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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6강.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일곱 별

by IMmiji 2014. 11. 24.

6강.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일곱 별 (계 1:10-19)

 

계 1:10-19=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 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어떤 분들이 이런 질문들을 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성경을 잘 깨달을 수가 있는가요?

그 비법을 좀 알려 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럼 저는 역(逆)으로 묻습니다.

그 비법이 있으면 저에게 좀 알려달라고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경을 깨닫는 데에는 비법이 없어요.

 

흔히들 기도 많이 하면 된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기도 많이 하면 깨달아진다고 할 것 같았으면 저는 수십 년 전에 이미 깨달았어야 해요.

 

저는 율법 아래 있을 때 기도를 엄청 많이 했어요.

그럼 그 때 복음을 알았어야 했어요.

그러나 그 땐 저는 열심은 특심했지만 복음을 몰랐어요.

 

제가 복음을 깨닫고 난 후에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려 주셔야지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요한이 천상(天上)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았어요.

어떻게 보았는가요?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이 임함으로서 알게 되었어요.

사도요한이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기 때문에 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본문 어디에도 시도 요한이 기도를 했다는 내용이 없어요.

그냥 주의 날에 성령이 감동케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의미를 두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어떻게 찾아 오셨고,

무얼 보여 주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을 보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어요.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이라고 하지요.

안식 후 첫 날이 예수님이 부활 하신 날이에요.

성경은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의 날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겁니다.

제자들이 기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 오셨어요.

마치 주의 날에 사도 요한을 주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부르신 것과 같아요.

 

왜? 찾아 오셨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 찾아 오셔서 내가 부활 한 것이 맞다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 미명에 무덤에 가서 보니까 무덤이 빈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고 알려 줍니다.

마리아가 이를 제자들에게 알려 줍니다.

 

제자들이 쫓아가서 무덤이 빈 것을 보았어요.

그럼에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어요.

반신반의 했어요.

 

그런데 그 날 저녁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잘 알아요.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 일이 있고 난 후 대강 50여년이 지났어요.

제자들은 다 떠나고 없어요.

모두들 복음 전하다가 순교를 당하였어요.

 

이제 사도 요한만 남았어요.

그것도 밧모 섬에 유배당하고서 노령의 몸으로 오늘 내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때 사도 요한의 나이가 학자들 간에 조금씩 의견이 다르지만 대강 95세 전후라고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노 사도에게 부활 하신 그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한아!

내가 죽었다가 산 예수다!

너의 주님이시다! 라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이것만큼 더 기쁜 소식은 없어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것 그 자체가 사도 요한에겐 소망이고 기쁨이었어요.

 

요한계시록을 계시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 오셔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께서 찾아옴을 입은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어디에 누구에게 가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더라고 하는 자들의 말에 속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잘 전하는 목사에게 배우면 알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학습으로 알아진 지식이지 계시는 아니에요.

계시는 학습으로 알아지지 않아요.

계시는 성령의 감동이 임해야 해요.

그런데 그 성령의 감동을 우리 쪽에서 일으킬 수가 없어요.

 

그러한 의미에서 어디에 누구에게 가면 복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더라는 자들의 말에 미혹 당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 놈은 십중팔구 사기꾼이에요.

거짓 선지자이고 삯꾼일 확률이 높아요.

 

요즘 어떤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 무슨 대단 한 일이라도 되는 냥 자랑하는 자들이 있어요.

나 누구 설교 들어요! 라고 해요.

그러면서 재판장 자리에 앉아서 다 비판하고 정죄해요.

 

자기만 옳다고 하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해요.

이게 전형적인 학습으로 배워서 알아진 복음이에요.

그 복음은 지식이고 지식으로 알아진 예수는 관념이지 실제가 아니에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 듣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은 예수로 사는 것이에요.

제발 속지 마세요.

 

학습으로 알아진 복음의 내용은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지 복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말 그대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학습으로 알아지는 지식 쌓음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알아지는 은사에요.

은사는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은사가 복음을 삶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으로 복음 전하는 자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 땐 뭔가 엄청 깨달은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마치 재를 한 움큼 손에 잡았는데 나중에 보면 다 빠져 나간 것과 같아져요.

심령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피폐해져요.

복음을 알면 알수록 심령이 강퍅헤져요.

이게 모두가 죽은 지식이기 때문이에요.

 

복음은 생명이에요.

은사로 알아진 복음을 들으면 반드시 생명에 소성함을 얻게 되어요.

마음이 따뜻해지고 관대함이 묻어져 나와요.

예전엔 까칠 했는데 너그러운 거에요.

이는 은사가 그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오늘 본문 식으로 주의 날에 주께서 사도 요한을 찾아 오셔서 사도 요한의 눈을 열어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보고 나니까 배가 부르고!

배가 부르니까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생기니까 너그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로 복음을 깨닫는 사람은 어디에? 누구에게 가면 복음을 알 수 있다!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러한 것을 배격시켜요.

제가 목사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계시의 본질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자칭 스스로 선생이라고 하는 자들을 많이 보았어요.

자기만 복음 안다고 교만을 떠는 인간들을 너무도 많이 보았어요.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의 특징은 전부가 사람들을 자기 종으로 삼아요.

자기를 떠나면 복음을 알 수 없는 것처럼 교묘한 논리를 펴서 자기 수하에 두어요.

그리곤 그들 위에 군림을 하고 왕 노릇을 해요.

 

지식에 속한 사람들은 그 사람과 그 조직을 못 떠나요.

떠나면 죽는 줄 알아요.

이게 이단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제가 누가 혼자 복음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절대로 경계를 하라고 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자기만 특별히 안다고 하는 자들은 100% 사기꾼이에요.

 

다시 계시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하나님 말씀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란? 열어서 보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커튼이 쳐져 있는 무대 뒷면을 보여 주시려고 연극이 시작이 되면서 커튼을 활짝 열어서 보여주시는 것과 같아요.

커튼이 열리고 나면 비로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 형식으로 알려주고 있어요.

편지를 받은 성도들은 사도 요한이 본 것을 그대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처럼 천국을 보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은 사도 요한처럼 천국에 올라오게 해서 보여 주시지 않아요.

성령이 사도 요한이 본 것을 믿어지게 해 주세요.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난 후 “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고 믿을 거야!” 라고 하던 도마에게 나타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더 복 되도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보지 않고 믿나요?

이는 성령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천국을 보여 달라고 하지 마세요.

그럼 마귀가 가짜 천국을 보여 주어요.

이 시대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고 하는 자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전부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해요.

이건 마귀가 보여준 것이에요.

그러니 누가 천국을 갔다 왔다고 하여도 미혹당하지 마세요.

 

아니!

천국을 보아야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한다면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뭐가 아까워서 보여주지 않겠어요.

그럼에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사도 요한을 성도의 대표 자격으로 보여 주셨기 때문이에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사도 요한이 대표로 보고 온 그 천국을 믿음으로 보고서 살아요.

그러니 그 안에 성령이 역사하는 성도는 천국을 보고자 하지 않아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말씀들을 깨닫고 믿어지게 해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에요.

새로운 계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에요.

계시는 성경 66권으로 완성이 되었어요.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케 하시고 계시가 완성이 되고 난 후에는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서 완성 된 계시를 깨닫고 믿어지게 해 주시는 일을 하세요.

그러니 지금도 천국에 가서 보겠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사단의 미혹이에요.

 

누가 누구에게 계시해 주시는가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알게 해 주세요.

 

계시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 주세요.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 주시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그럼 계시가 어떻게 단절이 되었고 어떻게 열리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에덴동산에서는 계시가 필요가 없었어요.

그 때는 아담이 범죄하기 전이므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면서 교제 하였어요.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게 되었어요.

이는 거룩과 비거룩이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거룩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의 문을 걸어 잠그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에요.

나는 범죄한 자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죄인 앞에서 숨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 계시가 단절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 길이 없어졌어요.

 

그러자 마귀가 인간들에게 조작된 하나님 상(像)을 심어주기 시작합니다.

죄 아래 빠진 인간들은 마귀가 조작해 준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자기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를 다른 신(神)이라고 하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이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 말고 다른 심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너희가 섬기는 신이 바로 다른 신이란 뜻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알아진 하나님 상(像)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광야에 나와서 금송아지로 나타냈어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라요.

애굽에서 알아진 가짜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인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일을 제일 먼저 하신 것입니다.

 

교제가 되려면 먼저 서로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 미신 것입니다.

얘들아!

내가 이런 분이다! 라고 자기 계시를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게 계시에요.

 

출애굽을 하자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스스로를 드러내 주십니다.

애굽에서 난 백성들에게 최초의 계시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각인된 애굽에서 알아진 왜곡된 하나님 상을 깨트리고 새로운 하나님 상을 심어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에게 계시해 주시고 그 후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백성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셨어요.

이 모습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모습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오게 하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신 것처럼 사도 요한을 천상으로 불러 올리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힌트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 위로 올라오게 하여서 스스로를 계시해 주신 것은 지금 산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릇 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럼 사도 요한을 천상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주신다는 것은 지금 지상에 있는 교회들이 왜곡된 예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 시대 교회들이 예수를 몰라요.

전부 자기 식으로 알고 있어요.

 

구약 교회인 출애굽한 백성들이 복 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이 지금도 복 주는 예수로 알고 있어요.

누가 이런 예수를 가르치는가 하면 목사들이 가르쳐요.

강단에서 기복주의 신비주의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고 산 아래 백성들에게 알려주라고 하셨듯이, 신약에서는 사도 요한을 천상으로 올라오게 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여 주시고 지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알려 주라고 편지를 써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참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성도들에게 알려 주는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를 올바로 알아야 교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도 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자 함이에요.

 

성령의 오심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왜곡된 예수상을 찍어내고 진짜 예수에 대하여 알려주시는 일을 하세요.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마다 우리가 조합해 낸 예수를 찍어내고 성경이 말하는 그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에요.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아가는 것이에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 사십년간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을 지우고 창세전에 언약 하신 그 언약의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을 당하였어요.

지금도 동일해요.

복 주는 예수가 아니고 창세전에 언약하신 그 일을 하시는 예수를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펀지 한통을 주었어요.

그게 십계명이에요.

율법이에요.

율법은 곧 편지와 같습니다.

 

사도 요한도 동일합니다.

천상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아 왔습니다.

그리곤 그 편지를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냅니다.

 

계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啓示)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편지의 전달 체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십니다.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천사를 시켜서 사도 요한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그 종들에게 보이라고 합니다.

편지의 최종 수신자는 누구인가요?

종들입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성도들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시고,

예수님이 천사에게 주었고,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주고서,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장 3장의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에게 편지합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는 일곱 별을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라고 하지요.

여기서 사자란? “엥겔로이” 라고 하는데 이는 문자적으로는 천사를 말해요.

이 천사라는 말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일곱별은 천사라고 오해를 하고 있어요.

 

쉽게 말할게요.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드는 종이에요.

천상에서 수종 드는 종을 천사라고 하고!

지상에서 수종 드는 종을 사자(使者)라고 해요.

 

그러니까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는 존재론 적으로 말하면 성도들을 말하고 사역론 적으로 말하면 목사들을 말해요.

사자(使者)를 별로 표현하는 것은 하늘에 소식을 전해주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편지를 전해 준 천사는 천상에서 수종드는 천사가 맞아요.

그러나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는 천상의 천사가 아니에요.

이 땅의 주의 종들을 말해요.

 

주의 종을 사자(使者)라고 해요.

예수님의 초림 때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보내심을 입은 자가 있었어요.

그 이름이 세례요한이에요.

세례요한을 일컬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내 사자(使者)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자(使者)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종들을 말해요.

 

구약 시대에 보면 천사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활동을 하였어요.

아브라함도 천사들을 영접했어요.

롯도 천사를 영접했어요.

 

그러나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활동하던 그런 천사들은 지상에서 사역하지 않아요.

이들은 모두가 천상에서의 수종 드는 자들로 나타납니다.

그럼 지상에서 수종 드는 천사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들이 바로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들이에요.

신약에서는 주의 종들을 사자(使者)라고 했어요.

주의 종들이 천사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것입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은 주의 종이에요.

그런 측면에서는 모든 성도가 사자(使者)가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을 각 교회로 말하면 말씀에 수종 드는 자가 사자(使者)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에 수종드는 자가 누군가요?

목사들이에요.

그럼 사도 요한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에게 편지를 한다는 이 말은 곧 각 교회에서 말씀에 수종드는 목사들에게 주었다고 하여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에요.

 

목사가 천사란 말이 아니고 천사의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존재론으로 접근하지 말고 직분론으로 접근을 하세요.

직분론으로 접근을 하면 목사도 사자(使者)가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일곱 교회 사자(使者)가 천사냐? 아니면 목사냐? 라는 것들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입니다.

사자(使者)를 목사라고 하면 이단시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이런 논쟁들을 하는가 하면 사자(使者)가 하는 직분적인 의미로 접근하지 않고 사자(使者)라는 말에 매몰 되어서 존재론으로 접근을 하니까 사자(使者)는 천사다! 아니다 목사다! 라고 싸우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 보아요.

 

이 편지의 수신 체계를 봅시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시고,

예수님이 천사에게 주었고,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주었어요,

그리고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들에게 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도 요한까지는 막힘이 없이 잘 전달이 되었어요.

그런데 일곱 교회 사자(使者)들에게 주어지면서부터 요한계시록이 막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각각의 해석들이 난무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단들이 창궐하기 시작을 했어요.

 

역사 속에서 나타난 이단들은 모두가 요한계시록을 포함해서 모든 성경을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해석했어요.

한국의 이단들도 모두가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장난을 쳐요.

신천지도 요한계시록으로 미혹을 하고 있어요.

 

교회의 타락은 어디서부터 시작 되는가 하면 강단으로부터 시작 되어요.

목사가 타락하면 온 교회가 타락해요.

목사가 인본주의에 빠지면 모든 교인들도 인본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목사가 기복주의에 빠지면 온 교인들도 기복주의에 빠져요.

한국교회가 산 증인이에요.

 

우리 주변을 보세요.

목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잖아요.

교회가 크든 작든 대 부분의 교회들 속에서 목사의 말이 곧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잖아요.

이 시대 교회의 현실이에요.

 

지난 번에 부산에서 WCC 총회를 했어요.

WCC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모여서 종교 통합 운동을 일으키는 자들이에요.

이 일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천주교의 교황이 주도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의 많은 교단과 교회가 동참을 했어요.

목사가 동참하니 교인들도 덩달아서 WCC를 동조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강단에서 쑥물을 먹이니까 교인들이 그 쑥물을 진리인줄 알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 날 줄을 미리 아시고 아시아의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하면 교황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WCC는 괜찮다고 하고 있어요.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교회를 통해서 알리시고 드러내신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이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는 곧 이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10=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계획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드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먼저 죄 아래 가두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뱀이 동원이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이 일을 시행하였습니다.

 

아담이 뱀의 미혹으로 범죄하게 됩니다.

죄인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식으로 말하면 죄 아래 가두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죄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흠 없는 짐승을 피 흘리게 하여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힙니다.

이는 곧 짐승의 피 뿌림으로 아담이 죄에서 의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비 거룩하고 흠이 있는 자가 흠 없는 짐승의 피 흘리심으로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었어요.

 

죄인이 거룩해 졌다는 말이 아니고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거룩함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거룩함을 입었다는 것은 실제로는 거룩하지 않은데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거룩하다고 여겨 주심을 입었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되면 죄인은 거룩함을 입혀주는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벗어나면 비거룩이 되고 말아요.

 

그럼 신앙이 어떤 식으로 흘러야 하나요?

자기를 거룩하게 해 주신 흠 없는 제물의 희생 안에 거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시대 이것이 사라졌어요.

 

우리는 이미 거룩해 졌으니까

거룩한 자로 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교인들을 선악의 법 아래서의 선을 쫓아가라고 하고 있어요.

이름하여 성화에요.

 

성경이 말하는 성화란? 우리가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에요.

다른 성화는 없어요.

예수라는 가죽 옷을 입고 사는 것이 최고의 성화에요.

 

물론 착하게 살 수가 있어요.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난 후의 삶이 달라질 수가 있어요.

당연히 달라져요.

왜냐하면! 가치관이 달라지게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포카스는 성화주의자들처럼 착하게 사는 것으로 두면 안 되어요.

인간은 육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착함과 선은 미친 여자 널 뛰듯이 해요.

컨디션이 좋으면 천사가 되었다가 컨디션이 나쁘면 악마가 되어요.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러므로 인간에게 발생 되는 착함은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바라는 성화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결이 말하는 거룩이란? 우리더러 거룩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신 분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거룩한 분이에요.

 

하나님께서 죄인들 세계에 예수라는 거룩한 분을 보내 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고자 오셨는데 자칭 성화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그걸 거부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착한 삶이 거룩이 되는 줄 알았어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그게 통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 그건 성화가 아니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어요.

 

거룩이 무엇이냐?

내가 거룩하니 내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는 자가 거룩한 자라고 합니다.

이걸 에덴동산 식으로 말하면 가죽 옷을 입는 것이에요.

 

범죄한 아담은 죄인이므로 자기 쪽에서 아무리 수치를 가리고자 하여도 가려질 수가 없어요.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 주셔야 해요.

하나님이 어떻게 가려주셨나요?

흠 없는 제물을 잡아서 가죽 옷으로 가려 주셨어요.

이게 거룩이고 성화에요.

 

그럼 누가 예수라는 가죽 옷을 입고 살까요?

이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에 감사하고 사는 것이에요.

 

내가 착하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나의 어떠함을 근거로 하지 않고 나에겐 선이 없음을 알고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그 은혜로 산다는 것을 삶 속에서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 받았기 때문에 착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지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나님이 영광 받는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오직 그 아들을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아요.

우리가 착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이 아니에요.

 

착하게 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렇게 막 살아도 되겠네! 라는 것도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은 뼈 속 깊이 나는 죄인이며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용서 받고 살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범죄한 아담을 위하여 피 흘려 죽임 당한 짐승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죄인을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의인이 되는 일들을 하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이걸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그 뜻의 비밀(秘密)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라는 말입니다.

그 뜻이 뭔가요?

그 아들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을 누구에게 알리셨다고 합니까?

우리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누구냐?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거룩함을 입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두가 이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어떤 비밀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인이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곳이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구약과 신약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기록하고 있어요.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로 기록을 하였고,

신약은 교회의 역사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입니까?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을 입은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 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죄 아래 가두어진 것을 말합니다.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빼 내셨나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빼냈습니다.

어디로 빼냈습니까?

광야입니다.

스데반은 광야를 교회라고 했어요.

 

사도행전 7장을 봅시다.

 

행 7;37-38=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스데반은 광야를 일컬어 교회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광야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교회도 신약의 교회처럼 피로 값 주고 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교회이든 신약의 교회이든 피로 값 주고 산 곳입니다.

누구의 피 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서 알리시고자 하는 비밀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피입니다.

너희가 예수의 피로 산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운을 때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이 예수그리스도를 교회에 알려 주라고 하십니다.

교회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어떻게 죄 아래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려 주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구원을 받은 그 바탕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말하는 것이 이러합니다.

너희의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 아들이 죽었다! 라는 이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아들의 죽으심을 기리고 감사할 것이 아닙니까!

이게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 된 것은 내 아들의 죽음 덕분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교회는 무얼 하는 곳이냐?

그 아들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곳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천국도 이와 같았어요.

구원을 받은 24 장로가 자기의 면류관을 어린 양에게 던지며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어요.

 

요한계시록 4장을 봅시다.

 

계 4;10-11=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24장로는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 사도를 상징해요.

이는 신, 구약의 구원 받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고 있어요.

그럼 신약의 교회이든 구약의 교회이든 그 정체성은 동일합니다.

어떤 정체성이냐 하면 어린 양의 피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떻게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을 하였는지를 자자손손에게 가르치라고 했어요.

애굽에 장자가 다 죽어 나갈 때 너희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자손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였어요.

 

왜? 가르치라고 하는가요?

이는 어린 양의 피가 곧 너희들을 살게 하는 근거라는 것을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너희가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살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주객(主客)이 전도가 되어요.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고 어린 양을 찬미하는 것은 나중이 되어요.

이게 죄에요.

 

죄가 뭐냐?

어린 양의 피를 잊는 것입니다.

내가 어린 양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는 것입니다.

 

신약의 죄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사는 근거는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잊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저주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사실을 놓치게 만들어요.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면 근거를 놓치게 되어요.

주객을 전도 시킨단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결론을 집 짓는 비유로 마감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집을 지었느냐를 보지 않고 어디에다 지었느냐를 보아요.

주초(柱礎)가 어디이냐를 묻고 있어요.

 

왜? 주초를 묻나요?

이는 집을 지탱해 주는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존재케 하는 뿌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뿌리를 묻느냐 하면 그 뿌리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상처가 나도 살아요.

그러나 뿌리가 상처를 받으면 죽어요.

뿌리가 생명을 보존하지 가지가 자기 생명을 보존하지 않아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꼬라지가 형편없어도 괜찮아요.

그러나 예수를 안 믿으면 죽어요.

 

하나님은 예수라는 가죽 옷을 입지 않은 자는 상종하지 않아요.

내가 비록 형편없는 꼬라지이지만 예수라는 가죽 옷만 입고 있으면 탓하지 않아요.

그러나 반대로 예수의 옷은 입지 않고 자기 꼬라지를 화려하게 가꾸는 자들을 저주하세요.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화려한 꼬라지는 누더기 같은 거지의 옷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최고의 화려함으로 살았던 솔로몬이 야! 인생 별거 없다!

아무리 화려한 인생도 풀의 꽃과 같더라!

그러나 인생의 화려함을 쫓지 말고 하루라도 젊었을 때 창조주 앞에 설 것을 기억하고 살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 12:1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을 산다고 하여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는 인생을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하느냐?

예수 안에서 해요.

그럼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서의 화려한 성공을 꿈꾸는 젓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주초를 반석 위에 세우고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이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요한계시록은 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하였어요.

그럼 먼저 아시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알다시피 아시아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떠날 때 성령께서 아시아로 가지 못하게 강하게 막았던 곳입니다.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은 1차 선교 여행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1차 선교 여행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성격이었어요.

그러나 2차 선교 여행은 1차 때 세워진 교회들은 순방하는 차원에서입니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차원이에요.

 

사도행전 15장을 봅시다.

 

행 15:35-41=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여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36절을 보면 바울이 바나바에게 우리가 1차 선교 여행 때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城)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격려하고 위로하는 차원에서 방문하자고 합니다.

이에 바나바가 좋다고 하면서 자기 조카인 마가라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이에 바울이 이 자(者)는 1차 선교 여행을 함께 하다가 도중에 밤빌리아에서 돌아간 자라고 하면서 이런 자(者)는 “자기들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안 된다고 합니다.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급기야 갈라서게 되어요.

 

바울은 실라를 새로운 파트너로 택하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가게 되었어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이유입니다.

38절을 보면 바울이 “자기들을 떠나 한 가지로 일하지 아니한 자(者)를 데리고 감이 옳지 않다” 고 하지요.

이는 일 때문에 다투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가 일하러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선교는 일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구경하는 것이에요.

여기서 구경 한다는 말을 잘 이해하세요.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우리가 선교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선교는 하나님이 하세요.

 

우리가 사도행전을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다고 하여서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전했어요.

성령이 사도들을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지 구경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능력으로 회개가 일어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에요.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지 사도들이 한 일이 아니에요.

 

사도행전 16장을 봅시다.

 

행 16:13-15=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기도를 하고자 기도처를 찾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강가에서 빨래하던 아낙네들에게 물었어요.

여보시요!

여기 어디에 기도하는 처소가 있느냐고!

이 말은 회당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아디라 성에서 온 자주 장사 루디아 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루디아가 자기 집으로 안내를 한 겁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였어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바울이 마음을 연 것이 아니고 주께서 열었어요.

그러니 선교는 주께서 하시는 것이지 바울이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구경을 한 겁니다.

이게 선교에요.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일하러 간다고 하면서 마가는 자기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은인과 같은 바나바와 격하게 다투고 헤어지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다는 말은 “파록쉬스모스” 라고 하는데 이는 전쟁 용어로서 서로가 창을 겨누고 죽일 기세로 싸웠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바나바는 성경 속에서 사라져요.

이 후로 바나바의 이름이 없어요.

이는 바울의 창에 바나바가 찔려서 죽었다는 말이에요.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바울은 일 때문에 자기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죽인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건 2차 선교 여행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에요.

2차 선교 여행은 사랑으로 돌보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인데 일 때문에 자기하고 다르다고 해서 죽이는 마음으로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성령께서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는 것을 강하게 막아 버린 것입니다.

넌 교회를 위로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면 또 다시 너와 다른 성도들을 잘라내고 죽일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막아 버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봅시다.

 

행 16: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 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보세요.

성령이 두 번씩이나 막아 버리지요.

왜? 성령이 교회들을 돌아보고자 하는 것을 막았을까요?

이는 교회를 돌아보는 것은 연약한 자들을 감싸고 위로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이건 일하는 차원이 아니에요.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는 심정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바울은 일 때문에 바나바와 대판 싸웠습니다.

이건 교회를 돌아보는 심정이 아니에요.

그런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다가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잘라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교회를 돌보는 것은 막아버리고 바울의 말대로 일을 하라고 마게도냐로 보낸 것입니다.

 

6절에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이라고 하고!

7절에서 바울이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는지라” 고 하지요.

이는 주께서 강하게 막았다는 말입니다.

 

일하는 데에는 부모의 심정이 필요가 없어요.

그건 종처럼 씨를 뿌리면 되어요.

씨가 뿌려지고 난 후에는 종처럼 일을 하면 안 되어요.

부모의 심정으로 잘 자라가도록 사랑으로 잘 보듬고 도와주어야 해요.

 

그러한데 바울의 심정은 그 심정이 아닌 겁니다.

종처럼 일만 앞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으신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3차 여행 중에는 방문한 교회들도 있어요.

 

제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성령이 막았던 그 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이 편지를 하신단 말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편지를 하였다는 말은 그들을 돌아보라는 말과 같아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주의 은혜 가운데 든든히 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아시아의 교회들이 극심한 환란 가운데 있으니 바울같이 일하고자 하는 종을 보내지 않고 예수님의 품에 안겼던 사랑의 사도를 보내서 부모처럼 돌보고 보호하고자 하심이에요.

환란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처럼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잘라내는 일하는 자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사도 요한처럼 그들을 품어 줄 수 있는 사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도들이 다 죽어가는 데에도 사도 요한은 살려 두시고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바울이 못다 이룬 교회를 돌보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러한 일을 하도록 편지를 써서 보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바울이 사랑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2차 선교 여행시에는 그 선교 여행의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 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나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씨를 뿌리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면 그들을 돌보고 위로하고 하는 일은 사도 요한에게 맡겼다는 말입니다.

환란당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천국의 소망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다른 사도들과 같이 일찍 데려가시지 않고 맨 마지막까지 남겨 두셨다가 천국을 보게 하시고 그 천국에 소식들을 위로를 받아야 할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미리 말하지만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그 당시로서는 실제 하는 교회이지만 지금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을 말해요.

 

아시아라는 말은 그 당시 하나의 주(州)와 같아요.

편의상 주(州) 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도(道)와 같아요.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라고 하는 그 아시아는 지금 이 시대 식으로서의 5 대양 6대 주(州)로 말하는 그러한 의미의 아프리카나 아시아나 유럽이나 아메리카나 하는 것과 달라요.

당시 아시아는 지금의 터키 지역을 말해요.

 

이 시대 미국을 이해하면 쉬워요.

미국은 51개의 자치 주(州)가 연방을 이루어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어요.

이와 같이 그 당시에도 로마라는 나라에 수 많은 속국들이 있었어요.

이 속국들이 마치 미국의 자치 주(州)와 같아요.

 

당시 지중해 연안에는 끝 말이 “아(亞)” 자로 끝나는 지역이 많았어요.

아시아를 비롯해서 그 주변으로 무시아, 비두니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길리기아, 밤빌리아, 루기아 라는 주가 있었어요.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함경도, 평안도, 라고 끝말이 도(道) 라는 식으로 붙여졌듯이 그 당시에는 아(亞) 자로 이름 불려 졌어요.

 

그 중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아시아 지역에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와,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었어요.

이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여기엔 비밀(秘密)이 있어요.

실제 우리가 성경을 보면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마게도냐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로마 교회,,등등등 그 외 다른 교회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내라고 하는 교회는 성경 속에서 듣도 보지도 못한 교회들이 대다수에요.

에베소 교회만 우리가 성경에서 들어본 교회이지 그 이외 교회들은 성경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들인지 들어보지 못한 교회들이에요.

 

10-11=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우리 생각에는 편지를 보내려면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성경에 없는 교회들에게 보내고 있단 말입니다.

이는 장차 일어날 교회들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게 비밀이에요.

 

그렇다고 이러한 교회들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실제 하였어요.

다만 성경의 기록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은 이 일곱 교회를 통해서 장차 이 땅에 일어날 교회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상에 따라서 교회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9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것은 역사 속에 일어날 교회들의 모습이에요.

그리고 이 교회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영적 싸움을 하게 될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또한 교회가 어떤 식으로 타락하게 될 것인지도 보여주고 있어요.

이러한 교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간섭하시고 위로하시고 이기게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이 19절 말씀이에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온 세계 교회를 말해요.

또한 온 시대의 교회도 말하고 있어요.

 

어느 시대이고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모습이 있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되어질 일들이에요.

그러므로 현재적 의미에서의 해석도 하여야 하지만 미래적 해석을 간과해서는 안 되어요.

 

쉽게 설명할게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십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시기 위하여 창조가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뭔가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역사는 마치 아파트 모델하우스와 같아요.

모델하우스는 아파트를 설명하고자 만든 것이에요.

이는 설명을 다하고 나면 철거가 되어요.

 

아사아의 일곱 교회가 그러해요.

하나님께서 아사아의 일곱 교회를 가지고 뭔가를 말해주고자 하셨어요.

그 일을 다 하시고는 철거를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 본체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본질은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살아 있지만 그 껍데기는 없어요.

 

이 역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설명을 다하고 나면 사라질 것들이에요.

그래서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태초에 주께서 땅에 기초를 두고 하늘을 지으셨다고 하지요.

이게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이에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어요.

 

그런데 이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다 멸망을 할 것들이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유한한 것들이에요.

용도가 다하면 폐기가 되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역사에 속한 예수님도 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다 시작과 끝이라는 역사에 가두어졌기 때문이에요.

 

역사에 속한 우리의 몸은 태어남과 죽음이 있어요.

죽을 몸을 왜? 태어나게 하셨는가요?

이는 하늘에 몸을 설명하기 위함이에요.

 

이 역사도 마찬가지에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자 만드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구약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서 보여 주셨고! 신약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도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의 한 모습으로 나타나겠지요.

역사를 생선 중에서 긴 갈치로 비유합시다.

갈치를 보면 머리에서부터 꼬리가 있지요.

 

그것을 역사와 같이 시간 단위로 토막을 낸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럼 갈치의 모습이 다 다르게 나타나겠지요.

모습은 다를 지라도 본질을 다 같고 그 맛 또한 다 같아요.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 그러해요.

그 본질을 같지만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요.

이걸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 전체를 갈치로 비유합시다.

 

그럼 예수님 초림 당시의 교회가 갈치의 머리처럼 나타나겠지요.

그 다음은 각각의 몸통으로 나타나다가 맨 마지막은 꼬리로 나타나겠지요.

 

지금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그러해요.

에베소를 시작해서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순으로 일곱 교회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에베소 교회가 신약의 교회 시대를 여는 시작이라고 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의 끝을 장식하는 때의 마지막 교회가 되겠지요.

그럼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담겨져 있겠지요.

물론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도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이 담겨져 있어요.

 

우리가 역사를 말할 때 선사 시대, 고대 시대, 중세 시대, 근대 시대, 현대 시대 이러한 것으로 구분을 하듯이 하나님께서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시기 때문에 각 시대마다 교회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대마다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각 교회마다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교회 상의 모습들을 정확하게 담아 놓았어요.

그러므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각 시대적 의미를 담고 있는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해석들이 분분해요.

 

어떤 이들은, 그 시대 교회들이다!

다른 이들은, 아니다 전 교회 시대를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아니다 각 시대마다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대부분 없어졌으니까 이건 영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다 일리가 있어요.

그러나 모든 성경은 모든 세대 속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해요.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 역시도 전 역사 속에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물론 그 당시의 교회로 해석을 해야 해요.

왜냐하면! 그 당시의 교회들에게 주신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면 안 되어요.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편지로서 어느 시대나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나 적용을 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나 적용을 하되 역사 속에 시대별로 나타나는 교회로도 해석을 하여야 해요.

이걸 종합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저는 종합적 해석을 해요.

 

어떤 이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내용들은 모두가 상징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해석을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영적으로 해석하여야 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도 그 사건이 주는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그 사건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상징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에요.

그러나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영적인 메시지를 담아 놓았어요.

성도는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19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물론 그 당시 교회들만 알도록 상징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 맞아요.

하지만 상징이라는 기법으로 표현을 한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상징이란? 일종의 자기편들만 알아보기 위하여 만든 비밀이에요.

 

그러니까 나타날 일을 은유적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다음 시간부터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반드시 속히 될 일로서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십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2천 년 전에 사도 요한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 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믿어지게 하시고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뜻을 눈을 열어서 보고 깨달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도 요한에게 계시한 그 계시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허락을 하셔서 교회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이 요한계시록이 남의 편지가 아니라 나의 편지로 읽혀지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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