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강. 성도와 세상 권세 (롬 13:1-7)
롬 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성도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는 비록 세상이라는 구조(構造)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하늘나라 가치관으로 사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세상에는 세상 가치관이 있듯이 하늘나라도 하늘나라 가치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하늘나라 가치관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은 곧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사는 삶에 본(本)이기도 합니다.
이 본(本)이 계속하여 우리를 고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흙에서 낫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나셨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는 죄의 몸이고 예수님은 죄가 없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살아간 그것이 곧 정답이 되어서 우리를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삶이 정답이 되어서 우리의 삶이 틀렸음을 드러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더러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살지 말라는 것도 아니에요.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성경의 요구는 예수님처럼 살라고 해요.
하지만 예수님처럼 살라고 하는 그 명령의 진의(眞意)는 다른데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답을 주고서는 우리가 틀렸음을 말해주고 이렇게 틀린 자가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흔히들 착각을 하는데!
신앙생활을 죄인이 개과천선(改過遷善)을 하여서 더 이상 죄를 안 짓고 천사(天使)처럼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이건 천사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가 그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죄 문제를 예수를 보내서 해결해 주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죄 가운데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그 아들을 보내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고!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원함이나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 아래서 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가 죄 아래 태어난 것도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한 수순(手順)인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아브람 언약을 보세요.
언약의 후손들이 이방에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 언약을 위하여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방의 종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구원을 위하여서 먼저 버려짐이 있는 겁니다.
이방에서 돌아 돌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 뿌림을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애굽에서 돌아 온 자들은 어린 양의 죽음으로 살아나는 은혜를 입고 오게 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돌아온 자들은 그 은혜를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 속에 담겨놓은 비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람의 언약을 위하여 생겨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겨진 그 수순들을 밟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만물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그러므로 만물에 속한 우리들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절실하게 깨달아가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죄를 안 짓고 살고자 하는 그 원함은 있으나 그 원함대로 살 수 없는 육신의 한계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용서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몸에 구속을 기다리며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러는 겁니다.
죄인은 정답(正答)을 알려 주어도 정답대로 살 수가 없는 자라고!
우린 성경이라는 정답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의 뜻을 안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정답대로 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세미(細微)하여서 의인이라야만 지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가 없는 자라야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이 죄 없는 인간이 있나요?
아무도 없어요.
우린 모두가 죄 아래서 태어난 타고난 죄인들입니다.
우리 조상이 죄인이에요.
제가 정(鄭)씨입니다.
제가 정(鄭)씨가 된 것은 제 원함으로 된 것이 아니에요.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정(鄭)씨이기 때문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정(鄭)씨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인이 된 것도 우리를 낳아준 조상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난 인간은 그 누구라도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즉 죄 안 짓고 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죄인이 사는 것 자체가 죄에요.
이게 이 세상 구조에요.
우린 이 구조를 벗어 날 수가 없어요.
벗어 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바깥에서 누군가가 오셔서 건져주셔야 해요.
구원이란? 죄의 권세 바깥에서 누군가가 건져 주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원래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죄로부터 건져 주셨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 안 짓고 산다는 말이 아니에요.
죄 아래서 난 몸뚱이를 가지고 사는 한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신앙의 포카스를 “죄 짓지 마세요” 라는 데 맞추면 안 되어요.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죄인이 “죄 안지을께요” 라고 하는 것은 교만이고 참람이에요.
이건 자기 주제를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이건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나 앞으로 엄마 말 잘 들을게요!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어린아이는 엄마 말을 잘 들을 수가 없어요.
마음이야 잘 듣고 싶지요.
그러나 어린아이의 몸뚱이가 엄마 말을 거역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엄마는 그 말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엄마는 아이에게 엄마 말을 잘 들으라고 해요.
결국 엄마가 아이에게 엄마 말 잘 들으라는 그 말이 계속하여서 아이가 엄마 말을 안 듣는 불효자(不孝子)라는 것을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아이는 자라가면서 난 참으로 부모님 말을 안 듣는 불효자라는 것을 알고!
이런 못난 자가 부모님의 은혜로 살았구나! 를 알게 되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효도가 뭔가요?
부모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이 뭔가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의 포카스는 말씀 앞에서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고 그러함에도 정죄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에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을 살면서 철저하게 자기 안에 죄가 낱낱이 고발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MRI 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과 행동이 죄라고 고발을 해 주어요.
성령 충만은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반대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고 이런 악당이 주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 짓고 막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만약에 죄 짓고 막살아도 된다고 하는 그 사람은 그 속에 성령이 없는 가짜 신자에요.
성령은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죄를 지으라고 하지 않아요.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그것이 계속하여서 우리를 죄인의 자리로 끌고 가요.
왜냐하면! 우리 몸뚱이는 죄 안 짓고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신자가 세상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죄와 싸우는 모습으로 살아가되 그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아는 쪽으로 나아가겠지요.
이러한 시각으로 오늘 본문을 이해해보세요.
그럼 왜? 하나님께서 세상 권세에 굴복하라고 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각 사람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
이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합니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 낫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서 다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악한 권세이든 선한 권세이든 다 하나님으로부터 났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선한 왕도 있고 악한 왕도 있습니다.
그 왕들을 모두가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악인(惡人)도 악한 날을 위하여 하나님이 일으켰고 선인(善人)도 선한 날을 위하여 하나님이 일으켰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고 가는 모든 인간들은 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왔다가 갑니다.
태어남이 우리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어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이 필요에 의하여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에 출연하는 탤런트들처럼 자기 역할을 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시대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때와 기한에 따른 것입니다.
복음을 듣게 한 것도 하나님이고!
복음을 못 듣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들을 자는 듣게 하시고 듣지 말아야 할 자들은 못 듣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일어서고 넘어짐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서 결정이 됩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알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작금에 세월호 때문에 데모를 하는 구원파들처럼 자기들 힘으로 권세에 도전하여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곧 스스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행동이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여야 하는 것이지 자기 힘으로 해결하는 자가 아니에요.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심을 믿어야 해요.
성도는 때리면 맞고 욕을 하면 욕을 먹는 자들이지 같이 싸우는 자가 아니에요.
원수 갚음을 하나님께 맡겨야지 내가 원수를 갚고자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사울을 죽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어요.
사울은 다윗을 그렇게 죽이고자 하였음에도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아들이 반역을 하여서 도망을 가고!
또한 도망가는 길에 별 거지깽깽이 같은 자가 쫓아오면서 조롱을 하고 욕을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께 하신 일이라고 믿고 수욕을 그대로 당하였어요.
예수님도 그렇게 당하셨어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초대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모두가 세상 권세에 굴복했어요.
그런데 이단들은 그렇지 않아요.
자기들 힘으로 실력행사를 해요.
자기들이 원수를 갚고 심판을 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게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에요.
이단들의 특징이 뭡니까?
자기들 힘으로 실력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하나님께서 일으킨 것으로 보지 않으니까 돈의 힘으로 또는 사람의 숫자를 힘으로 하여서 자기들의 옳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불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요즘 세월호 사건으로 인하여 국가가 수사를 하는데 구원파 교인들이 하는 짓들을 보세요.
저는 구원파 교인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몰라요.
그것은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작금에 하는 행동들을 보면 저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수(數)를 힘으로 삼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또한 잘못해서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이 죽는 것이기 때문에 힘없이 잡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임 당함으로서 아버지 뜻을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희생을 통해서 세상의 악함과 틀렸음을 고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이 되어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왜? 세상의 권세에 굴복하라고 합니까?
이는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이 허락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보면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력들에게 권세를 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때에는 성도들이 그들에게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거짓 종들에게 권세를 줍니까?
이는 그 권세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라고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들이 불을 토하면서 일을 할 때도 있지만 예수님처럼 힘없이 무기력하게 죽임 당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면 우리 힘으로 실력 행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실력행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 없음을 스스로 자증(自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세상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천국을 만들기 위하여 존재는 자가 아니에요.
도리어 세상의 악함을 고발하는 미끼로 존재합니다.
죄악 된 세상에서 올바로 예수를 믿으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고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질서를 무시하고 어지럽히고 무관심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을 뜯어 고치고자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과 비 본질을 혼동하지 마세요.
세상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어요.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 되어서 다스립니다.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명(命)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생명(生命)이란? 하나님이 살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만물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는 만물이 곧 하나님의 명령에 붙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하라는 명령이 있으니까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합니다.
옛 말에 임금은 하늘에서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기도 하고 페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구약 이스라엘에서 왕이란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로 존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왕과 상대 하였습니다.
왕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있으면 백성들이 복을 받고 살았습니다.
반대로 왕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면 모든 백성들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장차 오실 진정한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성을 이야기해주고자 하신 표상학적인 그림들입니다.
구약 시대 장차 오실 왕이 누구입니까?
메시야입니다.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 하실 때 하늘에 별이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것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별을 따라 간 동방 박사들이 유대 왕에게 가서 방금 유대인의 진정한 왕이 났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은 예수님하고만 상대를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시자 세상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이양을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변화 산에서도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지목한 그 왕이란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예표적인 왕들의 실체이신 진짜 왕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만 왕의 왕으로서 지금도 만유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만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다 예수님의 다스림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제일 먼저 예수님의 주(主) 되시는 사건들을 만물을 가지고 알리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주 되심이란? 주인이란 말이고 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고,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것은 예수님이 이들을 다스리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참새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 나귀를 타고 갑니다.
그 나귀를 제자들에게 데리고 오라고 할 때 나귀 임자가 뭐라고 하면 주(主)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 나귀의 주인이 곧 주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전에 바칠 세금을 물고기 입에서 가져 오라고 합니다.
누가 들으면 황당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물고기 입을 열고 보니 놀랍게도 그 속에 돈이 들어 있는 겁니다.
결국 물고기도 주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들에 백합화를 보라고 합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신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를 인간에게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주인입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
악한 자는 악한 일을 위하여 다스리고 선한 자는 선한 일을 위하여 다스리십니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일어난 제국들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나라들을 일으키겠다는 뜻입니다.
다니엘 2장을 봅시다.
단 2:29-45=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36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37 왕이여 왕은 열 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38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39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40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41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서질 만할 것이며 43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44 이 열 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인고 하니 큰 신상의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그 꿈을 알려줍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나아가서 왕이 꾼 꿈은 장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알려 줍니다.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제국들을 금속성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금(金) 나라가 일어나고,
은(銀) 나라가 일어나고,
놋(銅) 나라가 일어나고,
철(鐵)의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큰 틀에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나라는 이 네 나라에 속한 것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금속성으로 말을 할 때는 갈수록 단단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세상이 악해진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이 짐승처럼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노아 시대에 죄악이 관영하였듯이 세상의 종말이 짐승의 세계처럼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할게요.
예수님이 언재 재림 하느냐?
더는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락을 할 때입니다.
노아 시대처럼 죄악이 목구멍까지 꽉 차서 더 이상 집어넣을 틈이 없을 정도가 될 때입니다.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살기가 좋아 질수록 인간들은 더욱 더 악해져만 갑니다.
극도의 이기주의로 짐승이 되어갈 것입니다.
하나님도 떠나게 됩니다.
역사의 진행과 인간성을 보세요.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성은 더욱 더 말살 되어 갑니다.
이게 세상 역사가 보여준 교훈입니다.
그래서 다니엘 7장에서는 세상에 일어날 나라들을 짐승으로 말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단 7:1-18=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네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9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 17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18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장차 역사 속에서 일어날 세상 나라들을 짐승으로 알려 줍니다.
사자와 곰과 표범과 괴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 끝에 나타나는 넷째 짐승은 괴물로 나타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괴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악함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세상을 끝장내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만든다는 것이 다니엘서의 내용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 나라들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면 하늘에서 큰 바람이 바다로 내려 부니까 짐승의 나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 세상에 일어나고 망하는 제국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으키고 망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고 망하게 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 도구로 사용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난다는 것이 맞지요.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성도들에게 세상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비록 억울해도 그 억울함을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걸 이 시대로 연장해서 봅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가도 하나님이 세우심이 됩니다.
북한도 하나님이 세우셨고,
남한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왜? 세우셨을까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서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 언약을 이루시고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십니다.
그런데 이 국가들이 어떤 국가들입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국가들입니다.
모두가 자기 백성들을 훈련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세상 나라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봅시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네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돌아오게 된다는 언약입니다.
그 이방이 바로 애굽이고 곧 세상입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이 에굽에 총리로 있을 때 호의호식(好衣好食) 하면서 살았습니다.
애굽에 귀족(貴族)이 되어서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을 때는 “애굽이여 영원하라” 는 식으로 배 두드려 가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언약에 의하면 출애굽을 떠나야만 합니다.
그들이 살 곳은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를 알고 자기가 죽을 때 형제들에게 당신들이 살 곳은 여기가 아니고 가나안이므로 애굽을 떠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에서의 삶이 너무도 풍요롭고 편하여서 애굽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 하신 정한 때가 되어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을 애굽에 왕으로 등극시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게 합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은 친 애굽 백성 정책을 펴서 비 애굽인들은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은 졸지에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하고 맙니다.
주류로 살 때는 애굽이여 영원하라고 하였는데 비주류가 되고 나서는 애굽이 싫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그동안 살기 좋을 때는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삶에 처지가 힘들게 되자 그동안 잊었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주여! 살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출애굽을 시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에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종살이하게 한 것은 모두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니엘에게 장차 일어날 제국들은 애굽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 할 것입니다.
왜? 강포한 나라들을 일으킵니까?
이는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떠나게 하고자 함입니다.
인간들이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힘들 때입니다.
힘들면 하나님을 찾다가도 편안하면 하나님을 떠나는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는 인간은 자기 몸뚱이 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몸뚱이 편해지면 하나님도 천국도 필요 없어요.
여기가 좋사오니 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붙박이로 살 자들이 아니에요.
하늘나라로 떠나야 할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 좋아서 떠나기 싫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이 싫어지도록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악한 왕들을 세워서 핍박을 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고난에 집어넣어져 보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족속들입니다.
편할 땐 몰라요.
사사기를 보세요.
등 따습고 배부르면 어김없이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럼 하나님은 주변의 강대국에게 붙여 버립니다.
고난 속에 던져 버립니다.
그럼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해요.
이는 결국 고난당하고 보니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 주시는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용서해 줍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 못가요.
제 버릇 개 못 주어요.
또 그 짓을 하고 맙니다.
우상을 섬기게 되어요.
그럼 하나님은 또 이 놈에 새끼들이 하고선 이방을 들어서 후려 팹니다.
이러한 것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악순환으로 해 댑니다.
열 왕 시대도 동일해요.
물론 지금 우리도 이 짓을 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인간은 일평생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자기 몸뚱이를 이길 인간은 없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려면 세상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면 세상이 주는 것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행복은 세상 방식으로 살 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실상은 세상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온통 세상 가치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하늘에 가치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원함이지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세상 가치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돈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돈을 좇아갑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세상에서는 돈 없으면 못 살기 때문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듯이 예수 믿는 것도 다 돈이 있고 난 후에나 가능해요.
그래서 우리는 돈 버는 일에는 발이 빠르지만 하나님을 찾는 일에는 느려요.
몸 아파 보세요.
직장은 나가지만 교회는 안 와요.
주일날 비즈니스 생기면 그리로 가지 교회에 오지 않아요.
그만큼 우리는 애굽에 발을 푹 담가 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허상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요.
하나님이 빼내 주셔야지만 나올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줄을 끊는 사건들을 벌리시는 일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는 몽둥이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아프게도 하고!
사기도 당하게 만들고,
강도도 만나게 하고,
사고를 당하게 하고,
사업에 실패하게 만들어요.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세상 권세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연히 그들에게 칼을 주지 않았어요.
다 필요해서 준 것입니다.
그들은 이 칼을 가지고 누구를 공격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해요.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곁에 항상 이방인들을 붙여 두었어요.
자기 백성들이 언약 안에 머물면 가만히 두어요.
그러나 언약 안에 머물지 않으면 몽둥이로 사용하는 겁니다.
몽둥이로 사용 하고서는 버려요.
이걸 부지깽이라고 합니다.
부지깽이는 불이 잘 붙도록 사용하고선 맨 마지막에 불 속에 집어넣고 태워요.
이 세상 나라가 그래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세상 권세를 가지고 언약 안에 몰아넣고서는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지요.
과거 1997년도 IMF 국가 부도 사태가 났을 때 교회가 가장 부흥했다고 합니다.
살기 힘드니까 하나님을 찾더란 말입니다.
살기 좋을 땐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살기 어려워지니까 하나님 앞에 기어 나오는 겁니다.
이건 마치 사시기의 반복이에요.
하나님은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이방 나라 권세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다스렸듯이 지금도 세상 권세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사사시대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에 팔아 버리고 붙이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에게 칼을 준 겁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연히 세상에게 권세를 주시지 않았어요.
세상 권세에 굴복 하라는 것은 이 세상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권세자도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주로서 다스리십니다.
악인(惡人)이든 선인(善人)이든 모두가 하나님이 다스립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세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이나 제도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세상의 권세자 위에 하나님이 있음을 알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일컬어 피조 세계라고 합니다.
피조 세계란? 창조주에 의하여 생겨난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피조물인 인간들은 창조시부터 창조주에게 복속(服屬)이 된 자가 됩니다.
즉 우리의 주인이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낳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 하였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는 낳아준 자와 낳음을 입은 자의 관계로 있는 것입니다.
이걸 주인(主人)과 종(從)의 관계라고 합니다.
이 관계로 사는 것을 순리(順理)라고 합니다.
순리(順理)란? 창조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우리의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에요.
이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됩니다.
반대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벗어나는 것을 역리(逆理)라고 합니다.
역리(逆理)란? 창조의 원리를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주종(主從)의 관계로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죄라고 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것을 가지고 죄를 추적해 보세요.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했습니다.
그럼 아담은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는 주종(主從)의 관계로 있어야 합니다.
이러 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됩니다.
하나님은 주인으로서 종인 아담에게 명령합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으라고 합니다.
아담은 이 말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주종(主從)의 관계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의 목적에 맞는 순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뱀의 말에 미혹당하여 하나님의 명(命)을 어깁니다.
자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주종(主從)의 관계가 깨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쁨이 됩니다.
죄가 뭐냐?
자기 위치를 벗어난 것입니다.
종이 주인의 명을 어기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순리가 역리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죄가 들어오자 창조주에게 매여서 살아가야 할 자가 그 매임을 끊고 독자적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를 스스로 왕 노릇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죄가 인간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여도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깨어지지가 않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을 떠난다 하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가 된 이 세상은 하나님의 권세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하나님의 간섭 하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으로서 다스립니다.
어떻게 다스리는가 하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하여서 다스립니다.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다 함은 계획된 용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목적에 따라서 다스려 가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서 진행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봅니다.
계 5:1-7=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사도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니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손에 책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책이 봉인(封印)이 되어 있습니다.
이에 천사가 외칩니다.
누가 저 책의 봉인을 땔 수 있느냐? 라고,,,
그러자 요한이 크게 웁니다.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장로 중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곤 그 책의 인봉을 떼실 분을 알려 줍니다.
그가 누구인가 보니 어린 양입니다.
그 어린 양을 일컬어 다윗의 뿌리라고 합니다.
뿌리란? 근원이란 말입니다.
어린 양이 다윗의 뿌리란 말은 곧 어린 양이 다윗 왕의 원형이고 실제란 말입니다.
다윗 왕은 어린 양을 보여주는 예표적인 왕이었습니다.
그럼 다윗 왕의 실체이신 어린 양이 다윗 왕처럼 분열된 왕국을 하나로 만들어서 백성들을 태평성대와 같은 천국을 누리게 해 주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 그가 봉인된 책을 취하여서 하나씩 인을 떼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자 세상에서 갖가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결국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에서 허락된 것이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봅시다.
계 6:1-17=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렛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7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어린 양이 인을 하나씩 떼니까 각각의 색깔의 말들이 뛰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세상에 각양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과 지진과 온역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를 찍을 때 감독이 큐 싸인을 내면 장면이 바뀌고 배우들이 연기를 하듯이 이 세상 역사도 어린 양의 싸인에 따라서 다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어린 양의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창조주란 말입니다.
그럼 어찌 해야 합니까?
어린 양을 보아야지요.
어린 양의 말을 들어야지요.
이 세상은 어린양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고,
어린 양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으며,
어린 양의 의하여 사라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은 예수로 시작하여서 예수에 의하여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걸 아는 자이고,
불신자는 이걸 모르는 자입니다.
신앙이란? 만물이 예수에 의하여 다스려진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만물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주인도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두 주인입니다.
천국도 예수님 주권 아래 있고 지옥도 예수님 주권 아애 있습니다.
천국도 예수님이 지으셨고 지옥도 예수님이 지으셨습니다.
다 필요해서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들을 심판 하십니다.
이를 심판주 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만유의 주(主) 되심이라고 합니다.
빌 2:6-11=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자 만물을 그 발 아래 굴복케 하였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主)라 시인케 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만유의 주(主)로서 활동하십니다.
즉 심판주로 등극하셔서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각 자 갈라내십니다.
천국에서 영생할 자와 지옥에서 영벌 받을 자로 갈라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항상 살아서 만유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세상 권세 모두가 예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필요에 따라서 권세자들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 권세자들을 주의 사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 권세자들 위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래서 신자들에게 세상 권세에 굴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세상 권세자들만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 권세자들을 다스리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주 예수라는 것입니다.
악인도 하나님이 일으켰고 선인도 하나님이 일으켰어요.
다 필요해서 일으킨 것입니다.
나라를 세우는 왕도 있지만 나라를 망하게 하는 왕도 있어요.
잠 16: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사실이 믿어지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이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하여서 일어나는 사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과 사고들은 징조(徵兆)라고 하는 것입니다.
징조란? 싸인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징조를 보고 때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마 16: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 24:1-14=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감람산에서 세상 종말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세상 끝에 어떤 징조(徵兆)가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는 세상 끝 날이 되어갈 때면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거짓선지자들이 일어날 것과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온역들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장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6장에서도 어린 양의 인을 떼니까 흰말이 나타나서 미혹하고,
그 다음에 붉은 말이 나타나서 전쟁을 일으키고,
그 다음에 검은말 말이 나타나서 기근을 일으키고,
그 다음에 청황색 말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음부로 데리고 가는 일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져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러한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지독한 개인주의가 창궐하여서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일들이 횡행하고 있어요.
이는 곧 인간이 짐승화 된다는 말입니다.
뉴스를 보면 친구가 웃는 것이 기분 나쁘다고 죽였어요.
부모가 자식을 말 안듣는다고 때려 죽였어요.
자식이 돈 안 준다고 부모를 죽였어요.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이 사람을 죽여도 몇 년 감옥살이 하면 풀려나요.
과거엔 사형을 처하고 무기징역을 처했지만 지금은 몇 년 살고 나면 나와요.
이러한 것들은 인간들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짐승화 되어간다는 징후들이에요.
그러니까 짐승 짓을 하는데도 법이 관용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어요.
지금 이 세상이 지옥이에요.
돈을 위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들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어요.
인간들이 맘모니즘에 사로잡혀서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매기는 겁니다.
지금은 사람의 생명이 집안에서 키우는 강아지만도 못한 세상이에요.
인간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가치를 강아지만도 못하게 매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은혜로 들으세요.
창세기 1장을 보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짐승을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여섯째 날에 짐승과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은 일곱째 날 안식일 전날이에요.
일곱째 날은 역사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재림 하여서 주어지는 날이에요.
즉 예수님이 재림 하셔서 주어지는 천국이 곧 일곱째 날 안식일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창조시에 일곱째 날이 이르기 전 여섯째 날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짐승이 만들어 지고 사람이 만들어졌지요.
그럼 이 시대 인간들이 짐승화 되어 가는 것은 곧 여섯째 날에 짐승을 만드는 것과 같아요.
그럼 사람도 만들어지겠지요.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이는 곧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짐승처럼 사는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가십니다.
즉 짐승들 속에서 자기 백성들만 쏙 뽑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뽑혀진 자기 백성들은 여호와의 안식에 초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날이 일곱째 날인 여호와의 안식일이에요.
예수님이 재림 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여호와의 안식에 초대키 위함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지옥화 되어가는 것도 모두가 역사의 종점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인간성은 상실하게 되어 있어요.
세상은 편한 쪽으로 흘러가지만 인간성은 그 반대로 흘러가요.
짐승이 되어요.
짐승이란? 육신의 본능으로 사는 자를 말해요.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요.
디모데후서 3장을 봅시다.
딤후 3:1-9=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 들이라 9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바울은 말세의 징조(徵兆)를 말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 짐승처럼 변한다고 하지요.
먼저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요.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음이 강퍅하고 패역해지는 이유가 뭔가요.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은 그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갈 젓꼭지를 빨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들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너그럽지 못하고 사나워지는 겁니다.
심령들이 패역하여 참지 못하고 싸움꾼이 되는 겁니다.
결국 남을 헐뜯고 죽이는 짐승 짓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까요?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이 갈수록 인간성이 말살이 됩니까?
이는 세상이 끝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의 예언처럼 세상이 이상한 괴물들 천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악해야 멸망을 시키지요.
신앙도 극명하게 갈라져요.
불의한 자는 더욱 더 불의하게 되고!
거룩한 자는 더욱 더 거룩하게 되어요.
쉬운 말로 세속화하는 자는 더욱 더 세상 속으로 푹 빠져 들게 되고 말씀을 붙잡는 자는 더 말씀 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어요.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비록 이 세상이 소돔 고모라처럼 되지만 롯처럼 소돔 고모라에 살면서도 그들과 동화되지 않고 성문 어귀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기다리는 자세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삶에 자세가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분리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걸 거룩한 삶이라고 합니다.
착하게 살아서 거룩이 아니라 분리된 모습으로 사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신자들은 나타나는 시대의 표징(表徵)들을 통해서 때를 가늠하게 됩니다.
지금이 잘 때인지, 아니면 일어날 때인지!
씨를 뿌릴 때인지, 추수할 때인지!
지금은 갈라지는 시기에요.
추수 때란 말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하나님은 세상 권세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무얼 하시고 어떻게 다스려가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악한 일에 대하여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3-4=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악을 행하면 세상 권세자들을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그럼 세상이 말하는 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세상은 자기들이 정한 선과 악에 기준이 있어요.
이는 세상을 유지하고 다스리기 위한 법이에요.
그 법이 무엇인고 하니 세상 중심의 윤리와 도덕이에요.
이 윤리 속에는 세상 속에서의 착함도 있고 정직하게 국가의 정책에 따르고 세금을 바치는 것도 있어요.
한마디로 국가가 정한 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을 말해요.
세상에 윤리와 도덕이 왜 필요한가요?
이는 사회를 유지하는 틀이기 때문입니다.
윤리와 도덕을 성경식으로 말하면 십계명(율법)이에요.
율법을 세상 식으로 풀면 윤리와 도덕이 되어요.
윤리와 도덕은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것들입니다.
이웃과 이웃을 지키고 사회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무법천지(無法天地)가 되면 혼란해져요.
그럼 짐승의 법칙이 난무해요.
힘 있는 자들이 힘 없는 자들을 잡아먹어요.
짐승의 나라가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권세자들에게 칼을 준 겁니다.
그 칼로 짐승의 법칙이 난무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모든 인간은 그 속에 짐승의 본성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이걸 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튀어 나와요.
그럼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요.
이건 신자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사는 한 언제든지 짐승처럼 육신의 본능이 튀어 나올 수가 있어요.
짐승의 본능이 튀어 나오면 비윤리적으로 비도덕적으로 치달아요.
몸뚱이를 자기 사욕(私慾)을 쫓는데 사용한단 말입니다.
이걸 세상 권세자들이 가지고 있는 칼로 강제하는 겁니다.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키는 윤리와 도덕을 신앙적인 행위 차원으로 접근하지 말고 세상 사람과 다름의 차원으로 접근을 하세요.
윤리 도덕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에요.
하지만 신앙은 윤리 도덕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죄가 우리 몸을 가지고 죄의 속성인 남을 헤치고 타락케 하는 것들을 발현케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 윤리와 도덕으로 심판하지 않아요.
구원의 기준으로 삼지 않아요.
하지만 윤리와 도덕적으로 살게 하세요.
왜냐하면! 윤리와 도덕이 죄에 반(反)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서신서들이 윤리와 도덕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죄의 성향에 반(反)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도 윤리와 도덕을 지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신앙의 본질은 아니지만 지향하여야 하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반(反) 죄 성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믿음은 추상명사(抽象名詞)에요.
믿음이 어떻게 생겼느냐?
없어요.
그런데 이 믿음이 역사 속에서는 동사(動詞)로 일을 해요.
이걸 사역(使役) 동사라고 합니다.
사역 동사란? 믿음이 원동력이 되어서 어떤 일들을 일으키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벌여요.
그러므로 믿음을 받으면 반드시 그 믿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예수를 믿게도 하지만 또한 예수의 마음으로 살게 하세요.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면 일차적으로 우리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고 살게 하세요.
이걸 율법에 정죄 당하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의 마음을 우리 삶 속에서 적용케 하세요.
즉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 살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죄가 우리 몸을 가지고 행하는 것들을 반(反)하는 것으로 살게 하는 식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죄가 비윤리와 비도덕으로 살게 한다고 하였지요.
그럼 믿음은 죄의 사욕에 반하는 윤리와 도덕을 우리 몸에서 발현케 하는 일을 하세요.
즉 이방인과 다른 모습으로 살게 한단 말입니다.
계속 그 지향을 추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그에 반하는 모습을 돌출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고 우리는 죄인으로 폭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17-32=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방인과 같이 살지 말라고 하지요.
이방인의 삶을 뭐라고 합니까?
방탕과 방임과 방종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는 것이에요.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합니다.
이걸 역(逆)으로 이해해 보세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이방인들의 삶을 방탕과 방종과 방임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생명에 붙어 있는 자의 삶은 이와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겠지요.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들의 삶을 한마디로 자기 몸뚱이의 쾌락을 쫓아가는 삶이에요.
이게 죄가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타락이라는 죽음에 속성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몸을 타락으로 끌고 가요.
이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이 모습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마귀는 거짓의 아비에요.
그래서 거짓 신앙을 양산해요.
죄가 인간의 몸에 타락을 나타낸다고 하니까 마귀는 이를 가리기 위하여 반대로 금욕주의로 가게 해요.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기 몸에서 죄가 발현하는 비윤리성과 비도덕성을 가리는 식으로 일을 한단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몸을 방탕과 방종과 방임하는 것으로 죄를 토해낸다고 한다면,
종교인들에게는 자기 몸을 치는 형식으로 나타내요.
그래서 우린 죄인 아닌 식으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도록 더 윤리적이고 더 도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게 금욕주의에요.
몸을 금욕으로 치면서 우린 죄를 안 짓습니다 라는 식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가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악이라고 해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성자(聖者)라고 불러요.
타락도 죄이지만, 금욕주의도 죄에요.
모두가 몸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지나친 의인도 되지 말고 지나친 악인도 되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몸뚱이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막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작금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의 주범들인 구원파 신앙과 같이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서도 죄의식을 못 느껴요.
이게 모두가 믿음을 지식과 관념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제가 구원파의 그릇된 가르침을 받고 죄의식이 없이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을 비판하는 것이지 그들 속에 있는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에요.
비록 구원파 속에서도 진리에 속한 성도들이 있을 수가 있어요.
그들은 스스로 믿음으로 살고자 할 것입니다.
아까 믿음이 역사 속에서 사역동사로 나타난다고 했잖아요.
그럼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그 믿음 속에 담겨져 있는 것들이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믿음 속에는 예수님의 성품과 마음도 담겨 있어요.
그러므로 진짜 믿음을 받은 성도는 늘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을 봅시다.
벧전 2:11-18=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 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베드로는 우리에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말은 육신의 소욕과 싸우라는 말입니다.
즉 몸뚱이 중심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라고 하지요.
우리가 얻은 자유란 무엇인가요?
육신의 행위로 정죄당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요.
즉 성도는 그 어떤 행위로도 율법의 정죄를 당하지 않아요.
율법의 정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어떤 행위로 인한 심판은 받지 않아요.
그렇다고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우리 맘대로 살라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내어주고 우리를 구원한 것은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은 농부처럼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로 심었어요.
그리곤 수많은 열매로서의 예수를 생산해 냈어요.
이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임 당한 예수의 죽음으로 살아난 그 열매(예수에게 속한 자)들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로 살아난 자들에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처럼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몸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서의 삶으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세상 사람들은 야! 저 예수쟁이들은 우리 하고 달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자들이야! 라고 하지 않겠느냐 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와 왕이나 방백들에게도 순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악한 왕도 세우고 선한 왕도 세우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정권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여서 자기들 힘으로 뒤집어엎겠다고 데모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어떤 권세 아래서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면 되어요.
이 세상엔 그 어떤 정권도 하나님 앞에 옳은 정권은 없어요.
그러므로 세상 정권에 대항하여 목을 매지 말란 말입니다.
성도는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자이지 자기가 심판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에요.
죄도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나고,
의도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나요.
죄에게 장악당하면 우리 몸이 비윤리 비도덕적으로 나타나요.
반대로 의가 우리 몸을 장악하면 윤리와 도덕적으로 나타나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언제 육신의 쾌락을 쫓아갑니까?
하나님을 잊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 몸은 쾌락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세상 사람들과 방불한 모습으로 살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 권세를 가지고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을 강제하기 위하여 세상 권세를 가지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 권세로 억제하지 않으면 세월호 침몰당시의 구원파 신자들처럼 나 구원 받았으니 어떠한 행동을 해도 내 구원에는 지장이 없어! 하면서 뻔뻔하게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기 본분을 잊고 자기만 살고자 도망을 쳐 나온단 말입니다.
믿음이 지식이면 신앙이 관념이 되고 그럼 몰상식한 인간이 되어요.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어요.
뻔뻔스러워진단 말입니다.
그럼 구원파 교주처럼 남에게는 돈 좋아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는 교인들 목에다가 빨대를 꽂아놓고는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빨아 먹는단 말이에요.
이런 자들을 위해서 세상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징벌을 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신앙을 가진 신자들도 마찬가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요.
경중(輕重)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우리 안에도 동일한 죄성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우리도 언제 신앙을 이용하여서 자기 사리사욕을 쫓을지 몰라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 권세를 가지고 우리들이 신앙을 핑계 삼아 자기 사욕을 쫓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일들을 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이 우리의 행동을 억제 시키는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 권세가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 권세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쁜 짓 하지 말고 사세요.
국가의 정책도 따르고 세금도 떼어 먹지 말고 정직하게 사세요.
세상이 정한 규범대로 사세요.
법대로 살고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 억울함은 하나님께 탄원하세요.
이 세상은 법대로 살면 손해를 보고 탈법으로 살아야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렇더라도 탈법하지 마세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사람 아닌 듯이 사세요.
잠시 잠간 후면 주님이 오십니다.
곧 오세요.
그러니 소망 가운데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사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듭니다. 하지만 힘든 세상도 잠시 지나가는 형적임을 알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연약해지지 말게 하시고 또한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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