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의 수수께끼 (삿 14:1-20)
삿 14:1-20=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2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3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 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 4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5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 지르는지라 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7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더라 8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9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10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11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15 제 칠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로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 하냐 16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 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 하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17 칠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 18 제 칠일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 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9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20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 되었던 그 동무에게 준 바 되었더라”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든 성경을 예수님께서 하신 일로 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자기 백성 구원 이야기로 보라는 뜻입니다.
특히 사사기 서에서 사사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어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을 하는지 그림자로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성도)를 상징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의 결과물로 생겨난 것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이스라엘이 나중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아브람 언약을 보면 그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즉 버려짐과 되찾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되어진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ㅗ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기로 하셨다고 하지요.
그 신령한 복이 무엇인고 하니 구원이에요.
그런데 그 구원이 어떻게 주어진다고 하나요?
죄 아래 가두어진 자를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이 죄악 된 세상에 죄인으로 출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했습니다.
그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생겨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도 언약 때문이고,
출애굽 한 것도 언약 때문이고!
가나안에 들어 간 것도 언약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 속에는 성도의 구속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그 구속사는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한 것입니다.
출생에서부터 죽음 이후까지 모두가 언약이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어요.
언약에 의하여 태어났고!
언약에 의하여 다스려졌고!
언약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어요.
이게 이스라엘의 팔자에요.
우리들 팔자에요.
우리는 독자적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에요.
철저히 언약에 다스림을 받고 있어요.
이것이 믿어지면 대박이고 안 믿어지면 짜증이 폭발합니다.
믿어지는 자는 아멘 감사합니다! 가 니오고!
안 믿어지는 자는 내가 당신 시다비리요! 라고 신경질을 내요.
사사 시대는 구약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사사 시대와 같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사시 시대는 타락과 징계 그리고 회복의 악순환을 걸어 왔습니다.
이는 구약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사기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려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어떤 상태인가요?
죄 아래 가두어진 상태에요.
죄인을 다루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다툼이 많다는 말입니다.
말을 안 들어 먹는 종자들을 간섭하자니 얼마나 속이 터지겠어요.
그러나 그 일 자체가 창세전 언약에 의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담당할 몫인 겁니다.
성경의 주제는 인간 구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하여 죄인의 구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도 시키지 마세요.
이 사실이 전도가 되면 인간 구원이 주(主)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는 객(客)이 되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主)이고 인간 구원은 객(客)이 되어 그 은혜에 종속되어서 따라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2장을 봅시다.
엡 2:1-9=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靈)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허물로 죽은 자를 살렸다고 하지요.
즉 죄인을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왜? 구원 했다고 합니까?
이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고 오는 세대 속에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려고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구원 받았다고 자랑하지 말고 이런 망나니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천국을 선취적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쉬운 말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천국을 이 세상에서 사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천국의 모습이 어떤가요?
요한계시록 4장을 봅시다.
계 4:1-1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성령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여 주시고는 천국에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는 교회가 이 모습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천국을 보니 보좌가 하나 놓여 있는 겁니다.
그 보좌에 하나님이 보석의 모양으로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24장로들이 세세토록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창세전 언약에서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왜? 구원 했느냐?
세세토록 영광 받기 위해서에요.
영광 받기 위하여 만물을 지으셨다고 하잖아요.
그러므로 성경의 초점을 우리의 구원이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요점은 인간의 타락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의 악함을 고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간섭하시고 구원해 내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사사기를 통해서 지독히도 말을 안 들어 처먹은 인간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시는 하나님의 그 아프디 아픈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속 섞이는 자식을 보듬어 아는 부모의 심정이에요.
우린 하나님의 은혜 앞에 압도당하여야 해요.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인간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런 죄인을 그 아들의 피 흘리심으로 통해서 구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그 아들을 통하여 구속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습니다.
그 아들의 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천국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미하는 것도 다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구원의 목적이 뭐냐?
하나님의 그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하여 죄가 있고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이 예정에 의하여 은혜가 역사 속에서 하나 둘씩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이 세상에 나타났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을 보내사 우리 죄를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라고 확증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정점이에요.
은혜는 이미 창세전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난 후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야! 우리의 구원이 장난이 아니구나!
세상에~ 창세전에 주시기로 작정 된 것이구나!
그 작정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구나!
세상에 이럴 수가!
놀라고 또 놀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주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십자가에 죽어 주심이 창세전에 예정 된 것이라는 것에 놀라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냥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미 계획 된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감격하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창세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세전에 예정하였던 그 은혜의 정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세전 언약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역 추적하여서 창세전에 예비 된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시작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 시작이 어떻게 흘러 흘러서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은 그 은혜가 십자가에까지 흘러오는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구약 속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것들이 많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것도 성경 속에는 예수님께서 하실 일들을 예표적으로 깔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가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 이야기도 창세기가 시작되기 전인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태초부터 있던 그 은혜가 역사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을 하였어요.
조금씩 서서히 구약을 통해서 드러나더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꽃을 확 터트린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고 본 것을 태초부터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듣고 보고 만졌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한은 그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보았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본 것입니다.
은혜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태초에 계셨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를 스킨쉽 하는 겁니다.
보고 듣고 만진바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부뚜막에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맛 보아야 해요.
경험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고 경험하는 자들은 넉넉함이 있어요.
까칠하지 않고 여유가 있어요.
이건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보고 배부름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은혜 아래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을 구원 받은 신자라고 해요.
예수는 구경하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은 예수에 대하여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씹고 뜯고 맛 보는 것이에요.
예수는 먹고 배부름을 얻어야 할 양식이에요.
예수를 양식으로 먹고 사는 신자들은 예수와 같은 마음이 나오고, 예수를 구경하는 불신자들은 예수의 마음이 나오지 않아요.
예수를 양식으로 먹고 사는 신자들은 은혜로 살고, 예수를 구경하는 불신자들은 법으로 살아요.
은혜가 나오면 예수를 먹는 자이고, 법이 나오면 예수를 구경하는 자들이에요.
동일한 복음을 말해도 어떤 사람은 따뜻함이 묻어 나오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쌀쌀함이 묻어 나와요.
이는 예수를 먹은 자와 구경하는 자의 차이에요.
예수를 먹고 사는 자들은 넉넉하고 여유가 있고 포용적이지만, 예수를 구경하는 자들은 조급하고 쫓기고 배타적이에요.
예수를 먹은 사도들을 보세요.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그들은 넉넉했어요.
극한 가난 속에서도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넉넉함으로 살았어요.
목숨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고 좇기면서도 비판하고 정죄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보듬어 주면서 살았어요.
이게 예수를 먹은 자들이 삶이에요.
사도 요한이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과 한 몸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인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그 세계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이란? 하나님의 손길을 맛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느끼는 것을 예수로 산다고 합니다.
성경을 인간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에서 함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반면에 신약 성경은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창세전에 계셨던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개입을 하셔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셨고 지금도 동행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어요.
지식으로만 알았어요.
지식이다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과 동행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알려 주십니다.
내가 부활한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합니다.
내가 분명히 죽었고 내가 분명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제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성도들 속에 들어가서 이 사실들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성도는 사도 요한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태초에 계셨던 그 말씀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된다고 합니다.
구약을 보면 여호와의 천사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여호와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장차 여호와 되신 구원자가 인간의 몸을 입고 실제로 역사 속에 나타날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마당에 여호와의 사자가 가현(假現)적으로 나타난 사건은 곧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옵니다.
이는 여호와가 이삭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오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기에서 삼손은 마지막 사사입니다.
사사기는 구약 이스라엘 전체를 축약하고 있기 때문에 삼손의 시대는 곧 구약 이스라엘의 마지막 때를 상징하고 있어요.
이러면 삼손이 구약의 마지막 사사가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라고 하였으니 구약의 마지막 때가 되면 삼손과 같은 사사가 출현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구약의 마지막 사사와 같아요.
삼손은 예수님을 예표(豫表)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예수님의 출생과 방불한 모습으로 출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삼손의 잉태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리고 삼손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이건 마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성령의 능력으로 아이를 낳을 것을 미리 수태(受胎) 고지를 해 준 것과 같습니다.
사사기 13장을 봅시다.
삿 13:2-5=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 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가 나옵니다.
삼손입니다.
“소라” 라는 말은 “천벌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단 지파”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단 지파는 야곱의 유언을 보면 길의 첩경에서 사람을 물어서 죽이는 뱀을 상징하는 저주 받은 지파입니다.
창세기 49장을 봅시다.
창 49:16-17=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심판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지파 같이” 라는 말입니다.
이는 지파가 아니란 말입니다.
쉬운 말로 지파도 아닌 것이 지파 행세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가룟 유다와 같아요.
가룟 유다는 12 제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12 제자 군에 들어와서 12 제자 노릇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는 멸망 받기로 작정된 자라고 했습니다.
멸망 받아야 할 자를 왜? 12 제자 군에 넣었을까요?
이는 단 지파처럼 심판하는 일을 수행케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자리에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바울을 집어넣습니다.
가룟유다는 바울이 들어갈 자리를 임시직으로 잠깐 행세한 것이에요.
이해되시지요.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가 있습니다.
“소라”는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곳에 “뱀”을 상징하는 “단 지파”에 속한 “마노아” 라는 사람이 살고 있어요.
삼손이 마노아에게 태어납니다.
그럼 삼손이 태어나는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곳이란 말입니다.
알다시피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럼 소라 땅에 단 지파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저주한 땅에 죄인인 아담이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마노아”는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걸 종합하여 해석을 하면 저주 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뱀이 주는 거짓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맞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식민지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노아가 그 원수 같은 블레셋에 빌 붙어서 배부르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과거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로 있을 때 친일파들이 일본 놈들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호강을 한 것과 같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원수에게 빌 붙어서 배 두드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노아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천벌을 받을 인간이 있습니까?
마노아를 욕하지 마세요.
우리가 곧 마노아 이니까요.
우리도 저주 받은 세상에서 땅 강아지처럼 흙 파먹고 땅이 주는 안식을 누리고 살고 있어요.
마노아는 지금 거짓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이 주는 안식을 누리고 있어요.
“노아” 라는 이름이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노아도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뜻으로 보면 동일합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천지(天地) 차이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안식을 누리지만!
마노아는 뱀이 주는 안식을 누리고 있어요.
마노아는 지금 거짓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하나님이 간섭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를 찾아 와서 아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지금 마노아가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나실인으로 태어납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자란 말입니다.
아비인 마노아는 뱀에게 빌붙어서 살고 있는데!하나님은 그에게 뱀에 머리를 깨트릴 아들을 주십니다.
이건 마치 유대인을 깨트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유대인 속에 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속에서 하나님께 바쳐질 나실인으로 오셨습니다.
마노아는 예수님 초림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같아요.
예수님 초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마노아처럼 세상 것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어요.
삼손이나 예수님이나 하시는 일은 그 영적 의미는 같아요.
그래서 삼손은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일들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린 것과 같이 삼손도 아버지가 싫어하는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깨트리기 위한 모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모략인가 하면 나실인인 삼손을 이방여자에게 장가를 보낸 것입니다.
삼손이 하는 일을 상식으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도모하기 위하여 꾸민 연극이라고 보세요.
그럼 이해가 쉬울 겁니다.
부분 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도 있지만 거기에 몰입하지 말고 큰 틀에서 하나님께서 삼손을 들어서 블레셋을 치기 위하여 벌인 모략이라 생각하시고 보세요.
알다시피 나실인은 율법에 금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삼손은 율법을 정면으로 거스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있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에 금하는 일을 하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도 율법에 금하는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렸어요.
죄인들과 함께 하였어요.
율법으로는 죄인들과 상종하면 안 되어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삼손처럼 율법으로는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아비가 이 일에 의미를 모르듯이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몰랐어요.
그러니 삼손의 아비나 유대인이나 같은 겁니다.
삼손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삼손이 행하는 일 속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행할 일들이 계시사적으로 담겨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직이 있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입니다.
이 삼직을 맡으신 분을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서 선지자 직을 수행하셨습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선지자는 죽어서 백성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죄를 고발합니다.
그러다가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선지자들처럼 죽임을 당하심으로서 죄를 고발하신 것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인 삼손도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삼손을 예표의 사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세리와 창기들과 이방인들이 구원 받을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방인은 하나님 앞에서 개 같은 자들이어서 구원은 꿈도 못 꾸었어요.
그런데 삼손이 율법의 규례를 깨트리고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어요.
삼손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이 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의 규례를 깨트리고 죄인들을 사랑했습니다.
이는 죄인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편입을 시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오신 이후로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삼손이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 주었어요.
그럼 삼손을 통해서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주는지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삼손이 딤나로 내려갑니다.
“딤나”라는 말은 “분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곧 딤나에 구원 받을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을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포도원을 허무는 새끼 사자를 만납니다.
새끼 사자란? 늙은 사자와 비교하는 것으로서 사냥을 잘하는 가장 포악하고 힘이 센 놈이란 뜻입니다.
그런 사자를 삼손이 성령의 능력으로 맨 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를 잡으라고 하지요.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하고 여우는 거짓 종들을 상징해요.
이걸 예수님의 초림 때를 말하면 포도원을 허는 여우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말해요.
포도원을 교회라고 한다면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는 교회를 허무는 거짓 선지자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에는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거짓 종들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백성들을 옥 죄는 칼로 사용한 율법 신앙을 깨트렸어요.
거짓 종들이 율법으로 백성들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마치 새끼 사자처럼 백성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율법아래서 종 노릇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율법 신앙을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삼손이 젊은 사자를 죽인 것에는 여러 가지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일차적인 의미로 보면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인 것은 블레셋의 심판을 말해주고 있어요.
지금 블레셋이 새끼 사자와 같이 포학하게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어요.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었어요.
이를 삼손이 해방 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神)을 힘 입고 블레셋을 사자처럼 찢어 버릴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삼손은 성신을 힘입고 죽어가면서 블레셋의 신(神)인 다곤 신전을 허물어 버렸어요.
블레셋 신전이 허물어 졌다는 것은 곧 블레셋의 망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인 것은 일차적인 의미로는 블레셋의 망함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삼손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삼손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이야기로 끌어 당겨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사자를 죽인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권세를 깨트린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단의 권세를 깨트려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사 53: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즉 예수님이 사자처럼 죽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삼손이 포도원을 허무는 사자를 죽인 의미를 죽은 사자에게서 꿀이 나온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꿀이란?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말합니다.
사자가 죽어서 꿀을 냈다!
이는 블레셋이 망하여 이스라엘에 해방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해방 되는 것이 꿀과 같은 것입니다.
이걸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죽어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 문제를 해결 하셨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이 되면 사망의 문제도 해결이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죄와 사망으로 인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이라는 사자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걸 언약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언약 적으로 보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에는 율법이 사자처럼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율법이 수고하게 하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의 요구로부터 해방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의 요구에 시달릴 필요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꿀 같은 맛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게 죽은 사자에게서 나온 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사자의 주검에서 꿀이 나온 것을 잔치 집에서 수수께끼로 냅니다.
삼손이 아내를 맞이하러 딤나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였던 사자의 몸에서 벌들이 꿀을 생산해 놓은 겁니다.
죽은 사자가 꿀을 생산해 낸 것입니다.
이것을 잔치에 초대 받은 자들에게 수수께끼로 낸 것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는 것으로 수수께끼를 냅니다.
삼손은 “사자를 강한 자”로 “단 것은 그 몸에서 나온 꿀을” 말하고 있어요.
이건 삼손만 아는 것이에요.
삼손은 잔치 집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에게 옷을 걸고 내기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낸 수수께끼를 풀면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겠다고 합니다.
반대로 풀지 못하면 그들이 삼손에게 옷 삼십 벌을 주어야 합니다.
“베옷”이라는 말은 “세디님” 이라고 하는데 이는 “세마포 속옷”을 말해요.
그리고 “겉옷”을 “베가딤”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상복이 아니라 특별한 행사나 “결혼식 때 입는 예복”과 같아요.
쉬운 말로 신부가 결혼식 때 입을 예복을 걸어 놓고 수수께끼를 낸 것입니다.
수수께끼라는 말은 “후드”라고 하는데,
이는 “은밀한 말” 혹은 “오묘한 말”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은밀하고 오묘하다는 말은 비밀(秘密)이란 말입니다.
수수께끼를 딤나 사람들 상황으로 해석하면 삼손이 포도원을 괴롭히는 사자를 죽임으로서 딤나 사람들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걸 이스라엘에게 적용하면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서 블레셋을 심판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복음적으로 말하면 강하신 예수님이 죽음으로 죄인이 산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삼손이 낸 수수께끼는 삼손 이외는 몰라요.
이건 삼손이 일으킨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자기가 경험한 사건으로 수수께끼로 냈기 때문에 아무도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어요.
삼손이 알려 주지 않으면 몰라요.
이걸 복음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수수께끼를 냈어요.
그런데 그 수수께끼는 하나님만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지 않으면 알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삼손의 수수께끼를 잔치 집에 참석한 자들이 알게 되었어요.
삼손의 아내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낸 수수께끼도 알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삼손의 아내와 같이 예수님의 신부들이 모인 교회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에요.
삼손이 자기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 주었듯이 하나님도 수수께끼를 교회에 알려 주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교회에 청함을 입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낸 수수께끼를 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먹음으로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이런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어요.
그래서 사자가 죽음으로서 꿀을 얻은 것을 일컬어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고 합니다.
강함이란? 힘을 약한 자를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강함은 생명에 풍성함을 가지고 있어야만 나타낼 수가 있어요.
삼손이 이방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은 곧 생명이 죽음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늘에 생명이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삼손이 이방 여인을 사랑한 것은 여호와께로 난 일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에게는 두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딤나 여인과 가사에 있는 들릴라입니다.
두 여인 다 삼손에게 비밀(秘密)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딤나 여인은 그 비밀을 동료들에게 알려 주어서 옷을 입게 해 줍니다.
하지만 가사의 들릴라는 삼손을 죽음에 넘기우는 일을 합니다.
딤나의 여인은 비밀을 가지고 잔치에 참석한 동료들을 살리는 길로 인도 했지만,
가사의 들릴라는 비밀을 가지고 민족을 죽이는 길로 인도했어요.
두 여인은 두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입니다.
어떤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으로 성도들을 살리는 길로 인도 하지만,
어떤 교회는 복음으로 성도들을 죽이는 길로 인도해요.
마치 삼손의 두 여자처럼 어떤 여자(교회)는 비밀로 민족을 살리는 일을 했고, 어떤 여자(교회)는 비밀로 민족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잔치에 초대 받은 30명은 삼손의 아내 때문에 수수께끼를 풀고 옷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삼손을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했으면 삼손의 아내는 곧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잔치에 초대 받은 30명은 삼손의 아내 때문에 수수께끼를 풀고 옷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곧 성도들은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구원을 받게 됨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배설한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성도가 선택받은 것과 같습니다.
잔치에 초대 받은 30명만 삼손의 아내 덕분으로 수수께끼의 비밀을 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결혼식에 입고 갈 예복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들에게 예복을 입혀 줍니다.
그 예복은 교회를 통해서 입어요.
그 예복은 다름 아닌 예수그리스도라는 옷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의에 옷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던진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강한 자가 죽어서 단 것을 내는 것입니다.
즉 강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서 죄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꺼꾸러 말하면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천국 가는 법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천국은 인간들의 의(義)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천국은 오로지 그 아들의 의(義)로만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의란? 옷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실 분이란 말입니다.
옷이란?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후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담이 만든 옷을 찢어버리십니다.
그리곤 가죽 옷을 입혀 주십니다.
가죽 옷은 양이 죽어서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 양의 실체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양처럼 죽어서 자기 백성들에게 수치를 가려 주실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의(義)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비밀을 교회에 맡겼습니다.
세상은 이 비밀을 모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만 압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한 자기 백성들을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리곤 수수께끼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입고 갈 예복을 주십니다.
예수의 비밀을 아는 자는 30명처럼 선택받은 성도들뿐입니다.
성도들은 블레셋이라는 심판의 대상인 나라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입었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장을 봅니다.
엡 3:1-1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블레셋과 같이 심판받아야 할 곳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블레셋과 같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잔치 자리에 자기 백성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성도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잔치에 입고 갈 옷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말할 때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로 비유하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예복을 입고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복은 왕이 준비한 옷입니다.
그 예복은 초대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우리가 교회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교회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 누구라도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 올 수가 있는 곳입니다.
그만큼 교회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어느 시대고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무너뜨리느냐 하면 인간의 의(義)로 예수의 의(義)를 가리는 식으로 무너지게 합니다.
신앙의 본질을 예수 믿기에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미혹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감추고 인간의 행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예수님의 의(義)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예수님의 의(義)가 사리지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의(義)를 사라지게 만드느냐 하면 유대교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유대교인이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주의는 말씀대로 살면 그것이 의(義)가 된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은 말씀대로 살면 의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신앙의 시선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 두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려는 것이 두고 있습니다.
이건 과녘에서 빗나간 죄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은 신앙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마귀가 던진 미혹입니다.
마귀는 인간들이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을 압니다.
어떤 자가 지옥에 가고 어떤 자가 천국에 가는지를 압니다.
마귀는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마귀는 교회 안에서 예수 믿음 대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행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던진 수수께끼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던진 수수께끼는 강한 자가 죽어서 단 것을 내는 것이에요.
강하신 하나님이 죽어서 옷을 입혀 주는 것이에요.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서는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인본주의가 되었어요.
예수님의 의(義)는 사라지고 인간들의 의(義)가 활개를 치고 있어요.
예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인간들이 다 받고 있어요.
인간들이 상석에 앉았어요.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마귀의 놀이터가 되어가요.
교회라는 조직을 움직이기 위하여 인간들이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행함에 의미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행함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에요.
그러나 행함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악이 되어요.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부여하면 예수님의 의(義)는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두 의(義)는 공존할 수가 없어요.
서로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의(義)에 성질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내 의(義)가 인정받으면 예수의 의(義)가 부정당하고,
예수의 의(義)가 인정받으면 내 의(義)는 부정당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본성은 무얼 해도 내 의(義)를 쌓고자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우리의 의(義)를 기각시키고 예수님의 의(義)를 붙잡게 하는 일을 하세요.
이를 일컬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해요.
좁은 문 좁은 길이란? 내 의(義)가 기각 당하고 예수의 의(義)로 사는 것입니다.
이 길이 좁고 협착하기 때문에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서 우리를 의(義)에 길로 인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적어요.
작은 무리로 있어요.
인간의 의(義)가 힘으로 작용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의(義)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의(義)로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 어리석은 길을 작은 무리들이 가고 있어요.
이들이 삼손의 잔치에 초대 받은 30명의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만이 장차 천국에서 이루어질 어린 양의 잔치에 입고 갈 예복을 받았어요.
하나님은 하늘에 비밀을 맡은 교회들을 겨자씨 같이 두셨습니다.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처럼 두셨습니다.
지극히 미미한 모습으로 두었습니다.
이는 육에 속한 자들에게 감추기 위함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강한 자가 죽어서 단 것을 낸다는 하나님의 비밀을 모릅니다.
강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서 죄인이 살아난다는 비밀을 몰라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은 종들만 알아요.
마찬가지로 강한 자가 죽어서 단 것을 내는 수수께끼는 잔치에 초대 받은 자들만 알아요.
예수님이 우리를 장차 천국에서 일어날 잔치 집을 예표하는 교회에 우리를 초대하셨어요.
우린 가나 혼인 잔치 집의 종들처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을 일컬어 세상에 빛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죄 사함의 비밀을 맡기고는 성령을 주시면서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수수께끼를 세상에 알려 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사실을 말이에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만 의로워진다는 이 사실을 인본주의로 타락한 교회에 알려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이방 전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전도 하여야 할 때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되었어요.
오순절 성령이 강림 하고 난 후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를 했어요.
성령 강림 후 제일 먼저 전도한 곳이 유대인들의 회당이라는 이 사실은 지금 이 시대적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에게 전도를 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가 있어요.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 증인들이 어디로 가나요.
교회에 가요.
이건 종말에는 교회가 전도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다른 의(義)로 치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유대교와 똑 같아요.
예수를 죽이고 있어요.
인간들의 의(義)로 예수의 의(義)를 가리고 있어요.
아담과 하와처럼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있어요.
인간의 행함을 의(義)로 삼고 있단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삼손의 수수께끼를 알게 해 주셨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던진 수수께끼를 알게 되었어요.
우린 어린 양의 혼인에 입고 갈 옷을 받았어요.
이 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복(福) 중에서도 가장 큰 복이 하늘에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으로 인하여 주눅 들지 마시고 감사하며 사세요.
그리고 받은 그 옷을 더럽히지 마시고 잘 간수하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수수께끼를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입고 갈 옷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복을 더럽히지 않고 잘 간수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늘에 비밀을 맡은 자로서 감사하면서 세상 것으로 인하여 주눅 들지 말고 어떤 환경에서든지 당당하게 담대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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