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우리는 예수라는 옷으로 덧 입혀져 있기 때문에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복음이요, 구원이요, 의요, 진리요,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 열심히 공부해서 마귀를 이기자, 믿음을 더 갈고 닦아 마귀를 이기자’라는 구호와 다짐이 나쁘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믿음을 갈고 닦으십시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밝히 아는 곳으로 수렴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과 열심이 우리의 힘과 무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계 3:7-12)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 8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9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10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 11 내가 곧 가겠다.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12 이기는 사람은,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써 두겠다. 13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도시들은 아시아에서 아주 유명한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할 빌라델비아 라는 도시는 유명한 거라고는 지진이 많다는 것 이외에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아주 가난한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빌라델비아 교회도 아주 가난했고 수적으로도 아주 적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빌라델비아에 사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따돌림과 핍박을 당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7번의 큰 지진으로 도시가 거의 황폐하게 되었고 AD17년에 있었던 큰 지진 후에는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할 만큼 커다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 때 (도시를 재건할 때)에 로마 황제의 지원을 받아 도시를 재건했는데, 도시를 재건하고 나서 로마 황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도시의 이름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New city of caesar) ‘시저에게 바치는 새로운 도시’라는 새 이름으로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한 30여 년 간을 그 이름을 쓰다가 다시 빌라델비아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는 날까지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었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는 그 사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라는 표현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럼 한절 한 절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7절을 보시면
(계 3:7)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주님을 ‘거룩하고 진실하신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하기오스 호 알레디노스’라는 표현은 ‘진짜 거룩’‘참 거룩’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거룩이라는 말이 53번 나오는데 그 중에 거의 30번 가량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거룩’이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사실 거룩이라는 단어 히브리어로 ‘카다쉬’ 헬라어로 ‘하기오스’라는 단어는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흔히 ‘거룩’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단어로 생각들을 하는데 사실 그 단어들은 하나님의 신비함과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하늘의 것을 표현하는 데에 쓰이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막 10:18)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성도’라고 부르지요? 그 ‘성도’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거룩을 가리키는 ‘하기오스’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자가 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거룩의 옷 때문에 ‘거룩한 무리’라고 불려 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자로 여김을 받지만 사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이지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지요? 오늘 본문 7절에서 “진짜 참 ‘거룩’이신 이”라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묘사하신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 ‘거룩’의 본체이시며 그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그 구절은 이사야서에서 인용이 된 구절입니다.
(사 22:15,20-24) “1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20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 22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23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24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리라“
이 이야기는 히스기야 왕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 ‘셉나’라는 대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의 국고를 맡은 막강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묘실, 무덤을 파고 그것을 치장하다가 하나님께 호되게 꾸중을 듣고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세를 엘리야 김에게 넘겨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다윗의 열쇠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을 잘 보시면 그 엘리야 김에게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들을 묘사한 단어들이 전부 메시야에 관한 언어들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김을 ‘내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엘리야 김에게 옷을 입히고 띠를 띠워 힘 있게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옷과 띠의 개념은 구약 성경에서 아주 자주 등장하지요?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을 시작으로 성전을 상징하는 제사장의 옷과 요한 계시록에 자주 등장하는 성도들의 흰 옷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장막으로 입히시는 장면이라든지 그렇게 성경에서는 옷을 입히고 띠를 띠게 하신다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이미 공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의 옷을 입게 되는 성도들’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에베소서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 (구원의 투구, 의의 흉배, 믿음의 방패,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 진리의 띠, 성령의 검)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못 건드리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 우리가 마귀보다 더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세요? 마귀는 주님이 오셨을 때 척 알아보았습니다. 마귀는 주님이 언제 오실 지도 다 압니다. 주님을 시험할 때도 마귀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시험을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동거하던 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많이 공부한다고 해도 그게 마귀를 당할 검이 되겠습니까?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것이 우리의 무기가 됩니까? 우리는 예수라는 옷으로 덧 입혀져 있기 때문에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복음이요, 구원이요, 의요, 진리요,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 열심히 공부해서 마귀를 이기자, 믿음을 더 갈고 닦아 마귀를 이기자’라는 구호와 다짐이 나쁘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믿음을 갈고 닦으십시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밝히 아는 곳으로 수렴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과 열심이 우리의 힘과 무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부분은 제가 ‘은혜’에 관해 설교를 하면서 여러 차례 다루었던 것이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1절에 그 엘리야 김에게 정권을 맡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철장으로 다스리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엘리야김을 유다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비라는 것은 자식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김을 유다의 아비로 만드시겠다는 것은 유다라는 민족을 엘리야김에게 지키고 보호하도록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사 9:6-7)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바로 이 메시야의 상징으로 엘리야김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다윗의 열쇠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요,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이’라고 묘사를 하신 것은 ‘내가 바로 그 메시야다‘라는 것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고 가난하고 핍박을 받던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편지를 받았을 때,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예수님이 거룩의 본체이시고 그 분이 진짜 기름부음을 받으신 철장으로 통치를 하실 왕 메시야라는 확인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분이 엘리야 김이 유대의 국고를 맡았던 것처럼 하늘의 보고의 열쇠를 갖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 하늘의 보고를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안 주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걸 것이다’ 이런 위로도 함께 받았을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 3:8)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을 열어 놓았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에서 인용이 된 구절입니다.
(사 60:11) “11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하나님께서 열방이 돌아오게 될 것에 대해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시는 구절입니다.
(계 21:22-24)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이 내려왔는데 그 성문들이 모두 열려 있습니다. 왜 열려 있다고 합니까? 낮이라서 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기 때문에 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낮이라는 단어는 예수께서 자주 쓰셨던 단어입니다. 한군데만 찾아보고 가지요.
(요 9:4-5)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주님이 계신 곳이 낮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밤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있고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주님께서 가난하고 작고 비천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이미 천국의 문을 열어 두었고, 그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 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문은 아무도 닫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밤 같은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대낮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계 3:9)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여기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을 ‘사단의 회’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정말 거짓말을 그렇게 많이 했을까요? 아니요. 그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거짓말을 안 하기 위해 입을 꿰맨 사람이 있을 정도로 거짓말을 안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거짓말하기 싫은데 자꾸 거짓말이 나오니까 너무 괴로워서 입을 꿰매버린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럼 여기서 유대인들을 모두 싸잡아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표현을 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그 분을 거짓메시야라고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가리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말 하는 자들’사단의 회‘인 것입니다. 진짜 유대인, 진짜 이스라엘,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있는 바로 너희들, ’빌라델비아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9절에 그들 중 몇 명을 빌라델비아 교회의 발 앞에 절하게 만드시겠다고 하신 구절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도 역시 이사야서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사 60:14) 14 너를 괴롭게 하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 엎드리어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 하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던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발아래 엎드려서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성읍(the City of the Lord)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Zion of the Holy One of Israel)이라 할 것이랍니다. 여호와의 성읍, 거룩한 자의 시온이 어디입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지요? 새 예루살렘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교회,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계 21:9-10)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예수를 그리스도라 인정하지 않는 거짓말 하는 자들, 사단의 회 유대인들을 네 발 앞에 절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야, 너희야 말로 진짜 이스라엘이요, 너희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성전이다’‘지금은 작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너희는 찬란한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위로해 주시는 구절 인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을 보시면
(계 3:10)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 말씀을 곡해해서 ‘네가 나의 말을 잘 듣고 인내했으니까 내가 너를 휴거 시켜서 7년 대 환난을 면하게 해 줄게.’이렇게 해석을 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여기서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라는 말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호티 에테네사스 톤 로곤 테스 휘포모네스 무’입니다. 거기서 쓰인 mou라는 단어는 소유격입니다. 우리의 인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인내’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번역을 하면 ‘예수님의 인내에 대한 말씀을(복음을) 잘 지켰기에(테레오)’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그 분의 인내에 대한 복음은 유대인들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를 당했습니다.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수난과 죽음과 인내와 부활을 이해하고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너희들을 내가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말 번역이 오해를 가져오게끔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이 구절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테레소 에크 테스 호라스 투 페이라스무’ 는 시험의 때로부터 ‘테레소’‘지켜주겠다’는 것이지 아예 시험을 없애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로는 ‘keep you from the hour of trial’입니다. 같은 단어가 쓰인 곳이 있습니다.
(요 17:15) “15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테레세스’ 같은 단어입니다. 마귀가 오지 못하는 곳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세대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7년 대 환난 전에 모두 휴거 될 것이고 7년 대 환난은 남아있는 자들의 몫’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지금이 바로 인의 재앙, 나팔재앙, 대접재앙의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인을 떼고 계시고 나팔을 불고 계시며 대접을 쏟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환난 기를 통과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하심, 지키심(테레오) 안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물자를 찾아다니는 시기에 거기에 당하지 않고 예수를 믿고 예배당에 오셔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눈물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과 기근, 자연재해, 질병, 인의 재앙, 나팔재앙, 대접재앙의 내용들이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우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밤 같은 재앙 속에서 우리를 낮처럼 지키고 계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11절12절을 보시면,
(계 3:11-12)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뭐였습니까? 10절에서 보았잖아요? ‘예수님의 인내에 대한 말씀’을 지킨 것 즉,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정확한 복음을 잘 지키는 것이 교회가 살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둥들은 결코 다시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둥 위에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교회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새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그 기둥은 성전을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 기둥이 빠져 버리면 성전은 붕괴되고 맙니다. 예수께서 교회더러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빠진 성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임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성전은 붕괴되고 말 것처럼 묘사를 하십니다. 우리는 그처럼 하나님께 대우를 받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기둥이 ‘난 도저히 어려워서 못 하겠다’고 포기하는 꼴을 보시겠습니까? 끝까지 끌고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입니다. 새 예루살렘, 완성된 참 성, 완성된 교회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계 21:12-14)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새 예루살렘의 성곽과 성문 위에 교회를 상징하는 12지파와 12사도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절대 포기될 수 없고 중도에 탈락할 수 없는 이미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다니고 푸른 초장으로도 다니고 여러 상황과 조건에 처해 지지만 ‘난 안다,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자라는 것을 안다. 왜? 난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이니까? 나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이 여호와의 집의 영원한 기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자신이 겪는 여러 가지 난관과 어려움 들이 자기를 괴롭히지만 결국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까짓 것들 쯤이야 괜찮다’ 하고 간 것입니다. 여러분도 세상을 향해 외치세요. ‘내가 가난하고 작고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냐? 괜찮다. 실컷 조롱해라. 그러나 어떤 것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 난 이미 여호와의 집의 영원한 기둥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이고 이미 내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사람이다. 난 그 소망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하다’ 작고 초라하고 가난했던 빌라델비아 교회가 2000년 전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위로와 격려가 지금 이 시간에 동일하게 여러분에게도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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