료에게 복음 전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야고보도 베드로의 말을 거들면서 구원은 율법과 할례와 상관없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된다고 확정을 해 줍니다.

 

초대 교회의 본산(本山)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아직까지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산재해 있는데 이방인의 교회인 에베소 교회는 오죽하겠어요.

이를 잘 알기 때문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면서 내가 3년 동안 가르친 그 복음을 굳게 지키라고 당부를 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는 유대교 거짓 종들도 있었지만 헬라 철학으로 복음을 이해한 자들도 많이 있었어요.

이들을 “니골라 당”이라고 해요.

 

니골라는 안디옥 사람으로서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에요.

이가 나중에 배도하여서 교회 안에서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규합하여서 당(黨)을 지어서 대적하였어요.

 

“니골라” 라는 말의 뜻이 “니콜”과 “라오스”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니콜”은 “승리” 라는 뜻이고 “라오스”는 “백성”이라는 뜻이에요.

이를 합성하면 “백성들이 승리 한다” 즉 “사람의 말이 득세 한다” 라는 말이에요.

 

이는 곧 인본주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복음을 삼켜 버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요.

이는 곧 헬라 철학으로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말입니다.

 

니골라는 헬라 철학으로 복음을 이해하여서 영지주의 사상을 퍼트렸어요.

이게 제 멋대로 방종과 방탕하는 쾌락주의로 나타나게 되었어요.

구원은 복음을 깨닫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했어요.

요즘 말로 복음 알면 막살아도 된다는 것이에요.

 

바울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당부를 하였던 것입니다.

 

30절을 보세요.

 

30절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너희 중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일어날 줄을 안다고 하지요.

이 놈들이 바로 니골라당 영지주의자들이에요.

오늘 본문 6절에서도 예수님께서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다고 하셨어요.

 

계 2: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 라는 말은 히브리어 발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발람”은 히브리어로 “발라~ 암”인데 이는 “백성이 통치 한다” 즉 “백성들의 소리가 이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속에 니골라 당이니 발람의 교훈이니 이세벨의 가르침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가 영지주의 이원론 사상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이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항상 교회 안에서 복음을 변질시키고 훼손하는 일들을 하였어요.

지금도 이 사상이 포장만 달리 하여서 교묘하게 가르쳐지고 있어요.

 

그러니 에베소 교회 안에 두 부류의 흉악한 이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인 겁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에 바울의 염려한 일들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옥에 가두어져 있으면서도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해서 너희들은 이방인과 다른 자들이다!

그러니까 몸뚱이 간수를 제대로 하라고 당부를 했어요.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17-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 교회 안에 영지주의에 물든 자들이 있었어요.

이들을 일컬어 니골라당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의 세력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이 이원화 되어 있었어요.

이들은 인간의 영은 선하고 육체는 더럽다고 하면서 구원이란? 복음을 깨닫는 것이지 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펴서 복음을 깨닫는 자들은 아무렇게 살아도 정죄당하지 않으니까 막 살아도 된다고 하였어요.

 

그래서 방탕과 방종을 일삼고 산 겁니다.

이 소식을 바울이 옥에서 들은 겁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편지를 써서 보낸 겁니다.

 

야! 이 사람들아!

우리가 예수 밖에 있을 때는 죄가 우리를 주장하므로 우리가 육체가 이끄는 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너희가 예수 믿는 자들이 아니냐!너희의 주인은 죄가 아니고 예수인데 어떻게 죄가 주인으로 있는 이방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가 있느냐?

 

그건 아니란 겁니다.

그러니까 감각 없는 자들처럼 살지 말고 이젠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이게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새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구습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신앙은 양 극단의 두 가지 모습을 낳았어요.

 

첫째는, 영은 신성하고 육은 더러우니 구원은 복음을 지식으로 깨달아서 영으로 받는 것이므로 육체적인 삶은 무익한 것이라고 하여서 쾌락주의로 나아갔어요.

둘째는, 육체는 더럽기 때문에 육체의 쾌락을 일절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쾌락으로 쫓아가는 자들과 반대로 금욕주의로 나타났어요.

 

쾌락주의 사상은 주로 이방인들 중에서 교회로 들어 온 자들이 따랐어요.

이방인들은 헬라 철학적 사고로 살던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쉽게 니골라 당의 교훈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금욕주의 사상을 따른 자들은 유대주의 자들 중에서 교회로 들어 온 자들이 따랐어요.

이들은 율법적 사고가 뿌리 깊게 남아 있기 때문에 복음 알았으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사상에는 거부감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쾌락주의와 반대인 극단의 금욕주의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나중에는 속세를 멀리하여 은둔하면서 수도(修道)에만 정진하는 수도원주의를 낳게 되는 단초가 되었어요.

 

이러한 사상이 교회 안에서 먹힌 것은 그 만큼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철학을 하는 자들은 모두가 논리적이고 달변가들이에요.

그러니 사람들이 넘어가는 겁니다.

이걸 공교하게 지은 말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2장을 봅시다.

 

골 2:1-23=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바울이 골로새 지역에 창궐한 극단적 율법주의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이들은 공교한 말로서 속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8절에 “노략할까 주의하라”는 말은 사냥꾼이 짐승을 잡고자 하는 말이에요.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을 유대주의자들을 어떻게 노략할까요?

이는 조상들의 율법을 들어서 그럴듯한 논리를 편다는 말입니다.

18절에 이들은 천사를 숭배하고 자기가 본 것을 헛되이 과장하여서 일부러 겸손한 척한다고 합니다.

즉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는 말이에요.

 

23절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자기 몸을 괴롭게 함으로서 겸손을 가장한 자의적 숭배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 한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을 봅시다.

 

딤전 4:1-5=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것은 금욕주의를 말해요.

이러한 것은 모두가 미혹케 하는 영인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나는 이만큼 경건합니다 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자 혼인을 금하고 금식을 밥 먹듯이 해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영적인 사람이고 신과 가깝다고 여겨요.

천주교 신부하고 개신교 목사하고 누가 더 경건하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신부들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우리의 본성 속에 사람의 행위 속에 거룩하고 경건한 것을 신앙이라고 여기는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혼한 목사는 세속적인 것 같고 결혼을 하지 않는 신부나 수녀는 엄청 경건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성령께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는 것을 마치 경건한 신앙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자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속세를 떠나 산 속에 은둔하면서 수도(修道)생활을 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는 것은 모두가 그 뿌리가 영지주의에서 나온 것이에요.

 

십자가 도는 인간의 삶 속에서 거룩이나 경건을 찾지 않아요.

인간의 경건을 의로 여기지 않아요.

그건 모두가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자의적 숭배에요.

영적으로 나르시즘에 빠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도 영지주의자이지만,

예수 믿기 때문에 더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도 영지주의이에요.

쾌락을 좇아가는 자들은 십자가 도를 자기 죄 짓는 일을 합리화 시켜주는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복음과 상관없는 자이고,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금욕주의로 나아가는 자들도 예수님께서 의문에 쓴 증서를 십자가에서 도말을 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복음과 상관없는 자들인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에도 별 이상한 이단들이 다 있었어요.

복음에 뱀의 독이 섞이면 별 희한한 변종이 되어서 각양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인간에게서 가치를 챙기고자 하는 일체의 신앙은 모두가 다른 복음이에요.

좌우지간 남들보다 뭔가 특이하게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여기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누가 나는 일 년 365일 철야를 한다고 하던가!

금식을 밥 먹듯이 한다든가!

뭔가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은 신앙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경계하세요.

이러한 행위로 자신의 신앙 있음을 은근히 자랑한다고 하면 경계 하셔야 해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것을 하면 속된 말로 영력이 좋다고 생각해요.

속된 말로 영발이 세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이게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먹히니까 이러한 짓들을 하는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 뭔가 특별하게 하는 사람들을 추종해요.

 

이단들의 특징은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어요.

 

이 시대 변종 영지주의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교묘한 논리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어요.

성경을 상고하지 않으면 훅 하고 한방에 넘어가요.

그러므로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일단은 경계를 하세요.

 

로마서 16장을 봅시다.

 

롬 16:17-20=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어떤 당부인가요?

자신들이 가르친 교훈에 착념치 않는 자들은 멀리하고 떠나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들의 교훈에 착념치 않고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거치게 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었어요.

이들이 특징이 공교하고 아첨한 말로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했어요.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일컬어 양의 탈을 쓰고서 노략질하는 흉악한 이리 라고 해요.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는 어느 시대이고 항상 있었어요.

그리하여 십자가 도를 가렸어요.

교회를 세속화 하였어요.

지금도 이 사상은 포장을 달리해서 미혹을 하고 있어요.

 

이 시대 율법주의자들은 신앙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해야 한다는 성화주의로 나타나고!

영지주의는 복음 알았으니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 교회의 모임과 신앙의 형식들을 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성화와 성화주의를 구분하세요.

성도의 변화된 삶을 이야기 한다면 시비 걸 이유가 없어요.

성도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방인과 다른 가치관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이건 강요할 것이 아니에요.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살도록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화라고 하면 저도 동감을 해요.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반대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내어 놓는 것은 반대에요.

제가 이단이라고 하는 성화주의는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을 말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을 말해요.

 

이게 예수님의 초림 때에 율법주의자들로 나타났어요.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의 신앙과 같아요.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킴을 의라고 여긴 것이나, 성화주의자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나 동일해요.

 

로마서 9-10장을 봅시다.

 

롬 9:31-32=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10:1-4=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지요.

왜? 그렇다고 합니까?

이는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었단 말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거부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나와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여서 의가 되지 않아요.

그건 인간들에겐 착함은 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의는 오직 예수 믿는 것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롭다 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또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롭다 혹은 의로운 행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화와 성화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에요.

참으로 미묘해요.

그러나 그 본질은 극과 극이에요.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 하여야 한다는 것도 십자가 도를 훼손하는 것이고!

복음 알았으니 신앙의 모든 형식을 버리고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자들도 십자가 도를 훼손 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애석하게도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자들이 수두룩해요.

이들은 인간의 행위로 성도 간에 차별을 두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는 고급한 신자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저급한 신자로 보아요.

그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들의 언행 심사 속에서 드러나고 있어요.

 

제 주변에 이러한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 열심으로 남을 판단해요.

자기보다 열심이 없는 자를 보면 저급하게 보고서 혀를 끌끌 차요.

 

이들의 특징은 입만 열면 자기 행위를 자랑해요.

전 아직까지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오로지 자기가 행한 것을 자랑해요.

 

기도를 얼마나 했고!

봉사를 얼마나 했고!

헌금을 얼마나 했고!

전도를 얼마나 했다! 라는 말로서 은근히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해요.

 

이게 결국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차등을 두게 하고 신앙에 우열을 두어서 성도가 붙잡아야 할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말았어요.

자기 행위가 법이 되어서 사람 간에 차별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어요.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자칭 사도라 하는 율법주의 거짓 선생인 자들과 또한 진리의 도를 훼손하는 악한 무리들인 영지주의 자들과 싸우다가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과 싸우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지경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혹시 저 놈 이단 아닌가 라는 식으로 서로를 의심하고 반목하고 갈등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책망한 것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자칭 사도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고 악한 무리인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영지주의자들을 가려낸 것은 잘한 일이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킨 것은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하여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처음 사랑이라고 합니다.

 

4-5절을 보세요.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너희가 어떤 자이고 어디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놓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린 모두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저주 받아야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았어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요.

너도 은혜로 구원 받고, 나도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요.

너도 긍휼로 용서 받고, 나도 긍휼로 용서 받았어요.

 

처음 교회로 부르심을 입었을 때는 너와 나가 차별이 없었고!

잘난 놈 못난 놈 우열이 없었어요.

누가 잘나고 누가 못나고 가 없었어요.

 

다 죄인이었는데 동일하게 부르심을 입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은 자로 있었어요.

긍휼을 입은 자로 있었어요.

 

그런데 이단들과 싸우다가 그만 하나님의 은혜 바깥으로 나아가고 만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의 자리를 떠나 법과 심판을 자리로 나아가고 만 것입니다.

법의 자리로 나아가다 보니까 어느새 심판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자기 하고 다른 자들을 심판하기 시작을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부르심을 입은 형제들을 법으로 판단하고 쫓아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은혜의 공동체이어야 할 교회를 법이 난무하는 집단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는 은혜가 왕 노릇하여야 해요.

법이 지배하는 곳은 사단의 회이지 교회 일수가 없어요.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내 안에서 은혜와 긍휼이 강물처럼 흘러야지 법이 흐르면 안 되어요.

긍휼이 흐르면 이해하고 용서하고 안아주지만!

법이 흐르면 자기 하고 다르면 갈라내고 잘라내고 밀쳐 버려요.

 

우리가 언제 갈라내고 밀치고 잘라냅니까?내가 안다고 할 때에요.

내가 저 사람보다 복음을 더 많이 안다고 할 때에요.

 

내가 저 사람보다 행위가 더 많다고 할 때에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행한 것을 의지하게 되어 있어요.

힘을 삼게 되어 있어요.

 

내 행위가 저 사람보다 많다고 하면 그 행위가 법으로 작동해요.

법이 작동하면 신앙이 일이 되어요.

신앙생활이 일이 되면 사랑은 날아가게 되어 있어요.

 

사랑이 날아가면 그 때부터 신앙이 법이 되어서 사람을 죽이는 마귀 짓을 하게 되어요.

이건 차라리 일을 안 한만 못해요.

일을 하지 않고 긍휼의 자리에 앉는 것이 나아요.

 

예수님의 요구는 이단을 좇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주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에요.

옳고 그른 자들은 우리가 판단할 몫이 아니에요.

그건 주께서 하실 일이에요.

 

이건 이단을 방치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단을 좇아내더라도 내가 어떤 자인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도 이단이었는데 주께서 은혜로 주 안으로 불러 주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내가 복음 아는 것으로 복음 모르는 자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 모르는 자들을 보면 판단하기에 앞서서 나도 복음을 몰랐던 자이었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복음이 들려지게 하시고 깨달아지게 헤 주시고 믿어지게 해 주셔서 알아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게 되면 복음 아는 것이 힘이 되어서 남을 판단하고 자기하고 다르면 법을 집행하는 자가 되고 말아요.

 

복음 안다는 것은 귀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 복음 안다는 것이 남과 차별을 둘 때는 죽이는 칼이 되어요.

이건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을 받고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극단적인 말을 합니다.

잘 새겨서 들으세요.

교회 안에는 이단이 있어도 괜찮아요.

나와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어도 괜찮아요.

그러나 내게서 사랑이 사라지고 긍휼이 사라지면 안 되어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 하셨어요.

밭에 곡식을 심었는데 원수가 밤에 가리지를 덧뿌려 놓았다고 하셨어요.

농부들이 자고 일어나 보니 가라지가 밭에 뿌려진 것을 보고서 주님에게 이걸 뽑을까요 라고 물으니까 주께서 말씀하시길 내벼려 두어라 저 놈들을 뽑다가 혹시라도 곡식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가라지를 뽑는데 있지 않고 곡식이 다치지 않는데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단을 쫓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라지가 누군가요?

율법주의자들이고 영지주의자들이에요.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런 자들을 쫓아낸다고 하다가 곡식까지 다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게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어요.

 

초대 교회는 은혜와 긍휼로 세워졌어요.

그런데 이단들과 싸운다고 교회 안에 흘러야 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사라진 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서 촛대를 옮겨 버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의 신앙으로 이해해 봅시다.

우리 안에 은혜와 긍휼이 있는가 살펴보세요.

나는 지금 복음을 무엇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나도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세요.

 

복음 아는 것이 힘이 되고 예수 믿는 것이 일이 되면 사랑은 날아가요.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라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이 일이 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점고해 보라고 합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살펴보라고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앉을 자리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자리여야 해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는 그 자리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복음 아는 것이 힘이 되고 말았어요.

복음 아는 것이 완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주인의 상 아래 긍휼의 자리가 아니고 상 위의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이건 악이고 참람이에요.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의 편지가 남의 편지가 아니고 우리 울산 목양교회에 보낸 편지이고 LA 모퉁이 돌에게 보낸 편지에요.

우리들에게 보낸 편지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정낙원이에게 보낸 편지에요.

 

우린 에베소 교회의 편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경고해 주심에 감사하여야 해요.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에 감사하여야 해요.

 

일은 종들이 하는 거에요.

아들은 일하는 자가 아니라 가정을 사랑으로 돌보는 자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교회로 부르셨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회를 일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려요.

법이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신앙생활이 일이 되면 그 일로 인하여 반목과 갈등이 생기게 되어요.

복음 아는 것이 법이 되면 그것이 사람을 차별하고 갈라내고 좇아내는 칼이 되어요.

 

일에는 반드시 호불호(好不好)가 따라요.

그 일에 협조하는 사람과 비 협조하는 사람으로 나눠져요.

협조자는 남고 비 협조자는 꺼져 그런다구요.

 

이러면 부르심의 은혜가 날아가요.

교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차별이 없어요.

누가 잘나고 누가 못 나고 가 없어요.

 

신앙이 일이 되면 반드시 분쟁을 낳게 되어 있어요.

자기 생각과 달리하는 자들을 잘라내게 되어 있어요.

바울도 처음에는 이러한 실수를 하였어요.

 

사도행전 15장을 봅시다.

 

행 15:35-41=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여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짝이었어요.

요즘 말로 절친이었어요.

그런데 일 때문에 갈라지게 되었어요.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합니다.

두 사람은 앞서서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고 1차 선교 여행을 하면서 여러 교회들을 세웠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 교회들이 든든히 잘 서 가고 있는지 격려하고 위로하는 차원에서 돌아보자고 합니다.

 

이에 바나바가 그게 좋겠다고 하면서 1차 여행 때 동행 하였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간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정색을 하면서 그건 안 된다고 합니다.

그 놈은 자기가 하는 일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됩니다.

 

바울의 이러한 행동은 2차 선교 여행의 목적에 맞지 않아요.

2차로 떠나고자 하는 선교 여행 목적은 교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러 가는 것이에요.

사랑의 마음으로 가야지 법의 마음으로 가면 안 되어요.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연약한 자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보듬고 안아주는 것이에요.

이건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못해요.

그런데 바울은 법으로 마가 요한을 대하여서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있어요.

 

바울이 왜? 마가 요한을 거부했나요?

일 때문이에요.

 

38절을 보세요.

 

38절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지요.

바울은 일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사랑을 잃어버리니까 그 속에서 법이 작동을 한 겁니다.

법이 작동을 하니까 자기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은 용납 할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결국 바나바를 잘라내고 만 것입니다.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다는 말은 서로 창을 겨누고 죽이고자 전쟁을 하였다는 말이에요.

이는 바울의 창 끝에 바나바가 죽고 만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바나바는 성경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아요.

 

더 이상 바나바는 언급 되지 않아요.

이는 결국 바울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이에요.

영적으로 바나바는 바울의 손에 죽임 당한 것이에요.

바울은 결국 일 때문에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통해서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경히 여기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신앙의 본질로 붙잡고 있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해요.

 

우리가 끝까지 붙잡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은혜와 긍휼입니다.

천국은 누가 가느냐?은혜와 긍휼을 아는 자가 가요.

 

천국은 은혜의 나라에요.

은혜의 나라에서 살려면 은혜를 아는 자여야 해요.

은혜와 긍휼이 빠진 것은 외식이에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셨어요.

 

누가 복음 10장을 봅시다.

 

눅 10:25-3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에게 나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율법사는 율법지킴에 관하여는 자신만만했어요.

스스로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의도를 아시고 율법을 이야기 합니다.

“율법이 무엇이라 기록이 되었으며 너는 그 율법을 어떻게 읽느냐?” 라고 되 묻습니다.

이에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27절입니다.

 

27절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잘 알고 있네!

그럼 그렇게 살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내 이웃이 누구냐”

“그 이웃을 좀 알려주세요” 라고 묻습니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에 예수님이 사마리아인 비유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리로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보았어요.

 

하지만 그냥 지나갔어요.

그 다음에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또 본 겁니다.

그런데 레위인도 보고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았어요.

얼른 그 사람을 업고 주막에 데리고 가서 자기 돈으로 치료해 주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이 사람을 살려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볼 일을 보고 돌아 올 테니 그때까지 이 사람을 잘 돌보고 치료 해 달라고 하면서 자기 명함을 주고서는 떠나갔어요.

 

그리고는 예수님이 그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이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 이느냐? 라고!

그러자 율법시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합니다.

 

자 봅시다.

이 비유의 핵심이 뭔가요?

예수님께서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는 율법사에게 율법의 정신이 묻어져 나오지 않는 삶은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발하고자 함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율법이 무엇이라고 하고 너는 그 율법을 어떻게 읽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넌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였느냐? 로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율법정신을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정신에 반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 당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이었어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강도 만난 자를 외면했어요.

율법 정신대로 라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어야 했어요.

그럼에도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의 일 때문에 정작 율법 정신으로 보면 마땅히 도움을 입어야 하는 자를 외면한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이에요.

성전에 봉사하는 자들은 시체나 부정한 것을 만지면 안 되어요.

그들은 그 율례를 지킨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 때문에 정작 율법이 말하는 그 정신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인애와 긍휼이 나와야 해요.

법 지킴이 나오면 안 되어요.

그런데 이들은 인애와 긍휼이 나오지 않고 법 지킴이 나온 겁니다.

 

이들은 법을 지키고자 인애와 긍휼을 놓친 겁니다.

즉 일 때문에 사랑을 버린 겁니다.

인애와 긍휼은 모든 율법의 마침이에요.

사도 바울도 온 율법은 형제 사랑하는 것에 있다고 했어요.

 

롬 13: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렇게 되면 사마리아인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킨 것이 되어요.

사마리아인에게서는 인애와 긍휼이 나왔어요.

사마리아인은 율법을 일로 행사하지 않고 사랑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이 바로 예수님인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때문에 죄인인 세리와 창기들을 저주하고 외면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 정신으로 세리와 창기인 죄인들과 어울렸어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율법사는 이웃을 자기 쪽에서 찾고자 하였어요.

 

율법주의자들은 자기 쪽에서 이웃을 찾았어요.

율법주의자들이 자기 쪽에서 이웃을 찾으면 어떤 이웃을 찾겠습니까?

당연히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지요.

율법주의자들은 이방인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웃의 정의를 새로 해 주신 것입니다.

이웃은 내 쪽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강도를 만난 자 입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을 보세요.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

그러자 율법시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에게 필요합니까?

죄인들에게 필요해요.

그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자들은 누구에게 다가가야 합니까?

죄인들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이 비유의 끝에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 10:38-42=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지요.

그런데 그 촌에 마르다 라는 이름하는 한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을 합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찾아간 것으로 말하지 않고 마르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마르다가 예수님을 왜? 찾아 왔나요?

이는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집으로 들어가자 마르다는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대접히겠다고 분주한 겁니다.

 

정작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은 마리아인 겁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을 대접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도움을 입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도움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언니이고, 마리아는 동생이에요.

이는 언니인 마르다는 바리새인을 상징하고, 동생인 마리아는 세리와 창기를 상징해요.

바리새인은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대접하겠다고 나왔고, 세리와 창기들은 마리아처럼 예수님 도와주세요! 라고 나왔어요.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겠다고 분주한 것은 마치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아요.

이들은 일 때문에 자신들이 도움을 입어야 할 자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불법이고 타락이에요.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강도 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기 위하여 오셨어요.

우린 모두가 강도 만난 자들이에요.

 

누가 강도냐?

마귀에요.

마귀가 우리를 율법으로 참소해요.

그러니까 율법이 강도가 되는 셈인 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가 사람의 옷을 벗기고 거반 죽게 만들었다고 하지요.

이건 율법이 우리의 수치를 발가벗겨서 드러내게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의 눈에는 인간들이 발가벗고 있어요.

자기 백성들이 발가벗고 있어요.

 

어떻게 발가벗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발가벗고 있어요.

이게 어렵고 중요한 말인데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고자 하심이에요.

 

하나님께서 율법 속에 제사 제도를 주신 것은 이들의 발가벗음을 덮어주고자 하심이에요.

알다시피 율법은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서 죽임을 당해야 해요.

 

그런데 자신들은 죽지 않고 짐승이 죽임을 당했어요.

이렇게 되면 죄로 발가벗은 수치를 흠 없는 짐승의 죽음으로 덮어줌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럼 백성들은 제사를 지내면서 율법을 지킨다는 생각하면 안 되어요.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해요.

 

흠 없는 제물이 희생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가 마땅히 죽어야 함에도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너희에게 묻지 않고 흠 없는 제물에게 대신 물으셨음을 알리고자 함이에요.

그럼 이 사실을 안다고 하면 내가 사는 것은 내 대신 죽어준 제물의 희생 때문임을 알아야 하겠지요.

 

그래야 율법을 지킨 것이 되어요.

만약에 대신 죽어준 제물 속에 담긴 은혜를 모르면서 제사를 지내게 되면 그것이 곧 율법을 안 지킨 것이 되고 말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하나님은 제사라는 율법의 의식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제사라는 의식 속에서 죄인이 사는 것은 희생당한 제물의 은혜 때문임을 아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제사 지냄이 자랑스러우면 안 되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마태복음 9장을 봅시다.

 

마 9장 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너희는 아버지께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배우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배우라는 말이 무엇인가요?

이는 제사 속에 담아 놓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제사를 지내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제사의 목적은 죄사함을 위해서에요.

죄 때문에 제사를 지냅니다.

그럼 제사 지내는 자의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까?

 

주여 내가 죽어야 하는데 여기 흠 없는 제물이 내 대신 죽습니다!

내가 죽일 놈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는 마음이 나타나야 한단 말입니다.

 

“나 제사 지냈잖아요” 라고 하면 안 되어요.

그건 제사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율법을 지켰다고 잘난 척 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제사의 의미도 모르면서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나요?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하셨어요.

이는 유대인들이 율법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강도를 만나서 옷을 발가벗김 당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네가 바로 강도 만난 자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강도를 만나서 발가벗김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이고 레위인인 너희들이 바로 마귀에게 미혹당하여서 율법으로 의를 만들어서 입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발가벗김 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은 이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건 이 시대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바로 강도 만난 자들이에요.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은 자기 행위에 근거해서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있어요.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고 있어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겼어요.

그래서 치마를 해 입은 겁니다.

자기 손으로 치마를 해 입으면 수치가 가려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모습이 바로 발가벗은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 방식으로 수치를 가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수치스러운 일이에요.

수치는 하나님 방식으로 가려 줄 때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방식으로 수치를 가려주십니다.

어떤 방식인가요?

죄인을 대신하여 흠 없는 제물이 죽어서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혀서 가려주었어요.

 

가죽 옷이 무엇을 말하는가요?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의 수치가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지하여 나오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발가벗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들이 누구인가요?

자칭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자들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모두가 가죽 옷을 벗은 자들이에요.

 

이들은 자기 행위라는 나르시즘에 빠져 있어요.

그 증거가 바로 입을 열면 자기가 행한 것을 토해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한 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감사하고 자랑하는 자이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이란?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것이 아니에요.

 

죄인이 천사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을 말하는 거에요.

 

신앙이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에겐 선이 없음을 철저하게 고발당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 말씀을 칼이라고 하지요.

어떤 칼인가요?

우리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칼이에요.

이는 우리의 뜻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를 고발하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왜? 고발하는가요?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그리하여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긍휼하심을 얻기 위하여 때를 따라 돕는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니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는 기능을 해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이런 인간이 되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어요.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넌 이런 인간이다” 라는 것을 고발하고자 성경을 주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살아보라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명령문으로 주신 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역설적으로 너희는 이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고자 하심이에요.

 

십계명을 하나로 말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에요.

이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 진의(眞意)는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자 우리 이제부터 이런 인간이 됩시다” 라고 하고 있어요.

“이런 인간이 되어야 해” 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이건 성경을 주신 목적에서 이탈 된 것이에요.

 

“넌 이런 인간이다” 라는 것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인간이 되어야 해” 라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달라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가 죄인임을 고발하고자 하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지켜서 의로운 자가 되고자 한단 말이에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그 아들 예수를 소개 시켜주고 있어요.

너희가 존재하는 바탕에 예수가 있고 너희가 사는 삶 속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대속에 은혜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어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 시킨 것은 너희는 어린 양의 대속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죄란? 이 사실을 놓치고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자기 치장하는 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구원이란? 아담의 생명으로 살던 자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럼 구원 받은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산다는 것이 고백 되어져야 합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해요.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에요.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은 변하지 않아요.

죄 아래서 난 몸뚱이를 가지고 사는 한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담아 낼 수가 없어요.

이 몸을 가지고 사는 한은 우린 변하지 않아요.

 

흑인의 검은 피부가 비눗물로 씻는다고 희게 되지 않고!

표범의 반점이 없어지지 않듯이 우리 인간들이 죄도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서 구원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세요.

그러면서 자기 한계를 깨달으세요.

 

우린 내가 어떤 자인지를 몰라요.

말씀 앞에서 보면 내가 누구인지가 보여요.

야! 내가 완전히 썩은 놈이구나를 알게 되어요.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경주해 보세요.

나의 불 가능성을 알기 위해서 경주하세요.

 

신앙생활이란? 나의 불가능성을 확인하고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담으로 기록하여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가 이런 자들이고!

이런 너희를 하나님께선 그 언약하신 것 때문에 구원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 이렇게 변했어요!” 로 나오면 안 되고!

그 반대로 “주여 주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라고 나와야 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제사 지냄의 당당함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긍휼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말씀 앞에 서면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상한 심령과 긍휼의 마음이 없었어요.

그래서 너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 하라고 합니다.

 

계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뭘 하다가 이걸 놓쳤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키라고 합니다.

그럼 그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과를 먹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는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책망 한다는 것은 돌이키게 해 주신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돌이켜 회개하는 자를 이긴 자라고 합니다.

 

우린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알았습니다.

왜? 내 안에 은혜와 긍휼이 사라졌는지를 알았습니다.

내가 왜? 법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복음 아는 것이 지식이었고!

신앙생활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근본부터 다시 정리합시다.

 

내가 누구이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이란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 “너희들 내 아들에 죽음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로 살게 하는 능력임을 아십시오.

그리하여 그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나의 기쁨이고 소망이고 자랑이시길 바랍니다.

 

이 사실을 지금도 성령이 교회들에게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이기는 자이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은 자이고 지금도 먹고 있으며 장차도 먹을 것입니다.

부디 에베소 교회를 통하여 말씀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는 귀를 받은 축복이 모두에게 임하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를 예수의 피로 감싸 안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 그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해 주심도 감사합니다. 이제 이후로 신앙생활이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남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첫 사랑을 회복케 하여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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