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1) 단 주위에서 뛰놉니다.(2) 그리고 큰소리로 그들의 신을 부르고 (3) 자해를 합니다.(4) 그리고 진언을 하지요. 두아디라 교회에 그런 이교 적 행위들이 침투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밥까지 굶으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겠어?’ 그건 자해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시기 전에 먼저 나는 왜 이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가를 확인하세요.)
(계 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그 눈이 불꽃과 같고, 그 발이 놋쇠와 같으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나는 네 행위와 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을 알고, 또 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 20.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21.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자기 음행을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22. 보아라, 나는 그를 병상에다가 던지겠다.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그와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을 당하게 하겠다. 23. 그리고 나는 그의 자녀들을 반드시 죽게 하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겠다. 24. 그러나 두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깊은 흉계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인 너희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25.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 26. 이기는 사람, 곧 내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27. 그는 쇠막대기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고, 민족들은 마치 질그릇이 부수어지듯 할 것이다. 28. 이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께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다스리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사람에게 샛별을 주겠다. 29.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오늘과 다음 주에 걸쳐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편지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버가모나 이집트 등이 전쟁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지나게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의 침략을 많이 당했던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안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돌파구는 상업을 통한 부의 축적 뿐이었습니다. 로마가 그 작은 두아디라까지 도로를 낸 것은 두아디라가 이렇게 상업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 만났던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로 이 두아디라 사람이었습니다. 자주색, 빨간색은 지금도 염색이 힘든 색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 벌써 그런 염색 업이 발달했고 그에 따라 옷을 만드는 기술과 봉제업, 그리고 옷에 부착하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과 그런 것을 다루는 도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의 제련 기술도 발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한 곳에는 당연히 상업 조합이 생겼고 그 조합마다 각자 섬기는 수호신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수호신을 섬기는 무당들, 제사장들이 많았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조합들이 벌이는 축제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 이교적 신앙의 모습이 많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먼저 18절을 보시겠습니다.
(18절)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각 교회에 주시는 편지의 서두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묘사는 항상 그 내용과 관련이 있었지요? 두 눈이 불꽃같고 발이 주석 같다고 하는 것은 전에 우리가 공부할 때 심판과, 심판 속에서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고 권세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아디라 교회의 내용은 한 교회 안에 검은 색과 흰색 두 종류의 신앙인 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가는 자들은 구원에 이를 것이고 교회 안에서 사탄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시고 내용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지금 뭔가 혼 날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게 어떤 내용인지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요, 19절을 먼저 보시면,
(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거기서 네 ‘사업’이라는 단어와 나중‘행위’라는 단어가 ‘엘곤’이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work’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면 ‘나는 네 행위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런 뜻입니다. 어느 교회하고 대조가 됩니까? 에베소 교회와 대조가 되지요? 에베소 교회는 처음 행위를 버렸다고 혼이 났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오히려 나중행위가 더 많았다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 무슨 의미라고 했지요?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에베소서가 1-3장까지는 복음을 설명하는 교리 부분이고 4장부터가 그 복음을 근거로 한 행위를 진술하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그 3장까지의 내용이 없는 껍데기뿐인,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지 않은 겉만 번드르르한 열심들만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에 근거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교회에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20절부터 함께 보겠습니다.
(계 2:20-23)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 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세벨의 가르침을 좇아 행음을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셨다면 지금 계시록2장 20절에서 23절은 열왕기서의 이세벨과 엘리야의 대결의 결과를 보는듯한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이세벨이 나오고 우상을 섬기게 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 회개를 하지 않았다고 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에 던지겠다고 하고 그 자녀들을 죽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엉터리 왕, 아합의 아내입니다. 원래 두로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그의 아버지 엣바알의 이름의 뜻이 ‘Baal with us’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God with us’를 흉내 낸 말이지요. 이세벨은 그 바알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바알의 선지자로 열심히 이교 사상을 가르치고 바알 신앙을 전파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켜서 이세벨의 수하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세벨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협박했습니다. 결국 이세벨은 예후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 개의 먹이가 되었고 그의 아들들 70명도 도륙을 당했습니다. 내용이 거의 같지요? 만일 두아디라 교회에서 그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바로 그렇게 처참하게 심판해 버릴 것이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훤히 꿰고 있었던 당시 사람들은 금방 그 의미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세벨은 왕비였을 뿐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이교 선지자였습니다.
(왕하 9:22) “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이세벨이 술수를 행하던 자였다고 하지요? 여기서 이세벨이 행했다고 하는 ‘술수’라는 단어 ‘케쉐프’는 ‘witchcraft, 마술’을 의미합니다. 이런 마술을 행하던 자들을 ‘술사, 술객’이라고 불렀는데, 그 술사가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 7:11) “11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애굽 술객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바로 ‘케쉐프’입니다. 애굽 술객들이 뭐하던 사람들이었습니까? 애굽의 신을 섬기던 애굽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세벨은 그렇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술수를 행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세벨을 ‘자칭 선지자’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이세벨의 가르침에 넘어간 자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 이세벨의 가르침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세벨이 이스라엘에 끌고 들어 온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교신앙이지요. 우리가 여러 번 공부한 갈멜 산에서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종교 행위를 보면 그게 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왕상 18:26)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그들의 신을 부르며 (1) 단 주위에서 뛰놉니다. (2) 그리고 큰소리로 그들의 신을 부르고 (3) 자해를 합니다. (4) 그리고 진언을 하지요. 두아디라 교회에 그런 이교 적 행위들이 침투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날 교회들에 그것이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 보자구요.
(1) 먼저 그들이 단 주위에서 뛰놀았다고 하는 대목을 보면, 그들은 제사를 축제처럼 드렸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축제처럼 드리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가끔 ‘예배는 잔치’라는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예배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잔치는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을 위한 잔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잔치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가 내가 즐겁고 내가 기쁘고 내가 위로 받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나를 즐겁게 해줄 멋진 밴드도 있어야 하고 드라마도 있어야 하고 멋진 멀티미디어도 첨가되어야 하고 지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교회는 회중들의 그러한 요구를 맞춰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여러분을 위로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예배 시간을 통해 여러분의 죄가 드러나서 얼굴이 붉어지셔야 합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예배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눈물도 흘리셔야 합니다. 때로는 너무나 작은 우리가 드러나고, 아울러 하나님의 그 크심이 드러나서 그 하나님 앞에 압도되어서 ‘헉’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경외감을 느끼셔야 합니다. 환갑잔치 돌잔치하고는 다른 잔치입니다. 돌잔치에 가보면 정작 주인공인 아기는 방에서 울고 있고 놀러온 사람들이 주인공인 그런 잔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회중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예배를 환갑잔치, 돌잔치처럼 이벤트화 하고 있는 것이 오늘 날 교회들의 모습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드럼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왜 드럼을 치느냐를 고민해야 합니다. 밴드를 이용해서 듣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라면 당장 다 갖다 버려야 합니다. 세련된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이 앉아있는 사람들의 귀를 update하기 위한 것이라면 당장 집어치워야 합니다. 어떤 악기를 가지고 어떤 멜로디와 리듬의 찬양을 하는 것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피아노만 쳐야한다, 피아노가 교회에 들어오는데 100년이 걸린 것 아십니까? 피아노는 선술집에서 접대부들이 노래하고 춤 출 때 사용하는 악기라고 교회 지도자들이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고요. 그런데 지금 피아노 안 쓰는 교회 있습니까? 어떤 악기를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 찬양하고 왜 예배하는가를 우리가 알고 있다면 ‘랩’으로 찬송가를 불러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헤비메탈 그룹이 와서 찬양 반주를 하면 어때요? 그러나 시대의 조류를 따라,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예배를 자꾸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책망 받았던 바로 그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인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큰 소리로 그들의 신을 불렀다고 하지요? 큰 소리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목소리를 크게 해서 신을 부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면 집중도 되고 좋은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큰 소리로 부른 다는 것은 그 신이 살아있다는 확신이 없어 조바심을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들이 만들어 낸 신이라는 말입니다. 조바심이 나서, 그리고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여러분이 기도 할 때 소리를 지른다면 그것은 바로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져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그 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신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소문으로, 풍문으로 들은 종교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중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십니까?
(3) 세 번째로 그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자기의 요구가 들어지지 않으니까 몸을 상하게 합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100년 만에 급성장한 비결이 뭔지 아십니까? 새벽기도입니다. 우리 한국 어머니들은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도 새벽에 일어나서 자기 소원을 들고 장독대에서 치성을 드리던 분들이었습니다. 그걸 교회에 와서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이렇게 새벽에 잠도 안자고 기도하는데 설마 하나님이 외면하시겠어?‘이런 식의 자해 기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밥까지 굶으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겠어?’ 그건 자해입니다. 40일 100일 1000일 작정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불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도하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1000일 기도가 아니라 평생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자해를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그런 것이 바로 이세벨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4) 네 번째로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진언을 합니다. 진언이라는 것은 히브리 말로‘나바’라고 하는데 그 말은 ‘frantic prophesying’ ‘미친 듯한 예언‘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도 예언이 나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 번 설명해 드렸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는 자들의 예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풀어서 해석하여 전해 주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나바’는 그야말로 미친 듯한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특별 계시를 받아서 예언을 한다고 하는 수많은 예언자들은 모두 이 ‘미친 듯한 예언’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속지 마세요. 보세요. 이 이세벨의 가르침이 오늘 날 교회에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교 적 신앙에 빠지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신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갈멜 산 위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제단과 엘리야의 제단이 똑같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제단은 뭔가 다릅니다.
(왕상 18:30-35)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야곱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돌 위에 제물이 쪼개져 올려지고 거기에 물이 부어져 물이 넘쳐흐릅니다. 그 제단이 모조리 불살라지자 비가 오는 것입니다. 이 엘리야의 제단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스라엘의 아들 (12지파, 교회)를 품에 안은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들, 남은 자들을 품에 안으시고 쪼개져서 죽으셔야 비로소 영적 해갈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이 되신 우리 주님은 언제나 영적 이스라엘, 교회를 품고 계십니다.
(출 28:8-9) “8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에 공교히 붙여 짤지며 9 호마노 두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대 제사장의 옷 에봇 위에 매는 띠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집니다. 에봇 위에 입는 흉패를 한 번 볼까요?
(출 28:21) “21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매 보석에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인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계시록 21장에 참 성전인 새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계 21:10-12)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그 품 안에 야곱, 이스라엘에게서 나온 12지파, 교회를 품고 계십니다. 그 교회를 품고 그 교회가 당해야 할 심판을 모조리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부어 주시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고전 10:4)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겔 47:1) “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전의 묘사입니다. 물이 흐르고 흘러서 넘칩니다. 하늘의 참 성전의 모형인 에덴은 어떻습니까?
(창 2:10)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요한 계시록의 완성된 성전의 모양을 볼까요?
(계 22:1-2)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은 바로 그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참 해갈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을 만들어 내어 자기들의 요구만 열심히 빌어 대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 즉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심판 받을 자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모든 종교행위는 다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의 행위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아십니까? 그 예수님을 근거로 여기 나와 앉아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엉터리 신을 예수 라 부르며 교회 안에 섞여있는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입니까?
만일 여러분의 종교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그 행위를 카운트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23절의 말씀처럼 마지막 날에 그 분이 여러분의 행위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시기 전에 먼저 나는 왜 이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가를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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