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 교회에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사데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로 인정도 받고 인기도 얻고 유명했지만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만 나가면 그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바른 복음을 깨닫고 꼭 붙들고 날마다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행위가 예배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그 행위가 나오고 있는가를 확인하세요. 예배당에 나와서 종교행위는 그럴듯하게 하면서 나가서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형편없이 세상과 부화뇌동해 버리는 그런 죽은 행위, 이파리만 무성한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느냐 이 말입니다. 구원에는 세 시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세 시제가 헛갈리면 사데 교회처럼 죽은 행위들을 할 수 있습니다. . 구원은 회심과 성화 영화를 다 합쳐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시작하신 것은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 다는 의미에서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계 3:1-6) “1 "사데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2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4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5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 6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오늘은 사데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겠습니다. ‘사데’라는 지방은 고원지대입니다. 그래서 그 도시 전체가 요새화 되어있는 도시입니다. 산 위에다가 성을 쌓고 남쪽 한군데에만 입구를 만들어 놓아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이 난 도시입니다. 지금도 호전적인 인디언들의 후예들이 사는 인디언 reservation에 가보면 거의 대부분 마을이 산 위에 있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사방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입니다. 적들의 침략에 대비해서 그렇게 높은 산 위에다가 마을을 이루고 삽니다. 8월 달에 중 고등부가 아리조나 인디언 단기선교를 가게 되는데 그 곳에 가면 아마 실제로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도시가 요새화 되다 보니까 그 성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이 되어서 그 주변에 위성도시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전체를 다 합쳐서 ‘사데’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헬라어 원어에도 그렇고 영어에도 복수로 sardis라고 표기하는 것입니다. 사데는 아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도시 아래로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서 사금이 나고 있었고 그 사금 덕에 최초의 금화를 주조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허무스 평야의 풍요로운 농산물도 사데의 부에 일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두 번 완전히 파괴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BC549년에 우리가 잘 아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서, 그리고 BC218년에 안티오쿠스 대제에 의해서 점령당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다 하룻밤 사이에 반대편 절벽을 타고 넘어오는 게릴라전에 의해 패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로마의 아시아도의 한 도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밤사이에 도적같이 침공해 온 적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망한 전력이 있는 사데 교회에 예수님께서 편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은 그런 사데 도시의 배경을 들어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예수 을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 라고 묘사를 합니다. 일곱 영은 1장 공부하면서 배웠지요? 성령입니다. 일곱별은 천상의 교회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일곱 편지 서두의 예수님에 관한 묘사가 그 편지의 내용과 성격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했지요? 예수께서 성령과 천상의 교회를 가지고 계시다는 표현을 볼 때 사데 교회에 보내시는 편지에는 천상의 교회, 즉 완성된 교회의 모습을 들어 이 지상에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지상의 교회인 사데 교회에 뭔가 메시지를 전하실 것이 있으시다는 것을 미루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계속해서 천상의 완성된 교회(already)와 지상의 역사를 살아내는 교회(not yet)를 띄워놓고 이 지상의 교회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퍼붓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사데 교회의 편지를 통 해서 오늘날 교회에 우리 주님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계신지 차근차근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후반부에 주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I know your deeds’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행위가 복수입니다. 사데 교회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들이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데 교회더러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다’고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데 교회 내에는 우리가 공부한 다른 교회들처럼 이단들도 없었고 도시로부터의 핍박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와 번영은 멋진 종교 활동을 일으켰습니다. 엄청나게 멋지고 커다란 예배당이 있었고 많은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사데 교회는 인기가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사데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실상은 네가 죽었다고 하십니다. 행위가 풍성했는데 죽은 행위들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데는 아주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에 시민들 전체가 도덕적으로 아주 문란했다고 합니다. 사데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로 인정도 받고 인기도 얻고 유명했지만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만 나가면 그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위를 겉만 번드르르한 죽은 행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위였겠지요?
(마 23:27-28)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예배당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화려한 행위들을 하는데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집착하고 중독되어진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런 삶, 그렇게 죽은 행위를 하고 있는 사데 교회에게 주님은 ‘깨어나라’고 외치십니다. 2절을 보세요.
(계 3:2)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깨어나라, wake up’‘그레고 류오’라는 단어는 ‘잠에서 깨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다’라는 뜻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말씀이 적용되는 자들은 사데 교회 전체가 아니라 사데 교회 안에 있는 죽어 가는 남은 자들이겠지요? 어차피 죽어있는 가짜들은 못 알아들을 테니까요. 그들은 그렇게 모양만 풍성한 죽은 행위들을 하다가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일깨워’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기누 그레고론’입니다. ‘기누’는 become이라는 뜻을 가진 ‘기노마이’의 현재 중간 태 직설법입니다. 그리고 ‘그레고론’은 ‘그레고류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적인 진행을 나타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바른 해석은 ‘계속해서 깨어있어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깨어있지 못한 자들은 완전히 ‘죽은 자’ 아니면 ‘죽어 가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죽어 가는 남은 자’라는 표현을 하신 것으로 보아 사데 교회에는 겉만 번드르르하게 종교행위를 하는 죽어있는 자들 틈에 그들과 부화뇌동해서 남은 자이면서도 죽어 가는 자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총체적인 영적 괴사상태로 죽어가고 있는 남은 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라’ ‘스테리조’ ‘확고부동하게 고정하고 확립하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에 근거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닌 형식적인 행위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네 행위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2절 후반부에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는 문장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누가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주어입니다. 우리 교회의 행위는 예수님이 인정하셔야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한다고 해도 죽은 행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 처방을 주십니다. 3절을 보세요.
(계 3:3)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위가 되게 하기 위해 처음에 그들이 듣고 배웠던 바른 복음을 기억하고 (므네모뉴오) 그 복음을 굳게 붙들고(테레오) 그 복음에 근거하여 회개하라(메타노에오)고 충고하십니다. 바울도 똑같은 권면을 하지요?
(행 20:31)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기가 가르친 것을 기억하면서 깨어서(그레고류오)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딤후 1:13-14)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남아있지만 죽어 가는 것처럼 사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이 처음 받았던 복음을 기억하고 지키고 회개하여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한번 돌아보자고요. 우리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게으르고 늘어지고 풀어져서 삽니까? 아닙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2절의 ‘죽게 된 것’‘에멜론’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입니다. 그 시제는 아주 시급한 상황을 다룰 때 쓰는 것입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곧 죽게 되는 아주 절박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의 현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안전하겠지, 평안하겠지’ 그렇게 사데가 그렇게 자기들의 난공불락의 성을 믿고 있다가 15명의 특공대에게 속수무책으로 하룻밤 사이에 자다가 당한 것입니다. 깨어야 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만일 잠에서 깨지 않으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고 신앙 생활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도적을 맞듯이 맞게 될 것입니다. 도둑은 아무 기대 없이 준비 없이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주님을 도적을 만나듯이 맞게 되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살전 5:1-6)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 할지라”
죽어있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도적같이 오시지만 깨어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러면 주님을 도적을 맞이하듯이 맞지 않을 수 있는 깨어있는 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합니까? 911의 소방수들이나 경찰관들이나 군대의 파수병들이나 병원의 응급실 의사들이 왜 밤에 깨어있지요? 그들이 맡은 일을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괜히 깨어있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위해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지난주에 찾아봤잖습니까?
(요 6:28-29)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러분이 깨어서 할 일이 뭡니까? 예수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예배, 헌금, 구제, 선교 다 좋지만 그게 죽은 행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예수를 바로 잘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방심하지 말고 ‘기누 그레고론’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금방 죽어가는 자들이 되어 버리는 것이 바로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렇게 바른 복음을 깨닫고 꼭 붙들고 날마다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행위가 예배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그 행위가 나오고 있는가를 확인하세요. 예배당에 나와서 종교행위는 그럴듯하게 하면서 나가서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형편없이 세상과 부화뇌동해 버리는 그런 죽은 행위, 이파리만 무성한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열 처녀의 비유에서 살펴보았지만 신부의 들러리들이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바른 신앙에 근거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인 것입니다. 잠이 들었던 처녀들은 미처 그것을 준비하지 못하고 나중에 그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애걸합니다. 그러나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왜요? 그 성도들의 성도다운 옳은 행실은 나누어 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매일매일, 깨어서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롬 13:11-14)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 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살전 5:6-8)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noppo)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깨어있는 자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 안에 거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마 24:42-44)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 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벧후 3:10-14)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렇게 깨어있는 자들은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하나님 앞에 서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의무나 짐이나 굴레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기쁘게 자발적으로 그 삶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르게 믿는 자들의 삶, 깨어있는 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제 왜 편지 서두에서 예수님을 일곱별을 쥐고 계신 분이라고 묘사를 했는지 아시겠어요? 천상의 교회는 이미 완성이 되어서 그 거룩한 삶을 완벽하게 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상의 교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천상의 교회, 일곱별로서의 신분을 늘 기억하고(므네모뉴오)그 신분을 굳게 잡고(테레오) 매일 매일 회개하면서(메타노에오)천상의 교회의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을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합니다. 구원에는 세 시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세 시제가 헛갈리면 사데 교회처럼 죽은 행위들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창세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있고 이제 장차 완성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구원은 회심과 성화 영화를 다 합쳐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분적 운명적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홍해를 건넌 것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시작하신 것은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 다는 의미에서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Eschatology preceeds soteriology.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광야를 가시면서 구원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already 구원을 받았고 not yet 아직 구원을 받고 있는 것이며 이제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받은 자들은 지금 그 구원받은 자답게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교회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낮이 되었는데도 밤처럼 사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살아난 자로서의 감사와 감격의 삶이 나와야 하는데 여전히 죽어있는 자들처럼 살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깨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지금 엄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은 그 경고가 들릴 것이고 아닌 자들은 계속 그렇게 살다가 이름만 살아있는 자로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정상적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말과 심판을, 그리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종말론 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깨어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늘 주님이 오실 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하나는 에녹이고 하나는 엘리야입니다. 그 중 에녹이 왜 산채로 승천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란 어떤 자입니까? 심판을 준비하고 종말을 준비하며 사는 자를 말합니다.
에녹이 자기 아들이름을 '무드셀라'라고 지었습니다. 무드셀라 라는 이름의 뜻은 ‘창던지는 자’라는 뜻과 함께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전쟁을 할 때 각 부족이나 마을에 창을 제일 잘 던지는 사람이 전투의 가장 선두에 섰었습니다. 그가 창을 던져 적장이나 적의 왕을 죽이면 나머지 군사들이 기선을 제압당한 적군을 무찌르는 그런 식의 전쟁이 고대의 전쟁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창던지는 자가 먼저 죽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전쟁은 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무드셀라’는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 한다’는 뜻을 담지하고 있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 아들을 낳으면 ‘무드셀라’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에녹은 무드셀라가 태어나면서부터 매일 매일 심판과 종말을 준비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아이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매일 매일을 심판의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병에 걸려 죽을지 돌에 걸려 넘어져서 죽을지 맹수에게 물려 죽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산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창세기 5장의 죽음의 족보에서 유일하게 에녹만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깨어있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총체적인 영적 괴사 상태에 있는 사데 교회에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 명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있었다고요? 성경은 ‘몇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흰옷을 입게 되는 것은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에 즉, 그럴 자격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합당하다는 단 ‘악시오스’가 쓰인 곳이 계시록 5장에 나옵니다.
(계 5:9,12)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왜 주님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까? 왜 주님이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피로사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일찍 죽임을 당하셨기에 그 분이 합당하신 분이 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삶에 연합되어 주님의 고난의 흔적을 몸에 지닌 사람들이 합당한 자요 흰옷을 받을 자들인 것입니다.
(계 6:9-11)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누가 흰옷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가 가진 증거를 인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 흰옷을 받습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순교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죽임을 당한 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그리고 그 삶에 증거, 증명‘말튀리아’를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인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라는 말 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죽은 자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죽음 같은 나그네의 삶을 살아낸 자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그 말씀대로 그 고난을 겪어 낸 자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게 당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굳게 붙든 자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를 그들의 삶 속에 가지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합되어진 삶을 살아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 그의 인생에 증거로 보여 지게 되어있습니다. 그 삶을 살아낸 사람들만 흰옷을 받습니다. 그 흰옷은 어린양의 피에 빨아서 희게 된 옷이기 때문입니다.
(계 7:14)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3:18)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 흰옷은 불로 연단한 금, 곧 환난을 통과해야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과하면서 정결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연단을 통과해야만 옛 몸을 끊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 11:35) “35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쇠패하여 무리로 연단되며 정결케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작정된 기한이 있음이니라”
또한 지혜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얼마가 학살을 당할 것인데, 이 일로 백성은 단련을 받고, 순결하게 되며, 끝까지 깨끗하게 남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끝 날이 올 때까지, 이런 일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 환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바르게 살려고 할 때,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삶을 살게 될 때, 반드시 받게 되는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흰옷을 입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이 깨어서 매일 매일을 종말론 적인 삶을 살아내시게 될 때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옳은 행실을 추구하며 세상 속에서 살게 될 때 여러분은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되고 때로 그것이 힘에 부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환난이요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 19:8)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빛나고 흰 세마포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흰옷은 그렇게 입혀지는 것입니다. 환난은 누구는 통과하고 누구는 지나가고 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바른 말씀에 근거한 그런 옳은 행실이 있으십니까? 그 옳은 행실로 말미암아 핍박을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깨어나십시오. 주께서 권면 하실 때 깨어나셔야 합니다. 아니면 도적같이 여러분의 종말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고난과 수고가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합당한 자들의 삶이요, 흰옷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시고 열심히 수고하십시오. 그러한 자들을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계 3:5)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똑같은 말씀을 하신 곳이 있습니다.
(마 10:32-33)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주님이 시인하시겠다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사람 앞에서 주님을 삶으로 입으로 시인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입으로가 아니라 삶으로도 주 예수가 나의 주인임을 살아낸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으시겠다고 하시지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해 놓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게 만드시고야 마시지,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신다는 결연한 확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잠들어 계십니까? 깨어있으십니까? 오늘 저녁이라도 우리 주님 오시면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옳을 행실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아니라면 깨어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죽어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기억하시고 꼭 붙드시고 회개하십시오.
지금 열심히 수고하며 신앙인의 삶을 살아내고 계신 여러분, 어떠십니까? 힘드시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그 길만이 우리가 흰옷을 받아 입을 수 있는, 합당한 자가 될 수 있는 길이라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말씀대로 죽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스러운 흔적을 증거로 살아내고 계신 것입니다. 오히려 기뻐하세요. 너무 지쳐 힘이 들 때는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곧 오신다. 곧 오신다. 그리고 이 세상은 곧 끝난다. 그리고 난 이제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거닐 하나님의 자녀다. 마음속으로 외치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을 다소 지나치게 다그친다고 생각되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여러분을 무시하거나 여러분을 과소평가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15년 넘게 한국과 미주 전역의 교회를 돌며 집회를 인도해오면서 여러분만큼 말씀을 사모하고 여러분만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기 위해 고민하고 수고하시는 분들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참 잘 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안주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더 달려야 합니다. 주마가편이라는 말이 있지요?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 때리는 법입니다. 달릴 수 없는 말은 아예 채찍을 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잘 달리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더 격려하고 독려하는 의미에서 제가 채찍을 대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더 열심히 고민하고 수고하고 노력해서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들로 지어져 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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