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 (계 1:4-6)
계 1:4-6=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감람산에서 대화를 합니다.
제자들이 화려한 성전 건물을 가리키면서 은근히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 성전 참으로 멋지지요.
이에 예수님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종말의 징조들을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 첫째가 많은 적 그리스도들이 일어나서 미혹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들이 참 성도들을 핍박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 24:9절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란? 적 그리스도 세력을 말합니다.
누가 적 그리스도 세력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훼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했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훼손하고자 다른 복음을 전했어요.
다른 복음이란? 믿음에다가 율법지킴이라는 인간의 행위를 섞는 것입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예수도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 중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 얻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걸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서 선교 보고를 하였어요.
이 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어떤 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아니다!
구원은 예수도 믿고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회가 술렁거리게 됩니다.
이에 안디옥 교회가 그럼 이 문제를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문의해 보자고 하면서 바울과 바나바와 다른 형제들을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로 보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사도들과 성도들 앞에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구원 받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그 중에 바리새파에 속한 자들이 일어나서 아니다! 구원은 예수도 믿고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신이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 전한 이야기를 하면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주어진다고 못을 박아 버립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도 이러한 일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된 것이니 이방인들에게 더 이상 짐을 지우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여 볼 것은 복음은 항상 교회 안에 들어온 형제라는 자들이 가리고 핍박을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줄기차게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고!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 버렸고!
육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을 핍박했어요.
이러한 맥은 지금도 그대로 교회 안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누가 가장 신경질을 내는가 하면 율법주의와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이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당신 같이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라고 전하면 누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금을 하겠느냐고 합니다.
이들의 말을 가만히 뜯어보면 이들의 관심사는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있음을 알 수가 있어요.
오로지 교회라는 조직을 운영하기 위하여 교인들이 열심과 충성과 돈을 뜯어내기 위하여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인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종교꾼들이고 교권주의자들이에요.
이들이 오해하는 것은 복음 아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안하는 줄 알아요.
물론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의 게으름을 합리화 하여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자들이 있어요.
이 시대 이런 자들이 엄청 많아요.
그래서 복음 복음하면서 게으름과 악함으로 복음을 훼손하는 겁니다.
그러나 진짜 복음을 받은 성도들은 율법 아래 있을 때 보다 더 감사하고 열심히 해요.
억지가 아니고 감사함으로 행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복음 안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열심이에요.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열심히 담겨져 있어요.
우리가 열심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행하게 되면 그 행위가 곧 의가 되어요.
하나님은 그런 열심을 받지 않아요.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므로 주께서 간섭 하시는 성도들은 복음 안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우러나는 열심과 충성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복음 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고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은 그가 안다고 하는 복음은 배워서 알아진 지식이지 결코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고 게으름을 피우고 말썽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자들도 잘못이지만 복음 아니까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자들도 잘못이에요.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마귀가 교회 안에 가라지들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에요.
아브라함의 집에 육으로 난 자와 영으로 난 자가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육에 속한 자들과 성령에 속한 자들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육에 속한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육으로 난 자들이 발언권이 세고 힘이 있어요.
이들은 다수이고 주류로 있어요.
상대적으로 영으로 난 성도들은 미미해요.
소수이고 힘이 없어요.
그러니 늘 소외당하고 이들의 말이 신청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 하려고 요한계시록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환란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주어진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편지의 내용이 모두가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들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너희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환란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나의 택함을 입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먼저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인 줄을 알라고 하지요.
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나요?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악에 속하였음을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빛이 어둠을 비치니까 어둠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을 미워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진짜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이는 세상에 있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란 뜻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하였어요.
하나님을 떠난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에요.
알다시피 아담이 범죄 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어요.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곳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 있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담은 뱀의 미혹으로 생명과를 먹지 못한 채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가 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산 자들이 사는 곳인 에덴동산에서 죽은 자가 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좇아낸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배려한 것이고 사랑한 것이에요.
어째서 사랑인가 하면 죽은 자가 산 자와 있으면 서로 불편해서 못 살아요.
쉬운 말로 조폭은 조폭 문화가 익숙한 조폭 세계에서 살아야 거기가 천국인 거에요.
조폭을 착한 사람들 무리에 두면 그것 자체가 고문이고 불편해요.
즉 죄인은 죄인들과 살아야 편하지 죄인이 의인들과 살면 불편해서 못살아요.
건달은 건달과 어울려야 재미있고 좋아요.
에덴동산은 죄 없는 의인들이 사는 곳이에요.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배려해서 죄인들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시켜준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사는 곳에서 이 놈들이 자신들이 의인인체 하는 거에요.
즉 죽은 자들이 산 자 인체 한단 말입니다.
생명도 아닌 것들이 생명인척 사기를 치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진짜 생명이신 예수님을 보내서 너희는 가짜라고 고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세상이 발칵 뒤집혀 진 겁니다.
마귀가 비상이 걸린 겁니다.
마귀가 그동안 죽은 생명을 가지고 진짜 산 생명인 것처럼 사기를 쳐 왔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는 죽은 자라고 정체를 폭로시켜 버립니다.
너희의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가짜라고 하면서 내가 진짜 생명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예수가 미운 겁니다.
예수가 없으면 진짜로 행세 할 수가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세상이 예수를 미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내가 참 빛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세상이 알고 있는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가짜임을 드러내게 하는 말이에요.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고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예수님만이 참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마귀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미혹했어요.
지금도 마귀는 교회 안에서 구원 받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해요.
예전에 감리교 신학대학 총장이었던 변선환이라는 분은 구원을 산 봉우리에 올라가는 것으로 비유하면서 산 봉우리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불교와 같이 타 종교로도 구원의 길이 있으니까 기독교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천주교에서도 그래요.
그들은 꼭 예수를 믿어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요.
그러니 타 종교를 배척하지 말고 서로 어우러져서 잘 살면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냐?
그러니 기독교만 옳다는 말을 하지 말고 타 종교도 좀 받아 주라고 합니다.
말이야 참 좋지요.
올해 WCC 총회를 부산에서 했어요.
이걸 한국의 많은 교단들이 참가했어요.
WCC 사상은 종교 다원주의에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교회가 이들과 같이 어깨동무하면서 같은 길을 가고 있어요.
이는 스스로가 우리는 하나님이 세운 교회가 아니고 인간들이 만든 세상 종교와 같습니다 라고 자기 정체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짜들을 한 단으로 묶는 일을 하신 겁니다.
앞으로 더욱 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한국교회의 주류로 행세할 거에요.
복음 전하는 교회는 쇠퇴하게 될 것이에요.
이게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의 운명이에요.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전하는 우리들은 결국 기독교를 가장한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는 짝퉁 기독교인들 손에 이단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이외 구원 얻을 길을 주시지 않았다고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늘로서 나신 분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신 참 생명이기 때문이에요.
땅에서 난 자들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에요.
세상의 종교는 다 땅에서 난 것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 세상 사람들아!
내가 보낸 내 아들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성경을 통해서 공표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가 난리가 난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만든 종교로도 구원 받을 수 있고 인간들의 열심과 충성으로도 의로워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가 와서 아니라고 하니까 자기들의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것으로 들통이 나게 생겼으니 예수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를 죽이고 이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죽었던 예수가 사흘만이 부활을 한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영인 성령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내 주었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여기저기서 예수만이 참 생명이고 참 빛이시고 참 진리이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증거하는 자들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천하 만민에게 구원 얻을 이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귀가 자기 졸개들을 동원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핍박을 한 곳이 사도들이 세운 예루살렘 교회에요.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자 오순절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온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냥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예수만이 참 생명이고 진리이고 빛이고 하나님께 인도하는 구원자라고 합니다.
예수쟁이들의 말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산 불을 끄려고 막대기로 불씨를 쳤더니 그 불씨가 온 산에 흩어져서 더 큰 산불을 내고 온 산을 다 태우는 형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교 신자들이 깡패들을 동원해서 핍박을 하잖아요.
바울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도 바울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유대교 신자와 같은 율법주의자들이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면서 난리를 쳐요.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이 유대교와 같아졌어요.
전부 행위 신앙으로 치닫고 있어요.
왜? 행위 신앙으로 치닫느냐 하면 교회라는 거대한 종교 시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운영하자면 교인들이 돈도 내고 조직을 위해서 움직여 주어야 하거든요.
교인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교회를 위하여 돈을 내고 충성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고 복 받는다고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복 받는 일이라면 열심을 내고 충성을 해요.
종교꾼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교인들의 주머니와 열심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교회에 열심히 하면 복을 받는다고 기복사상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 한다고 가르치는 거에요.
이 사상은 에덴동산을 쫓겨난 모든 인간들이 바라는 바에요.
인간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잘 먹고 죽은 귀신 땟깔도 곱다고 하겠어요.
인간들에게 있어 신이란? 자기 배를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해요.
이걸 세상 종교들이 해결해 주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 이외 모든 종교는 이 땅에 복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복을 받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그 저변에는 인간의 가치를 챙기고자 하는 인간 존엄 사상이 깔려 있어요.
이러한 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인본주의는 절대가치에요.
천주교가 여기에 앞장 서서 외쳐요.
인간은 존귀하다!
종교의 근본은 인간 사랑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하나가 되어서 인간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번에 교황이 방문해서 뭘 말하든가요?
인간 사랑이에요.
그러니 사람들이 열광하는 겁니다.
이게 적 그리스도이고 마귀인데 말이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마귀의 세상이에요.
이러한 곳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외치면 미친 놈 소리 듣기 딱 십상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는 교회 안에서 야! 우리가 그동안 너무 편협하게 전도를 했다!
이제는 지평을 좀 넓힐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타 종교를 너무 배척하지 말고 우리도 통이 크다는 것을 좀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종교 일치 운동을 벌리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에 중들이 와서 설법을 하고 목사들이 절간에 가서 설교를 하는 시대가 되어 말았어요.
이러한 집단을 통틀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음녀라고 해요.
교황의 치마폭으로 온 세상 종교를 감싸고 있어요.
한국교회도 그 치마 폭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어요.
이제는 카토릭과 기독교의 경계가 무너졌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카토릭과 기독교는 같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힘 주어 말합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달라요.
근본이 달라요.
천주교는 이단이에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WCC 총회를 통해서 모든 종교와 우리는 한 형제라고 했어요.
새로운 바벨탑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게 작금에 우리가 처한 신앙의 현실이에요.
이러한 곳에서 진짜 복음을 외치는 자들은 외로울 수 밖에 없어요.
또한 고난 일 수 밖에 없어요.
이 시대 사도 요한이 유배당한 밧모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종교통합을 외치는 그 속에서 그건 아니라고 외치는 현장이 바로 밧모섬인 겁니다.
우린 주여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 할 수 밖에 없어요.
신앙은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동일해요.
그 사상은 바뀌지 않아요.
2천 년 전에 우리의 믿음에 선배들이 예수 믿음 때문에 환란을 당하였다고 한다면 지금도 환경은 다를 수가 있어도 그 영적 상황은 동일해요.
또한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을 통하여서 위로 하셨듯이 지금도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위로의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다시 봅시다.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지요.
여기서 세상은 광의적으로는 이 세상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인본주의와 율법 신앙을 가르치는 유대주의자들을 말해요.
예수가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한 통속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가 오자 홍해가 갈라지듯이 두 부류로 쫙 갈라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한 형제인줄 알았는데 아닌 겁니다.
이렇게 갈라지면 자연히 상대는 적이 되고 맙니다.
나와 다름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나와 다르면 적이에요.
배척의 대상이에요.
이런 사고는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어요.
이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가 내 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만 있어요.
예수님 편이든지 아니면 마귀편이에요.
영적 중립 지대는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택함을 입었어요.
택함이란 강제성이에요.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예수님이 홀로 일방적으로 넌 내꺼야! 하면서 확 낚아챈 겁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니 구원 받은 자로서 세상을 산다는 것이 낯선 겁니다.
우린 세상이 편해요.
세상의 가치로 세상의 사고로 사는 것이 편해요.
그게 익숙해요.
우리에겐 여전히 떡이 복음이지 죄사함이 복음 일 수가 없어요.
떡의 가치로 사는 세상에서 말씀에 가치로 산다!
이건 고난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자라고 알려 주시고 세상에서 예수의 것으로 산다는 것은 힘들고 아픈 일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위로가 되려면 위로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어야 해요.
지금 사도 요한이 그 지경에 처하여져 있는 겁니다.
알다시피 사도 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쓰게 된 때가 밧모 섬에 유배되어서 오늘 내일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에요.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성도들의 모습이 사도 요한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밧모 섬에 유배당한 자들이에요.
밧모라는 말이 “송진(松津)”이라는 뜻이에요.
송진이란? 소나무의 진액(津液)입니다.
소나무 진액은 소나무의 피와 같은 것이에요.
이걸 직역하면 밧모 섬이란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이 어떤 곳이냐 하면 성도들의 피를 짜내는 곳이에요.
성도들은 세상에서 피 흘림을 당하고 있어요.
누구 때문에 피 흘림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 때문이에요.
복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와 그 복음 때문에 피 흘림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늘에 있는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피 흘리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떡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에요.
위로와 평강은 피 흘리는 자들에게만 주어져요.
피 흘림이 없는 자들에겐 위로와 평강이 주어지지 않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은 오직 예수님에게 택함을 입은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주시려고 자기 백성들을 위로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몰아넣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알게 하시려고 환란 가운데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게 역설이에요.
신앙은 역설적이게도 고난 속에서 감사가 나오고,
환란 가운데서 소망을 붙잡게 되고,
사망 가운데서 생명을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지옥에서 천국을 보게 한단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을 봅시다.
고후 1:1-7=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합니다.
이건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와 같아요.
무슨 편지를 보냅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있어요.
왜?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가 하면 지금 고린도 교회가 처한 환경이 환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은혜와 평강이에요.
3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자비의 하나님이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비롭고 위로하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디에 던져 놓았다고 합니까?
환란 가운데 던져 놓았다고 합니다.
환란 가운데 던져 놓고서는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요.
5절을 보세요.
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고 하지요.
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덮쳐왔는가요?
이는 그리스도의 위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No cross
No crown 이에요.
무슨 말인가요?
십자가의 죽음이 없는 한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이 없으면 예수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혜와 평강도 없다는 말입니다.
위로가 위로 되려면 먼저 환란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환란 속에서 위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환란 받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왜? 환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는 책인가요?
이는 환란을 이기고 벗어난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복속(服屬)된 자들이 환란 당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일찍 목 베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니 너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다고 하여도 슬퍼하거나 낙심 할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는 영광이고 복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팔자로 사는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예수님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마귀가 알아서 그렇게 대우 해 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으로 위로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역설적입니다.
역설적이라 함은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나쁜 것을 먼저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해 두셨어요.
그런데 천국은 반드시 지옥을 통하여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창세전 언약은 은혜와 평강의 언약이에요.
은혜와 평강은 반드시 아픔 속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시고 나중에 건져 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환란 가운데 던져 놓고 위로를 주시고 법 아래 가두어 놓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에 동참하기 위한 수순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옥이 없으면 천국을 몰라요.
천국이 천국 되려면 지옥이 바탕 화면처럼 깔려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의 은혜와 평강이 주어지려면 지금 모습이 은혜 받아야 할 입장에 있어야 하고 위로와 평강을 받아야 할 처지에 처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와 평강을 주시려고 지옥에 던져 넣은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이 세상에서의 모습이에요.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눈물을 닦아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번 보고 갑시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4절을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신다고 하지요.
모든 눈물이란? 여러 가지 눈물 흘릴 일들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보면 여러 가지 눈물 흘릴 일들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한 가지 눈물 흘리는 일이 아니고 수많은 눈물 흘릴 일들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쉬운 말로 먹고 사는 일에서부터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갖가지 아픔들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은 세상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을 바꿔주고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주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 요한을 밧모 섬에서 탈출시켜주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 요한이 천상에 갔다 왔다고 해서 밧모 섬에서 유배가 풀린 것이 아니에요.
여전히 밧모 섬에 유배당하고 살았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어요.
사도 요한이 남은 여생을 유배지에서 보냈지만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환란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겨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세상 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에요.
영적인 것이에요.
미래에 소망을 주는 것이에요.
지금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담은 편지를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처한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이겨내라고 주신 것이에요.
너희들이 비록 죽을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까?
이는 너희의 주(主)시고 너희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너희를 지키시고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예수그리스도에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과 화목 된 자들에게만 주어져요.
본문을 다시 봅시다.
계 1:4-6=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5절을 보세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셔서 땅의 임금들에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주어진다고 하지요.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 은혜와 평강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들에게 주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말은 “카리스” 라는 말인데 여러 의미가 있는데 그 중에 덮어준다는 의미가 있어요.
이게 최초로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발가벗음을 덮어주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즉 죄의 수치를 가려주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스가랴 3장을 봅시다.
슥 3:1-5=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 곁에 사단이 서 있구요.
그런데 여호수아의 모습이 불에 그슬린 것처럼 더럽고 추해요.
이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더러운 추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구요.
사단이 이 모습을 참소하는 겁니다.
이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줍니다.
이를 네 죄과를 제하신다고 합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의 속성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피조물에게 다가 오면 덮어주는 것으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가죽 옷을 입혀 주었어요.
이게 은혜의 모습이에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안고서는 두렵고 불안해요.
마음에 쉼을 누릴 수가 없어요.
마음에 쉼은 수치의 가리움을 받아야지만 얻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먼저 수치를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에요.
평강이란? 이 덮어줌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해요.
수치를 덮음 받고 보니 마음에 쉼이 오는 겁니다.
그동안 수치로 인하여 두려웠는데 그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니까 쉼이 오는 겁니다.
이렇게 쉼의 상태를 평강이라고 해요.
예를 들어서 말합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님이 아끼는 도자기를 깨트리는 잘못을 저질렀어요.
이제 부모님에게 혼이 나야 합니다.
혼이 나기까지는 두렵고 떨려요.
조마 조마하면서 잠도 못 자요.
그런데 부모님이 용서 해 주셨어요.
그러자 긴장이 풀리고 잠이 오는 겁니다.
부모님의 용서가 잠을 몰고 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성경은 안식한다고 합니다.
이 안식이 바로 평강인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을 준다는 말은 지금 자기 백성들이 쉼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무엇 때문에 쉼을 얻지 못하고 있나요?
작게는 사단의 참소로 인한 것입니다.
사단은 율법으로 끊임없이 참소해요.
너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너 그러고도 신자라고 할 수가 있느냐?
사단은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참소합니다.
이 참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이겨요.
나의 죄를 예수님의 대속하심으로 용서 받았음으로 이길 수가 있어요.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복음으로 사단의 참소를 이기게 하세요.
그 다음으로 두려움을 몰고 오는 것은 죽음입니다.
사단은 죽음을 무기로 하여서 성도들을 겁박해요.
이 겁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이 없으면 이기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임하자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어요.
이제 마음에 쉼과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죽음에 쫓기는 성도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와 평강이 뭔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너희가 지금 환란 가운데서 설령 죽는다 하여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운명은 죽었다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싸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죽으면 살려 줄게!
그러니 걱정 하지 마!
나 예수가 보증해 줄게!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곁에 서서 응원하고 있는 겁니다.
야! 정낙원이 누가 너를 뭐라고 하여도 흔들리지 마!
내가 널 지켜줄게!
예수님이 수호천사가 되어준다고 해요.
저는 이 사실을 믿어요.
지금까지 수없이 어렵고 힘든 일들을 겪어왔어요.
복음 전하다 보면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들어요.
온갖 음해와 방해를 받아왔어요.
그럴 때마다 속이 상해요.
너무 힘이 들어서 목사하기 싫다고 도망치고자 할 때도 있었어요.
참으로 위태위태한 고비들을 많이 넘겨 왔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셨어요.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의 증거에요.
저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서 계신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우린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에요.
속된 말로 돈 많이 벌게 해주고 직장에서 승진시켜 주고 하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 가치를 초월하게 해 주시는 것이에요.
위에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세상 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에요.
그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요?
이는 그의 피로 죄사함을 주시고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먼저 죄사함이 주는 은혜를 살펴봅시다.
사람이 환란을 당하고 죽는 것이 저주가 아니에요.
저주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것이에요.
모든 저주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요.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를 저주하느냐 하면 자신과 관계가 틀어진 자들에게 하세요.
이들이 누구냐 하면 죄인이에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과만 상종을 하세요.
죄 없는 자들과만 사귐을 가지세요.
그런데 우리는 범죄 한 조상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죄인이에요.
개가 강아지를 낳고!
바퀴 벌레가 바퀴 벌레를 낳듯이,
죄인이 죄인을 낳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래적으로 죄인인 겁니다.
죄인인 우리 조상이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는 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도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원수 된 자들에게 날마다 분노를 쏟아 부으세요.
시편을 봅시다.
시 7:11-12=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하나님은 매일 분노 하신다고 하지요.
화살을 당기고 있다고 하지요.
한 번 상상해 보세요.
화살을 우리를 향하여 당기고 있어요.
놓으면 죽어요.
그래서 인간들의 모든 날이 하나님의 분노 중에 지나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쏟으신 분노가 바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이에요.
인간들은 일평생 두려움에 쫓기고 살아요.
죽음이 미친개처럼 달려오기 때문에 죽지 않고자 일평생 쫓기는 삶을 살아가요.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그러므로 죄인은 일평생 죽음에 쫓기는 피곤한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비는 것이 뭔가요?
건강이에요.
매년 1월 1일이 되면 해 맞이 하면서 빌잖아요.
그 때 모두가 한결같이 비는 내용이 뭔고 하니 건강이에요.
제 1 순위가 자신의 건강이고 가족의 건강이에요.
그만큼 인간들에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고 하겠어요.
그래서 죄 아래서 난 인간들은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경주한 것이 불로장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오래 살까를 궁리해 왔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요.
인간들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음은 죄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인간 쪽에서 주관을 한다고 하면 어찌 한번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죄 문제는 하나님이 주관을 하신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죄 없다 하시기 전에는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할 수가 없어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범죄 한 후 자기들 방식으로 죄의 수치를 가리고자 하였어요.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으면 수치가 가려진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자기들 생각이에요.
하나님 앞에 수치스럽다고 치마를 해서 입었다고 한다면 수치는 아담의 방식으로 가려서는 안 되어요.
하나님 방식으로 가려져야 해요.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을 보고 누가 너 더러 발가벗은 것을 수치라고 하더냐고 묻습니다.
너희들 지금까지 발가벗고 살았잖아!
그러고도 그걸 수치로 여기지 않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지금은 발가벗음을 수치라고 여기느냐!
발가벗음을 수치라고 여기게 한 그 놈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 놈이 바로 죄입니다.
아담은 이미 죄에게 졌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되었어요.
죄를 이기지 못해요.
이에 하나님이 죄가 몰고 온 수치를 가려주십니다.
어떻게 가려 주셨느냐 하면 아담의 죄를 흠 없는 짐승의 죽음으로 가려 주셨어요.
아담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하여 흠 없는 짐승이 죽었어요.
그리고 가죽을 벗김 당합니다.
그 가죽으로 아담의 수치를 가리는 옷을 만들어 입히십니다.
이게 대속의 은혜에요.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났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어요.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께서 옆구리에 창으로 찔린 것은 우리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채찍에 맞고 창에 찔림 당하여야 하는데 예수님이 당하셨어요.
그런데 이러한 것을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을 시키셨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흠 없는 짐승을 죽이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혀서 수치를 기려 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묻지 않고 예수님에게 물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들을 성도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게 비밀이에요.
오직 성도만이 아는 비밀이에요.
성도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죄 가운데서도 죄를 지으면서도 심판에 이르는 정죄를 당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그 아들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 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걸 믿어지게 하시려고 성령을 우리 안에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알려 주시는 겁니다.
얘들아! 너희들 죄를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셨단다!
그러니 이젠 죄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사 너희가 죽는다 하여도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나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지칭 할 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하지요.
이는 항상 존재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현재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도 계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현재 우리를 지키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제의 하나님도 아니고, 미래의 하나님도 아니고, 지금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구원을 현재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어떻게 지켜내셨는가요?
죽였다 살려 내는 식으로 지켜 내셨어요.
그것이 때로는 홍해바다 속에 집어넣었다가 빼내는 식으로 지켜 내셨어요.
적국에게 포로 잡혀 가게 하셨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지켜내셨어요.
이스라엘은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다귀 골짜기와 같이 죽게 하였다가 다시 살려 내는 일들을 수없이 반복하여 왔어요.
왜?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자기 백성들을 죽였다 살려내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나요?
이는 지금 자기 백성들의 운명이 죽음에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환란 속에 던져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에게 내가 구약 이스라엘을 죽였다 다시 살려내신 것처럼 너희도 죽어도 다시 살려 낼 것이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말씀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였다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할 때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 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죽었다 살아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밧모 섬에 유배당해서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보증을 해 주시니까 염려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인 것입니다.
이 은혜와 평강을 아시아에 일곱 교회에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기가 받은 그 은혜와 평강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사이아 일곱 교회는 온 세계의 교회를 말해요.
일곱이란? 창조의 수로서 완전 수이고 충만 수에요.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시대를 초월하고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전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교회나 현재의 교회와 미래의 교회 전부를 말해요.
지금 우리 교회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 울산목양교회 성도들아!
LA 모퉁이돌교회 성도들아!
이 편지를 보는 모든 성도들아!
누가 너희를 뭐라고 하여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그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조건으로 인하여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아요.
믿음은 모든 조건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에요.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였어요.
극심한 환란 가운데 있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발각당하면 가산을 적몰 당하고 죽음에 넘겨지는 일들을 당하였어요.
이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것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난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을 환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하면 지금 고난 속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제사장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이 뭐냐?
제사 지내는 자에요.
흠 없는 제물로 죄인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자에요.
레위기를 보면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 나와 있습니다.
제사장 속에는 두 의미가 있어요.
먼저는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나중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성도들을 말해요.
예수님이 참 제사장이고 우리는 제사장적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에요.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불러서 회막에서 드려질 제사에 대하여 알려 주십니다.
회막이란? 성전을 말해요.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에요.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납니다.
회막에서 부른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부른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너희들 예수 믿느냐?
그럼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1장에서 7장까지 보아야 하는데 대표적으로 1장만 봅시다.
레위기 1:1-9=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를 보면 5대 제사가 나옵니다.
5대 제사를 크게 나누면 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사와 감사로 드리는 제사 이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죄를 위한 제사는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하여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제물을 불에 태워서 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물이 태워지는 것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합니다.
향기로운 냄새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모습을 노아 홍수 때 본 사건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사를 지냅니다.
이 때 정결한 짐승을 제사로 드리자 하나님께서 흠향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을 흠향 하시고 다시는 물로 심판 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셨어요.
번제는 노아의 제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번제로 드려지는 제물은 모두 각을 떠서 태워지는데 유독 한 가지만 태우지 못하게 하였어요.
제물의 가죽이에요.
하나님은 그 가죽을 제사장의 몫으로 주었어요.
가죽 그러면 퍼뜩 생각나는게 있지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신 가죽 옷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옷을 입혀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죽 옷 사건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이걸 제비 뽑은 자가 가지고 가지요.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자들이 입는 옷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옷을 벗어서 제비 뽑은 자에게 주신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하여 희생당한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힌 것과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상징하는 번제 제사에서 하나님께서 그 제물 되는 흠 없는 짐승의 가죽을 바로 제사장들의 몫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로 죽은 제물의 가죽 옷을 제사장들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제사장들입니다..
예수님이 벗어준 그 옷을 입고 있어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고 하지요.
번제물의 가죽을 제사장에게 분깃으로 주었듯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이 벗어준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대속의 옷인 겁니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린 옷을 입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건 벗으면 안 되어요.
항상 입고 있어야 해요.
번제를 거쳐 온 자에게 주어지는 제사가 소제입니다.
소제는 곡물을 고운 가루에 기름을 치고 소금을 쳐서 떡을 만들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도 불로 태우는 화제로 드려집니다.
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가루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에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맷돌에 갈려져야 해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발가 벗겨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여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안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세요.
그러니까 고운가루로 드려지는 소제는 성도가 성령으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진짜 소제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순종하신 것을 말해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제사장들인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먹음으로서 소제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재물을 드렸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라는 제물을 힘 입고 아버지께 나아가 우리 자신들을 드려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화목제가 있습니다.
화목제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제사에요.
이것은 각 사람의 생활 형편에 맞게 소나 양이나 염소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는 각자 받은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든 옥합을 깨트린 것을 가지고 제자들이 시비를 할 때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화목제는 각자의 신앙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남겨진 제물을 먹음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려짐을 각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목 제물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깨달음과 비례되어 나타나요.
많이 깨닫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적극적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고,
적게 깨달은 사람은 소극적으로 게으름을 피우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빤질거리면서 취미 생활하듯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못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신앙생활을 깨닫는 만큼 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어요.
무엇을 즐겨 내는가요?
우리 자신이에요.
우리 자신이 제물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을 봅니다.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설명했어요.
의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교리에 대하여 설명 했어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알려 주었어요.
그럼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그 이야기를 12장 이후부터 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장 이후부터의 내용이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몸을 산 제물 되게 하여서 예수님이 사셨던 그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제사장이 하는 일이에요.
이 일을 행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 삼았어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는 교회에요.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속성으로 세워져 가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담당하는 것으로 세워져요.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믿음이 강한 자들이 더 많은 수고를 하게 되고 더 많은 열심과 충성과 헌신과 연보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어요.
자신이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자신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고 있음을 알아요.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좋은 분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고 더 많은 수고를 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제물로서의 산 제사의 삶인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로 하기 때문에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하면서 각자 받은 은사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감사하고 서로 섬기고 봉사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소제와 화목제의 삶이에요.
이 소제와 화목제의 삶을 하나님 나라 제사장들인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어요.
이 제사는 살다가 부지중에 죄를 짓거나 남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드리는 제사에요.
속죄제니 속건제니 하는 제사는 여호와의 금령을 어겼거나 또는 이웃에게 죄를 지었거나 혹은 피해를 입혔으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죄를 짓게 됩니다.
사람에게 짓건 하나님에게 짓건 지어요.
신앙적인 죄이든 삶 속에서 일어나는 죄이든 우리는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몸을 가지고 살고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이 아니고 죄 가운데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죄짓고 사는 것을 합리화 시켜주고 면죄부를 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의 존재가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마땅히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
이건 성도의 정체성이고 지향성이에요.
하지만 정체성이 맞고 지향성을 안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지향성와 정체성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이 죄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되어요.
우리 몸은 죄 아래서 난 몸이에요.
그러므로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걸 아시고 피할 길을 주셨어요.
그것이 속죄제와 속건제에요.
그런데 속죄제는 성막의 직분에 따라서 제물의 차이가 있어요.
제사장이 지은 죄와 백성들이 지은 죄를 다르게 취급해요.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소를 잡아 드리지만 평민들이 죄를 지으면 양이나 염소를 드려요.
가난한 자들이 죄를 지으면 산비둘기를 잡아서 드려요.
이 보다 더 가난한 극빈자들은 곡물의 고운 가루로 드렸어요.
이건 죄를 간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큰 죄 작은 죄를 따지지 말고 죄 자체를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하여 부자든 가난한 자든 간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린 이 모든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이기 때문에 제사가 주는 그 의미를 곱 씹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제사는 다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들을 예표하기도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는 것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이 된 자로서 살아가요.
그러므로 하루 하루가 우리 몸을 제물 삼고 산 제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분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예수와 하나 된 자로 사는 자들이에요.
세상은 성도를 통하여서 예수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삶이 쉽지 않아요.
하지만 감당케 해 주세요.
하나님이 제사장의 직무를 잘 감당 하라고 은혜와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우린 은혜와 평강을 받았어요.
지금도 받고 있어요.
물론 앞으로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한다 하여도 낙심하지 마세요.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증거이므로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감사하여야 하는 일이에요.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 평강을 맛보는 자들이에요.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입니다.
동구 밖에 오시고 계세요.
그러니 믿음으로 소망가운데서 범사 속에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위로부터 주어지는 그 은혜와 평강을 받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비록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고난 일지라도 이 모든 것을 이기고 벗어난 승리자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고난 가운데서 주를 바라보게 하시고, 아픔 속에서도 찬송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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