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강.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롬 14:7-13)
롬 14:7-13=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 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옛말에 모르는 것은 손에 쥐어 줘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러고 있지는 않은가 모르겠어요.
우린 엄청난 은혜를 입고 있어요.
천사들도 흠모할 구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우린 그 구원이 주는 기쁨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놀라운 비밀들을 알지 못하고 있어요.
땅에 것이 마음을 빼앗겨서 하늘에 소망을 놓치고 살고 있어요.
이건 마치 과거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다이아몬드를 유리구슬로 바꾸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그렇게 어리석게 살고 있어요.
구원의 축복을 놓치고 산단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고 하잖아요.
살고 있어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이래요.
무슨 말인가요?
우리의 구원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는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린 죽음 앞에 서면 두렵고 작아져요.
왜냐하면! 죽으면 실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에요.
살아도 성공이고!
죽어도 성공이에요.
왜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 한 것인지 살펴봅시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을 하신다고 합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조성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우리를 말해요.
모든 성도가 야곱이에요.
그러니 나의 이야기로 들으세요.
구속이니, 조성이니, 지명이니, 부르심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행하신 일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행하신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다고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어요.
왜? 이러한 말을 합니까?
야곱(이스라엘)이 지금 두려운 환경에 처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들 틈에 끼어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있어요.
물이 엄몰하는 환경과 같고 불 속에 갇힌 것과 같은 환경입니다.
이건 저주 받은 이 세상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야곱이 저주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조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허락한 것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물속에서 빠져 죽어야 하고 불에 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홍수 속에서 살아난 것과 같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서 살아난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붙잡고 있음을 너는 내 것이라고 하고 지명하여 불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야곱을 내꺼! 라고 불렀어요.
그러면서 네가 물 가운데 지날 지라도 물결이 너를 엄몰치 못하겠고, 불 가운데 지날지라도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과 불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저주를 말해요.
물은 땅에서 일어나는 저주를 말하고,
불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저주를 말해요.
그러니 영적 권세로부터도 지켜주고 세상 권세로부터도 지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사단의 참소로부터도 막아주고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이 야곱을 구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속이란? 값을 치르고 산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값을 지불하였나요?
그 아들을 내어주는 값을 지불하였어요.
왜? 값을 지불하고 사왔느냐 하면 야곱을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을 마귀가 붙잡고 있었어요.
마귀가 죄와 사망이라는 권세로 야곱을 붙잡고 종처럼 부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에게 예수를 속전으로 주고 야곱을 사 온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와 야곱을 맞바꾼 겁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위하여 엄청난 값을 지불하였기 때문에 야곱을 포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지켜내야 합니다.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내어 줄지라도 야곱을 포기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애굽과 구스와 스바란 이 세상을 총칭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은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이 다 망해도 자기 백성들만큼은 하나님이 지켜 낸다는 말씀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불 심판 속에서 건져준 롯처럼 멸망 받는 세상에서 건져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같이 값을 주고 산 자기 백성들에게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시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물 같고 불 같은 세상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을 사도들을 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알다시피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나자 두려워서 벌벌 떨었어요.
비록 예수님이 부활 하신 것을 목격 하였지만 그건 남의 일처럼 믿어지지 않았어요.
아무리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여도 소용없었어요.
아무리 겁 내지 말자 라고 다짐을 해도 속으로 두려운데 어찌 합니까?
그런데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자 돌변합니다.
세상 권세가 두려워서 벌벌 떨던 사람들이 성령이 임하고 나자 담대해졌어요.
죽일 테면 죽이라고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섭니다.
도리어 예수의 제자 됨을 당당하게 밝힙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예수의 제자 됨을 숨겼어요.
베드로를 보세요.
계집아이가 당신도 예수와 한 편이지요 라고 하니까,
무슨 소리야!
난 저 사람 몰라! 부인했어요.
심지어 저런 인간은 죽어도 싸! 라고 까지 저주 했어요.
그러던 그가 성령이 임하자 나는 예수의 제자다!
어쩔래! 라고 겁도 없이 죽음의 권세에 당당히 덤비는 겁니다.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생겼을까요?
이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그 속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속에서 간섭하신 것입니다.
야! 베드로야!
너 내 꺼야!
두려워하지 마!
예수님(성령)이 그 속에서 두려움을 내어 좇은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거로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것이란 말은 주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져 주신다는 것은 간섭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만 믿어진다고 한다면 세상 말로 대박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두려움이 엄습합니까?
믿음이 약할 때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보면 스스로 흔들릴 때가 있어요.
이거 내가 진짜 예수를 믿기나 하는 건가?
내 믿음이 진짜인가?
의심이 들 때가 있지요.
이런 의심이 언제 듭니까?
내 꼬라지를 볼 때 들어요.
그것도 자기가 정한 기준에 미달이 될 때입니다.
시편 51편을 봅시다.
시 51:1-19=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이는 일을 벌였어요.
우리야는 충신(忠臣) 중에 충신입니다.
지금 전쟁터에서 열심히 전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왕이란 작자가 그 아내를 겁탈한 것입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덜컹 임신을 했습니다.
큰일 난 겁니다.
신랑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데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간통을 했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율법에는 간통한 여자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해요.
지금 밧세바가 돌에 맞아 죽게 생겼어요.
밧세바를 추궁하면 임신을 시킨 남자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럼 다윗도 죽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왕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생겼어요.
부하는 죽기 살기로 왕을 위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데,
왕이라는 놈은 그 아내를 겁탈을 해서 임신을 시켜놓았으니 율법으로 하면 간통한 사람은 남자와 여자 모두 돌에 맞아 죽어야 해요.
그래서 완전 범죄를 꿈꾸고자 전쟁 중에 있는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불러들입니다.
우리야를 불러들인 이유는 단 하나에요.
밧세바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우리야 아이라고 덮어씌우고자 함이에요.
그래서 밧세바와 동침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우리야가 지금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데 어떻게 장수가 되어서 자기 마누라와 한가하게 잠자리를 할 수가 있겠느냐 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럼 왕이 상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술을 먹여서라도 동침을 하게 합니다.
우리야가 끝까지 거절하자 왕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다른 부하에서 편지를 써서 전쟁터에 있는 다른 지휘관에게 보냅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우리야를 선봉장에 세워서 화살 받이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야를 죽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돌로 쳐 죽일 놈이 있나요?
이게 왕이란 작자가 하는 짓이에요.
결국 우리야는 다윗의 죄 때문에 전사(戰死)를 하고 맙니다.
우리야가 죽고 나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어요.
밧세바 뱃속에 잉태한 아이 때문입니다.
밧세바를 추궁하면 다윗은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윗도 탄핵당해야 합니다.
우리야를 죽인 것을 보아서 아마도 다윗은 밧세바까지 다른 사람과 간음한 여자로 몰아서 죽였을지 몰라요.
이런 광경을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 지켜보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밧세바를 살리기 위하여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을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넌 왕의 자격이 없는 놈이고!
마땅히 죽어야 할 놈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에 다윗이 회개합니다.
주여 내가 죄를 지은 것은 우리 어머니가 나를 죄악 중에 잉태를 하여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한 죄인이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자기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나 때문에 죄 없는 우리야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충신인 우리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도 그 죽음을 근거로 자기를 용서 해달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우리야의 죽음을 근거로 다윗을 용서해줍니다.
다윗을 죽이면 우리야의 죽음이 헛 죽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 해 준 것입니다.
이는 우리야의 죽음을 다윗의 삶에 지워놓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은 우리야의 죽음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 됩니다.
자기 목숨이 아니고 우리야의 목숨인 거에요.
이 우리야가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을 상징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솔로몬의 아비를 다윗이라 하지 않고 우리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 1:6절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말은 솔로몬은 우리야가 낳은 자식이라는 말이에요.
결국 다윗은 우리야를 대신하여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윗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였는지를 말하고자 함이에요.
아까 우리 안에 언제 두려움이 엄습한다고 했나요?
다윗이 언제 두려움이 엄습했나요?
자기가 간음했다는 행실 때문이지요.
결국 인간들은 자기 행실로 인하여 희비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양심이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고발을 해요.
그러므로 다윗처럼 율법이 금하는 짓을 하면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하면 어찌 되나요?
구원의 즐거움이 상실이 되어요.
다윗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10-12절을 보세요.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지금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인 것 때문에 무얼 상실했다고 합니까?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했다고 하지요.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을 받은 자에요.
그러므로 다윗의 행동으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어요.
왜냐하면! 애당초 구원을 다윗의 행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기 위해서는 다윗의 행실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면 안 되어요.
그럼 행위 구원이 되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행위로 인하여 구원을 취소하는 일은 없어요.
하지만 범죄하면 인간의 양심은 은혜로 주어진 구원을 법으로 이해하게 되어요.
구원이 법으로 이해되면 자기 행실로 인하여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기에 걸려 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내 안에 성신(聖神)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왜? 성신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합니까?이는 성신은 우리야의 죽음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신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믿음이 없으면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해요.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끊임없이 법을 만들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안에 신앙은 이런 것이다 라는 정한 기준이 있어요.
즉 신자가 되어서 이 정도는 되어야 신앙이 있다고 여기는 상한선이 있어요.
우리는 신자다움을 자꾸만 우리 행실에서 찾고자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본성이 이러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났어요.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우리 몸은 항상 죄가 주는 선악의 법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악의 법은 우리 행위를 근거로 일을 해요.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행위로 인하여 자기 믿음을 가늠하게 되고 또한 희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하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준에 미달하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실상은 자기 행위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떨어 졌다고 생각하면 어떤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안 하던 짓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던 일에 강도를 더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일 수도 있고,
충성 봉사일 수도 있고,
착하게 사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러한 것을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종교성을 다 가지고 있어요.
종교성이 열심으로 일어나면 믿음이 있다고 여기고, 종교성이 떨어지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나쁘단 말이 아니에요.
또한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에요.
열심히 하세요.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척도로는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척도가 되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처럼 먹고 마시는 것과 날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 여부를 가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자기 몸으로 행하는 것에 의미를 둡니까?
이는 인간들 속에 있는 타고난 종교성으로 신앙을 가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근거를 자기 행위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술 담배를 안 먹으면 신앙 있음으로 여기고, 술 담배를 하면 신앙 없음으로 여기고!
주일성수를 잘하면 신앙 있음으로 여기고, 주일성수를 못하면 신앙 없음으로 여기고!
착하게 살면 신앙 있음으로 여기고, 나쁘게 살면 신앙 없음으로 여기고!
찬송가를 부르면 신앙이 있다고 여기고, 유행가를 부르면 신앙 없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에요.
이러한 신앙관을 가지게 되면 계속해서 자기 행위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하게 되어요.
성(聖)과 속(俗)을 세상 적인 것으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쉬면서 집안일을 충실히 하면 죄를 안 짓는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고 음주가무라도 즐기면 죄를 짓는다고 생각을 해요.
사람들은 죄 그러면 자기 행실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죄라고 해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예수를 안 믿는 것이에요.
다른 말로 자기 꼬라지로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그것이 죄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한다고 하지요.
책망이 뭔가요?
틀렸다는 거잖아요.
뭘 책망한다고 합니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책망해요.
이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죄관과 의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바깥의 세상과 예수 안에서의 죄관이 달라요.
예수 밖에서는 인간들이 정한 기준의 죄관이 있어요.
이름하여 윤리 도덕입니다.
윤리 도덕은 인간의 행실을 근거로 해요.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사관에서 보면 이게 죄에요.
왜? 그럽니까?
성경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해요.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에게서 발생 된 것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죄인은 착하게 살아도 죄고, 악하게 살아도 죄에요.
하나님은 죄인의 행실을 가지고 이건 선(善)이고, 저건 악(惡)이라고 판단하지 않아요.
왜? 그런가요?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벌레에요.
마치 인간들 앞에서 바퀴벌레와 같아요.
인간들은 바퀴벌레에게서 착함과 악함을 나누지 않아요.
왜냐하면! 바퀴벌레 자체가 백해무익(百害無益)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그러해요.
백해무익한 죄인들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인간의 행실을 근거로 선(善)이다 악(惡)이다 판단하는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죄는 따로 있어요.
시편 2편을 봅시다.
시 2:7-12=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포고령(布告令)을 내렸어요.
어떤 포고령인가 하면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는데 그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를 영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끌어 붓겠다고 합니다.
이건 인간들을 무시하는 말이에요.
인간들은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는다고 저주를 받는 다는 사고는 인간들 정서에 맞지 않아요.
그건 하나님의 횡포에요.
인간들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본능 속에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의 사고를 가지고 있어요.
차라리 착하게 살지 않고 악하게 살면 진노를 끌어 붓겠다고 하면 이해가 가요.
그런데 자기 아들을 영접 안했다고 진노를 퍼 붓는다는 것은 그건 귀신들이나 하는 짓이지 하나님으로서는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예수 안 믿으면 저주 받는다는 것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어요.
사람들은 예수 안 믿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에 내린 포고령에는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저주 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세상에 던진 죄의 기준이에요.
하나님은 이 기준으로 심판하세요.
하나님이 정한 죄의 기준에는 인간의 착함과 악함은 판단 대상이 아니에요.
오직 하나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었느냐 에요.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춘 자는 죄 없는 자이고!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자는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 세상에 새로운 죄관을 던져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저주하세요.
오해할까봐 못을 하나 처 두고 갑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으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건 그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는 두 가지 죄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존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관과 하나님이 주신 죄관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죄관은 자기 행동을 근거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죄관은 인간의 행동과 상관없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죄라고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란? 세상 죄관에는 밝은데 하나님이 주신 죄관에는 어두운 자들을 말해요.
그러므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이 날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저 날을 지킬 것인가 라는 것으로 신앙이 있다 없다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아직까지 율법적 사고가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 안에는 어떤 이들은 율법적 사고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 율법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율법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죄관으로 살아가요.
이들이 강한 자에요.
이들은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고 살아요.
하지만 아직까지 율법적 사고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관으로 자기 신앙을 판단하게 되어요.
이들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날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성령이 알게 해 주신 죄관으로 살아요.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율법적 죄관으로 살아요.
그러니 어떠한 일을 가지고서도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일을 가지고서도 믿음이 강한 자들은 죄로 여기지 않는데, 믿음에 연약한 자들은 죄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정죄하고 심판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죄관을 알려주고 이해하고 기다려주어야 해요.
하나님이 말하는 죄란 예수를 안 믿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봅시다.
마 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백성들을 초청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사정 때문에 참석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자 왕이 대노하면서 군사들을 보내서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을 다 도륙을 했어요.
이건 구약의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것을 상징해요.
왕이 다시 훈령을 내립니다.
이제는 자기 동네를 따지지 말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혼인잔치에 참석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을 했습니다.
왕이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예복들을 입혀주라고 했습니다.
이제 왕이 손님들을 맞이하려고 잔치 장으로 나아가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을 몽땅 내어 좇으라고 합니다.
이건 신약의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것을 상징해요.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는 천국을 말해요.
예수님이 지금 천국 비유를 하고 있어요.
그럼 천국에는 어떻게 가느냐 하면 왕이 준비해 놓은 옷을 입고 가는 겁니다.
그 옷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를 말해요.
여기서 살펴볼 것은 심판은 왕이 정한 기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정한 기준이 바로 왕이 부르면 자기 사정을 따지지 말고 참석하는 것이고!
자기 옷을 입고 오지 말고, 왕이 준비한 옷을 입고 오라는 것입니다.
자기 옷은 자기 의를 말하고, 왕이 준비한 옷은 왕이 준 의를 말해요.
자기 옷은 자기 행함이고, 왕의 옷은 예수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앞세우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걸 신자들은 받아들이는데, 불신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아요.
불신자들이 왜? 받아들이지 않나요?
이는 인간의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왕이지만 어떻게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인간 세상에서는 없는 일이에요.
사람마다 다 자기 사정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금방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느라 참석하지 못했어요.
또 어떤 사람은 회사 일이 급해서 출근 하느라 참석하지 못했어요.
어떤 사람은 몸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어요.
세상 왕이라고 한다면 정상 참작을 해 주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참작해 주지 않아요.
무슨 이런 하나님이 있는가요?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처사가 못 마땅한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 2편에서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진노를 하는 것과,
신약의 마태복음 22장에서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진멸을 하는 것 속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무슨 공통점인가요?
하나님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사정을 봐 주지 않는가요?
그리고 자기 사정 때문에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은 것이 왜? 저주 받아야 할 죄가 되는가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힌트를 얻을 수가 있어요.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뭐라고 했나요.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지요.
누구 것이라구요?
주의 것이에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에요.
이게 답이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인이에요.
만물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이 사실을 안다고 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피조가 된 인간들이 창조주인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사정을 핑계로 하나님의 명을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을 어긴다는 것 자체가 곧 자기 주제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죄가 뭐냐?
자기 생각으로 사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 자기 사정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입니다.
독자적인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가 몰고 온 현상입니다.
군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어요.
속된 말로 “까라면 까!”
예를 들어서 하는 말이니 욕으로 듣지 말고 이해하고 들으세요.
무슨 말인가요?
네 생각을 하지 말고 상관의 명령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군대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어요.
군대에서는 부하의 생각은 중요치 않아요.
그러므로 상관이 까라고 하면 예! 라고 하여야지 핑계를 대면 안 되어요.
이게 군대에서의 법이에요.
이 법을 어기면 영창에 가요.
지금 하나님께서 군대의 상관이 되어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어요.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라고 합니다.
그럼 예! 하고 따라야 합니다.
토를 달면 안 되어요.
이걸 성경에서는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나는 누구 것이라고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정 하십니까?
진짜로,,,
그럼 안심하고 사세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살 권세도 없고 죽을 권세도 없어요.
죽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달렸어요.
멀쩡한 사람이 죽을 때에는 다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고!
살게 하실 때는 다 살게 하실 이유가 있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럽니다.
참새 한 마리도 천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참새보다 더 귀한 자라고 합니다.
참새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아들들을 지켜주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8-3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건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 필요해서 일으킨 사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들이 닥치면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비록 너희들이 세상이 정한 죄에 빠졌다 할지라도 낙심치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누가 송사한단 말이냐!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데 어떤 놈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느냐!
없다고 합니다.
누가 정죄 하느냐?
예수님께서 눈 부릅뜨고 자기 피를 가지고 송사를 막아 준다고 합니다.
예수 믿으면 그것 자체가 모든 죄를 덮는 것이므로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라는 것에 참소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혹시라도 너희가 도살당하는 양과 같은 입장에 놓인다 하여도 댕댕거리지 말고 다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묵묵히 받으라고 합니다.
환란을 당하든지,
기근을 당하든지,
위협을 당하든지,
누가 공갈을 치고 참소를 하여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 필요해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것입니다.
욕을 먹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칭찬 듣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이단 소리 듣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모두가 다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주의 것으로 사는 성도들의 복이고 특권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질 때 남의 일에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도 주의 것으로 주께서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깁니까?
이는 그 형제만 보고 그를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았다고 하는데 니가 왜? 판단하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니가~ 뭔데!
맞다 틀렸다! 하느냐 입니다.
너도 판단 받아야 할 놈이 누굴 판단하느냐!
꼴값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너나 잘 하세요!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큰 소리로 말합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너희가 누구를 판단하던 그 판단으로 네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11-13절을 보세요.
11-13절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 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는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남을 판단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살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의 존재가 어떤 자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그 어떤 것으로도 판단 받지 않으며!
또한 그 누구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는 소극적인 것에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판단 받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누가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
절대로 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는 것이고!
정죄당하지 않기 때문에 정죄 할 수가 없으며!
판단 받지 않기 때문에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 어떤 자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습니다.
절간에 스님도 주를 위하여 살고 있고!
작두 타는 무당도 주를 위하여 살고 있고!
이단인 강아지도 주를 위하여 살고 있고!
복음 전하는 양아지도 주를 위하여 살고 있어요.
악인은 악인으로 사용당하고 있고!
선인은 선인으로서 사용당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장기판의 말처럼 버릴 놈은 버리고 쓸 놈은 쓰면서 사용하고 있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찍으시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에 캐스팅 된 자들이에요.
각자 맡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자기 맘대로 사는 자가 없어요.
이 사실을 신자들은 알아요.
그러므로 신자들은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든지 교회 바깥에서든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내 할 일 만 하면 되어요.
사도 바울 같이 불신자를 만나면 불신자에게 예수를 전하고 신자를 만나면 신자에게 예수를 전하고 살면 되어요.
그 사람이 예수를 받아 들이냐 안 받아 들이냐는 우리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에요.
우린 그냥 주께로 받은 것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증거하면 되어요.
주께로 받은 사랑으로 살면 되어요.
난 이런 사랑을 받았다고! 자랑하고 살면 되어요.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 받은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이 준 사람은 있고, 하나님께서 안 준 사람은 없어요.
우린 받았어요.
그러니 감사하고 살아야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해 주셔서 듣는 것이고!
보게 해 주셔서 보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 예수를 믿을 순 없어요.
다 복음을 들을 순 없어요.
다 들으면 하나님이 준 자와 안 준 자가 구분이 되지 않아요.
차별성이 사라져요.
구원 속에는 차별성이 있어요.
그러므로 반드시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서 들려지게 해 주셨고,
마음을 열어서 믿어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아는 것을 자랑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자고 나에게 복음이 들려지고 믿어지는 은혜를 주셨나이까!
백골난망(白骨難忘)이로소이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성도는 이 기쁨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은혜에 감사하고 사는 거에요.
이럴 때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에 들어가서도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찬송과 기도를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좋고 나쁨이란 없어요.
믿음으로 받으면 다 감사할 것들입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통해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아요.
힘들 때마다 묵상을 해요.
좋으면 좋은 대로 감사하고 힘들면 힘든 대로 기도해요.
저는 변론하고 논쟁하고 싸우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싸움이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겨도 지고 져도 져요.
이겨도 마음이 편치 않고, 져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래서 누가 시비를 걸면 대응치 않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안타까운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복음을 말해요.
지식적으로는 다 알아요.
그런데 그 복음을 자기 삶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복음이 주는 넉넉함이 없어요.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겁니다.
마음이 가난하다 보니까 정죄와 비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납고 차갑고 싸늘한 겁니다.
마치 공갈 젓꼭지를 빠는 아이들처럼 배부름을 못 얻으니 신경질을 내고 사나워요.
이는 복음을 양식으로 먹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 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차갑고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는 이원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복음 아는 것이 신앙인 줄 알고 있어요.
성경적 지식을 많이 알면 그것이 믿음인줄 알고 있어요.
신앙은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아는 것은 그림의 떡을 구경하는 것이고 사는 것은 실제 떡을 먹는 것이에요.
성경은 먹어야 할 양식이에요.
연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문자 해석 하듯이 하는 것이 설교가 아니에요.
설교는 문자 속에 담겨진 것을 생명으로 끄집어내서 실제로 산 것을 증거하는 것이에요.
잘 이해하세요.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문자 속에 가두어져 있어요.
성령이 생명을 문자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는 문자로만 보여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 속에 생명이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얼음 속에 가두어진 생명과 같아요.
얼음 속에 가두어져 있을 땐 죽은 것과 같아요.
분명히 산 생명인데 죽은 것처럼 있는 것입니다.
이걸 따뜻한 기운으로 해동을 하면 생명으로 나타나요.
그럴 때 얼음 속에 있던 생명이 살아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작금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였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을 합니다.
동행하면서 성경을 풀어 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마음이 뜨거워져서 지식으로 알고 있던 부활의 예수가 실제가 되어서 만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니 내려가던 신앙이 올라가는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게 바로 문자 속에 가두어진 예수를 성령이 생명으로 끄집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을 주해하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만나진 예수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설교에요.
그래서 설교를 케리그마 라고 하는 겁니다.
케리그마는 선포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사도들이 예수가 이런 분이다 라고 선포하였어요.
지금 예수가 우리 안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있다고 선포했어요.
예수님이 이렇게 일을 하고 있다고 사건을 선포하였어요.
이게 설교에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사도들이 자기들 안에서 함께 살아서 일을 하는 그 예수를 증거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삶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식으로 주해하지 않았어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어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구약 성경이 이스라엘들이 살아온 삶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역사란?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에요.
사건이란 말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로 기록한 것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들이에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써 내려 가고 있어요.
그러므로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사건들이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간섭하고 있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이 설교이고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해박한 성격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되어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해박하게 안다고 하여도 그것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에요.
예수가 양식이 되어서 예수 정신으로서의 삶이 토해져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예수로 산다고 해요.
사도들이 쓴 서신서들은 모두가 십자가 도가 삶의 현장에서 나타난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사도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증거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예수가 살아서 성도 안에서 어떻게 일을 하는지를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나타 날 것을 증거해 주고 있어요.
분명히 말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십자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것은 가짜에요.
지식이고 죽은 것이에요.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그것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행함이란? 예수로 살아가는 삶이에요.
예수가 우리 안에서 살아서 일하는 것이에요.
예수가 살아서 성도 안에서 일을 하니까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들이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봉사로 충성으로 구제로 연보로 섬김으로 전도와 희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연악한 자들의 짐을 대신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복음)은 양식이고 생명이에요.
양식은 연구하고 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먹고 배부름을 얻는 것입니다.
복음(예수님)을 양식으로 먹은 사람은 그 복음 속에 담겨진 양분을 힘입고 살아가요.
이런 사람은 넉넉해요.
배부름을 얻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부르기 때문에 관용과 관대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긴들 무슨 상이 있으며,
진들 무슨 손해가 있나요.
어차피 내 신앙은 하나님이 판단 해 주세요.
그러므로 남이 나를 판단하여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을 알면 끝이에요.
요즘 개그콘서트에 말죽거리 잔혹사 라는 코너를 보면 조폭들이 나와서 한 대 때리고서는 “끝” 그래요.
우리 신앙도 그래요.
하나님이 알면 “끝”이에요.
성령이 내 안에서 “끝” 그래요.
그러니 남에게 내 신앙을 알아 달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확증해 주세요.
그러니 누가 안 알아준다고 불안해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구원해 줄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서 맞는다고 하면 그걸로 “끝” 이에요.
나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고 복음이 깨달아지게 하시고 믿어지게 해 주신 성령이 맞는다고 하는데 무엇이 두려운가요.
자기 안에 온전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두려워하지 않아요.
요한일서 4장을 봅시다.
요일 4:16-1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하지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역(逆)으로 해석해 보세요.
그 안에 온전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판단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안에 있는 온전한 사랑이 너는 맞다고 확증을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온전한 사랑으로 사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즉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인정하는 분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넌 가짜야! 라고 한다고 해서 가짜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진짜에요.
그러니 사람들이 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맞다고 하는데!
뭘 걱정입니까.
제가 정낙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당신은 정낙원이가 아니야! 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정낙원이가 아닌가요?
그렇지 않지요.
여전히 나는 정낙원이에요.
이건 변하지 않아요.
내가 정낙원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인정을 하건 안 하건 변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누가 나를 당신은 정낙원이가 아니야! 라고 말을 하여도 아! 그런가요! 하고 씨익 웃어주고 가면 되어요.
싸울 필요가 없어요.
복음 증거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당신이 전하는 복음은 가짜야 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저는 제가 증거하는 복음이 참이라고 믿어요.
왜냐하면! 제 안에 성령이 그렇게 증거를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저에게 당신은 아니야 라고 시비를 걸어도 웃고 말아요.
그건 자기 생각이고 자기가 만든 복음이에요.
지식으로 알아진 것이니까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남을 판단하는 법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지식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아요.
누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쫓아낼 필요가 없어요.
그냥 저는 이렇게 깨닫습니다! 라고 하면 되어요.
판단은 주님께 맞기고 내 할 일만 하면 되어요.
심판 하실 이는 주님이시니까요.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있었어요.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에게 주셨어요.
그러므로 그 온전한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 안에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없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맞다 틀리다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어도 그냥 씨익~ 웃고 말아요.
그런다고 내가 받은 사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구원이 취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게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의 담대함이에요.
이것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내가 살았노니” 라고 하지요.
그리고 9절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된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12절에서 “각 사람이 자기가 한 일을 하나님 앞에 직고 한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자신에 행한 것은 곧 자신을 심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판단하면 그 판단이 곧 나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남을 판단하는 자는 남을 판단하는 그 법에 의하여 자기가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살리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살려야 하는 복음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죽이는 도구로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복음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란 것입니다.
생명에 속한 자가 아니고 죽음에 속한 자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온전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복음을 가지고 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을 토해내야 할 복음으로 도리어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스스로를 심판해요.
결국 자기 자신이 한 일이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와서 자기 목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리석고 미련한 짓을 하면 죽을 짓을 골라서 한다고 하지요.
맞아요.
죽은 자는 복음을 가지고서도 죽을 짓을 골라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 왕 노릇하고 산 자들이에요.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교회 안에 들어 온 자들에게 “너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다” 라고 하면서 형제를 판단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는지 아시겠지요.
주의 것으로 사는 자는 자기 생각이 없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자기 생각을 가지면 안 되어요.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은 자기 생각을 가지면 안 되어요.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그것이 바로 죄에요.
죄가 뭐냐?‘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에요.
이걸 스스로 왕 노릇한다고 합니다.
죄란? 하갈처럼 주인의 품을 떠나 도망가는 거에요.
도망을 친 하갈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네 주인의 수하로 돌아가라고 하지요.
하갈이 왜? 쫓겨났나요?
아들을 잉태 하였다고 주인을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주인을 업신여긴 것은 곧 주인을 판단한 것이에요.
에이! 아이도 못 낫는 것이,,
그러면서 조롱한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하갈이 아이를 누구의 허락으로 잉태하였나요?
주인의 허락으로 잉태하였어요.
그럼 그 아이는 누구 것입니까?
주인의 것이에요.
그런데 하갈은 착각한 겁니다.
그것이 마치 자기 것인 줄 알았어요.
우리가 복음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건 우리 실력이 아니고 우리의 주인 되신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에요.
그러므로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모른다고 업신여기거나 판단 할 수가 없어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판단 할 수가 없어요.
하갈처럼 주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업신여기면 안 되어요.
그건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주인으로부터 받아놓고서는 그것이 마치 자기 것인 냥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법 아래 있는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이에요.
죽은 자들이 모습이에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팥이 나요.
이처럼 죽음에서 죽음이 나오고 생명에서 생명이 나와요.
산 자는 살리는 일을 하고, 죽은 자는 죽이는 일을 해요.
동일한 복음을 가지고서도 전혀 다른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요.
스스로 돌아보세요.
난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토해내고 있는지?
부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나오기를 소망해 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린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도 심판을 행하는 악당들입니다. 은혜를 받고도 법을 토해내는 자들입니다. 감히 고합니다.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고 주의 성신으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내가 어디에서 구원을 받았고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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