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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이야기

민방위 훈련

by IMmiji 2013. 8. 21.

원래도 방콕이 내 생활의 주된 모습이긴 하지만,

요즘처럼 가마솥 더위가 한창일 때는,

나갈 일이 있고 나오라고 누가 부르는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No, thank you~~를 하고 싶다.

그렇지만 살다보면,

그래도 나가야만 하는 '볼일' 이란 게 있는 법이다.

 

점심 한 술 간단히 뜨고서, 대충 준비해서 나가는데,

그 짧은 준비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가기전에 이미 몸은

땀으로 젖기 시작하는... 정말 나가고 싶지 않은 날씨였다.

버스에서 내려, 두어 군데 볼일을 보러 다니는 사이에,

민망할 정도로 땀이...  겉으론 멀쩡해 보였는지 몰라도,

그 찜찜한이란... 하긴 그게 어디 나만의 문제였을까마는...

그 더위 속에서, 노상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다.

 

누굴 만나지 않는 이상, 혼자 볼일을 보러 나가면,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볼일만 보고 그대로 집에 오는데,

오늘은 걷다가 나도모르게 테이크 아웃 커피점으로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얼음 가득 담아 레모네이드 한 잔을 사들었다.

평상심을 잃게 만들 정도로 더위가 대단했다...는 의미이다.

 

이번 주까지만...하던 더위는 그 주를 지나 이 주까지 이어졌고,

오늘까지만 하던 폭염은 내 보기에 내일도 이어질 듯싶다.

어제 저녁에 쏟아지던 비가, 내일부터, 모레는 전국적으로 온다니까

예보처럼 이것을 고비로 정말 수그러들지도...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아무튼, 더위는 분명 이게 막바지인 듯하다.

극에 달할 때, 떠나갈 때 뭐든 그 정도가 제일 심한 법이니까...

 

볼일을 다 마치고, 정류장에 이르렀을 때,

고맙게도 얼마 안되어 타고 갈 버스가 왔다.

그런 작은 일에, 난 왜그리 감사가 되는지 모르겠다. ㅎㅎ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버스가 오면 얼마나 반가운지,

나도모르게, 아버지, 감사합니다~~ 가 나오는데,

오늘처럼 뜨거운 날씨에 버스가 바로 와주니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종합병원과 우리나라 3대 시장이라 불리던 큰 시장이 있는 곳이라,

그 버스 정류장은, 그곳에서 거의 다 내리고, 또 많이 타는 장소다.

헐빈한 내부에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는 버스는, 바깥과는 전혀

딴판인 세상이었다. 

두 사람이 앉게끔 된 넓은 자리에 혼자 편하게 앉는 그 순간,

사이렌이 울리고, 순식간에 도로에 있던 그 많던 차들이 다 사라졌다.

타고 있던 버스도 천천히 가로수 그늘로 들어가 서더니 조용해졌다.

 

첨엔 무슨 일인지 몰랐다.

앞에 앉아 있던 아줌마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여기서 잠깐 우스운 얘기를 하자면,

이게 나이 먹은 표인지, 나이보다 젊어보이던 들어보이던 간에,

그 사람을 보면 겉모습에 상관없이 대충 그 나이가 짐작이 되는

놀라운 신통력<?>이 언제부턴가 생겼다.^^

난 직감적으로 그 아줌마가 나랑 비슷한 나이란 걸 알았다.

겉보기는 좀 더 들어보였지만서두. ㅋㅋ

모자 쓰고, 흰티셔츠에 8부 청바지를 입고, 백팩에 운동화를 신었어도,

그리고 심지어 오늘은 여늬 때와 달리, 레모네이드 컵까지 들고서도,

직접 농사지은 우엉이라는 소리에, 우엉 향이 짙게 나는 그것을 사들고,

내가 버스를 탔듯이, 겉모습이야 어쨌든,

내면에 쌓인 삶의 모습은 어쩔 수가 없는 게다.^^)

나한테, 오늘 민방위 훈련을 한다는 소릴 들었냐고 물었다.

 

"민방위 훈련이요?" 하고 되물으면서, 

내심, 아, 이게 그 훈련인가 싶었다.

어제 저녁에 잠시, 한 5초쯤, 지나가는 자막을 본 기억이 났다.

오늘 오후에, 십 분? 이십 분?쯤 훈련을 한다느니 하는...

그게 전국적으로 다 하는 건지, 수도권에만 하는 건지 자세히 보지를

않아서 잘 몰랐고, 굳이 신경을 쓰지도 않았는데, 이게 그건가 보다 했다.

앞의 아줌마가, 자기가 어릴 때 말고는 이런 훈련은 첨 보는 것 같다며,

요즘 시대에 이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스레 말했다.

"그래도 버스를 타자마자 시작되어서, 다행이예요, 시원하니까요...

바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했으면 날도 더운데 정말 힘들 뻔했어요.^^"

웃으며 말을 하니, 그제서야 그 아줌마도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세워진 버스, 그것도 에어컨 풀로 나오는 버스 안에서,

사방이 트인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니, 마치 딴세상을 보는 듯 신기했다.

늘 복잡하던 그 도로에 차가 한 대도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밤이든 낮이든 혼잡 자체의 그 도로가 그런 모습을 잠시라도 보일 수 있다는 게...

하긴, 신기하고 놀랍기 이전에... 내 눈엔 참으로 낯설었다.

 

훈련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 차만 다니지 않는다 뿐이지,

고가철도 공사중이라 사람들은 여전히 도로에서 인도에서 저마다의 할 일을

하고 있었고, 다닐 사람들은 다 다니고 있었다.

제대로 된 훈련은, 사람들은 모두 대피소로 피하게 하고,

거리에는 차건 사람이건 아무도 아무것도 없도록 하는 거니까.

 

금방 훈련이 끝나고,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차들이 도로를 점령했을 때,

군용 트럭에 빼곡히 앉아 있는 병사들 - 얼굴에 시커먼 칠을 하고 저마다

무릎 사이에 총을 꽉 끼고 앉아 있는 - 과 그 앞뒤로 달리는 Jeep 차들과

소방차들, 구급차들을 보며, 아, 훈련을 하긴 했구나... 했었다. ㅎㅎ

그래, 필요하니까 했겠지... 이 더운데 할일 없이 했겠어... 속으로 중얼댔다.

 

십 오분만에, 훈련이 끝나기까지,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원함과 뜨거움으로 나뉘어져 있으면서, 편하게도 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 마음도, 아니 영혼육 모두 다, 한 번씩 이렇게 민방위 훈련을 했음 좋겠다...고.

쉬지않고 달리던 차들도 멈추고, 도로에서 사라지고,

시끄럽던 주변도 조용해지고, 사람들 발걸음마저 뜸해진듯한...

마치 도시가 호흡을 멈춘 것만 같은 그런 낯선 모습들을,

우리 자신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잠시만이라도, 하던 일 다 멈추고 나자신을, 내 모습을, 

그리고 내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다.

해서 그 낯섬이, 들이마시기만 했던 숨을 내쉴 필요도 있음을,

아니 내쉬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런 시간이기를 말이다.

 

생각지 않은 시간에, 생각지 않은 민방위 훈련으로,

가로수 그늘에 선 버스 안에서, 잠시 누렸던 그 여유로움이,

우습게도 내게는 소소하지만 더없이 줄거운 시간이 되었다.

마치 어느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고장이나서,

잠시 나무 그늘에 서 있게 되고,

앞만 보던 시선을 비로소 산이며 들이며 나무들도 바라보게 되는,

예상치 않았던 그 시간을 한가로이 즐기는 듯한 착각을 주었으니까...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는 자의 여유이고 한가로움이라고나 할지...

어쩌면 오늘 그 훈련은, 내 마음의 민방위 훈련이 아니었나 싶다.

종종 억지로라도 가지면 좋겠다 싶은 그런 훈련...말이다.

집에 돌아와서 이런!! 싶었던 게 있다면,

나로서는 거기서 첨 보는 현상인, 차 없는 도로를 폰에 담아왔어야 하는데,

생각에 잠기느라 그 생각을 못했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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