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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풍성한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사랑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6. 8.

 

 

풍성한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사랑

 

(김성수 목사)

 

 

(엡 1:7-10)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의 구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속이 죄 사함보다 훨씬 큰 의미임에도 구속 곧 죄 사함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죄의 자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했던 죄인들이 그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 되는 것을 구속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구속과 죄 사함을 동격인 것처럼 묘사를 한 것이라고 설명을 해드렸지요. 그래서 ‘구원을 얻는다, 신자가 된다.’라는 것은 행복이나 무슨 형통, 능력, 이런 쪽으로 먼저 개념을 갖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이 초점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구속 곧 죄 사함이라는 말을 쓴 것이라는 것도 아울러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그 죄 사함으로 시작되는 구속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이라는 말로 수식이 됩니다. 그 하나님의 구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 그의 긍휼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은혜의 풍성함, 긍휼의 풍성함’의 그 풍성함이라는 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가애 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풍성하심을 너무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함을 모르며 겁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긍휼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왜 그러셨는가?‘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러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말만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조금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고작 그 상대방이 기대에 어긋나게 되면 그 사랑한 만큼의 분노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훨씬 분노도 클 수 있는 것이지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다 저주해 버리셨습니다.

 

(롬 8:18-25) “18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19 피조물은 하나님의 16)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아들들' 20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21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22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3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17)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신분으로' 또는 '아들 됨' 24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이 저주를 받고 자연계 모두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모기가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고 거머리가 붙고 기생충이 몸속에 기생을 하고, 독충이 생기고, 자연이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자연계는 썩어짐의 종노릇도 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자연계는 인간과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피조물들이 무엇을 기다립니까?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제 구원이 완성이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올 때 그 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이 되는 그 시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인간이 범죄를 하자 그들 모두를 저주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은혜와 긍휼의 풍성함이라는 말을 함께 쓰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언제든지 사랑은 진노로 변할 수 있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사랑이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란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사랑 정도가 아니라 긍휼과 은혜와 풍성함을 포함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기 쉽게 우리 인간들의 사랑의 개념에다가 긍휼과 은혜와 풍성함이라는 것을 보태 놓은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자기가 즐겨 보는 어떤 드라마의 내용을 이야기 해 주는데 그 남자 주인공의 전 아내가 그 남자 주인공을 너무 사랑했었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니까 그 사랑이 몽땅 저주와 방해로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신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사랑뿐만이 아니라 긍휼과 은혜의 풍성하심이라는 말을 함께 쓰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그런 조잡한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 워낙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개념이 너무 조악하다보니 그렇게 부연 설명을 하는 것이지요.

 

(엡 2:4)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여기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를 빼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는 말만 써도 문맥상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썼습니까? 그 사랑이 진노로 넘어갔었는데 어떤 한 무리에게만 풍성하신 긍휼과 은혜가 적용이 되어 진노로 넘어갈 수 없는 풍성한 은혜와 긍휼의 사랑으로 구원을 선물 하셨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엡 2:7)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엡 3:8)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풍성하신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다가 그 다음에 안 되면 던져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바로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긍휼의 사랑인 것입니다. 절대 진노나 분노로 바뀌지 않는 그 은혜의 풍성함,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 같으면 조변석개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약이 올라서라도 다 쓸어버릴 것 같은데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셔서 끝까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안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풍성하신 은혜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딜레마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하루에도 열두 번씩 죄를 짓는데도 정말 나를 구원하실까?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수 있는 걸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할렐루야! 사도는 성도들에게 바로 그 사실을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을 경외(敬畏)해야 합니다.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란 하나님만이 신이시며 나는 그 분의 피조물이라는 차원에서의 두려움입니다. 내가 혹시 버림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혹시 이런 나의 모습을 보시고는 실망하셔서 나를 중도에 버리실 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하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로 척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풍성하심과 그 분의 사랑하심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라 그 분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정도가 깊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우리는 어떤 죄를 지은 자들이며 그 죄 값을 어떻게 치러야 되는가? 하나님이 얼마나 존귀하신 분이며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그러한 구속의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가 가야 할 그 무시무시한 형벌의 장소는 얼마나 끔찍한, 그 곳에는 형벌 받을 자가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형벌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엄청난 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더욱 더 명확하게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까지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경이 기술하는 바대로 우리가 얼마만큼 죄인인가를 아는 만큼 우리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면 알수록 ‘절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풍성히 안다면 ‘내가 이러고도 천국 갈 수 있나’ 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럼에도 불구하고 날 구원해 주시다니 그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못 주워 먹을 만큼 처참한 지경의 죄인을 아버지께서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시고 소를 잡습니다. 뭘 잘했다고 그렇게까지 하시지요? 탕자의 행위가 아버지의 호의를 산 것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녀이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긍휼과 은혜가 풍성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알지 못 하는 자들은 아버지 품에 와서도 늘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아버지께 받은 것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신지 잘 모르니까 아버지가 선물을 해 줄 때마다 수첩에다 기록하지요. 갚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입니다. 밥 한 그릇 먹을 때마다 수첩에다 기록합니다. 아버지가 좋은 음식을 해 줄수록 더욱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갚아야 할 것이 자꾸 커지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그 아버지께 뭔가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요한이 이런 서신을 썼습니다.

 

(요일 4:16-18) “16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7 이것으로써 사랑은 우리에게서 완성된 것이니, 곧 심판 날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것은 우리 삶 속의 아버지 상이 많이 왜곡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긍휼과 은혜가 풍성한 아버지를 설명하려 해도 그런 아버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설명이 요원한 것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삶에 일이 잘 못 되거나, 잘 안 풀리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생기거나 하면 ‘하나님이 내가 뭘 잘 못 했기 때문에 화가 나서 벌을 주시나보다’라고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가 나서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녀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 교훈을 하실지언정 화풀이를 하시기 위해 앙갚음을 하시는 분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그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우리 아버지를 좀 힘써 아십시오. 우리가 그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긍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안다면 우리는 다른 자잘한 것에 관심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막내는 아직도 25센트짜리 동전이 최고 좋다고 합니다. 아이들 이모가 장난감 사라고 100불짜리를 줘도 안 가집니다. 그 아이는 100불짜리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늘 구멍가게에서 25센트를 넣고 뽑아먹는 알사탕에 매혹되어 25센트짜리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100불짜리의 가치가 25센트짜리 400개의 가치라는 것을 압니다. 100불짜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100불짜리를 쥐고 있는데 25센트짜리 동전에 왜 눈이 갑니까? 5000불짜리 마틴 기타가 있는데 99불짜리 마톤 기타가 왜 탐이 나겠습니까?

 

이왕이면 돈도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왕이면 잘 먹고 잘 사십시오.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일반 은총입니다. 누리세요.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에 맞게 살기 위하여 손해를 봐야 할 일이 있으면 우리가 받은 그 커다란 선물을 생각하며 손해 좀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소한 것에 너무 목숨 걸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나의 유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악인의 삶을 종종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롬 8:31-32)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에게 안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왜 안 주실까요?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우리 아버지가 왜 자녀에게 유보하시는 것이 있는 걸까요? 그것은 별로 내 아들에게 필요 없다 싶어서 안 주시는 것입니다. 자녀의 성숙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사랑의 아버지는 매몰차게 거절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너무 징징대지 말고 우리 아버지의 뜻을 잘 헤아리며 좀 자유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싶은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정도가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풍성한 은혜를 모르고 지금도 병이나 고쳐 달라고 하고, 집값이나 오르게 해 달라고 조르고, 아들 대학이나 붙여 달라고 조르는 이 무지함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개화기 때 농부가 차를 얻어 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농부는 차에 타고도 머리에 짐을 계속 지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차 주인이 물었답니다.‘ 왜 그 짐을 계속 이고 계세요? 이제 내려놓으세요.‘했더니 ’차를 얻어 타는 것만도 죄송한데 짐까지 내려놓을 수 없지요‘ 하더랍니다.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의 풍성하신 은혜의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에서 자유하세요. 자유하세요. 그럼 마지막으로 ‘그러한 자들, 그 풍성한 은혜를 아는 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가?‘에 대해 살펴보고 마치지요.

 

(살전 5:16-18)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지난번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쓴 오강남 교수를 두둔했던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설교에서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을 오역해서 하루에 ‘주 예수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을 삼천 번씩 중얼거리면 정말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유명 목회자의 수준이 그 정도라는 것이 정말 씁쓸하더군요. 신 장로님과 함께 그 테이프를 들으면서 얼마나 통탄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게 정말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기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화해로 인한 relationship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 분과 대화를 하는 것을 기도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수시로 지성소에 들락거리는 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아니 우리 몸 자체가 지성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정말 아세요? 구약 시대에는 일 년에 한번 속죄일에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지성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이 연합되어 버렸습니다. 이 감격스러운 복음의 말씀 앞에 어찌 우리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발 여러분, 복음에 감격하십시오. 하나님과 늘 함께 거하는 우리는 지금 예수로 말미암아 쉬지 않고 그 분과 communication하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의 복음을 알게 된 후 우리는 엄청난 선물을 받은 것을 알게 되기에 늘 기뻐서 싱글벙글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를 천국에 들어가기 알 맞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나에게 주어지는 일이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게 지금 읽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패할 리 있겠습니까? 결코 실패 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일을 시작하셨고 반드시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끔 우리에게 어떤 일을 완성해 놓으셨으니 너희는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늘 기뻐하세요. 늘 감사하십시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9-11) “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

 

보세요. 이렇게 예수께서 완성해 놓으셨으니 늘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의 감사와 기쁨은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기쁘기만 하고 늘 감사만 넘치는 그러한 사람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조금씩이라도 맛보면서 가야지요.

 

(빌 1:6)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그리고 그 풍성한 은혜와 긍휼에 근거한 사랑을 아는 자들은 종말론적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을 이해하고 있는 거듭난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은 자들이기에 육신의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다시 오시더라도 그 분을 반갑게 맞을 수 있는 삶을 살겠노라는 결심과 다짐이 성도의 마음속에 없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풍성하심을 맛보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요 11:25-26)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이러한 약속을 받은 자들이기에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예로 에녹을 들고 있습니다.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지요?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고 합니다.

 

(창 5:21-24)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렇지요? 구약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히브리서로 가서 조금 더 설명을 해 드리지요.

 

(히 11:5)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실체로 여기며, 그 나라와 그 분을 소망하며 사는 자인데 그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이기에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에녹이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유 1:14-16) “14. ○이런 사람들을 두고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아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16. 이들은 불만에 쌓여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요,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어떻게 그 심판이 있을 것을 알았을까요? 에녹의 아들 이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무드셀라입니다. 무드셀라의 이름의 뜻은 창던지는 자라는 뜻도 있지만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 한다’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시대에는 전쟁을 할 때 각 부족이나 마을에서 창을 제일 잘 던지는 사람이 선두에서서 상대방 적장이나 중요한 인물들에게 창을 던져 그를 죽이는 것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대시대의 전쟁은 창던지는 자에 의해 그 승패가 좌우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창던지는 자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전쟁은 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심판입니다. 그래서 무드셀라라는 이름이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뜻을 담지하게 된 것입니다. 에녹이 자신의 아들 이름을 어떻게 그렇게 짓게 되었을까요?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요한의 이름을 지어주고 가지요? 또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의 이름을 지어주고 갑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도 무드셀라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무드셀라는 에녹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이 태어났습니다. 무드셀라는 에녹이 죽는 날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안 자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다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고, 넘어져서 죽을 수도 있고,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 시대는 유아 사망률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니 에녹은 무드셀라가 태어나고는 매일 매일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자가 이 땅에다가 뭘 쌓아두었겠습니까? 그는 그 심판을 기다리며 심판이 올 것을 전하며 살았던 자였던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렇게 에녹과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약속되어 있던 예수가 진짜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죽으셨고 진짜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가시면서 내가 곧 다시 오마 하고 약속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 약속은 분명 이루어질 것입니다.

 

(창 5:24-32)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잘 보시면 무드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지요? 노아가 600살 되던 해에 홍수가 임합니다.

 

(창7:6)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187+182=369. 노아가 600살 되던 해에 홍수가 났으니 더하면 969, 무드셀라가 몇 살에 죽었습니까? 969. 정확하게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됩니다. 어떠세요? 이렇게 하나님의 예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성경의 기록이 우리를 벅차게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오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세상을 심판 하실 것이고 우리 성도는 하나님 나라로 영광스러운 입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그 풍성한 긍휼하심과 은혜로우심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 맞다 면 우리도 에녹처럼 심판을 선포하며 회개를 외치며 세상에 성을 쌓지 않는 삶을 살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꼭 반드시 속히 오실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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