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
(김성수 목사)
(엡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구원이란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반응에 의해, 우리의 선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친절하게 기술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구원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우리의 어떤 성실함이나 반응 같은 것이 거기에 보태지지 않는 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크게 흔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태만하게 하거나 실족했을 때에 ‘이래도 내가 구원받은 것이 맞나?’하는 것 아닙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조금이라도 그 구원의 근거를 찾으신다면 우리는 벌써 포기했어야 합니다. 게다가 마음까지 살피시는 분이시니 우리의 구원은 애시 당초 물 건너갔다고 봐야지요. 그러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서 출발한 것이지 우리의 반응이나 우리의 선택이나 우리의 열심을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할 때마다 ‘그래, 나는 이렇게 실패하지만 우리하나님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셔’하고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이렇게 ‘은혜’와 ‘사랑’으로만 설명을 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다 설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1장 3절에서6절은 구원에 관한 전체적 서술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그 구원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거기에 반응하는 감사와 찬송’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하나님의 영광’ 혹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왜 구원을 은혜와 사랑만으로 설명을 하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구원을 그렇게 설명을 하다보면 자칫 구원을 너무 신파적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진리로 균형을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단순히 자기가 경험한 감격의 경중에 따라, 자기가 체험한 사랑의 경중에 따라 구원을 본인이 편집하고 때로는 오해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구원을 받고 느끼는 감격의 종류와 그 깊이가 다 다르기 때문에 성경은 구원을 설명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객관적 진리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생각할 때 너무 주관적이며 경험적인 것으로 구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는 구원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이 내 문제, 내 감격, 내 눈물, 내 시원함, 이런 것들을 떠올리기 때문에 성경이 구원을 설명할 때 보편적으로 내세우는‘’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거나 쉽게 감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오늘은 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클라이맥스, 구원의 절정인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시는 주님의 생애 모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눅 2:13-14)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라고 천사들이 찬송하고 있습니다. 당신 아들의 십자가로 향한 탄생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부수적인 결과가 바로 이 땅에 평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부수적인 결과물인 우리의 행복과 감격과 평화로만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평안과 감격과 행복이 오게 되었는지는 쉽게 간과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합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합하여 구원을 받은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설명하지요? 이렇게 성경은 구원을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설명 할 때도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고후 4:5-6)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그러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복음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 온 것을 우리는 복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 했습니다. 구원은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서 발현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성실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영원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등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며 우리의 구원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그분의 주권으로 구원해 내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얻기 전의 죄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죄에서 건져내어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단순히 ;악한 짓을 했다, 안 했다‘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고 있는데 성경은 죄를 정의하기를 ’마땅히 드려져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그분께 돌려드리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 합니다.
(롬 3:23)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니까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버러지와 금수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고도 모르는 것입니다.
(롬 1:23) “23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 이탈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급했다시피 죄의 진수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가장 크게 잘못 영향을 받고 있는 큰 문제는 구원을 전부 하나님의 영광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영광 아래에 초대받은 것으로가 아니고 행복이라는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구원의 결과와 구원의 목표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1번의 답이 무엇입니까? 암송해 보지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 죄의 가장 무서운 성격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우리를 어떤 특별한 죄목에서 건져내는 것, 살인을 했다든가, 도적질을 했다든가, 거짓말을 했다든가 하는 내가 저지르고 앞으로 저지를 어떤 죄의 항목에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의 영광됨을 모르며, 그 아래 부복할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이 구원의 본질인 것입니다. 오늘 아주 중요한 것을 공부하는 것이니까 잘 새겨들으세요.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에서만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군데서 말을 합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능력으로의 간섭, 하나님의 신비가 역사 속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차 대전 때 던케르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연합군 50만 명이 꼼짝없이 포위가 되어서 포로가 될 위기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전차부대가 물밀듯 밀고 들어오고 있었고 독일 공군의 전투기 스투카가 하늘에서 맹공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민간인 선박과 군용선박을 모두 동원해서 연합군들을 실어 날랐다. 누가 봐도 그 전쟁은 독일군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히틀러가 아무 이유 없이 3일간 독일 전차부대의 진군을 stop시켰습니다. 그리고 던케르크 탈출 기간 9일 동안 기상이 나쁘고 하늘이 연기로 덮여서 전투기들이 해변의 연합군 위치 식별이 어려워졌습니다. 그 동안에 연합군 35만 명이 탈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사막의 여우 ‘롬멜’같은 사람을 경질시켰고 해전에서 맹위를 떨치던 잠수함 U보트의 생산도 중단시켜 버렸다. 결국 독일은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쟁은 어이없는 농부의 거짓말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패배였습니다. 40이 넘으면서 나폴레옹은 살이 쪄서 비대해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장 앞에서 지휘를 못하고 망원경으로 뒤에서 지휘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산 능선이 이상해서 그 지역 농부를 불러 혹시 저기 능선에 계곡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농부가 이유 없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한 것이지요. 아직도 왜 그 농부가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오리무중입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그 계곡에 연이어 빠지기 시작했고 그 전투의 실패의 원인이 되어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삼하 17:14) “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다윗의 심복이었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붙었습니다. 다윗은 정말 가슴이 아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작정하심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이 먹히지 않고 아히도벨은 목매달아 죽습니다. 성경은 그 일을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 직접 개입하셔서 이룬 일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전 9:11) “1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셔서 역사를 이끌고 가십니다. 자연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높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시 19:1)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지구가 24시간에 한 번씩 자전을 하고 정확하게365일만에 태양을 한 바퀴 돌아서 1년이 되는 것, 그리고 질량이 있는 물체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 것, 4계절이 바뀌는 것,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을 과학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분석을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기서 그 자연의 법칙을 만들어내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비하리만치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은 우리의 구원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 크고 높으신 것이지만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성품이나 인격, 인격과 인격이 부딪치면서 발현되는 어떤 요소들은 자연 속에서는 다 나타나지 않습니다. 석양이나 바다, 높은 산, 단풍 등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만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서는 빛이 바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것을 데려다가 끝내 자식을 삼으시고 마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한없는 사랑과 그 한없는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6절에서 우리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거저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그 영광을 보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요 17:22-23)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자 중간 정리해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성품 이러한 것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영광을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라 했지요?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는 것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이라 했지요? 바로 그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우리가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영광을 선물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 값이 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은 삼십 냥에 팔렸는지 아세요?
(출 21:32) “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
보시다시피 은 삼십 냥은 생명의 값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노예시장에서 얼마에 사오지요?
(호 3:1-2)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보리 한 호멜 반은 은 열다섯 개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의 생명의 값을 역시 은 30냥을 치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일관성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죽어야 할 죄인, 창녀 고멜의 목숨을 은 삼십 냥에 사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은 삼십 냥에 팔리신 것은 바로 레위기에서의 생명을 대신하는 값으로 지불 되셨다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죽어야 하는 우리의 몸값이 예수로 치러졌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은 삼십 냥에 팔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를 지불하셨다는 것은 우리와 예수를 동등하게 취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런 은혜, 그런 사랑, 그런 맹렬함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설득하시고, 교훈하시고, 나무라시기도 하시며 결국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그 사랑 앞에 항복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란 것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공명이 북쪽의 위나라와 동쪽의 오나라와 싸워야겠는데 밑의 남만, 지금의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에 있는 그 부족들이 자꾸 익주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자 제갈공명이 그들을 치러갑니다. 그때 남만의 왕이 맹획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은 남만과의 전쟁에서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줍니다.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 하지요. 왜냐하면 맹획을 잡아다가 죽이는 것이 남만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란 것을 제갈공명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갈공명은 맹획이 잡혀오면 맹획의 변명을 다 듣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졌다’ 그러면 제갈공명은 그 사람을 또 놓아줍니다.
다음에 맹획이 또 잡혀옵니다. 맹획이 다른 이유를 또 댑니다. 그러면 제갈공명은 또 놓아줍니다. 결국 일곱 번 만에 맹획은 완전히 제갈공명에게 항복을 하고 촉나라로 귀순을 합니다. 제갈공명은 맹획과 남만에게서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맹획을 계속해서 놓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강제로 항복시키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설득하시고 회유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 앞에 굴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맹렬하게 그리고 열심히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열심으로 점철되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되며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여인의 후손이 네 머리를 밟으리라’부터 시작된 그 약속이 이렇게 신실하게 완벽하게 이루어짐을 보면서, 아니 창세전에 성 삼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따라 완전한 구원을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앞에 완전히 항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싸움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깊어지는 것과 신앙이 단단해 지는 것은 결국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아는 것과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놓치면 신앙은 금방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주목하여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6절의 우리가 찬미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 안에는 3절과 4절의 내용이 포함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엡 1:3-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거룩하게 흠이 없어져 가는 모습은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마 5:16)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우리의 거룩하고 흠이 없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저 사람을 저토록 변화시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나도 믿고 싶다는 고백들을 우리는 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골 3:12-13)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저는 스키를 잘 타는 편입니다. 처음에 스키를 잘 못 탈 때는 잘 타는 선배 형이 곁에서 자꾸 가르쳐 주려고 하면 귀찮아했습니다.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스키 타러 가자고 하는 사람은 괜히 미웠습니다. 내가 잘하는 것을 해야 신이 나는데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을 자꾸 권하는 사람들이 좋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어느 정도 기본기가 잡히고 재미가 붙으니까 잘 타는 선배들한테 쫓아다니면서 ‘폼은 어떠냐? 이렇게 턴하는 게 맞는 거냐?’ 하면서 열심을 내게 되더라고요. 어느 정도 진보의 표시가 나게 되면 우리는 열심을 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바로 그런 열심이 나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그런 것들이 나오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까지 유아기 신앙에 머물러 계신 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빨리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뛰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연습하고 훈련해서 여러분의 힘으로 이루어 내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열정과 열심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안에서 이끌어 내신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열심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조금 긴장은 해 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선한 행위를 해야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자들이므로 그렇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의 그 영광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그 신분에 맞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살후 2:13~14) “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부가 그 영광스런 결혼식장에서 입을 웨딩드레스를 어떻게 고르며 어떻게 관리합니까? 하루에도 열 두 번 씩 꺼내서 입어보고 혹시 그 웨딩드레스에 잡티라도 묻지 않았나 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지 않습니까? 혹여 김치 국물이라도 묻으면 침 묻혀서 닦기도 하고 화장실 들어가서 걷어 부치고 그 국물자국 없애느라 난리 법석을 피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부에게 있어서는 그 결혼식 날이 자기 인생의 최고의 날이며 그날은 자신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하객들과 남편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부들 아닙니까? 어린 양의 혼인잔치 날을 학수고대하며 등불과 기름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런 준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을 보면 그들은 일단 정혼을 하면 법적인 신랑 신부가 됩니다. 그리고는 한동안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다리는 동안 신랑은 신부 집에다가 지참금을 지급해야합니다. 돈이 없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노동력으로 대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참금이 다 완불이 되면 보무도 당당히 신부의 집으로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것입니다. 신부는 신랑이 데리러 올 때까지 정절을 지키며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은 이미 정혼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다른 곳에 한 눈을 팔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신부가 정절을 잃고 몸을 맘대로 굴리면 그 결혼은 파혼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혹시 파혼당할 만한 신부의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렇게 신부가 정절을 잘 지키게 되면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여 신랑 집으로 향하는데 신랑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의 일 주일에서 이 주일을 잔치를 벌입니다. 그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잔치와 비교되는 잔치입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유대인들의 혼인 풍습에 견주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몸값을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다 지불하시고 이제 보무도 당당히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영원한 신랑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똥통에 굴리고 온갖 오물을 가득 묻히고 있으면 그 결혼식이 정말 제대로 성사가 되겠습니까? 그 신부가 정말 신부 자격이 있는 사람이 맞아요? 신부가 뭔지 결혼이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인 것입니다. 신랑을 사랑하고 그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면 몸과 마음과 드레스까지 깨끗이 하려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그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계 14:4-5)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로 작정하셨기에 우리의 삶에서 그러한 모습이 드러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살펴 볼 것은 우리가 찬미하게 되는 그 하나님의 영광은 ‘은혜의 영광’이라는 부분입니다. 그 은혜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카리토오’ 라는 말로 ‘highly favoured’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똑같은 말이 어디에 쓰였는가하면 누가복음 1장 28절에 쓰였습니다.
(눅 1:28) “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수태고지를 하는 장면이지요? 세상 모든 여자들 가운데 마리아가 택함을 받고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을 품게 되는 장면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카리토오’‘크신 은총을 받은 자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우리를 향해 똑같은 단어로 크신 은총을 거저 받은 자 들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거저 받은 하나님의 은총의 영광을 찬미하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을 품게 된 마리아에게 주신 ‘카리토오’와 우리에게 주신 것이 같다는 것은 우리도 그 아들을 품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골 1:27)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잘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 안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카리토오’라 불립니다. 그것을 성경은 택함을 받은 자에게 주어진 커다란 은총이라 합니다. 골로새서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 안에도 역시 영으로 그 예수께서 와 계십니다. 우리도 그 크신 은총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 같은 인간들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영으로 와 계신 것이 믿겨지십니까? 이렇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은총을 입은 자들이 된 것은 눈곱만큼 이라도 우리 안에서 나온 것을 보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완성될 것이며 우리는 그 은혜의 하나님을 알며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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