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친구가 쉬는 날이라 만났다.
창 넓은 커피집에 앉아, 얼음 가득 채운 커피 한 잔씩 하면서,
바깥을 내다보며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병원 내에 있는 커피집이라, 이제 겨우 너댓 살 되었을까 싶은
꼬맹이가 환자복을 입고, 팔에 링거를 단 채 저 혼자서 링거대를 밀며,
커피집 앞 마당에서 비둘기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젊은 할머니가 아이의 뒤를 따라다녔다. 혹여라도 넘어질까 염려하며...
아빠가 환자인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우리가 앉은 창가에 와서
두 손을 모아 안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환자로든 환자의 자녀로든, 그런 곳<병원>에서 그 예쁜 모습들을
보지 않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럼에도 그곳에 천사같은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얼마나 평화롭든지...
그 귀여운 모습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짐을 느꼈다.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드는 서로 다른 그 생각들에... 잠시 심란했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 친구가 딸아이게 줄 속옷과 겉옷을 산다해서,
육교를 건너와 시장 상가를 돌아다녔다.
다니다가 십수 년 넘게 나의 단골 바지가게인 곳에 이르렀고,
거기까지 간 참에 가게 아주머니한테 인사를 건넸다.
내가 이식을 받을 무렵에, 아주머닌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서 회복중이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져서인지, 그때 이후로 아주머닌 더 내게 친절히 대했다.
그 날도 어찌나 반갑게 맞아 주시든지...
말하지 않아도, 정찰제라고 적어놓은 게 무색하리만치, 꼭 몇 천원씩 가격을
빼주고, 내 건강을 염려해 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날도, 바지를 사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내가 두 해째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살 수 없었던 연하늘빛 진을 그날 만났기로,
난 이게 웬 인연인가 했었다. 살 생각을 하고 온 게 아니라 했더니,
안 사도 되니까 구경이나 실컷 하라며 아주머닌 꺼내서 보여주었다.
하긴 또 언제 가서 보고 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빛깔은 내가 원한 것이었으나 스타일은 좀...
여지껏 단 한 번도 찢어진 진을 입어본 적이 었었다.
물론 그 바지는, 찢어진 건 아니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스크래치를 좀 심하게 낸
정도라고나 할는지... ㅎㅎ
여태 입어보지 않았으니 한 번 입어보라는 친구의 적극적인 권유와,
안 입어봐도 딱 맞다며 바로 싸서 넣어주던 아줌마의 넉살에 가져왔는데,
문제는, 그게... 이상해진 내 체형이었다.
난 요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스키니는 정말 질색인데,
붙지 않는 것을 입으려니 허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널널하고,
허리에 맞추자니, 스키니가 아니라 거의 타이즈 수준이었다.
대관절 이 허리 사이즈에 어떻게 그 다리가 될 수 있는지 난 이해가 안된다.
다들 허리는 우람하고 다리는 새다리들인가???
결국 오늘 바지를 들고 바꾸러 갔다.
너무 널널한 허리는, 허리띠를 해도 정말 보기가 싫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공연히 구경하러 다니는 것,
소위 말하는 아이 쇼핑<window shopping>이고,
그 다음으로 싫어하는 건, 맞나 안 맞나 가게에서 입어보는 것인데,
특히, 허리띠 풀고 입어봐야 하는 종류들...은 정말 질색이다.
웬만하면 사이즈만 얘기하고 그냥 가져오는데,
문제는 사이즈들이 일정치가 않다는 데에 있다.
왜 같은 사이즈인데 제각각인지 모르겠다.
오늘 난, 그 두번 째로 싫어하는 일을 진이 빠지도록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상태에서 나갔다가, 입었다 벗었다를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 다리에 맞추니 허리가 너무 커서, 아줌마가 봐도
그랬는지, 그래, 그건 정말 아니다...며 스스로 알아서 다른 바지를 갖다 주곤 했다.
도대체가 이게 무슨 유행이란 말인지... 차라리 타이즈들을 입고 다니든지,
어떻게 바지를 타이즈처럼 입고 다니나 몰라.
하긴 아줌마들은, 허리가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 입으니 바지 폭도 얼추 맞더라만...
허리 맞고, 다리 폭이 적당한 건... 그 가게에선 찾기 어려웠다.
아주머니 말마따나, 아줌마 가게는 그래도 다른 가게에 비해 덜한 편이라니,
어딜 가나 다른 건 없을 듯싶었다. 소위 대세가 그렇다는데야 뭐...
하여 탈진할 정도로 벗고 입고를 하다다, 결국 절충을 했다.
허리는 최대한 덜 큰 것으로, 다리는 최대한 덜 붙는 것으로...
아무래도 바지는 허리 부분을 내가 좀 접어 넣고 기워야 할 듯싶다. ㅜㅜ
내가 그 가게를 드나든 지 십수 년만에 그렇게 여러 벌을 입어보긴 첨이었다.
괜히 번거롭게 한 듯해서 미안했다. 그런데도 싫은 내색 한 번 보이지 않고,
집에 가서도 맘에 안들면 언제든지 다시 바꾸러 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무래도 내 체형이 요즘 트렌드 형은 아닌 듯하다고 했더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이렇게 건강해진 것만 해도 얼마나 좋으냐고,
요새 사람들이 너무 딱 붙게 입어서 그런 거지 아무 문제 없는 몸이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고 단도리까지 해주는 아주머니가 고마웠다.
하긴, 올 봄 초에, 모델로 활동하던 아무개가, 자기 패션몰을 창업하고,
론칭 이벤트로 내놓은 진은, 가격 대비 디자인도 옷감도 정말 괜찮았었다.
내 허리에 약간 컸고 다리는 원하는 대로 여유로웠다.
봄 내내 얼마나 편하게 잘 입고 다녔는지 모른다.
키가 안되어서 그렇지, 최소 10cm만 더 컸어도 모델 체형인데 말이다. ㅋㅋ
진이 빠져 인사하고 돌아서는 내게, "또 와요, 놀러도 자주 오고~~"를
거듭 당부하든 가게 아주머니가 오늘 따라 더 고마워서, 네~~했다.
그저 팔겠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내게 맞는 옷을 줘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미안함을 느낄 정도로 열심이었기에, 새삼 내가 '단골' 임을 느꼈다.
단골에 앞서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로서의 유대감이라고 할는지...
몇 안되지만, 그런 인연들이 참 고맙고 소중하다.
힘들게 사왔는데, 이 여름 내내 예쁘게, 시원하게 잘 입어야지~~ ^^
패션쇼가 아니라 그냥 혼자 '쇼'를 실컷한 셈이지만,
언제 또 그런 쇼를 해보겠는가...
그렇지만 두 번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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