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74강. 사랑과 율법 그리고 낮과 밤

by IMmiji 2014. 5. 22.

74강. 사랑과 율법 그리고 낮과 밤 (롬 13:1-14)

 

롬 13:1-14=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만물의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만물 가운데 속한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피조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없어요.

 

마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어요.

성도의 신앙을 위해서는 마귀도 필요해요.

욥기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마귀를 가지고 욥의 신앙을 시험하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난 것이므로 굴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가 옳아서가 아니에요.

세상 권세조차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어느 권세 아래 있더라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 권세가 옳으냐! 그르냐는 우리가 판단 할 몫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활용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가 필요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순경(順境)이든 역경(逆境)이든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하나님(예수님)과 성도를 목자와 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목자이고 우린 양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을 맑은 물 푸른 초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이는 양을 기르는데 있어서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도 필요하지만 그와 정 반대 환경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극(極)과 극(極)인 상반된 환경으로 몰아가십니다.

때로는 평안으로, 때로는 환란으로도 인도하세요.

그것이 양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7장을 봅시다.

 

전 7:13-14=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형통과 곤고를 가지고 다스린다고 하지요.

양 입장에서는 형통인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 가에서만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양들은 곤고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싫고 형통인 푸른 초장을 원해요.

음지(陰地)는 싫고, 양지(陽地)만 원해요.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양과 같은 생각으로 살고자 해요.

즉 고통 없이 만사형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천국으로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고 싶어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천국을 알게 하시려고 지옥을 잠시 허락하셨어요.

천국과 지옥은 서로 상대를 드러내 주는 짝이에요.

지옥이 없으면 천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천국이 천국다우려면 반드시 지옥이 바탕화면으로 깔려 있어야 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고!

에서와 야곱이 있고!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이 있어요.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육이 있으면 영이 있고!

세상 나라가 있으면 하늘나라가 있어요.

 

구원하시기 위하여 버려두셨고,

사망에서 빼내시려고 죽음에 가두어두신 것입니다.

천국을 위하여 세상이라는 지옥에 던져두신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이고 나그네이고 행인들입니다.

집 떠나온 길손들이 세상의 동네방네 일에 시시콜콜 간섭할 필요가 없어요.

이 세상은 모두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고 잠시 거쳐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그 동네를 뜯어 고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 세상 일에 너무 목을 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비바람이 불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어요.

형통 할 때도 있고 곤고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성도는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자세로 살아야 해요.

그리 할 때 세상을 이기고 세상 권세를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권세에 굴복하라고 하고서는 사랑의 빚 이외는 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었단 말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야 할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고!

그 사랑을 받고 보니 이 세상은 안개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허상에 불과한 세상 일로 인하여 목숨 걸고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허상에 속한 것을 옳다 그르다 판단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 봐야 세상 판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법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는 자세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 아래 있어요.

그러니 세상일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 자체가 죄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은 없어요.

모두가 죄 아래 있어요.

 

세상이 왜? 이래? 하지 마세요.

원래 세상이 이런 곳입니다.

이 세상은 죄인들이 살아가는 지옥이에요.

그러니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법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땅은 저주를 머금고 있어요.

하나님이 저주한 땅에서 만사형통을 꿈꾸고 천국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은 그 심보가 잘못 된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세상에서 희희낙락하고 살고자 한다는 그 심보가 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성도라고 한다면 세상에 기대를 걸지 않아요.

야! 이 세상은 살 곳이 못 되는구나! 라는 정신머리로 떠날 채비를 하고 살아야지!

붙박이장처럼 세상에 푹 빠져 땅 강아지처럼 있으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천재지변(天災地變)을 가지고 싸인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사는 곳이 이런 지옥이라고 말이에요.

 

그러면서 너희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두 가진 자들이며!

무명(無名)한 자 같으나 유명(有名)한 자들이고!

죽은 자 같으니 실상은 산 자라고 합니다.

너희 집은 하늘에 있으니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하늘에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넉넉함으로 사랑의 빚 이외는 피차 빚 지지 말고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고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품은 자들은 다 가진 자들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져야 넉넉함으로 살 수가 있어요.

하늘에 것으로 배부름을 얻었기 때문에 세상 것을 나누어 줄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미 가졌기에 양보하는 것이고!

이미 용서 받았기에 참아주는 것이고!

이미 이긴 자이기 때문에 져 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몰라요.

세상은 세상 밖에 몰라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이 전부인줄 알아요.

그러니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 것에 목을 매고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달라야 해요.

신자는 이 세상이 허상임을 알아요.

세상 영광은 풀의 꽃과 같고!

인생은 잠간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 같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과 다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이렇게 살으라는 강요가 아니에요.

성경의 그 어떤 말씀도 우리의 각오와 열심을 격발하여서 이루라는 말씀은 없어요.

비록 우리더러 하라! 하지 말라! 라는 명령법으로 주어졌지만,

그것은 우리의 실존을 고발하기 위함이지 우리더러 노력해서 말씀대로 살아서 의인이 되라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린 태생적으로 죄인이에요.

죄인은 마치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과 같아요.

검은 피부는 비누로 닦아 내고 사우나를 한다고 해서 희게 되지 않아요.

이와 같이 죄인은 그 어떤 것을 해도 죄의 산물이지 의로울 수가 없어요.

설령 말씀대로 살았다 하여도 그건 의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의는 의인에게만 나와요.

죄 없는 자에게만 나온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엔 죄 없는 자가 없어요.

죄 없는 자는 죄와 상관이 없는 세상 바깥에서 와야 해요.

죄 없는 분이 하나님 말씀을 지킬 때 비로서 말씀 지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죄 없는 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얻은 의를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시혜로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어요.

즉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렇게 의롭다 여기심을 입은 성도는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게 되어요.

 

성령이 그 안에서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법으로 살지 않고 사랑에 빚진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책망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소송이 일어나 서로가 반목하고 갈등이 일어나서 그리스도가 주신 화평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하는 법이 발동하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소리치는 겁니다.

야! 이 사람들아! 너희들은 법에 속한 자가 아니고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아니냐!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법으로 형제를 송사하느냐!

차라리 손해보고 말지!

 

상대가 법으로 나올 때 은혜로 응수하는 것이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이에요.

법! 법 하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그 자체가 그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고도 이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사는 그 자체가 세상을 고발하는 것이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법으로 살지 말고 사랑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랑으로 사는 그 자체가 이 세상을 고발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설령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탄원하시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는 겁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으라고!

그게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역설이에요.

이겨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지면서 이기는 거에요.

하나님은 성도는 세상에 이긴 자로 두지 않았어요.

진 자로 두셨어요.

 

예수님은 진 자로 살면서 이긴 자가 되셨어요.

 

사도들이 그러했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러했어요.

믿음에 선진들이 다 그러한 길을 걸었어요.

그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을 해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가 성중에서 소리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秘密)을 아셔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씨처럼 담아 두었어요.

 

씨는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반드시 자신을 죽고 썩게 해 주는 토양(土壤)을 필요로 합니다.

씨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동반하고 싹을 틔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원리는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 씨앗 속에 있는 내용물이 발현되게 되어 있어요.

 

씨가 죽지 않으면 그 속에 있는 내용물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 속에 있는 하늘에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씨앗을 깨트리는 일을 세상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항아리 속에 감추인 횃불을 꺼내기 위하여 항아리를 깨트리는 것과 같아요.

 

이 세상은 어둠이에요.

이런 어둠 속에 성도는 빛(예수)으로 있어요.

그 빛이 우리 몸이라는 항아리 속에 감추어져 있어요.

하나님의 예수의 생명을 빛처럼 우리 몸에 가두어두셨어요.

그리고 그 생명을 끄집어 내려고 우리 몸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을 사랑으로 포용하는 사랑에 빚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 몸이 깨어질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그럼 성도의 몸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려면 우리 몸이 깨어지는 아픔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요.

어떤 것인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라고 알려주는 일들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법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의 빚진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없는 사랑을 만들어서 보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랑을 주었으니 그 받은 사랑을 세상에 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빌 1: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어떤 식으로 행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방법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나요?

이는 죄 없는 예수가 죽어서 주어졌어요.

즉 하나님이 깨어져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어요.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당신이 죽어줌으로서 열매를 맺는 방식으로 일을 하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 그 원리대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원리로 다스려 가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우리의 깨어짐을 통해서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사랑도 강함에서 약함으로 흘러요.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어요.

나의 비워짐이 없이는 사랑이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비워지는 인생을 살게 하세요.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해 보는 일도 당하게 되고 억울한 일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이~ 차라리 손해보고 말지!

부부간에 다투어도 내가 져 주고 말지!

교회 안에서도 져 주는 자로서 살게 된단 말입니다.

 

복음 속에는 하나님 생명이 담겨져 있어요.

그 하나님 생명은 세상이라는 역사 속에서 죽는 것으로 나타나요.

그러므로 복음을 받게 되면 죽음의 자리로 등 떠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구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사랑(복음)을 받았기에 이해하게 되고!

사랑(복음)을 받았기에 져주게 되고!

사랑(복음)을 받았기에 용서하게 되고!

사랑(복음)을 받았기에 낮아지게 되고!

사랑(복음)을 받았기에 손해 보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 이외는 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에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져 주라는 겁니다.

 

굴복하고 져 주는 것이 곧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토해내는 갚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도 그 받은 사랑을 토해내는 식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간섭을 해 가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세요.

 

법 아래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생명은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고 목소리 높이는 법에게서는 싹을 틔우지 못해요.

도리어 져줌으로서 싹을 내요.

이게 생명의 속성이고 사랑의 속성이에요.

 

그런데 우린 복음 아는 것으로 이긴 자가 되고자 해요.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해요.

상대를 굴복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건 이기고도 진 것이에요.

 

성도는 지고도 이긴 자로 사는 것이지, 이기고 진 자로 사는 자들이 아니에요.

 

이걸 가정 속에 담아 놓았어요.

생명은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만 싹을 틔우고 자라가게 되어 있어요.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키워가면서 늘 져주어요.

부모 치고 자식을 이긴 자가 없어요.

자식이 옳아서가 아니에요.

법으로는 자식을 키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사랑으로 키우지 법으로 키우지 못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자식이 죄 아래서 태어난 이미 틀린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틀린 자식을 옳음으로 키우고자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틀린 자식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그 틀림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것뿐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허물을 감싸 안을 때 그 자식 속에 법이 뽑혀져 나가고 사랑이 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러해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보냈어요.

독생자를 왜? 보냈나요?

틀린 자기 백성들의 죄를 감싸고 죽으라고 보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옳은 자가 틀린 자를 감싸 않고 법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함이에요.

법은 사랑으로 완성이 되지!

절대로 법으로는 법을 완성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기면 못 키워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자식은 항상 틀린 자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틀렸기 때문에 옳은 부모가 져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일은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니고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참아주고 용서하는 사랑의 싸움이에요.

왜? 그런가요?

이는 내가 그 자식을 산고(産苦)라는 죽음의 과정을 지나서 낳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뜯어 먹고 살았듯이,

자식은 부모를 뜯어 먹고 사는 자에요.

부모를 뜯어 먹고 산 자식이 나중에 자기 자식에게 뜯어 먹힘을 당하게 되어요.

생명은 이러한 순환구조를 통해서 낳아지는 원리를 갖고 있어요.

 

창조란 자체가 하나님의 비움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움이 없이는 생명의 창조가 일어나지 않아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 비움이에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피조의 세상에 오신 것은 그 자체가 곧 하나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해요.

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는 죽음의 과정을 거치나요.

이는 생명이란? 부모의 죽음을 통해서 자식이 낳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아요.

자기의 옳음조차도 말이에요.

옳음을 버린다는 것이 아니고 주장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아이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판단 할 때까지 말이에요.

 

옳음이란? 그 아이가 스스로 알아가야 해요.

아~ 이것이 옳구나! 라고 인정을 할 때 비로서 옳음으로 자리를 잡게 되어요.

어린 아이가 스스로 옳음을 모르면 알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옳음은 부모가 옳다고 주입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이 겪어가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이와 같아요.

사랑하라고 해서 행하여지는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받는 것으로부터 나와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해요.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도가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나오고!

긍휼에서 긍휼이 나오고!

용서에서 용서가 나와요.

 

복음 아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이건 강요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설명 했는데도 왜? 모르냐고 소리치고 성질낸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 귀를 열고 들려지게 해주어야 들려져요.

하나님이 그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해 주어야 깨달아지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복음으로 인하여 다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자기 쪽에서 뭔가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법으로 옳고 그름을 다툰다는 것은 자신이 아직 복음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믿어지고 복음이 깨달아지는 것은 인간의 각오와 노력과 열심히 배워서 지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어야지만 해요.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해요.

그러므로 복음을 아네! 모르네! 라는 것으로 싸울 일이 아닌 겁니다.

 

이는 생명은 항상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는 것으로서만 싹을 틔우고 자라가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의 짐을 대신 지듯이!

복음 아는 사람이 복음 모르는 사람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해하고!

참아주고!

용서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법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을 가졌기 때문에 참아주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가 항상 아픔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사랑에 대하여 설교를 하려니까 이런 예화 거리를 주신 것 같아서 인용을 합니다.

 

어떤 분이 전화로 상담을 했어요.

남편이 이혼을 하자고 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서로의 신앙 때문이라는 겁니다.

 

남편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부터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난 후 매사가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는 독선주의가 되었다고 해요.

부부 간에 대화도 넌 복음 모르잖아! 라고 하면서 단절이 되었다고 해요.

 

심령이 강퍅해졌다는 것입니다.

언어도 거칠어지고 행동도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오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 걸어 잠그고 안 나온다는 겁니다.

이걸 어찌해야 좋으냐고?

 

상담 이야기를 예화로 인용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 착각하고 속고 있지는 않은가 하여서 참고 하자는 의미에서 부득불 말하는 것이니 이해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복음을 잘못 이해하면 살려야 할 복음이 도리어 해치고 죽이는 법으로 작용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 싸움은 어느 한 쪽의 말만 들어서는 몰라요.

양쪽 다 들어 보아야 알 수가 있어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듯이 남편의 이러한 행동에는 필시 아내 쪽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남편의 행동은 복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기에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어요.

복음이 그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법으로 풀어낸다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에요.

스스로 복음이 주는 사랑을 받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대부분 복음을 지식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반드시 교만으로 나타나요.

정죄하고 판단하고 남을 무시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생명을 살려내지 않고 도리어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요.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반드시 법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정죄와 비판과 심판을 행사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심령도 강퍅해지고 공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법이 발동을 하니까 복음 아는 것이 힘이 되어서 남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나 그 복음이 결국 자기를 넌 법에 속한 사람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으로 자랑하는 것은 지적 허영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래요.

이런 사람은 복음적 지식을 알면 알수록 심령이 피폐해져요.

부정적이고 싸늘해져요.

 

사랑은 덕을 세우고 지식은 교만케 해요.

 

어째서 사랑은 덕이 나오고 지식은 교만이 나옵니까?

이는 사랑은 내가 죽고 남을 살리는 속성을 지녔고,

지식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하면서 상대를 죽이는 법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란? 소유한 사람이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많이 아는 것이 세상에서는 힘으로 작용해요.

법 아래서는 법 지킨 자는 옳음이 되고 법을 어긴 자는 그름이 되어요.

그러므로 복음을 지식으로 소유하게 되면 그 앎이 힘이 되어서 남을 자기 뜻에 굴복 시키고자 강제하려는 폭력성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진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알수록 강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자가 되어요.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진 자가 되어요.

힘이 없어서 지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기 때문에 져 주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 때문에 이해하고 참아주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이해하지 못해도 부모는 자식을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감싸지만 자식은 부모를 법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랑을 가진 부모와 사랑을 받는 자식의 차이에요.

 

예전에 제 가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부모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잖아요.

때론 자식들 눈에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제 자식이 옳고 그름으로 따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혼을 낸 적이 있습니다.

 

야! 이 놈아!

나는 너를 법으로 키우지 않고 사랑으로 키웠어!

내가 너를 옳고 그름이라는 법으로 키웠으면 벌써 갖다 버렸어!

그러므로 부모에게는 옳고 그름이라는 법으로 대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했어요.

물론 그 당시는 아이 입장에서는 부모의 말이 억지로 들렸겠지요.

 

그런데 그 녀석이 지금 시집을 가서 자기 자식을 낳고 키워가면서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아요.

아! 자식은 법으로 키울 수가 없구나 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곧잘 부모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해요.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유출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해도 꽝이고!

하늘에 속한 크고 비밀한 말을 해도 꽝이고!

산을 옮길만한 엄청난 일을 해도 꽝이에요.

 

많은 분들이 착각을 하는데!

성경을 마치 영어 독해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성경은 문자를 분석하는 책이 아니에요.

성경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이 댕댕거리면서 싸운 사건을 문자로 담아 놓은 것입니다.

사건은 문자를 분석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은 생명이야기에요.

하나님과 죄인이 다투고 부대낀 삶에 이야기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란 말이에요.

이러한 사건으로 발생이 된 생명과 사랑은 분석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에요.

문자 풀이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때론 저주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때론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을 퍼 붓는 것입니다.

부모의 욕을 액면 그대로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분명이 저주이고 나쁜 것이에요.

그러나 그 욕 속에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이걸 읽어내야 해요.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 어떤 저주를 끌어 부어도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니까 사랑으로 들으라고!

 

이사야 1장을 보세요.

 

사 1:2-10=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나님께서 속이 상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울분을 토합니다.

너희는 소 돼지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소리칩니다.

에라이~ 이 저주 받을 소돔 고모라 새끼들이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아! 지옥 불에 들어 갈 놈들아! 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이런 놈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어요.

우리가 바로 그 욕을 들어 먹을 놈들이에요.

그렇게 욕을 하고 저주를 하던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그 저주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게 해 주셨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소리치던 것들은 우리가 우리 지식들에게 늘 하는 소리에요.

 

야! 이 새끼야!

이 우라질 놈아!

빌어먹을 놈에 새끼야! 라고 하잖아요.

이게 다 사랑의 소리에요.

 

그런데 문자풀이로는 절대로 그걸 사랑으로 읽어낼 수가 없어요.

성경이 그러해요.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을 토하여낸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벌린 사건을 눈으로 보고 구전으로 듣고 말씀이라는 문자로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문법을 연구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언어를 분석해서도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삶이에요.

사색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체휼하면서 깨닫는 것이고!

체휼되어서 얻어진 것이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속 썩이던 자식이 시집가서 자기 자식을 낳고 키워가면서 부모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 쏟아내듯이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빚진 자로서 법으로 살지 말고 사랑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에요.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이 나오고!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가 나오고!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에서 생명이 나오고, 죽음에서 죽음이 나와요.

은혜에서 은혜가 나오고, 법에서는 법이 나와요.

복음을 은혜로 받은 사람은 생명으로 토해내고!

복음을 지식으로 받은 사람은 법으로 토해내요.

 

복음을 법으로 사용하는 일은 지나가는 과정에서 잠시 일어나는 일일 수는 있어요.

 

사람이 자라가면서 사춘기(思春期)가 있듯이 복음도 사춘기가 있어요.

우린 모두가 법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법이 우리 안에 항상 잔재로 남아 있어요.

이건 복음 안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아요.

 

사춘기 때는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린 것으로 보여져요.

복음은 생명의 자람과 같기 때문에 사춘기 모습이 드러날 때가 있어요.

이 때는 나만 다 알고, 남은 다 틀린 것으로 보여져요.

이 때는 정죄하고 판단하기에 급급해요.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가야 해요.

 

저도 한 때는 이러한 때가 있었어요.

나만 복음 다 아는 것으로 기고만장 했어요.

그래서 한국교회는 다 틀렸다고 소리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교만이었고 철없는 짓을 한 것임을 알게 되었어요.

 

그 때는 목소리는 높이고 요란했지만 정작 그 복음이 담고 있는 긍휼과 용서 사랑이라는 내용물들은 쏟아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입만 열면 남을 비판하고 정죄했어요.

살려야하는 복음을 가지고 정작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죽이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께서 저를 다루어 주셨어요.

복음이 저를 깨트리는 일을 하신 겁니다.

내가 복음에 반(反)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은혜를 입고 보니 복음이 독(毒)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복음 자체는 독(毒) 일수가 없어요.

좋은 것이에요.

그런데 그 복음을 법으로 사용하면 죽이는 독(毒)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양날 가진 칼과 같아요.

잘못 사용하면 자기가 다쳐요.

이 사실을 깨닫게 되니 복음 전한다는 것이 두려워요.

예전에는 말씀 전한다는 것이 가벼웠어요.

그러나 이제는 복음 전한다는 것이 무겁고 두려워요.

 

예전에는 누가 집회 안 불러 주나 라고 했는데 이젠 집회를 해 달라고 하면 가슴이 철렁해요.

느닷없이 해외에서 요청이 와서 7월 달에 목사님들 세미나 일정이 잡혀 있는데 솔직히 안 하고 싶어요.

요즘은 하나님에게 저 이거 안 하면 안 됩니까?

말씀 전하는 것이 두렵고 저에겐 버겁다고 기도해요.

복음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복음 전한다는 것이 무겁고 또한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복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은 우리가 옳아서가 아닙니다.

우린 죄인이에요.

이런 죄인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지금도 여전히 받고 있구요.

앞으로도 받을 것입니다.

 

사랑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옳고 그름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에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세상을 법으로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세요.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다고 하지요.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율법은 정죄하고 죽이는 것인데 이러한 정죄와 심판을 이기게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조건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할 조건이 없는데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의 조건을 보고 주시지 않았어요.

 

로마서 5장을 봅시다.

 

롬 5:5-8=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랑을 어떻게 보이셨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 아들 예수를 보내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는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은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면서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정의하시고 확증을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곧 사랑의 리트머스 시험지에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 하셨어요.

그래서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인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은 자들에겐 법이 나오지 않고 은혜와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전혀 법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속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삶에 자세가 그렇다는 거에요.

성도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속엔 정죄함이 없어요.

우린 그 사랑을 받았어요.

그래서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린 죄인이 용서 받는 사랑을 받았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옳다 그르다 따지지 않고 사랑을 부어 주셨어요.

그러므로 우리도 옳다 그르다 따지지 말고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 이외는 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너희는 사랑하는 자로 세움을 입었으니 사랑함으로 살으란 말입니다.

 

사랑이나 감사나 찬송은 가진 자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산 자만이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에게서는 사랑이 나올 수가 없어요.

죽은 자는 찬송하지 않아요.

죽은 자는 감사가 없어요.

 

오직 산 자만이 사랑도 하고 찬송도 하고 감사도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죽은 세상에 성도를 산 자로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만이 범사 속에서 사랑하고 찬송하고 감사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과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려 도망 칠 수가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하여서 자살하고자 하는 간수를 살려내는 일을 발생 시키신 것입니다.

간수가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자살을 하고자 한 것은 다른 죄수들 같았으면 다 도망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도망치지 않았어요.

그래서 간수들이 놀라는 겁니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시기에 도망치지 않고 이렇게 있느냐고?

 

바울은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애매히 고난을 당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애매히 당한 고난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들을 하신 겁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애매히 죽었는데 그 죽음으로 우리가 살아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애매한 죽음으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 혜택을 입은 자들이에요.

이걸 하나님의 사랑을 빚졌다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탕감 받았어요.

 

하나님은 그 탕감 받은 빚을 누구에게 갚으라고 합니까?

네 형제에게,

네 이웃에게 갚으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탕감 해 주었으니 너도 탕감해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 이유입니다.

우리더러 잘난 척 하라고 사랑을 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사랑을 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이 빚을 회수해 가세요.

 

어떻게 회수해 가는가 하면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 같이 우리의 원수인 세상에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것으로 회수해 가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 사랑이에요.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곤 제자들을 찾아옵니다.

찾아 오셔서 사명을 주십니다.

어떤 사명인가 하면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은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어디에 보냈나요?

죄인들에게 보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육신을 입고 죄악 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원리를 예수님께서 그대로 제자들에게 적용합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곤 가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합니다.

 

가서 죄사함의 권세를 행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죄가 사해지나요?

죄사함은 의로우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인이 용서 받는 식으로 주어집니다.

의로운 자가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함으로 주어집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속한 의로운 자들입니다.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입고 의롭게 된 자들을 죄인들에게 보냅니다.

이걸 예수님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고 했습니다.

 

가서 죄인인 이리들에게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먹힘 당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 능력으로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모두가 이 구조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이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모두가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게 됩니다.

이게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의 사랑을 행하는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원수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사랑은 사랑하는 자에게 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들에게 주어져요.

이 비밀을 놓치지 마세요.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거래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유출된 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런 사랑은 인간은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나니 라고 하면서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갚을 수가 없어요.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사랑을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면 살수록 채무(債務)가 더 늘어가는 것입니다.

빚을 갚을 수 없으면 어찌 되나요?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잠 22:7절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한다고 하지요.

그리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라고 합니다.

부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우린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어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어요.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케 되심은 우리를 평균케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니 감사니 찬송은 산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 세상은 죽은 곳입니다.

그럼 이 세상에는 사랑이니 감사니 찬송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늘에만 있어요.

 

세상에 속한 자는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사랑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신자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구체화 되어서 나타나면 권세에 굴복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리가 생명이 사망에게 삼켜줌으로서 생명을 잉태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권세에 굴복 하라는 것은 우리 잘남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성도에게 주었어요.

이 생명은 성도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의 권세에 죽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생명을 가진 자를 세상 권세에 죽임 당하게 함으로서 세상이라는 밭에 하늘에 생명을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로 심었어요.

세상 권세에 먹힘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삼킨 세상 권세가 자기들이 이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도리어 예수 하나를 삼키고 수많은 예수를 낳는 형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일어났어요.

 

세상 권세는 예수 하나 죽이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겁니다.

오히려 벌집을 쑤셔 놓은 것과 같은 겁니다.

예수를 깨트렸더니 그 속에서 수많은 예수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빼앗으려고 덤벼요.

그러자 하나님이 줘 버리라고 합니다.

야! 너희들은 가진 자가 아니냐!

그러니 주라고 합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이 뭐냐?주는 거에요.

빼앗김 당하는 것이에요.

 

왜? 주고!

왜? 빼앗김 당합니까?

가졌으니까요.

없으면 빼앗길 것도 없고!

줄 것도 없어요.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빼앗기기도 하고 줄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아요.

퍼 내도, 퍼 내도 계속하여 나와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이게 영생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에요.

성도가 가진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하나님이 생명을 계속하여 공급해 주어요.

그 생명이 사랑인 것입니다.

 

우린 계속해서 받고 있어요.

이건 갚을 수가 없어요.

계속하여 유출 시키는 것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은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빚을 세상에다 갚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갚고자 하지 말고 세상에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다가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당이라는 것을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토해내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을 율법과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을 다 지킨 자나 사랑을 하는 자나 동일한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을 율법으로 이해하여 보세요.

그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사랑하라고 하는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는 인간의 실존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먼저는 “나는 이런 인간을 원한다” 라는 것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이런 사랑이 있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계명(誡命)이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린 빚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롬 1:14-16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빚진 자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어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영원히 갚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의 종으로 산 것입니다.

종처럼 매임을 당하고 로마에 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로마뿐만이 아니고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는 바울처럼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가게 되는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채무를 갚을 수 없기 때문에 종이 되는 것입니다.

종이기 때문에 주인이 어떤 구조 속에 집어넣더라도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온전히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어둠에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고 음란과 호색을 버리고 시기와 쟁투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봅시다.

 

세상은 어둠이고.

예수님이 빛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으란 말은 세상의 사고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린 어둠이고 주님만 빛이세요.

예수님은 죽음으로서 온 세상에 사랑을 주셨어요.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사는 것이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방탕이고!

무엇이 술 취함이고!

무엇이 음란과 호색인가요?

 

방탕이니 술 취함이니 음란이니 호색이니 시기와 쟁투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마세요.

물론 문자적인 의미도 지켜야 해요.

하지만 문자에 매몰당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리는 참람이 되어요.

 

예수만 빛이고!

예수 안만 낮이에요.

예수 밖은 모두가 어둠이고 밤이에요.

 

그러므로 예수 바깥은 모두가 어둠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가 방탕이고 술 취함이고 음란이고 호색이고 시기와 쟁투가 되어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잊는 순간 밤인 세상 방식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세상 방식으로 사는 것은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이라고 해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진 자라는 것을 잊으면 우리는 세상 방식인 법으로 살 수 밖에 없어요.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면서 한 말이 무엇인가요.

마음을 새롭게 하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지요.

즉 세상 가치인 법으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법 아래 있는 자들이 아니고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방탕이니 타락을 일차적으로는 윤리적인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표피이고 실상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밖에 거하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방탕하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어요.

그리고 받고 있어요.

앞으로도 받을 것입니다.

 

그 사랑 받음 때문에 나를 증명하기 위하여 남을 죽이는 율법으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법을 집행하는 자에게 먹힘 당하여 줌으로서 법을 사랑으로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님이시니 그가 끝 날까지 주님의 사랑이야기를 우리 몸을 가지고 세상에 행하여 가실 것입니다.

 

은혜보다 법이 앞선 우리의 입을 막아 버리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가지고 자기 가치를 챙기고자 하는 나를 기어코 자기 가치를 버리는 비움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옷이 아닌 예수의 옷을 입은 자로 나타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미 주께서 우리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 일을 행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러므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지난 것입니다.

이제 낮이 시작 된 것입니다.

 

세상 권세에게 세상 방식인 법으로 자기 옳음을 증명하여서 이기게 하지 않고, 하늘에 방식인 십자가 사랑으로 져주는 방식으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사는 방식으로 일을 해 가실 것입니다.

내가 죽은 그 자리에 예수가 보이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온 세상에 이긴 자의 기호로 세워지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옳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증거하는 곳입니다.

성도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요.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들을 구원 받자 말자 곧 바로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어둠과 같은 세상 속에 두었는가요?

이는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 나라가 전부가 아니고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이 세상은 안개 같이 사라질 허상이고 실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세상 권세를 대항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에 대항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그도 세상에 속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에 속하였으니 세상 권세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는 세상과 대항하지 않아요.

세상과 쟁투하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함입니다.

그러니 악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구원파가 좋은 시청각교제로 보여주고 있어요.

저들이 왜? 연일 국가 권력과 투쟁합니까?

이들은 법으로 자기 옳음을 지키고자 하고 있어요.

이게 어둠에 일인 겁니다.

 

이들이 하는 짓을 예수님이 하신 것과 비교해 보세요.

사도들과 바울이 행한 것과 비교해 보세요.

예수님은 대항하지 않았어요.

사도 바울도 대항하지 않았어요.

 

내 조직을 지키기 위하여 대항하는 것이 옳음이 아니고!

역(逆)으로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지! 라는 생각으로 조직조차도 사라질 허상임을 알고 조직을 버리는 것이 옳음이에요.

 

왜? 힘으로 자기 조직을 지키고자 합니까?

이는 그 조직의 그늘이 되어서 자기를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밤에 속한 자들이 행하는 어둠의 일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세상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세상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이 동네에서 때리면 저 동네로 피하고 저 동네에서 때리면 이 동네로 피하라고 하잖아요.

그들과 맞서 싸우라고 하지 않았어요.

억울함이 있으면 하나님께 호소하여야지요.

 

바울과 실라가 애매히 고난을 받았어요.

아무런 잘못이 없이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어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얼마든지 자기의 억울함을 항변 할 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세상 권세를 상징하는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지 않았어요.

 

성경을 상고해 보세요.

그럼 답이 나와요.

성경을 상고하지 않으니 자기 힘으로 세상 권세를 이기겠다고 대항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힘으로 대항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함이에요.

그 자체로 저들의 관심사는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하는 짓이 바로 어둠의 일인 겁니다.

땅에 일이란 말이에요.

 

저들이 하는 모습 속에서 어느 구석에 사랑에 빚진 자의 모습이 보이는가요?

저게 어디 사람인가요?

짐승들이지!

 

힘을 의지하는 것은 다 짐승이에요.

국가도 짐승이고!

그 국가의 권세에 대항하는 것도 짐승이에요.

두 짐승이 싸우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철저히 유린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라고 세상에 둔 것입니다.

짐승들 밥이 되라고 두신 거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뭐라고 하든가요?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고 하지요.

이건 가서 그들과 싸워서 이기라고 보낸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그들에게 잡혀서 먹힘 당하라고 보냈어요.

 

이리들이 양을 잡아먹음으로서 너희는 짐승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양을 잡아먹는 것을 보니 너희가 이리 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양일 것 같으면 양을 보낼 필요가 없어요.

이리이기 때문에 양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빛으로 오셨는가요?

세상이 빛이면 굳이 예수님이 빛으로 오실 필요가 없어요.

세상이 어둠이니까 빛으로 오신 겁니다.

 

빛으로 오신 것은 너희는 어둠이라는 것을 고발키 위함이에요.

어둠은 빛이신 예수를 죽임으로서 스스로 어둠임을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자신들의 어둠에 정체성을 빛이신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왜?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랑을 빚진 자로 살라고 하는가요?

이는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랑의 빚진 자로 사는 것이야말로 곧 이 세상은 법에 속한 어둠이라고 고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빛으로 있어요.

 

세상이 어둠임을 드러내고자 있어요.

그런데 세상과 싸워서 이기겠다고 대항하면 어찌합니까?

이게 유대교 사상이에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힘을 결집하여서 로마를 물리치고자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야! 너도 유대인이 아니냐!

그러니 네 힘을 보태서 로마를 물리치고 유대나라를 세계 강국으로 만들자고 했어요.

 

이에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왜? 거절합니까?

이는 유대나라나 로마나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힘을 앞세워 약자들 위에 군림하듯이 유대인들도 힘으로 세상 위에 군림하고자 하고 있어요.

이것은 로마나 유대인들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초록은 동색이에요.

둘 다 힘을 의지하는 짐승들이에요.

 

생각을 해 보세요.

로마가 힘을 앞세워 군림하는 것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힘을 앞세워 세상에 군림하고자 하는 것이 뭐가 다른가요.

둘 다 똑 같아요.

 

이 놈이 지배 하든,

저 놈이 지배 하든 똑 같아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지배하는 것은 선(善)이고, 로마가 지배하는 것은 악(惡)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요.

 

이 논리가 어디서 나온 겁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살아야지 왜? 세상 나라를 꿈꿉니까?

이는 허울만 하늘나라 백성이지 그 실상은 세상 나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일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제 왜? 세상 권세에 굴복 하라고 하고서는 사랑의 빚진 자로 살라고 하는지를 아시겠어요.

어둠에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는지 아시겠어요.

낮에와 같이 단정하고 술 취하고 방탕하지 말라고 하는지를 아시겠어요.

 

사랑은 이기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지는 것으로 나타나요.

빼앗기고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나요.

 

세상을 어떻게 이기느냐?

이는 세상을 버림으로서만 이길 수가 있어요.

세상 것을 지키고자 하면 세상을 이길 수가 없어요.

 

우리의 목숨을 어떻게 지키느냐?

버림으로 지켜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이라고 하였어요.

다시 얻을 목숨이 있는 사람은 지금 목숨을 지키고자 하지 않아요.

 

천국으로 사는 성도는 세상 것을 지키고자 하지 않아요.

세상 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천국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단들의 괴수들이 돈을 끌어 모으는 것이 왜입니까?

그들의 신은 돈이기 때문이에요.

돈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에 복음을 빙자하여서 돈을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어둠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이라고 하는 거에요.

모두가 땅에 일이고 육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방탕이니 술 취함이니 음란이니 호색이니 시기와 쟁투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마세요.

이건 어느 권세 아래 있느냐로 판단하여야지,

어떤 모습이냐로 판단하면 안 되어요.

 

어느 정도가 방탕입니까?

 

술집에서 아가씨들과 술 마시면 방탕이고 집안에서 TV 보면 방탕이 아닌가요?

방탕의 기준이 뭔가요?

하늘에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 자체가 방탕이에요.

예수 안 믿으면 방탕이에요.

 

어느 정도 마셔야 술 취함인가요?

 

소주 몇 잔 마시는 것이 술 취함인가요?

콜라를 마시면 술 취함이 아니고 소맥을 마셔야 술 취함인가요?

알코올 도수가 얼마가 되어야 술 취함으로 간주하는가요?

음주 측정기로 술 취함을 판단해야 하는가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라고 하지요.

이를 역(逆)으로 이해해 보세요.

성령 충만으로 살지 않는 것이 곧 술 취함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자세로 사는 것이 성령 충만이에요.

예수님의 사랑을 빚진 자로서 사는 것이 성령 충만으로 사는 거에요.

 

그리고 음란의 기준은 어디까지인가요?

 

남자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음란인가요?

아니면 포르노를 보는 것이 음란인가요?

그도 아니면 바람 피우는게 음란인가요?

 

이러한 것은 육적인 음란이에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음란이란 영적인 것을 말해요.

우상 숭배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우상을 음란히 섬겼다고 말하고 있어요.

 

인간이 왜? 우상 숭배하는가요?

육신의 탐욕 때문입니다.

육신의 쾌락 때문이에요.

죄는 항상 몸의 사욕을 좇는 것으로 드러나요.

그러므로 자기 몸을 위하여 사는 모든 것이 음란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했어요.

이는 곧 하늘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 의미를 두고 사는 것이 음란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다 라는 자세로 살지 않는 것이 다 음란이에요.

 

그럼 호색과 쟁투와 시기는,,,,

 

이러한 것은 문자적으로 접근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의도가 다른데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그 자체가 성경의 진의를 놓치고 있다는 증거에요.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신 것을 음란이고 술 취함이라고 하나요?

아니잖아요.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에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사는 곳이에요.

그럼 먹고 마시는 것을 가치로 두고 살면 그것이 곧 세상나라의 삶이고 이는 곧 어둠에 일이고 음란이고 술 취함이고 방탕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비록 죄인 된 모습으로 살지만 이러한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고 하늘나라를 소망 삼고 사는 것이 하늘나라 삶이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것이고 낮에와 같이 단장하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단장한 것이고!

예수 밖에 나가면 다 방탕이고 타락이에요.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님만 단장하신 거룩한 분이에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단장한 자이고 빛으로 사는 자이고 낮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아무리 좋은 치마를 만들어 입어도 수치를 가릴 수가 없어요.

수치는 오직 흠 없는 어린 양의 가죽 옷 밖에 없어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그 의만이 수치를 가릴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면서 하루 하루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살게 하는 그 날까지 살려 주신 그 은혜 안에서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시대의 표징을 보아서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운 줄 압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지났음을 압니다. 이제 일어나서 머리를 들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속이 가까웠음을 알게 하옵소서. 세상의 일을 벗어 버리고 하늘에 관심을 두고 살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 힘으론 할 수가 없사오니 주의 열심히 이를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