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6년 겨울에,
대구에서 그래도 제일 의료시설이 좋다는 대학 병원에서,
그 병원 생긴 이래 첨으로 최연소 백내장 수술을 받았었다.
그 당시에는, 어린 나 뿐아니라, 성인이라 해도,
백내장 수술 자체가 흔한 게 아니었고,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술 방법이 원시적<?>이었다.
지금은 너무나 간단해졌고, 효과도 거의 완전에 가깝게 좋아졌지만,
그 당시 백내장은 엄청 힘든 수술이었다.
수술 시간도 오래 걸렸고, 각막을 한겹 한겹 메스로 다 벗겨냈었다.
요즘은 수술하고 바로 일어나 움직이고 화장실도 가고 하지만,
그땐, 보름 동안 꼼짝없이 누워서,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고,
무엇보다 머리를 절대 움직여서는 안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 고생을 하고도 수술은 실패였다는... ㅜㅜ
덕분에, 난 열일곱에 다른 종합 병원<내가 12살 때부터
안과 치료를 받아오던 박사님이 그 새로 생긴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셨기 때문에>에서 다시 눈수술을 받을 때까지
시원찮은 한 쪽 눈으로 몇 년을 지내야 했었다.
아무튼, 하고자는 얘기는, 눈수술이 아니라... ㅎㅎ
내가 첫 눈수술로 인해, 한 달 늦게, 것도 눈에 안대를 떼지도 못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더니, 칠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수업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사흘만에 휴학을 하고, 일 년 뒤에 복학을 했는데,
그때 만난 영어 선생님이 내 눈에는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너무 시원시원하신,
서구형 마스크의 여선생님이셨다.
영어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의 시작이, 바로 그 선생님이셨다고
말하는 것에 추호도 망설이지 않는다.
선생님이 좋으니까, 영어도 좋고, 당연히 잘 하고 싶었다.
해서 유독 영어만은 늘 만점을 받다시피 했었고,
그땐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꿈을 '영문학 교수'라고 정했었다.
영어 선생님도 아니고, 영문학 교수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참 어이가 없다.
그러다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놀랍게도,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때 배운 단어와 문법들은,
전혀 잊혀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영어에 대한 내 앎의 기본이 되었다.
병이 발발되고도 일이십 년간은,
사실 의료진들조차도 소아당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고,
무식하고 가난한 부모님은 살기에 급급해 딸의 병을
치료하고자는 마음이나 신경을 쓸 여유가 없으셨다.
그러다보니, 이러저런 병치레와 곤궁함으로 인해,
배움의 기회는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갔고,
어느 때인가부터는, 꿈이나 장래 희망 따위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이 되고 말았다.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 가족에게는, 다른 건 늘 나중이었고,
그 '나중'을 위한 기다림의 기간은 길어도 너무 길었던 것이었다.
별다른 취미나 재능이 없던 내게, 그나마 유일한 삶의 낙은,
여동생이 도서관에서 빌려다주는 책을 읽는 것과,
그런 중에도 관심이 시들지 않은 영어 정도였었는데,
그 두 가지가 합쳐진 바람이 편지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왕이면 나라 밖에 사는 이들과 사귀는 것이었다.
곧잘 사용하는 말처럼, '우물 안 개구리'인 내가,
나라 안에도 없는 친구를 먼 나라들에서 찾고자 했던 거였다.
열일곱인가에 펜팔협회를 통해 알게 된 동갑내기 미국 소녀에게,
솔직하게 학교를 쉬게 된 사정과,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했다가,
몇 번 편지를 주고받기도 전에 절교당하는 아픔을 겪고서,
그 트라우마에 몇 년간 펜팔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 5년쯤 지나, 다시 용기를 내서 시작한 펜팔로,
나의 영어와의 인연은 재개 되었다.
수십 개국의 다양한 사람들<그야말로 남녀노소였다>과의 교제는,
외롭고 힘든 내 삶의 유일한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날마다 편지가 집으로 날아드니까,
어느날 우체국장님이 집으로 직접 찾아오시기까지 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 집에 살기에,
날마다 외국에서 편지가 이렇게 날아드느냐고... 확인 차...^^
컴도 없던 시절에 정말 날마다 손가락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도 썼었다.
그 즐거운 교제의 시간은, 결혼을 하면서,
그리고 투석을 하면서... 접게 되었다.
경제적인 부담도 물론 컸지만, 그보다는 투석을 하면서 감당하기에는,
내게 너무 무리였고, 전처럼 성실히, 최선을 다할 수 없었던 탓에,
편지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더는 할 수 없다고,
사정을 알리고 마지막 편지를 다 보냈었다.
게 중에는 그래도 괜찮다고, 나는 안보내도 자기들은 가끔씩 소식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그러면 너무 부담스럽고 미안한 일이라고...
양해를 구한 뒤 아쉬운 이별을 했었다.
해외 펜팔을 한창 할 때는,
여기저기 영어 강좌에도 곧잘 나갔었고,
거기서 좋은 사람들도 사귀었고,
한동안 공부방에서, 집에서 나름 아이들도 가르쳤었다...
그러고보면, 나름대로 영어와의 끈은 계속 이어졌었던 것 같다.
특별히 마음먹고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
실력은 늘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했었다...ㅎㅎ
그럼에도 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어떤 재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지를 몰라,
종종 내게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게 해주십사 기도를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해주셨는지 몰라도,
미련한 나는 깨닫지를 못한 채 그저 답답해하며 살아왔었다.
이번 여름을, 영육간으로 어느 때보다 힘들게 보내면서,
그 와중에 무슨 생각에선지, 사놓고 십 년이 지나도록 읽지 않고 있던,
'키다리 아저씨' 영문본을 보겠다고 뜬금없이 책을 집어 들었었다.
번역본을 수 차례 읽어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편지글 형식이라 만만하다고 여겨서 시작했던 게 아닌가 싶다.
산지 20년 넘은 소형 영어사전<다른 건 너무 크고 무거워서>과
번역본 그리고 스마트폰<소형 사전엔 없는 단어가 곧잘 있어서
단어 찾을 때 썼음>을 세트로 곁에 두고, 영문판을 읽기 시작했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게 번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정서에 맞게 표현을 한 곳이 많았고,
더러더러 빼놓은<빠진 게 아니라> 부분도 있었고,
심지어 오자도 있어서 그걸 고쳐<?>가며 읽기도 했었다.
책을 보다가 자주 소리내어 읽기도 했었는데,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 이번 YWCA 가을 학기 첫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내게, 표현력이 아주 많이 풍성해지고 자연스러워서
놀랐다고 하셨다...는 소문이~~^^
내 생각에는, 자주 보니까, 쉽게 표현이 되었던 것 같다.
여하튼, 개인적인 사정은 다 말할 수 없지만,
이런저런 일로 생각만큼 책을 빨리 보지는 못했지만,
나름 자주 보려고, 되도록이면 매일 책을 펼치려고 애를 썼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내 안에 생기는 것을 설핏 느껴본다.
먼 세월 둘러온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철없던 중학 시절의 영문학 교수도 아니고
통역사도 아니었다.
사람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나혼자 조용히 들어앉아,
누가 뭐라건 줄창 책만 들여다보는 게 좋은 내 성격에는,
번역만큼 잘 맞고 편하고 어울리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시간을 꿈쩍도 않고,
책만 들여다 볼 수 있냐는 소릴 자주 들었고 지금도 듣는다.
그렇게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 관념이 없이지는 듯하다.
원래도 그런 내가, 이번에 '키다리 아저씨'를 보며,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가 놀랐다.
원본과 사전을 들고 씨름하며 보내는 동안 시간의 흐름도 잊고,
심란한 삶의 문제들도 잊고, 심지어 나자신까지도 잊고...
난,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이번 여름의 힘겨움은 대체로 '그 시간' 덕분에 지나올 수 있었다.
그래, 난 번역사가 되었어야 했어...
그게 내 적성이라는 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러면서 혼자 안타까워 하다가 혼자 바보같이 웃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래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제대로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 내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런 생각을 부질없이 해봤다.
하긴, 그런다고 내 인생이, 나자신이 변하긴 변했을까??
비록 직업적인 번역사는 되지 못해도,
어설프나마 언제든 번역을 취미로 할 수는 있으니까...
병아리 눈물만큼씩 실력이 늘어가는 재미도 맛보고,
나만의 보람도 느끼면서... 그래서 즐겁다면 된 거지 뭘...
나의 <Bucket list 50> 가운데 하나가,
'키다리 아저씨'를 원본으로 끝까지 다 읽기...여서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 일이 이렇게 큰 즐거움을 안겨 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취미 한 가지가 생겼다.
아니, 뒤늦은 나의 '적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또한 감사하지 아니한가... ㅎㅎ
기념으로 '키다리 아저씨' 에서 내가 좋아하는 몇 구절을 적어본다.
<성격은 어쩔 수 없다고, 곧이곧대로, 있는 그대로 옮겨서,
번역본에 쓰인 것처럼 매끄럽고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는 바임...^^>
It isn't the great big pleasure that count the most;
it's making a great deal out of the little ones - I've
discovered the true secret of happiness, Daddy,
and that is to live in the now. Not to be forever regretting
the past, or anticipating the future; but to get the most
that you can out of this very instant.
It's like farming. You can have extensive farming
and intensive farming; well, I am going to have intensive
living after this. I'm going to enjoy second, and I'm going
to know I'm enjoying it while I'm enjoying it.
Most people don't live; they just race. They are trying to
reach some goal far away on the horizen, and in the heat of
the going they get so breathless and panting that they lose
all sight of the beautiful, tranquil country they are passing
through; and then the first thing they know, they are old
and worn out, and it doesn't make any difference whether
they've reached the goal or not.
I've decided to sit down by the way and pile up a lot of little
happinesses, even if I never become a great author.
Did you ever know such an philosopheress as I am developing
into?
정말로 소중한 것은 커다란 기쁨이 아니예요.
사소한 것에서 얻는 기쁨이 더 소중하답니다.
아저씨. 전 행복의 참된 비결을 찾아냈어요.
그건 바로 '현재'를 사는 거예요.
영원히 과거를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지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누리는 것,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예요.
그것은 농사와도 같아요.
조방<대규모> 농업을 할 수도 있고 집약 농업을 할 수도 있는데,
전 앞으로 집약 농업같은 삶을 살려고 해요.
그래서 매 순간을 즐길 거예요.
그리고 매순간을 즐기는 동안 제가 그렇게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단지 경주를 하고 있을 뿐이예요.
저 멀리 지평선에 있는 어떤 목표 지점에 이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시골의 아름답고 고요한 모든 경치를 지나쳐 가면서 보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지도록 헐떡거리면서요.
그러다 그들이 첨으로 알게 되는 것이, 목표에 도달하든 하지 않든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저는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길가에 앉아 많은 작은 행복들을 쌓아 올리기로 결심했어요.
제가 여류 철학자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혹시 알게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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