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룩
(김성수 목사)
(엡 1:1-7)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오늘은 ‘거룩’에 관해서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 보지요. 구원이란 혹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죄에서 건짐을 받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어그러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관계의 회복이란 하나님의 속성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할 자들이 전적으로 타락을 해 버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 상태에서 그 거룩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선물을 하셔서 거룩한 자로 만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제가 전에 ‘그리고 아말렉이 나타나다’라는 설교에서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정확한 표현은 ‘나는 구원받았다, I've been saved’ 그리고 ‘난 구원을 받고 있는 중이다, I am being saved’ 그리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I will be saved’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라는 완료 적 표현은 ‘칭의’에 관한 부분이고, 구원을 받고 있고 받을 것이란 현재 진행형과 미래는 성화와 영화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하면 성화와 영화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에서 건짐을 받은 것만을 구원이라 표현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구원은 훨씬 적극적이고 영광된 목적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목적은 다름 아닌 ‘거룩’입니다. 그 거룩이야 말로 영화 상태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목적을 무엇이라 설명이 되어 있습니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적극적인 목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그리고 흠이 없다는 것은 외적인 완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목적은 그렇게 겉과 속이 다 완전한 거룩함과 흠이 없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과 한 곳에서 사는 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러한 자로 우리는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고 흠이 없음은 하나님을 그대로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분과 한 곳에서 함께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의 거룩은 어느 정도일까요?
(요일 1:5)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약 1:17)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이토록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그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지만한 죄와도 공존하실 수 없습니다.
(암 3:3) “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온전한 거룩을 우리에게 선물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색하지 않은 자들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면 이제 막살아도 되겠네.’ 라고 무 율법 주의적인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는 반드시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구원의 목적인 거룩한 자로 만들어서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막 살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완전 성화에 이른다는 말은 아닙니다.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죄 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 육신을 벗고 새 몸을 입을 때에 우리의 성화는 완성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왜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그 거룩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반드시 깨닫고 인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 거룩의 필연성에 조바심 내며 하나님께 수시로 간구하는 삶은 성도에게 반드시 요구 되는 삶인 것입니다.
(빌 1:6)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골 1:10)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딤후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딛 1:14)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거룩으로 완성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상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은 번복하시지 않는다는 차원에서의 이야기이지 우리는 계속해서 완성되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떻게 이 주중에 여기 와서 앉아 계시지요? 세상 사람들은 황금처럼 여기는 시간들을 여러분은 이 예배당에 와서 소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바쁘고 고단한 이민사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인 주일날, 여러분 좀 쉬고 싶지 않으세요? 그런데 그 날도 예배당에 와서 하루 종일 봉사하랴 예배하랴 쉴 틈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미쳤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은 그렇게 예수에 미친 분들이 되신 것입니까? 몇 년 전의 여러분과 지금의 여러분이 왜 이렇게 달라져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맹렬하신 사랑으로 여러분을 이끌어 완성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되어져 가는 우리의 모습이 문득문득 인식되어질 때 우리는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렇게 변하게 만드신 그 분이 앞으로 약속된 모든 것도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구나.’그게 소망입니다. 혹시 ‘내가 정말 변하기는 변할까’하시는 분들 계시지요? 염려 마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확한 자각이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패서라도 그렇게 만들어 내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떠세요.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배우는 것보다 미리 그 전에 미리 항복하는 것이 좋을 듯싶지 않으세요?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으로 몰고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룩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이 땅에서의 행복’으로 달려갑니다. 구원의 목적은 ‘거룩’이지 ‘이 땅에서의 세상 적 행복’이나 ‘물질과 공간의 획득에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늘 기쁩니다. 그러나 그 행복과 기쁨은 예수님의 힘을 이용해서 나의 원하는 것을 얻어내었을 때 오는 세상 적 행복과 기쁨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세상의 힘이 내게 주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룻이 거지처럼 이삭을 줍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나의 삶에 주관자이시며,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행복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무엇을 얻어 내고 성취했을 때 오는 행복과 기쁨을 최종 목적지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그건 기독교의 본질에서 너무나 벗어나 있는 이단사설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그 거룩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때론 채찍을 드십니다.
(삼하 7:14)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히 12:5-11)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고전 11:30-32)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지요? 하나님은 자기 자식들의 성숙과 성숙을 위한 양육의 방법으로 징계를 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 자식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식의 눈물도 가슴을 치시며 목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 없듯이 ‘거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이후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죄인들은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 다른 말로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이 너무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 안 하는 자식 패서라도 가르치려는 게 부모의 마음이듯이 그 때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채찍과 막대기를 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맞고 나서, 겁이 나서 길을 돌이키게 되는 경우가 그냥 세월아 네월아 하고 놔두어서 지옥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질곡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이 완성 될 때까지 계속해서 채찍과 막대기로 우리를 몰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 보다 힘겨운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성도의 삶에 환난이 닥칠 때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징계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지만 사단의 공격도 함께 공존합니다. 따라서 주위에서 곤란한 지경에 빠진 분들을 보며 ‘저 사람은 지금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서 저렇게 벌을 받는다.’라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성도의 삶은 양수 겹장으로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환난을 통과해서 나오게 되는 정금 같은 거룩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러한 거룩의 모습으로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 ‘거룩’이 빠지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초대형 예배당입니까? 내가 전도한 사람들의 명부입니까? 내가 봉사와 구제에 쏟은 시간들인가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는, 거룩한 삶을 향한 추구에 쏟았던 열심과 그 열매들인 것입니다.
(살전 4:1-8) “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 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이렇게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맹렬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룩을 잃은 인간들의 특징을 구약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지요? 바로‘살인’과 ‘성적인 타락’ 이 둘로 나타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이 이 둘로 타락을 특징 지워 설명하는지 아세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타인을 밟으며 모든 사람을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쓰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세상 왕의 자리에 올려놓은 아담들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이성(異性)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쾌락의 도구로 사용을 하기에 성적인 타락과 살인을 타락의 대표적 성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 회복이 되어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타인을 자기의 이익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닌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죽여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여 상대를 세워 주는 십자가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단순히 죄를 안 짓는 차원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차원에서 ‘사랑’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고요.
(마 5: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율법의 대강령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 주시고 가셨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마 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죄한 아담에게 선악과가 주어진 것입니다. 아담은 무죄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최고 행복의 첩경이라는 것만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만 좇았다면 아담은 바로 천국입성이 가능한 자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는 하나님의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죄한 아담이 율법만 지켰다면 그 길로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보다 자신이 왕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분의 말을 잘 듣는데서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건 진리이며 법칙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기고만장한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께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는 것을 시작으로 율법을 모두 지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율법의 마침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랑이라고 하지요. 그 율법은 사랑으로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그 율법을 다 지키셨습니다. 사랑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을 목숨을 걸고 사랑하셨고, 그의 백성들을 목숨 바쳐 사랑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기에 이미 그 그리스도처럼 거룩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 것이 올바로 인식되어지는 사람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지를 정말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그 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했던 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 이라면 바로 그 십자가의 삶, 지고지순한 사랑의 삶을 흉내라도 내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거룩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이해한 만큼 성도의 거룩은 성숙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무서운 경고를 한 번 보세요.
(히 12:14)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딛 1:16) “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요일 3:3)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를 믿고 거룩한 행위가 조금도 나오지 않고 그의 삶이 아무 변화가 없다면 그는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 즉, 가짜라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이지요? 이렇게 우리 구원의 목적은 ‘거룩’입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해야 하며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의 가능성을 심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렇게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해서 성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이 나오게끔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노력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노력이 나오지 않을 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쓰는 것입니다. 다른 데에 눈을 돌려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단은 그 거룩을 향한 추구에서 눈을 돌리도록 우리에게 수많은 쾌락과 호기심을 쏟아 붓습니다. 그 때 속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이미 거룩한 생명의 씨가 심겨져 있습니다. 그 생명의 씨는 자라야 합니다. 그 자라남의 삶을 추구하셔야 합니다. 돈을 좇느라 명예를 좇느라 세상의 자랑을 좇느라 그 자라남의 삶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거룩은 찬송을 은혜롭게 한다든지, 기도를 멋지게 매력적인 저음으로 깔아서 한다든지,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늘 스마일 페이스를 만드는 것을 거룩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자세나 원칙이 세워져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우리 맘에 흡족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을 하고도 ‘하나님 나는 이만큼 해냈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무익한 종의 비유를 아시지요?
(눅 17:1-10)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 지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인간이 숨을 쉬어야 사는 것처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게 안사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렇게 당연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그 지경까지 우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 서글프지 않으세요? 우리는 그만큼 죄인입니다.
(사 64:6) “6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행한다 해도 그것은 더러운 옷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순결함 앞에서면 우리의 모든 것은 똥 걸레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만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면 할수록 그 은혜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압도되고, 그로부터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노력을 꺼내 놓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복음을 아는 데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순종과 열심. 그게 바로 우리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유일하게 경주해야 하는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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