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강. 가까이 할 자와 멀리 할 자 (롬 16:1-27)
롬 16:1-27=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2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러 너희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18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 (없음)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로마서를 끝 맺으면서 두 가지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로마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문안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문안이란 사귐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전한 교훈에 착념치 않는 자들과는 멀리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귐을 가질 사람들과 사귐을 가져서는 안 될 자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형제와 형제 아닌 자들을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부탁이지 의미상으로는 명령입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님 입장에서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부탁은 곧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는 항상 결론 부분은 가장 중요한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이 로마서의 결론을 사귐을 가질 자와 사귐을 갖지 말아야 할 자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의 결론을 가까이 할 자와 멀리 할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교회의 거룩성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진리와 비진리가 하나 될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속한 자들과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의 창조와 같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보면 갈라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곧 교회는 날마다 빛과 어둠이 갈라지듯이 진리와 비진리가 갈라지는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진리와 비진리가 갈라지는 창조의 일을 당부하는 것은 사단은 항상 교회의 순수성을 훼손하고자 발호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뭐냐?
그리스도의 의(義)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적(敵)은 혼합이에요.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타락을 항상 혼합으로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죄의 성질이 혼합 주의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어찌 하든지 교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미흡한 것으로 두어서 인간들의 의(義)를 섞고자 미혹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사랑입니다.
사도들은 이를 알고 사랑은 율법의 마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계명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죽임 당한 것입니다.
사사기 14장을 보면 삼손의 수수께끼가 나오는데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삼손은 사사기에서 마지막 사사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삼손의 출생은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서의 출생을 하게 됩니다.
삼손이 나면서부터 나실인이 된 것은 곧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낸 수수께끼는 곧 예수님의 수수께끼가 됩니다.
삼손은 젊은 사자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자에게서 꿀이 나왔습니다.
이걸 수수께끼로 내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젊은 사자처럼 강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건 마치 사자가 죽어서 꿀을 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꿀과 같은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만개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뭐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죄인을 위한 속량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대속 제물로서 죽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들이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죄 없는 예수님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사랑 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나니 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을 흉내 내게 합니다.
인간도 마치 사랑 할 수 있는 것처럼 연기(演技)를 합니다.
결국 인간의 의(義)를 가지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義)를 흠집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고 합니다.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썩어요.
이걸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마귀는 인간들의 온갖 의(義)를 교회 안에 난무케 합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7-18장에 나타난 음녀입니다.
타락한 교회를 말합니다.
왜? 교회가 인간의 의(義)를 강조 할까요?
이는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조직을 굴러가게 하자면 인간들이 움직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내고 충성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끄집어내고 충성을 끄집어내자면 인간의 열심도 의(義)가 된다고 하여야 합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의(義)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일을 하지 않아요.
칭찬해 주지 않으면 안 해요.
그래서 거짓 목사들은 인간의 행함도 의(義)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거짓 목사와 거짓 신자는 부창부수(夫唱婦隨)에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싸운 대상이 나옵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었어요.
예수 믿음에 율법 지킴을 섞어서 온전한 신앙이라고 가르친 자들입니다.
이 시대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자고 하는 성화주의자들입니다.
성화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화는 주께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성화가 뭐냐?
거룩이에요.
거룩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거룩은 거룩하신 분 안에 들어가면 거룩해져요.
그러므로 성화란?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이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성화에요.
그런데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은 예수는 가리고 자기를 치장하기에 바쁩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예수가 자랑스럽지 않아요.
말씀대로 살아서 변화 해 가는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지,,
이들은 자기가 변화하는 것을 성화라고 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화의 의미는 인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 꼬라지에 의미를 두지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을 믿는 것을 말해요.
성화란?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신 분 안에 거하는 것이에요.
거룩하신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그러므로 최고의 성화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여기엔 필연적으로 자기 부정이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 삶 속에서 내 가치는 부정당하고 오로지 예수님의 가치만 오롯이 남기는 것이 거룩이고 성화인 것입니다.
저는 성도가 거룩하고자 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아요.
즉 선하고 착하게 사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성도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지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정체성과 신앙의 본질을 인간이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거룩해 진다는 것에는 반대해요.
인간의 몸은 죄를 이길 수 없어요.
그러나 성화주의자들은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하고 변화 할 수 있다고 해요.
성령의 능력으로 점진적으로 거룩해 진다고 합니다.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서 바라본 것이지 비 성경적이에요.
성경은 인간은 변화 될 수 없다고 해요.
우리가 만약에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 질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는 우리를 구원 시켜 주는 도구로 전락해요.
우리를 구원만 시켜 주고 예수는 빠져야 해요..
그 다음 부터는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변화하면 되니까요?
그럼 예수 믿을 필요가 없지요.
이런 구원은 없어요.
이건 이단이에요.
갈라디아 교회 안에 이런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경고하기를 누구든지 내가 전한 예수의 십자가로 의로워진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하였어요.
비록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말이에요.
어째서 바울이 이렇게 극한 말을 할까요?
이는 자기 자신이 과거 율법 아래 있으면서 율법 지킴이 마치 의(義)가 되는 줄 알고서 율법에 의(義)를 무가치하게 말하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다녔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딴에는 율법에 의(義)를 고수하는 것이 신앙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곧 예수를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율법에 의(義)를 주장하는 자들과 싸우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 복음만 전했는데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와서 미혹을 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지켜야 온전한 신앙이 된다고 한단 말이에요.
예수 믿기 + 율법 지킴 = 온전한 신앙이라는 공식을 만들어서 가르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훼손코자 하는 마귀의 술수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가르침에 미혹을 당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 지킴 속에 자기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가치 챙기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인간들에게 매력적이에요.
결국 예수의 공로에 인간의 공로도 섞이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걸 타락이라고 하고 음행의 포도주라고 해요.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이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경계를 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고 항상 마귀는 교회 안에서 미혹했어요.
이렇게 되면 바울이 사귐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 자들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누가 사단의 종들이냐?
인간의 행함도 의(義)가 된다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형제로 보지 않았어요.
사귀지 말고 내어 쫓으라고 했어요.
같은 교훈 안에 거하는 형제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문안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지만!
반대로 사도들의 교훈을 무시하고 분쟁을 일으키면서 거치는 자들과는 상종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과 상종하지 말라는 말 속에 교회의 본질(本質)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교회란 뭐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거스리는 자들은 멀리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훈을 거스리는 자들을 쫓아내라는 것은 부르심의 은혜와 진리의 거룩성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람마다 호(好), 불호(不好)가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동질성을 추구하고자 해요.
이러한 본성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사귐을 갖고자 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본능적으로 멀리하고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자기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기쁘고 편안함을 느끼지만, 반대로 자기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편안한 사람들과 사귐을 갖고자 합니다.
내 주변을 둘러보세요.
모두가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으로 진(陣)을 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모 자식이나 부부지간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다르면 함께 할 수가 없어요.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설령 마음이 다를지라도 억지로라도 사귐을 가질 수가 있어요.
이는 얻어내야 할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돌아서면 욕을 하여도 면전(面前)에서 싫음을 표하면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싫음을 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달라요.
신앙은 내 유익을 얻고자 갖는 처세술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 될 수가 없듯이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진리관이 다르면 사귐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들과는 멀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교회를 어지럽게 한 자들이 크게 두 부류가 있었어요.
하나는 율법주의자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이었어요.
영지주의자들은 복음을 이원화 시켜서 영은 거룩하고 육신은 더러운 것이므로 구원이란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면서 육은 어차피 더러운 것이니까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하면서 육신의 쾌락을 좇아갔어요.
쉬운 말로 복음 알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런 자들이 엄청 많아요.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어요.
교회의 모임도 폐하고 이방인과 방불한 모습으로 방탕과 방종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역사는 늘 반복하면서 흘러가요.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일들이 어느 시대고 항상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 안에도 율법주의자들이 있고 영지주의자들이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끝내면서 두 가지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멀리하라고 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었어요.
유대교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열심과 정성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영지주의자들은 육은 무익하고 영은 거룩하기 때문에 구원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므로 복음을 알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에요.
우리가 온전하게 살지 못하는 것하고 아무렇게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은 그 의미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연약하여 넘어지는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주의 긍휼을 구하게 되지만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복음을 자기 악함을 면피하는 면죄부로 악용하는 악인 것입니다.
복음은 죄를 멀리하고자 하지 죄를 즐기는 것이 아니에요.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을 자기 사욕을 좇는 것으로 이용하였어요.
이들은 머리로는 진리를 추구하고 삶은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던 자들입니다.
율법주의도 안 되지만 영지주의도 안 되어요.
구원이란?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가 받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몸도 마음도 영혼도 세상과 다른 가치로서의 분리된 것을 지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보존되기를 바란다고 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처럼 신앙이 이원론으로 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전인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몸이 있은즉 영혼도 있어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이 육신으로서의 진리를 쫓아가는 삶이 없는 것도 죽은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라고 한 것도 이러한 사상이 암(癌)처럼 퍼져서 교회의 거룩성을 헤치기 때문입니다.
죄란? 누룩처럼 퍼져서 부패케 하여요.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하는 것과 같이 역사를 해요.
사람은 못된 것은 쉽게 배워요.
우리 몸뚱이는 쾌락을 좇아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이는 죄성이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게 하는 것으로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죄를 멀리하고자 하라는 것입니다.
악(惡)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한 것도 삶에 지향성을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고자 하는 죄성으로부터 멀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고 마귀는 교회 안에 거룩성을 헤치게 하였어요.
이방과 교회의 경계를 무너뜨렸어요.
신앙을 세속화 하게 만들어요.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이 함께하는 모임을 말합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본질이 같은 사람들끼리의 모임이어야 하고 이 본질을 지켜야 합니다.
이를 거룩성이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예전에 유대교인으로서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들어왔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충돌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옛 언약은 인간의 의를 좇아가고, 반면에 새 언약은 인간의 의를 죄라고 규정해요.
그러므로 하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 언약적 신앙은 새 언약 앞에서 죄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마치 빛과 어둠처럼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서로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증거한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들과는 사귐을 갖지 말고 멀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두 부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입니다.
이 둘은 하나 될 수가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본능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세상에서는 이념과 사상으로 나타나고 교회 안에서는 진리와 비진리로 나타나요.
세상에서 나타나는 이념과 사상은 서로를 적(敵)으로 간주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세계 역사와 특히 남북으로 분단이 된 우리나라에서는 산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공산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은 성경 식으로 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과 같아요.
아주 오래 전에 상영을 하였던 “태백산맥”이라는 영화를 보면 남(南)과 북(北)의 이념과 사상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해방 후 여순반란 사건과 빨치산 소탕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한 집안에 두 아들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갈라져서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죽이고 죽이는 일들을 하고 있어요.
한 고을에 백성들도 빨갱이들의 지주와 소작농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무상 계급의 세상을 만들자는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서 서로가 갈라집니다.
평온하던 마을이 사상으로 갈라지게 되어요.
다정하던 이웃이 적으로 돌변하게 되어요.
이 모두가 너도 나도 살기 위해서입니다.
살고자 날이 바뀌면 공산주의 편에 섰다가 민주주의 편에 서기를 밥 먹듯이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빨치산을 지휘한 간부인 김명곤이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대학에서 책으로 배운 마르크스 주의는 이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배운 공산주의는 지주와 소작농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계급이 없고 모두가 평등하게 평화롭게 살아가는 지상 낙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이 되어서 서로가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이러한 아비귀환의 세상을 만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공산주의 이론을 만든 마르크스가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마르크스는 독일의 신학자에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간의 계급을 혁파하고 유무상통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들고 나온 이론이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에서 따온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얼마나 큰 폐해(弊害)를 일으키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금석과 같아요.
마르크스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모두가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게 육(肉)의 한계에요.
마르크스는 초대교회를 보니까 하나의 신앙이 되고 유무상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위하여 가진 것을 내어 놓는 것에서 착안을 해서 만든 이론이 바로 공산주의 이론이에요.
공산주의는 종교라는 말도 다 이런 이유에서 그러는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보아요.
지금 북한을 보세요.
북한의 공산주의 사상은 종교에요.
마르크스의 이론을 정치화 한 사람이 소련의 레닌이에요.
그래서 공산주의를 맋스 레닌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공산주의를 하겠다고 하면서 사상과 이념으로 죽임당한 사람의 숫자가 전 세계적으로 치면 자그마치 2억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6.25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대략 500만 명이고 부상자와 피해자가 약 1.000만 명이 넘었어요.
그 당시 남, 북한 총 인구가 2.500만 명이었는데 직 간접적으로 죽거나 피해를 본 사람이 거의 3분의 2가 되니 그 피해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산가족을 따지만 온 민족이 다 피해를 입었어요.
그런데 지금도 그런 허울 좋은 공산주의 사상이 좋다고 하는 자들이 국회의원 노릇을 하면서 국가 전복을 위하여 무장 봉기를 획책하다가 붙잡혀서 재판을 받고 있어요.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무장 폭력으로 반대자들을 죽이고 공산주의를 하겠다고 하는 이런 자를 선처해 달라고 종교인이라고 하는 4대 종단 대표들이 탄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이상과 현실을 모르는 자들이에요.
인간이 어떤 자인지를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에요.
이런 자들은 모두가 종교를 빙자하여 거룩한 척 하는 자들이에요.
성경은 이런 자들을 음녀하고 해요.
이 시대 종교인들은 사기꾼들이에요.
제발 거룩한 척 하는 자들에게 속지 마세요.
말이 거칠더라도 이해하고 들으세요.
공산주의 이론을 만든 마르크스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무엇인줄 아세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놓친 것입니다.
죄인은 너와 나가 평등하게 사는 것이 안 되어요.
둘 만 모여도 서열을 정하고 으뜸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에요.
이러한 본성이 나는 갑(甲)으로 살고 너는 을(乙)로 살라고 해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공공기관에 근무를 하세요.
이 분의 말을 들어보면 울산에서는 노동자 권익을 내세우고 국회의원이나 공무직으로 나간 자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노동자 권익을 앞세우고 상좌에 앉게 되니까 갑으로 돌변 하더라는 것입니다.
온갖 특권을 다 누리고자 기관에 압력을 행사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노동자 권익을 내 세우는 것은 허울이지 인간들은 막상 권세를 얻으면 특권을 추구하고 갑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는 왕이 되어서 남을 종 부리듯이 하고 싶어해요.
이게 죄인이에요.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싸한 이론을 만들어도 죄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에요.
공산주의 사상은 이론적으로는 좋아요.
그런데 인간들이 그 이론을 담아낼 그릇이 안 되어요.
그럼 사기(詐欺)가 되는 것입니다.
지나친 이상주의는 마약과 같아서 거기에 빠지면 사람을 패인 만들어요.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단박에 신앙이 쑥 자라는 것은 없어요.
신앙이란 생명의 자람과 같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해요.
하나님의 은혜도 한꺼번에 다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가면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깊어지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도 그러해요.
그러므로 빨리 신앙이 자랐으면 하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디에 진리가 없나 찾아다니다가 이단에 빠지게 되어요.
진리는 찾아다닌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니에요.
진리는 찾아오는 것이지 우리가 찾아 가는 것이 아니에요.
진리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궁구하여 깨닫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노력하여서 깨달아지는 것이 진리라고 하면 그것은 땅에 속한 것이지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에요.
하늘에 속한 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진리는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반드시 진리가 찾아오세요.
진리가 누구냐?
예수에요.
예수가 찾아 와요.
예수님은 우리가 쫓아가서 만나는 분이 아니에요.
베드로와 바울을 찾아 갔듯이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세요.
그래서 구원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에 어떤 목사에게 가면 특별한 진리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에게 속지 마세요.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하는 자들을 조심하세요.
그런 자는 다 사기꾼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유무상통하는 그런 교회를 만들자고 해요.
그래 놓고서는 자신은 교주 노릇하고 특권을 누려요.
이렇게 생겨난 것들이 이단입니다.
금번에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한 유병언씨를 보세요.
유병언씨는 여왕벌처럼 로열젤리를 먹고 살았어요.
교인들은 궁핍하게 살면서 헌금을 하는데 그 가족들은 로열패밀리가 되었어요.
오늘 방송을 보니까 신발에서부터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것을 명품으로 치장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속옷도 수십만원씩 하는 명품을 입고 살았다고 해요.
얼마나 속이 공허 했으면 명품으로 온 몸을 도배하고 있었겠어요.
그 속에 진리가 없으니 신앙을 이용하여 돈을 축척하고 세상 가치관으로 명품을 치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인들에게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헌금을 강요하고서는 자기 가족들은 황제의 가족이 되어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왕 노릇하면서 살았어요.
더 가관인 것은 교인들이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그가 하는 일을 두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신앙인가요?
저는 유병언씨가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가 하는 짓은 예수를 믿는 자의 행동이 아니란 것입니다.
더군다나 설교를 하는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자로서는 더 더욱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짓이 이단이 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유병언씨만 그런가요?
아니에요.
지금까지 창궐한 이단들은 하나 같이 신앙을 빙자하여 교인들의 고혈을 짜 먹고 왕 노릇하면서 살았어요.
이단들의 교주들과는 다소간의 경중(輕重)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시대 대 다수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다 그런 짓을 하고 있어요.
목사가 무슨 로열패밀리라도 되는 냥 거드름을 피우고 있어요.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살아요.
이런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라고 하였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어요.
목사들만 그런가요?
기독교 불교 천주교라는 종파를 떠나 대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대동소이해요.
오죽했으면 인도의 성자(聖者)라고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는 종교를 사회의 7가지 죄악(惡) 중에 하나라고 정의를 했겠어요.
간디는 종교는 사회악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타락한 종교를 일컬어 음녀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의 음녀는 타락한 교회를 말하면서도 광의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종교를 망라하고 있어요.
그래서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라는 말은 ‘혼돈’ 또는 ‘혼란’이라고 하는데 이는 타락의 극치를 말해요.
이 시대 종교가 가장 타락하였어요.
진리를 가장하고서는 가장 음탕하고 음란한 소굴이 되었어요.
이방 종교야 어차피 땅에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그렇다고 쳐요.
육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교회는 달라요.
교회는 땅에 것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것을 소망하는 것이에요.
육신의 쾌락을 쫓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안식을 쫓아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목사들을 일컬어 별이라고 하면서 별은 당연히 하늘에 떠 있어야 하는데 종말 때에 별들은 땅에 떨어져서 교인들에게 쑥물을 먹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육적 가치에 매몰되어 자기 배 불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세요.
18절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 배를 섬긴다고 하잖아요.
유병언씨가 잘 보여 주었잖아요.
또한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잘 보여주고 있어요.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교회 목사를 보세요.
유병언씨가 하는 짓을 그대로 하였어요.
그러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탈을 보면서도 주의 종이라고 추종한 사람들이나, 신(神)처럼 살아가는 목사들의 행태를 보면서도 따르는 교인들이나 오십보 백보에요.
그 집단에 그 교인들이에요.
목사를 나무랄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성경에 무지해서 그래요.
교인들이 성경을 몰라서 그래요.
교인들이 성경에 무지하니까 목사들이 마르크스처럼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교인들은 성경 해석이 마치 목사들의 전유물이고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까 목사들이 자기 입맛에 맞도록 성경을 해석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교인들은 그것이 무슨 대단한 진리라도 되는 냥 따르고 있어요.
이걸 바울은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고 했어요.
솔직히 이 시대 기독교 방송에서 나오는 목사들의 설교들을 들으면 역겨워요.
어쩌면 낯짝이 저렇게도 두꺼울까?
저런 말을 하고도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 저걸 설교라고 내어 놓는지 참으로 대~단~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당이 따로 없어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기복신앙을 부추기고 신비주의로 끌고 가는 목사들이 무당이에요.
이들은 예배라는 이름으로 무당 푸닥거리를 해 주는 거에요.
그럼에도 수많은 교인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그런 자들을 추종하고 있어요.
물론 하나님께서 진리에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을 추수하고자 거짓 것을 믿게 하는 유혹의 역사를 일으켜서 무당 목사를 세우고 무당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따르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통함과 탄식이 나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여 감사합니다가 나와요.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놓으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자로 세우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망하는 것입니다.
눈 뜬 사람은 절대로 소경은 인도자로 두지 않아요.
사기꾼 목사를 지도자로 따르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신이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 자들을 지도자로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교리 서신이라고 하는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마지막 당부를 교훈을 거스리고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멀리하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그만큼 어느 시대고 진리를 가장한 비진리가 교회 안에서 독버섯처럼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는 항상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옳은 것처럼 보여요.
그만큼 매력이 있어요.
들으면 그럴듯하단 말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보는 눈이 없고 진리를 듣는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은 다 넘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로마서의 결론을 형제들에게 문안하라고 하다가 교훈을 거스리는 자들을 멀리 하라고 하는지를 아시겠어요?
이는 교회 안에서도 항상 사단의 세력들이 광명의 천사로 활동하기 때문이에요.
거짓은 항상 화려해요.
언변이 화려하고 논리적으로 그럴듯해요.
그 속에 진리의 영이 없는 사람들은 다 속아요.
그러므로 누가 사귐을 가질 참 형제이고 누가 멀리 해야 할 거짓 형제인지를 분별 할 수 있는 영안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목소리 높여서 말하는 것은 그만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이 소경이 아니어야 소경을 인도자로 따르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정통 교회라고 자부하는 교회 안에서도 교주(敎主)처럼 행세하는 자들이 수두룩해요.
목사들을 조심하세요.
특히 혼자 고상한 척하면서 혼자 복음을 다 아는 척 하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하여서도 여러분이 소경이 아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 중에 제일 먼저 경계 시킨 것이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미혹하니까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마태복음 24장을 보세요.
마 24:1-5=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종말의 징조를 성전이 무너진다고 하지요.
이는 교회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말이에요.
이 시대 교회는 놀이터가 되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교회를 각종 더러운 영(靈)들이 모인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을 봅시다.
계 17:3-6=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성령이 사도요한에게 종말의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이 어떤가요?
금과 보석으로 꾸민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손에 금잔을 들고 있지요.
그 잔 속에 가증한 물건들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지요.
그런데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에 취하여 있어요.
무슨 말인가요?
이건 교회를 자기 왕국으로 삼고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온갖 것들로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놈들이 누리는 것이 모두가 성도들의 피에요.
사도요한도 하도 기이해서 놀라고 놀라는 거에요.
아니 교회가 성도들의 피를 빨아 먹고 있다니,,,,
이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일컬어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신 겁니다.
이 강도의 굴혈이 종말에는 사창가가 되었어요.
그래서 종교를 바벨론과 같은 매음굴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계 18:1-4=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보세요.
교회가 바벨론처럼 종교적인 간음들을 행하는 매음굴이 되었고 각종 더러운 영(靈)들이 모인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고 하지요.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고 하지요.
그 속에 진리가 없으면 명품으로 사치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지금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에요.
성령이 사도요한에게 말해주고 있어요.
이 사실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보내서 교인들로 하여금 알게 하여서 속지 말게 하라고 하였어요.
제가 이 복음을 전하려고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목사들을 경험했어요.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복음을 빌미로 교주 노릇을 하고 왕 노릇하는 것을 보았어요.
마치 정치판과 같이 자기만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적임자라고 외치는 정치인들과 같이 자기만 복음 전한다고 하면서 복음이 또 다른 권력이 되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은 교회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눈을 떠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속지 않아요.
목사를 천사라고 믿지 마세요.
저 역시도 믿지 마세요.
제 안에도 교주 되고자 하는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믿을 인간은 단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전 설교 시간에 저 역시 달아 보라고 합니다.
내가 진짜 인지 가짜인지 알려면 여러분이 소경이 아니어야 한다고!
제 설교만 듣지 말고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는 안목들을 가지셔야 한다고!
이게 서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말한다고 해서 다 복음적이지 않아요.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복음으로 왕 노릇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아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의 행실을 보고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 13: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
복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반드시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거에요.
지금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유대교인들도 많지만 복음 알면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영지주의자들도 많아요.
그러니 어떤 목사의 논리에 빠지지 말고 성경을 상고해 보세요.
성경 속에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에 선진들의 증거가 수두룩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우린 그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가고 있어요.
동일한 컨베어벨트에 올려져 가고 있어요.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 길을 갔고 예수님도 가셨어요.
초대교회 성도들도 갔어요.
성경을 상고하면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거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거울 앞에 자신을 세워서 보세요.
사람의 판단에 귀 기우리지 마세요.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여러분의 신앙을 판단 해 줄 자가 없어요.
오직 성경만이 여러분의 신앙을 판단해 줄 수가 있어요.
저 한데도 여러분의 신앙을 추인 받고자 하지 마세요.
저는 족집게 도사가 아니에요.
누가 여러분의 신앙은 판단한다고 하면 그 놈은 거짓 선지자에요.
우리의 신앙을 추인 해 주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세요.
그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성경을 펴 보니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우리가 있어야 해요.
대 다수의 신학자들은 로마서는 반지의 보석과 같다고들 해요.
성경 중에서도 성경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 보석과 같은 로마서의 결론을 사도 바울이 사귐을 가질 자와 멀리 할 자를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간과치 마세요.
이는 그만큼 교회 안에는 미혹의 영들이 많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마귀의 타깃이에요.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진리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사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졌어요.
그럼 누가 참 형제이고 누가 거짓 형제인지 구분할 팁이 생긴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유대주의와 막 살아도 된다고 하면서 복음을 자기 사욕을 쫓는 도구로 이용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참 형제가 아닌 것입니다.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도 거짓 형제에요.
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안다고 해요.
그런데 그들이 하는 짓거리가 마귀짓거리를 해요.
입만 열면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논쟁을 일삼아요.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사귐을 하지 말아야 하는 자들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적인 지식은 해박해요.,
그런데 입만 열면 비판과 정죄가 쏟아져 나와요.
남은 다 틀렸고 자기만 옳다고 해요.
독불장군이에요.
왜? 그럴까요?이는 그 안에 법이 있기 때문이에요.
틀이 문제인 겁니다.
마치 붕어빵 틀에 밀가루 반죽을 부으면 붕어빵이 나오듯이 그 안에 법이 작동을 하니까 아무리 좋은 복음이라도 법으로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복음을 말한다고 해서 다 형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들의 행실을 유의하여 보세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지 아니면 정죄하고 비판하고 죽이는 일을 하는지 잘 살펴보세요.
은혜를 내어 놓는지 아니면 법을 내어 놓는지를 보세요.
법을 내어 놓으면 법 아래 있는 자로서 멀리 할 자이고, 은혜를 내어 놓으면 사귐을 가질 형제인 것입니다.
복음이 죄에서 구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복음을 받으면 그 복음에 합당한 삶도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지향성을 담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 거룩한 것이면 복음에 합당한 삶도 거룩을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복음을 받으면 내 맘대로 살거야 가 아니라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간섭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교리와 삶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교리와 삶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교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세요.
교리와 실천은 마치 믿음과 행함과 같아요.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교리도 반드시 삶을 도출하게 되어 있어요.
산 자에게 움직임이 있듯이 믿음도 행함을 낳게 되어 있어요.
바울이 12장 이후에 언급한 것이 복음이 삶으로 나타나면 사귐을 가질 참 형제이고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멀리 해야 할 영지주의자에요.
하나님 나라는 말(지식)에 있지 않고 능력(진리를 행하는 삶)에 있어요.
즉 하나님 나라는 이론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워져 가요.
설교를 듣는 것이 신앙이 아니에요.
들은 설교로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설교 듣는 것을 신앙으로 알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진리를 지식으로 소유케 만들어요.
진리가 지식으로 소유가 되면 말쟁이가 되어요.
말쟁이가 되면 논쟁을 하고 분쟁을 일으켜요.
그래서 바울은 논쟁을 피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멀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논쟁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논쟁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믿어서 믿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믿어져요.
그러므로 복음을 가지고 논쟁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이론을 파하는 능력이에요.
성령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분 앞에는 그 어떤 논리도 소용없어요.
복음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냥 쑥~ 하고 믿어져요.
그러므로 일체의 논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 많고 탈 많은 고린도교회에 경고하기를 내가 가면 너희의 말을 달아 볼 것이 아니라 너희의 능력을 달아본다고 했어요.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은 세운다고 하였어요.
무슨 말인가요?
신앙생활은 주둥이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온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십자가의 이론을 머리에 담아 두는 것이 아니고 머리에 담긴 복음을 몸과 마음으로 사건화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택한 자들에겐 십자가가 사건으로 다가와요.
사건이란? 삶이에요.
그러므로 십자가가 사건으로 다가온 성도들은 반드시 그 십자가의 사건이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속으로 흡입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로마서 12장 이후에 각자 받은 성령의 은사로 교회 안에서 각양의 모습으로 섬기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 속에서 십자가 도를 사건으로 유발케 하세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나타나는 사건마다 성령의 은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사가 있는 자가 참 성도이고 사귐을 가질 참 형제에요.
바울은 자기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자들과는 사귐을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마치 사라가 이스마엘을 쫓아낸 것과 같아요.
이는 종의 아들은 함께 유업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사귐을 가질 자와 멀리 할 자들이 한 교회 안에 있었으면 지금도 동일하게 있어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문안 받을 자들과 내어 쫓김을 당할 자들이 있어요.
그러므로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상태는 초림 때나 재림 때나 동일해요.
예수님의 초림은 재림의 그림자에요.
그러므로 초림 때 영적 상황은 곧 재림 때 영적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초림 때 각종 분파들이 자기들만 정통이라고 싸웠듯이 지금도 동일해요.
초림 때 자기들만 거룩한 무리라고 하여서 집단생활을 한 무리들이 있었듯이 지금도 자기들만 옳은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집단을 이루고 있는 자들이 있어요.
초록은 동색이라고 자기 교회 목사만 복음 전한다고 하거나 자기 교회만 옳다고 하는 자들도 동일해요.
초림 때 이런 자들이 있었듯이 지금도 있어요.
그러니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여서 속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귐을 가지지 말아야 할 자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사귐을 가질 자들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 하여야 할 형제들이 어떤 자인지 상고해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이 그리스도 안에서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에는 만남과 헤어짐이 있습니다.
바울과 교회의 성도들의 관계는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바울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거명하면서 문안하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안부를 물을 때는 각별할 사이 일 때 묻잖아요.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거명되는 사람들은 모두가 각별한 사람들이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과 성도들과의 관계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좋은 관계로 만난 사람도 있고, 나쁜 관계로 만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담아 놓고 싶고, 어떤 사람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선인(善人)도 만나고, 악인(惡人)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원함으로 되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우연히 만나다 보면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말이 좋아 우연이지 실상은 창세전 언약 안에서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필연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가 감독의 연출에 의하여 악당도 만나고 선인도 만나게 되는 것과도 같아요.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창세전에 만나기로 작정된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만나게도 하시고 헤어지게도 하십니다.
마치 드라마의 연출자가 탤런트들을 필요에 따라서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연출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만나든지 다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만남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복음을 전해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짐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람도 있고, 만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래 묵은 포도주처럼 기분 좋은 동무도 있고,
어떤 사람은 상한 음식처럼 입에 넣었다가 뱉어내고 싶은 사람도 있어요.
바울도 복음 전하면서 각양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어떤 이에게는 도움을 입었고,
어떤 이에게는 핍박을 받았어요.
어떤 이는 복음에 합당한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은 복음에 합당치 않은 자들도 있었어요.
앞서서 복음에 합당치 않은 자는 대표적으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했어요.
그럼 복음에 합당한 자들은 누구인가?
오늘 본문에서 거명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각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문안 하라고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름을 기억하고 문안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입 맞추면서 문안하라고 하지요.
이는 같은 식구끼리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성도 간에 거룩한 입맞춤을 한다는 것은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것은 너희는 한 말씀 안에서 난 형제들이란 말입니다.
입맞춤을 알려면 아가서를 보아야 합니다.
아가서 8장을 봅시다.
아 8:1-3=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다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3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으리라”
술람미는 천하디 천한 노예입니다.
그냥 이름 없이 잠시 살다가 사라져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런 존재였어요.
그런데 이런 천한 노예가 왕의 사랑을 입었어요.
인간들 세계의 상식으로는 왕과 노예는 신분의 차이로 둘은 사랑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세상에 드러내 놓고 사랑할 그런 처지가 아닌 것입니다.
술람미는 이런 처지가 안타까웠어요.
아무데서나 맘 놓고 사랑 하고픈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관습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자신의 오라비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솔로몬과 자신이 한 핏줄이었다면 마음껏 사랑을 나눌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오리비였다면 밖에서도 마음껏 입맞춤을 가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 당시의 시회적인 관습 때문입니다.
당시 관습은 남녀가 유별하므로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입맞춤을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남매간에는 인정을 하였어요.
이는 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람미가 그러는 겁니다.
당신과 내가 친 남매간이었으면 언제 어디서나 입맞춤을 가져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 라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언약적인 관점으로 보면 율법 아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은 하나 될 수가 없는 것과 같아요.
술람미는 먼저 자신의 처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자신은 너무도 비천한 사람이라서 감히 솔로몬 왕을 사랑한다고 말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신분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천하디 천한 노예인데 솔로몬은 왕입니다.
왕과 노예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분은 세상에서는 넘지 못하는 벽과 같아서 가슴이 아픈 겁니다.
마치 술람미는 만인들 앞에서 “이 남자가 내 남자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의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자신과 솔로몬이 한 형제였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합니다.
당신과 내가 한 어미 아래서 태어난 오누이였다고 한다면 내가 밖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음껏 입맞춤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서로가 한 어미의 젖을 먹고 자란 오누이라고 한다면 마음 놓고 사랑을 하여도 누가 나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랬으면 당신의 품에 안기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입맞춤이란? 한 생명에서 나온 자만이 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한 혈통이에요.
이건 장차 모든 성도는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될 것을 기능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한 형제에요.
히 2: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보세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다고 하지요.
한 형제라고 하지요.
한 형제이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한 형제는 같은 사랑 안에 있어요.
한 형제는 천륜(天倫)으로 낳아져요.
그래서 부부보다 형제가 더 가까운 것입니다.
부부간에는 이혼 할 수는 있어도 형제간에는 갈라짐이 안 되어요.
그게 핏줄이에요.
부부는 조건으로 만나기 때문에 조건이 사라지만 헤어져요.
그러나 형제는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끊어지지가 않아요.
형제에겐 그 어떤 것도 흠이 없어요.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감싸고 용서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라고 하지요.
자신의 피로 우리를 낳았어요.
피로 낳았다는 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 질수가 없는 관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형제란?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은혜 안에 있다 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는 한 몸이기 때문이에요.
너의 허물이 나의 허물이고 너의 온전함이 나의 온전함이에요.
법이 없는 세계가 형제에요.
부부는 법으로 만났지만 형제는 은혜로 낳아져요.
부부는 법으로 살지만 형제는 은혜로 살아요.
그러므로 형제끼리는 허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형제에요.
하나에서 났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흠이 되지 않아요.
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흠으로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타인과 나는 법으로 만나요.
다른 몸이기 때문입니다.
법은 항상 옳고 그름으로 나누어요.
세상은 사람을 신분으로 구분하고 나누어요.
그러니 서로가 타자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엔 술람미는 솔로몬과 법이 지배하는 곳에서 만났어요.
술람미는 솔로몬과 왕과 노예라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을 지닌 채 타인으로 만났어요.
그래서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극심한 저항을 받고 핍박을 받았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업신여기면서 네 까짓 게 어떻게 솔로몬과 사랑 할 수가 있느냐? 라고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어요.
그런데 이러한 법을 솔로몬이 깨트려 주었어요.
당시의 법은 왕과 노예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불가능했어요.
이건 마치 조선시대 양반집 아들이 노비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요.
이걸 인정받으려면 양반이 노비로 내려가는 것 밖에 없어요.
노비가 양반이 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양반과 노비가 사회적으로 결혼을 하려면 양반이 양반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노비가 될 때만 가능했어요.
지금 왕과 노예는 양반과 노비와 같아요.
그러니 공개적으로 사랑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왕이 자기 체면이라는 지위를 버리고 노예의 자리로 내려간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감히 예수님과 사랑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비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희생하고 죽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도 자기를 비웠다는 말입니다.
이제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기 수준으로 낮아짐으로서 당당하게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거친 들에서 솔로몬을 의지하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아 8:5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辛苦)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거친 들이란 비천한 곳이란 말입니다.
거친 들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존귀한 자리로 나아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나아오는가 하면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왕의 빽으로 나아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왕의 빽으로 나아오는가 하면 왕이 자기를 비움으로서 신분의 벽을 깨트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걸 어미가 사과나무 아래서 산고(産苦)를 통하여서 너를 낳았다고 하는 겁니다.
사과나무를 은유적으로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 나무 라고 합니다.
선악과는 선악의 법을 말하는데 곧 율법을 말해요.
그러니 사과나무 아래서 산고를 통해서 나았다는 것은 율법 아래 죽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로 죽임 당하신 것과 같아요.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죄인이라는 신분에서 의인이라는 신분으로 바뀌었어요.
우리가 의인 된 것의 바탕엔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당시의 법을 무시하고 노예를 왕비로 간택한 것은 자신이 그 당시의 법에 죽임 당한 것과 같아요.
스스로를 법에 내 던진 겁니다.
이건 자신을 죽인 것과 같아요.
왜? 죽음의 자리로 내려갔는가 하면 술람미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낮아짐으로서 이제 동등한 위치로 한 어미 아래서 난 자와 같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당당한 거에요.
누구 앞에서도 입을 맞출 수가 있게 되었어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솔로몬이 자기를 비워서 술람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처음 만나는 성도들에게 서로 거룩한 입맞춤을 하라는 말은 너희는 한 어미의 태어서 나온 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명령은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명령과 같아요.
바울은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복음 안에서 한 형제로 만난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부부는 바울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기거케 하였어요.
이건 친 형제가 아니면 못 해요.
오늘 본문에서 거명 되는 모두가 그러한 사람들이어요.
모두가 바울에게는 한 형제들인 것입니다.
바울의 형제이기 때문에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도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맞춤으로 문안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지극히 미미하지만 저도 복음을 전하러 다니다보면 뜻하지 않는 분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 때가 있어요.
어떤 분들은 가정을 내어주고 기거케 하면서 한 형제처럼 대하는 분들도 있어요.
이러한 분들을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을 영접하여 형제로 대하면서 자기 집에 우거케 한 것이 생각이 나요.
그럴 때면 아! 지금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일을 하시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가 되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니고 나와 늘 동행하고 계심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콜을 해요.
목사님 자주 오셔서 쉬다 가시라고 해요.
목포에서, 여수에서, 익산에서, 정읍에서, 서울에서, 제주도에서, 미국에서, 중국에서,,,,,
내가 이 분들을 어떻게 알겠어요.
모두가 복음 안에서 만나게 된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저에게는 성경의 이야기가 그냥 책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사건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인 겁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인 거에요.
하나님께서 2천 년 전에 바울을 통해서 제가 해야 하는 일들을 미리 보여주신 것으로 들려져요.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거룩한 입맞춤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도행전은 써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한 형제에요.
성도들은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 사람으로 살아야 할 운명을 띠고 있는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 모든 성도는 예수 안에서 난 한 형제들이에요.
형제는 외적 조건으로 차별하지 않아요.
교회 안에서는 세상 가치로 성도를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부르심이 외적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제란 모든 것을 공유해요.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미움을 당했으면 같이 미움 당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율법주의와 싸웠으면 교회도 율법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긍휼의 마음으로 사셨으면 교회도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본문을 보면 바울이 문안하라고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흩어진 교회의 성도들이에요.
로마교회의 식구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바울이 그 동안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도움을 입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교회 성도들의 관계는 예수님과 성도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바울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거명하면서 문안하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입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홀로 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부부도 있습니다.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습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사는 모습도 다 달랐습니다.
인종도 다르고 신분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바울을 예수님 마음으로 대하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바울을 도왔어요.
어떤 이들은 목숨도 내놓으면서 자기를 도왔고 어떤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바울을 입맞춤으로 대하였을까요?
이는 모두가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도운 형제들을 자기와 한 몸으로 로마교회에 천거하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지금 로마 교회에게 성도들에게 자신이 천거하는 사람들을 자기 대하듯이 대하라 당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하신 말씀과 같아요.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집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평안을 빌라고 하신 것과 같아요.
바울이 천거한 몇 사람만 살펴봅시다.
제일 먼저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인 자매 뵈뵈를 천거한다고 합니다.
자매라고 하는 걸 보아서 처녀였던 것 같아요.
이는 문자적인 의미로서의 처녀에 의미도 있지만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세상과 짝하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뵈뵈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천거하면서 주 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또한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합니다.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사도바울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뵈뵈 집사님은 여자이다가 보니까 바울을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듯이 세세한 것으로 돌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기의 보호자라고 하지요.
그 다음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들은 부부인데 아굴라가 남편이고 브리스가가 부인이에요.
그런데 유대사회에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여자의 이름을 남자 앞에 먼저 거명하고 있어요.
이는 복음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여자를 무시했어요.
오죽했으면 남자들이 기도 할 때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했겠어요.
그만큼 유대 사회에서는 여자는 인정을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라고 하면서 여자를 남자 앞에 내 세우고 있어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여자나 남자나 차별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자 이름을 남자 보다 앞세우는 것은 아마도 아내가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향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는 고난을 감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다니면서 바울이 당하는 아픔을 함께 당하였어요.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어요.
그래서 동역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안에 무려 26명의 이름들이 나와요.
그러면서 바울은 일일이 이들을 문안하라고 합니다.
왜 이들에게 문안하라고 합니까?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성령을 마시고 한 주를 섬기고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한 족보인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어요.
문안 하라는 말은 일종의 명령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일종의 계명과 같아요.
형제 사랑은 의무이고 책임이에요.
사도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이 로마 교회로 하여금 형제들이 가면 주께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제가 어디에 가면 하나님이 그곳에 있는 성도들에게 얘들아 정낙원 목사가 오거들랑 날 대하듯이 대하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럼 그곳에 계신 분들은 저를 주님 대하듯이 영접해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복음 전하러 다니면서 이러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어요.
제가 뭐 잘난 것이 있다고 이곳저곳에서 부름을 입겠어요.
단 하나 복음 때문이에요.
예수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고 보니 하나님이 이리 저리 데리고 다니시는 거에요.
가면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분들을 만나요.
그럴 때마다 사도행전이 기억나요.
그래서 저는 지금 우리가 로마서를 쓰고 있고 사도행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주께서 사도행전 후서를 쓰고 계신다고 한다면 우리 이름도 오늘 본문에 거명되는 바울이나 뵈뵈나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처럼 기록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
이는 성령께서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분이에요.
어느 시대나 동일하게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고 간섭을 하셨어요.
우리가 지금 성경 속에 나와 있는 바울이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곧 이 시대 우리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거명한 것은 그 사람들이 곧 바울의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면 영광도 같아요.
바울의 영광이나 바울을 영접한 형제들의 영광이나 같아요.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로 사용 되었고,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복음 전하는 바울을 돕는 자로 사용이 되었어요.
그래서 동역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역자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데 한 팀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광이 같은 것입니다.
모두가 주의 택한 그릇으로 사용이 된 것이기 때문에 서로의 영광이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교회가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가정 교회들이 모여서 지역교회를 이루었어요.
지금처럼 네 교회, 내 교회로 나누지 않았어요.
이 시대는 바로 이웃하고 있는 교회도 남이에요.
경쟁상대에요.
이웃 교회의 아픔을 보면 도와줄 마음이 들지 않고 고소하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초대교회 시대는 이웃 교회의 아픔을 보면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어요.
그래서 생판 얼굴도 보지 못한 마게도냐니 고린도니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의 교회들이 형제 사랑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힘에 넘치도록 도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와 이 시대 교회를 비교해 보면 이 시대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니란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만큼 세속화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책망을 들어야 해요.
그리고 회개 하여야 해요.
초대교회는 오로지 복음 안에서 형제 사랑을 나누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도 계산 적으로 살고 있어요.
교회 일을 해도 손익 계산을 하고 있어요.
사람을 만나도 유, 불리를 따지고 있어요.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의 행적을 논할 필요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분명하게 녹명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나요.
그런데 우리의 이름도 생명책에 분명히 녹명이 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기 때문에 미력하나마 복음의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저는 복음 전하는 종으로 사역을 하고, 여러분은 복음 전하는 종을 돕는 것으로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일에 동참이 되어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바울의 보호자로 담당을 하였고,
어떤 이는 바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위험한 일에 동참을 하였고,
어떤 이는 물심양면으로 도왔어요.
지금도 수많은 바울이 있어요.
복음 전하는 종들이 있어요.
또한 그들을 협력하는 종들도 있어요.
이 모두가 문안하고 문안 받아야 할 한 형제들인 것입니다.
바울이란? 작은 자란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를 심판 할 때 주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양들에게 너희가 지극히 작은 형제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영생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작은 형제란? 그 당시에 복음 전하는 종들을 말해요.
이들은 화려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다녔어요.
세상 가치로 보면 외면 당 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어요.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알아 볼 수가 없는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양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은 그들을 알아보았고 한 형제로 영접하고 문안하면서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어요.
배고프고 힘 들 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고맙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을 돌보아 주어서 고맙다고 하는 거에요.
너희들이 영접하고 돌보아 주었던 그 지극히 작은 형제가 곧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의 모습이 곧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모습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복음 전하는 종들은 화려하지 않아요.
어느 시대이고 복음은 화려하게 증거 되지 않았어요.
피 흘림 속에서 지극히 미미하게 증거 되었어요.
복음은 비록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꺼져갈 것 같은 심지처럼 보이지만 꺼지지 않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연약하여 꺾일 것 같지만 꺾이지 않고 견디어져 왔어요.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처럼 보이지 겨자씨처럼 지금도 천국 운동은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강해를 마감하면서 당부를 드립니다.
혹여 복음을 알면 영웅이 된다는 사고를 버리세요.
누가 알아준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죽은 그 자리에 또 다른 우리가 생겨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을 주고서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로 밀어 넣고 계십니다.
예수님만 한 일의 밀알처럼 죽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예수의 형제로서 예수님처럼 죽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부인되어지고 형제를 위하여 내가 희생 되는 그 자리가 곧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죽은 자 같으나 산 자가 되고,
망한 것 같으나 흥한 자이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살아날 것입니다.
진 자가 아니라 이긴 자로서 설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 하지 마세요.
잠시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십니다.
반드시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사모하면서 소망 삼고 이겨내세요.
만물이 주님이 오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어요.
만물의 소리를 들으세요.
주께서 그럽니다.
내가 지금 가고 있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은혜 가운데 로마서를 강해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위로도 주시고 소망도 주심을 감사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형제들 속에 우리도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바울의 형제 문안이 우리에게 향한 문안으로 들려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의 그 은혜에 동참케 하셨으니 기쁜 맘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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