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강. 성도를 섬기는 일 (롬 15:25-33)
롬 15:25-33=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성경을 펴면 해 아래 새 것이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새것이라고 하는 것들도 이미 예전에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성경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할까요?
이는 인간은 모두가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시대 인간이나 노아 시대 인간이나 모세 시대 인간이나 지금 이 시대 인간이나 다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는 짓이 구약의 인간들이나 신약의 인간들이나 다 똑 같은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과거는 현재의 자화상이에요.
이는 모든 인간의 본성은 같기 때문입니다.
옛 말에 애비를 보면 자식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자식은 아비를 닮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전자(DNA)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하는 짓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모양은 시대마다 변천하여서 다를 수가 있지만 그 본질적인 면에서는 다 같아요.
그러므로 인간들 세상에서의 역사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일컬어 역사라고 합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과 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마치 실을 길게 쭈욱~ 늘어놓은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걸 한 지평 아래 있다고 합니다.
지평이란? 일렬로 쭉 늘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한 지평 아래 길게 늘어져 있다 함은 어느 시대나 똑 같다는 말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역사는 마치 긴 갈치와 같아요.
갈치를 토막 토막 내서 구워 먹으면 각 토막마다 갈치의 맛이 나는 것과 같이 역사도 시대 시대마다 갈치의 토막처럼 동일한 맛을 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인간으로 말하면 2천 년 전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다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구조적 말하면 역사란? 하늘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아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기가 거기고 그 날이 그 날이에요.
그러니 하늘 위에서 보면 지구에서 일어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는 동일한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늘 순환되는 구조로 돌아가고 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또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순환을 합니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아침에서 저녁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해가 바뀐다고 하여서 새로운 날이 되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날의 반복이에요.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저녁에서 아침이 반복적으로 순환 하면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연속이 됩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이 되어서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여섯째 날까지는 저녁에서 아침으로 순환이 되다가 일곱째 날에 가서는 저녁에서 아침으로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는 일곱째 날은 다른 날이란 말입니다.
저녁과 아침이 없다는 것은 역사 바깥의 날이란 말입니다.
이를 묵시에 속한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일컬어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안식일이란 여호와께 속한 날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주의 날은 창조시의 역사 속에서는 일곱째 날이지만 영적으로는 여덟째 날입니다.
창조 시의 일곱째 날은 묵시의 날인 여덟째 날을 예표하고 있어요.
우리가 주일 날 모이는 것은 창조시의 일곱째 날을 기념하지만 영적으로는 여덟째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요일을 주의 날로 정하여서 교회로 모이는 것은 영적으로는 역사 바깥의 묵시의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는 일요일이지만 영적으로는 세상 밖에 속한 여덟째 날이에요.
묵시에 속한 성도들이 주의 날인 일곱째 날에 교회에 모임으로서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말 자체가 빼내심을 입은 무리란 뜻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묵시 공동체라고 하는 것도 역사에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곳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일곱째 날에 모임으로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구별의 날이듯이 교회도 구별된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곳입니다.
묵시에 속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 원리로 세워지지 않고 하늘에 원리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교회에 일곱째 날로서 열심히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월요일이든 수요일이든 금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모일 때마다 주의 날로서 일곱째 날이어야 합니다.
묵시적으로 모여서 묵시적 가치로 서로 섬겨야 합니다.
역사적 섬김이 아니라 묵시적 섬김으로 섬겨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묵시적 가치로 섬겨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말씀이 섬김입니다.
바울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섬긴다고 합니다.
어떻게 섬기는 것이 묵시적인 섬김인가요?
섬김도 두 섬김이 있습니다.
세상 가치로서의 섬김이 있고 묵시적 가치로서의 섬김이 있습니다.
세상의 섬김과 묵시의 섬김은 다릅니다.
역설적입니다.
성도는 역사에 살지만 묵시에 속한 자입니다.
이건 마치 미국 시민이 대한민국에 상주하는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비록 몸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미국시민권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대사관 안에서는 미국의 가치와 원리로 살게 됩니다.
대사관 바깥에서는 대한민국에 법을 지키며 삽니다.
비록 미국시민권자라고 해도 대한민국 법에 제재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 시민으로 삽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묵시에 속한 자이지만 몸은 역사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에 속한 것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에 가두어질 필요는 없지만 역사 속에서의 삶을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다만 역사를 통해서 묵시를 읽어내면 됩니다.
그럼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걸 바울은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사는 자들이므로 역사 안에서 묵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역사가 묵시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묵시적 상징성을 띠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 하나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읽을 수가 있어집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묵시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표상이라고 하고 사회현상론이라고도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시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회현상론은 하나의 징조(徵兆)가 되는 것입니다.
우린 징조를 통해서 그 시대 영적 상태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재림의 모형입니다.
초림 때의 상황이 재림 때 영적 상황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극심한 타락이 있었습니다.
이걸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묘사하였습니다.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하다는 말은 외식으로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 요란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장로의 유전으로 섬기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한다” 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기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장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타락할 때 예수님이 오십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모습으로 증거 해 주었습니다.
처음 창조가 언제 일어났느냐 하면 흑암이 깊음 중에 있고 혼돈과 공허함이 절정을 이룰 때 일어났습니다.
새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혼돈 된 시기에 일어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모습과 예수님의 초림 당시의 모습은 영적으로는 동일합니다.
물론 재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의 때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노아 시대와 같이 죄악이 관영해 질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달리 죄악이 관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늘에 소망을 다 잃어버리고 땅에 매여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두면 땅에 삼키운 바가 될 것 같으니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로 빼 내시는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보면 어둠 속에서 빛을 끄집어내는 창조를 하셨습니다.
초림 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바로 어둠 그 자체였습니다.
영적으로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신앙이 가장 거룩하고 좋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강도의 굴혈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건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같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맨 마지막에 나오는 교회입니다.
이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 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한마디로 하면 빛 좋은 개살구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을 보고 갑시다.
계 3:14-18=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맨 마지막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교회 모습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과 같습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때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집니다.
야 이놈들아!
네 꼬라지가 어떤지 좀 알라고 하십니다.
너희들 꼬라지가 어떤 줄 아느냐?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합니다.
이는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은 신자라고 하는데 하는 행동은 불신자들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속이 거북스러워서 확~ 토해내고 싶을 지경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나는 믿음이 부자이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실상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발가벗고 있다고 하십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가 없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 때 모습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신앙이 이러했습니다.
영적으로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와 같고, 중풍 병자와 같고, 앉은뱅이와 같고, 소경이고 절뚝발이고 각색 병든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외식 신앙이었습니다.
외식이란? 쉬운 말로 연기한다는 말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의 신앙상태를 표현하시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일컬어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이걸 이 시대 버전으로 하면 입술로는 복음을 말하는데 정작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없다는 말입니다.
초림은 재림의 모형이라고 했다면 지금도 그러합니다.
지금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멉니다.
신앙적인 담론(談論)은 무성하지만 실제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이 시대는 말씀에 홍수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작 마실 물이 없습니다.
복음이 담론(談論)화 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도가 담론으로 치닫다 보니 교회마다 말쟁이들만 무성합니다.
십자가 도는 말이 아니고 생명입니다.
성경은 말이 아니고 생명입니다.
말이란? 뜻을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일종의 기호와 같은 것이에요.
기호는 뜻을 전하는 수단일 뿐이지 기호가 내용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말 속에서 뜻을 찾아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 말씀이라는 문자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그 진의를 찾아야 합니다.
말씀이라는 문자 속에 담긴 내용을 보아야 합니다.
이번에 제가 중국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은 문자로 보면 안 된다고!
그런데 거기에 참석하신 목회자들이 자신들은 지금까지 문자로만 보았다고 합니다.
문자적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문자적 설교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문을 그대로 도덕책 읽듯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를 율법적 설교라고 합니다.
이러한 설교는 성령의 감동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글자만 알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설교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문자적으로 설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설교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영적으로 해야지요.
어떤 게 영적입니까?
무엇이 영적이냐?
예수가 영이에요.
예수로 해석하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으로 해석을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하여 기록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문자 속에서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내용이고 말씀이라는 문자는 그릇입니다.
그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보면 안 되고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문자 풀이를 이야기 하지 말고 예수를 이야기 하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어떻게 성취 하셨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주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였어요.
이 말을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하세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으킨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에요.
설교란?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지요.
증인이란? 목격자에요.
목격자는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면 되어요.
여러분이 만난 예수를 증거하는 거에요.
이게 설교이고 전도에요.
설교를 “케리그마”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경험된 사건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사도들이 한 설교를 보세요.
모두가 자기들이 경험된 사건들을 증거하였어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간증하였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그러지요.
지금 예수가 우리 안에서 이 앉은뱅이를 고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증거하였어요.
이게 설교에요.
이걸 이 시대 버전으로 말을 한다면 예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나열하지만 말고 예수니 마음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고 예수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시대 예수에 관한 담론은 풍성한데 예수로 살아내는 것이 없어요.
사도요한은 “형제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라고 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말만 하지 말고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말고 혀로 사랑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외식이란? 먹어도 배 부름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해요.
그림에 떡인 겁니다.
예수가 그림에 떡이다 보니 아는 것은 많은데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예수가 안에 있어야 하는데 바깥에 있어요.
예수가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겉도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문자적인 말씀만 있어요.
내용이 없어요.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 생명과 사랑이 없어요.
말씀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생명으로 산다고 합니다.
말씀이 살아서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초대교회를 본받읍시다! 가 아니고 초대교회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슬로건이 아니고 캠페인이 아니에요.
신앙은 삶이에요.
성령이 오시면 캠페인을 벌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게 하세요.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계시는 성도들은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태초에 계셨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었다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해요.
예수님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니에요.
성도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말씀이신 예수님이 성도 안에 오시면 성도의 몸을 가지고 말씀을 풀어내는 삶을 살게 하세요.
이걸 예수로 산다고 합니다.
서편제라는 뮤지컬을 보면 “살다보면” 이라는 노래가 나와요.
그 가사의 내용이 살다보면 살게 된다는 말이 있어요.
서툴지만 살다 보니 살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으로 살면 예수로 살아지는 것이에요.
이건 온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미흡하지만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지게 되어 있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면 역사 속에서 묵시적 가치로 살게 됩니다.
역사적 가치를 초월하여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묵시적 가치로 사니까 세상을 초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세상에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림의 떡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떡을 먹은 자는 육신의 배부름을 얻듯이 실제로 예수를 양식으로 먹는 성도는 예수 안에서 영적인 배부름으로 살아요.
예수가 주는 은혜의 풍성함 속에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뭐냐?
예수의 지체들이 모여서 예수의 몸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곳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예배가 뭐냐?
섬김이에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섬기듯이 말이에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섬김은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섬김 이야기에요.
성경은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어요.
그러므로 성경을 상식으로 보면 안 되어요.
성경은 곡언법(曲言法)으로 되어 있어요.
곡언법(曲言法)이란? 말을 구부려서 한다는 말입니다.
정설(定說)을 역설(逆說)로 말하는 것을 말해요.
이는 육에 속한 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아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과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여기서 차이란? 완전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근본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동일한 말을 해석함에도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오늘 본문을 보면 섬김이 나옵니다.
바울이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가 누구를 섬긴다고 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세상의 섬김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정 반대로 말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긴다고 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긴다고 합니다.
인간들 상식에 반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섬김이라는 말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인간의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의 섬김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의 섬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섬김에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꺼꾸러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자기 백성을 섬기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봅시다.
마 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베대의 아들들이란? 요한과 야고보를 말해요.
그러니까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알다시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자매(姉妹)지간이에요.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이종사촌지간 인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예수님의 이모가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모가 예수님께서 갖가지 기적을 일으키고 능력을 행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니까 사람들의 입 소문이 예수가 곧 왕이 된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찾아 와서 하는 말이 예수야! 네가 만약 집권을 하면 사촌 형제인 요한과 야고보를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을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열 제자들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건 아니지 라고 하면서 아니~! 여기서도 집안끼리 다 해 먹고자 하는 겁니까? 리고 뿔따구를 내는 겁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합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단다.
세상 나라에서는 집권자들이 섬김을 받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집권자들이 도리어 섬기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알다시피 내가 하늘나라 왕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섬김 받고자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내 목숨을 너희들을 대신하여 대속물로 주려고 왔단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섬김이니라 고 합니다.
너희들도 이 섬김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섬김은 우리가 생각하는 섬김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역설적이에요.
하나님은 이러한 섬김의 도를 가정에 두었어요.
부모가 자식을 섬기게 하신 거에요.
자식은 부모의 섬김으로 살아요.
이게 생명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섬김이에요.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의 세계에서는 어미가 새끼를 돌보게 되어 있어요.
섬김이란?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라는 여성 명사인데 이것은 어미가 자식을 돌보는 사역을 말해요.
자식은 부모의 희생을 통하여 자라가요.
부모의 희생 없이는 자식은 자랄 수가 없어요.
우리의 구원이 그러해요.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섬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 줄 알게 됩니다.
구원이란? 외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어집니다.
이렇게 돕는 것을 섬김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희생 없이는 얻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미가 아이를 낳을 때와 같은 현상인 물과 피를 쏟고 교회를 낳은 것입니다.
이걸 대속물이라고 해요.
대속물이란? 대신 갚아주는 몸값을 말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라는 몸값을 지불하고 주어진 것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예수님을 맞 바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구원 받았다가 자랑되어지면 안 되고 나 대신 예수가 죽었구나 를 알아야 해요.
이럴 때 우리의 삶이 자유가 아닌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의무감으로 사는 것을 빚진 자로 산다고 해요.
어째서 빚진 자입니까?
하나님의 섬김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섬김으로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 부분은 저의 히브리서 강의를 참고 하세요.
그럼 많은 유익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41강. 하나님의 섬김으로 완성된 구원”을 꼭 보세요.
히브리서 6장을 잠깐 맛보기로 인용하고 갑시다.
히 6:9-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불의치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덕 부리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이는 곧 그 어떤 상황이 되어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위에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성도가 예수 이름으로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한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행한 행위를 기억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위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면 앞으로도 열심히 성도를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되어요.
이렇게 되면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까지 앞에서 말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앞서서 히브리서 6장 1절에서 8절까지 멜기세덱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가지고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로 말했어요.
그러면서 멜기세덱의 비밀을 모르면 짤린다는 투로 말을 했어요.
하지만 너희들은 이보다 나은 구원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9절부턴 앞에서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의 연장선에서 해석을 하면 성도의 구원은 짤리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것으로서 9절 이하의 말씀은 주께 사랑을 입은 성도는 반드시 구원이 된다는 말로 해석 할 수가 있어요.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해석을 하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성도를 섬겨주시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섬기심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성도를 섬기는 일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성도를 섬기는 것을 성도가 성도를 섬기는 것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성도 안에서 성도를 섬기고 있다고 보시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섬기심으로 주어진 확실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 문법을 보면 “신적(神的) 수동태(受動態)”라는 것이 있어요.
이는 신이 인간 속에서 일을 한 것을 말해요.
겉으로 나타난 것은 인간인데 실제 그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신적 수동태라고 해요.
이걸 다른 말로 사역(使役) 동사(動詞)라고도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태복음 1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말 할 때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는 예수가 나시니 라고 합니다.
마 1장 16절 “야곱은 마리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누가 누구를 낳았다” 라는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이건 “아비가 자식을 낳았다” 라는 식으로 표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오면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낳았어요.
그런데 “마리아에게서” 라고 합니다.
여기서 “에게서” 가 중요해요.
“에게서”란? 누군가가 마리아를 통해서 낳았다는 말입니다.
언뜻 보면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본문의 어법(語法)은 요셉을 빼 버렸어요.
요셉의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못하게 하였어요.
일종의 금기어(禁忌語)와 같아요.
그래서 유대인인 마태도 예수님의 족보를 쓸 때도 유대인들을 의식해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문법적 방법이 “신적(神的) 수동태(受動態)”라는 기법입니다.
수동태(受動態)라는 말은 누구에 의해서 발생된 행위를 수동적으로 하게 된 것을 표기할 때 사용하는 문법이에요.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행위를 표현할 때 “신적(神的) 수동태(受動態)”라고 합니다.
그럼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는 말씀을 직역하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를 낳으니” 라는 말이 됩니다.
마리아의 남편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자를 모르는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섬김도 마찬가지에요.
“신적(神的) 수동태(受動態)”로서 하나님이 성도를 통하여 섬겼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 안에서 섬김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섬김이 아니고 하나님의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문맥을 따라서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건의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해요.
즉 하나님의 일하심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말씀을 궁극적으로 지키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설령 성도가 행하였다고 하여도 그 행함을 성도의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모든 바탕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적 관점의 해석법”이라고 해요.
“새 언약적 관점의 해석법”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비록 어떤 행함을 하였다고 하여도 그 행함은 예수님의 것이에요.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 안에서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성도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믿음과 행함이 나오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행함은 독자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믿음이 일으켜서 나온 것입니다.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에요.
이게 사역 동사인데 “신적(神的) 수동태(受動態)” 라고 해요.
그러므로 성도의 행함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걸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출발해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 전체이야기에요.
인간이 낄 틈이 없어요.
성경은 인간이 낄 틈을 허락하지 않아요.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하고 두 분이 맺었어요.
성도를 예수님이 책임을 지시고 구원을 하세요.
그러므로 성도가 그 어떤 일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행함은 예수님이 그 안에서 한 행함이기 때문에 성도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였다고 하면 반칙이에요.
그런 행함은 옛 언약적 행함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이 행함을 붙잡고 있다가 망했어요.
옛 언약 하에서의 주체는 나 이지만 새 언약 하에서의 주체는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성도의 섬김을 새 언약적 관점에서 주의 이름으로 섬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섬겼다는 것은 곧 주님이 섬겼다는 말입니다.
결국 주님은 성도가 섬김 것을 통하여서 주님 자신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펴도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칭찬하고 자랑한 적이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힘으로 하고서도 자기가 한 것처럼 영광을 가로채는 악당들이에요.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에서 말하는 성도가 섬긴 것은 성도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성도를 섬긴 “신적(神的) 수동태(受動態)” 로서 행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나오는 하나님의 맹세로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로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것은 곧 하나님의 맹세로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결국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섬김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을 지켜주세요.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지키시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섬김은 변덕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불의치 않는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 이름을 위해서 성도들을 섬기고 계신 겁니다.
이건 마치 자식이 부모 속을 섞여도 부모는 변치 않고 자식을 보살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 10절을 “하나님은 변덕이 없으신 분이므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지금까지 성도를 사랑으로 섬겨온 것과 같이 앞으로도 계속하여서 성도를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져 있어요.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 속에 자기 이름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부모는 자식을 타자(他者)로 보지 않기 때문에 온갖 사랑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자식의 행함과 상관없이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성도를 섬긴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섬김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긴다고 해요.
이는 곧 창조주가 피조물을 돌보는 것을 말해요.
우리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섬긴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어느 시대이고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겨 왔어요.
이걸 아는 것이 신앙이에요.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생명을 보살펴 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생명을 보살펴 주잖아요.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섬기는 겁니다.
아빠는 새벽에 나가서 돈을 벌어다 주고 엄마는 새벽같이 일어나 자식들 밥해서 먹여 살리고 있어요.
이게 섬김이에요.
자식들은 가만히 앉아서 부모가 해다 주는 것을 먹고 살아요.
하지만 자식들을 이 사실을 몰라요.
자기들이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을 섬긴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고서 유세를 떨어요.
공부하는 놈들 보세요.
꼭 누굴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결국 저 잘 살게 하려고 공부시키는데도 부모를 위해서 한다고 생색을 내고 있잖아요.
부모님들은 이 사실을 알지만 그래 부모를 위해서라도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꼭 그래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셨어요.
예수를 믿게 해 주는 것도 하나님이 해 주셨어요.
은혜를 깨닫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셨어요.
감사하는 마음!
봉사하는 마음!
섬기는 마음!
연보하게 하는 마음!,,,,
모두를 하나님이 주셨어요.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다 간섭해 주신 결과에요.
한마디로 하나님이 섬겨주셨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신앙을 지켜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린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에요.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주셨으면 그들도 방주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노아가 방주를 지었다고 하면 안 되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이 시대 방주란? 예수님이에요.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를 지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자랑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은 감사의 산물로 나타나야 하는 것도 다 “신적(神的) 수동태(受動態)”로서 행하여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의 바탕엔 하나님의 은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은혜를 주셔서 예수를 믿게 하실까요?
이는 하나님이 우리는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를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고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히 6장 10절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한 번 섬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지 않고 섬기고 있어요.
강하신 하나님이 약한 우리를 섬기고 있어요.
마치 부모님이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섬기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이만큼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방인들이 신령한 것을 받았은즉 육신의 것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울은 지금 서바나로 가는 길이에요.
그 도중에 예루살렘 교회에 들러서 고린도 교회와 마게도냐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로부터 받은 구제금을 전달해 주고자 합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빚을 졌다고 합니다.
무슨 빚입니까?
복음에 빚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마게도냐로 이르렀습니다.
이방인 교회들이 복음을 받고 보니 이건 너무도 귀한 것을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받은 거에요.
그래서 자기들은 하늘에 것을 갚을 길이 없어서 육신의 것으로 갚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신령한 복음을 받았은즉 육신의 것으로 구제하고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늘에 것이고 신령한 것이에요.
신령한 것은 갚을 길이 없어요.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신령한 것은 아래로 흘러가요.
아랫물은 윗물에게 갚을 길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갚느냐?
자신이 윗물로부터 받았듯이 아랫물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걸 내리 사랑이라고 하는데 빚 갚음이라고 합니다.
치 사랑은 없고 내리 사랑만 있다고 하지요.
이는 사랑이란? 위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흐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사랑할 수가 없어요.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이에요.
그럼 자식이 어떻게 부모를 사랑하느냐?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거에요.
27절에 보면 “빚진 자”라는 말이 나오지요.
여기서 “빚진 자”라는 말은 “오페일레타이” 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빚 갚을 의무를 지닌 자라는 말이에요.
이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반드시 갚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밥을 먹으면 배설을 하듯이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그 은혜를 토하여 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억지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거에요.
갚게 되어 있다 함은 앞서서 말했듯이 “신적(神的) 수동태(受動態)”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금을 보낸 것은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하게 한 것입니다.
이걸 구제라고 합니다.
구제란? 내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 구제를 하려면 먼저 받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어야 해요.
지금 고린도 교회와 마게도냐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와 같은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금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먼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복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라는 하늘에 신령한 것을 받고 보니까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귀하여서 물질이라는 땅에 것을 나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신령한 것을 받았은즉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과 같은고 하니 마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땅이 자기 몸을 희생하여 싹을 내는 것과 같아요.
흙은 씨가 발아 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씨가 흙을 침노하는 것이 되어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가 우리 안에 침노해 오면 우리 몸은 예수의 생명을 틔우기 위하여 후패해져 가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몸이 신령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육신의 것으로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봉사와 충성은 신령한 것을 받은 것에 대한 반응이에요.
신령한 것이란? 복음이고 하늘에 생명이에요.
지금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신령한 하늘에 생명을 받았어요.
복음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육신의 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감사가 그래요.
우린 하늘에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서 땅에 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것인 복음을 받고 보니 너무도 감사하여서 육신의 것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육신의 것으로 형제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가르치는 자를 알아주라고 하지요.
갈 6: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는 감사하라는 말이에요.
쉬운 말로 목사는 하늘에 신령한 것을 주는 자에요.
그럼 성도는 땅에 것으로 감사로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신령한 것을 받았은즉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부탁하는 것입니다.
유대에 순종치 않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자신의 섬김이 이루어져서 하나님께 드려짐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말 안 듣는 자식들처럼 지금은 속을 썩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처럼 은혜를 주셔서 바울의 섬김이 유효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빚진 자들이에요.
그럼 이제부터 우리도 바울처럼 섬기는 자가 되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서 일을 해 가세요.
바울은 이러한 것이 자기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이들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가 우리에게 아멘으로 화답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고 있음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하옵니다. 하나님께서 일향 미쁘신 섬김으로 인하여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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