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安息)
(김성수 목사)
(창 2:1‐3)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이제 일곱째 날로 넘어 왔습니다. 설명할 것들이 좀 많아서 두 번에 나누어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다 설명하지 못한 부분은 다음 주에 마저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까지 모든 천지 만물을 완성시키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보셔서 아시겠지만 여섯째 날까지는 매일 하나님의 창조가 끝난 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 번째 날이니라’라는 해설이 붙어 있었는데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해설이 없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창세기 1장에서 여러 번 반복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에 담긴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창세기 1장 31절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를 어떻게 해석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의 창조를 다 하시고 저녁이 오고 다시 아침이 왔을 때, 그 때까지를 여섯째 날로 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저녁부터 시작하셔서 아침이 되기까지 여섯째 날의 창조를 하셨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그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창세기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그 여섯 날들이 저녁에 시작하는 것인지 아침에 시작하는 것인 지부터 정리를 해 보지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헬라인들은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고 애굽 인들은 아침이 하루의 시작입니다. 우리도 아침이 하루의 시작이지요? 민족들마다 하루의 시작이 아침이기도 하고 저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하루가 저녁에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을 그냥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었나 보다‘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구절은 하루의 시작이 언제인가를 가르쳐 주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조차도 하루가 아침에 시작하는 것인지 저녁에 시작하는 것인지에 관해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살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여섯 날들이 아침에 시작하느냐 저녁에 시작하느냐에 관해 수백 년 간 연구를 해 왔습니다만 여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구약학자인 게하르트 하셀(Gerhard Hasel)은 ‘하루는 저녁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루가 저녁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날 저녁까지라는 증거 구절이 많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가 증거 구절로 든 성경 구절을 몇 군데만 찾아 드리겠습니다.
(출 12:18) “18 너희는 첫째 달 열 나흗날 저녁부터 그 달 스무하룻날 저녁까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한다.”
(레 23:32) “32 이 날은 너희가 반드시 쉬어야 할 안식일이며, 고행을 하여야 하는 날이다. 그 달 아흐렛날 저녁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날 저녁까지,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이밖에도 시편 55편이나 에스더 4장 이사야 34장 예레미야 27장 등을 ‘하루는 해가 지는 저녁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날 저녁까지’라는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동등하게 저명한 학자 움베르토 카수토(Umberto Cassuto)는 정 반대의 견해를 제시합니다. 성경의 하루는 아침에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에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가 증거로 제시한 구절도 몇 군데 찾아드리겠습니다.
(창 19:33‐34) “33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 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 하였더라 34 이튿날에 큰딸이 작은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33절의 그 밤 (할라일라 hallayla)은 tonight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작은딸이 그 밤을 last night (헤메쉬 'emesh) 어제 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아침과 그 전날 저녁은 다른 날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삼상 19:11) “11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여기도 보시면 이 밤과 내일이 다른 날이지요?
(레 23:27,32) “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32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이스라엘의 속죄일은 칠월 10일입니다. 그런데 7월 9일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키라고 나오지요? 그러니까 속죄 일이 시작되는 저녁은 9일 저녁이고 그 이튿날이 10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안식일이나 절기는 항상 그 절기의 전날 저녁부터 강제력을 갖는 것이긴 하지만 그 전날 저녁이 그 다음 날의 시작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출 12:17‐19) “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니라 18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19 칠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지 않게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 무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니”
여기도 잘 보시면 무교절을 칠 일 동안 지키라고 하면서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무교병을 먹으라고 합니다.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라면 14일부터 21일까지는 7일이 아니라 8일이 됩니다. 그러니까 무교절도 15일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지만 그 전날 저녁인 14일 저녁부터 강제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성경이 하루를 저녁부터 저녁까지라고도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침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를 하루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학자들의 의견은 이렇게 둘로 갈라지지만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성경은 저녁부터 저녁까지가 하루라든가 아침부터 아침까지가 하루라는 그러한 하루의 정의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도 거기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마 28:1) “1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막 16:1‐2)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 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마태와 마가의 진술을 비교해 보세요. 마태는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새 날이 밝기 전에 여자들이 왔다고 진술을 하는 반면에 마가는 여자들이 안식일이 끝난 후인 안식 후 첫날에 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하루가 아침에서 시작해서 아침에 끝나는 것으로 본 것이고 마가는 하루가 저녁에서 시작해서 저녁으로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그 전 날 저녁에 이미 안식일이 끝났으므로 여자들이 그 저녁에 향 품을 사둘 수 있었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가 해가 돋을 때쯤인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저녁이 하루의 시작인지 아침이 하루의 시작인지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 번째 이니라‘라는 구절이 왜 매 창조의 날에 후렴구처럼 붙어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저녁 ’에레브‘는 캄캄한 밤 ’라일‘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저녁‘ ’에레브‘는 ’캄캄한 밤‘ ’라일‘도 아니고 ’환한 낮‘ ’욤‘도 아닌 조그마한 빛줄기가 남아있는 ’빛이 이지러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저녁은 아침이 오기 전의 새벽 여명(黎明)도 저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출 12:5‐6) “5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 중이 그 양을 잡고”
6절의 ‘해 질 때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히브리어로 ’벤 하아르바임‘입니다. ’하아르바임‘은 히브리어 ’에베르‘의 쌍수입니다. ’저녁들’ 그러니까 그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저녁들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두 개의 저녁이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 이지러진 상태인 ’일몰(日沒)과 여명(黎明)’ 그 두 저녁 사이에 양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녁‘의 개념은 단순히 해가 지는 일몰의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 1장이 각 창조의 날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 번째 이니라’라는 말을 써넣었는가?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어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우리는 어둠이 조금도 없는 한 낮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요 11:9‐10)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 하느니라”
주님은 주님이 이 땅에 계신 그 시간을 가리켜 ‘낮’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궁극적으로 영원히 ‘낮’이 계속되는, 다른 말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할 수 있는 그 ‘빛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다시 밤이 없다’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그 빛의 세계의 완성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그 빛의 세계로의 출발지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이 창조기사 속에 하나님께서 기필코 이루시고야 말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언약을 담고 계신 것입니다.
어둠이 모두 물러가고 빛만 남는 세상, 바다가 모두 물러가고 뭍만 남는 세상, 하나님은 반드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시고야 마실 것인데 그 역사가 이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창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은 빛을 담고 있긴 하지만 온전한 빛은 아니지요? 그게 바로 ‘에베르‘ ’저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은 긴 투쟁의 시간을 통과하여 한낮의 시작인 왕국의 아침으로 향하고 그 아침은 한 낮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빛만 있는 빛의 시간을 ’낮‘이라고 부르고 ’날‘ ’욤‘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창 1:4‐5)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5절의 ‘낮’이 바로 ‘욤’ ‘날’입니다. ‘빛의 시간’이 바로 ‘날’입니다. 분명 24시간으로 구획되는 ‘날’은 ‘밤과 낮’으로 갈라지지만 그 ‘날’은 하나님에 의해 ‘빛의 시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하시는 모든 날들은 바로 ‘빛의 세계의 완성’을 향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의 시간’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시작하여(저녁) 어두움이라는 투쟁의 시간을 통과해서 ‘왕국의 아침’을 거쳐 ‘날의 충만’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구속 역사의 과정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 번째 날이니라’라는 구절에 담긴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은 낮과 밤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에서 낮으로 흐르는 구속 역사의 리듬, 다른 말로 역사의 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지러진 빛, 저녁으로부터 출발하여 아침을 거쳐 충만한 낮으로 향하는 구속의 역사의 리듬‘이 그 한 구절 안에 힌트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허락된 이 시간들, 날들(days)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지금은 저녁이 지나고 캄캄한 한 밤 중을 지나고 있는 시간이지만 우리는 믿음 안에서 그 찬란한 왕국의 새 아침을 본 사람들이고 영원한 빛의 나라, 천국을 미리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우리에게 허락된 이 ‘날들‘을 ‘새 창조’의 시간으로 잘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허락된 이 ‘날들’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만큼 지어져 가다보면 영원한 안식의 날이 우리에게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는 저녁이 없습니다. 그 곳에는 캄캄한 밤도 없습니다. 그 곳에는 영원한 빛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니라‘ 라는 구절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끝이 없으니까요. 그 일곱째 날 ’안식의 날‘은 역사의 끝이요, 영원한 빛의 시간을 상징하기 때문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과정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다 이루시고 그날 안식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쓰인 ‘안식’ ‘솨바트’는 단순히 일을 하다가 피곤해서 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시고 곤비치 않으신 분이십니다.
(사 40:28)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 안식을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안식’ ‘솨바트’는 ‘휴식하다’라는 뜻 이외에 ‘어떤 일을 마치다’ ‘경축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식’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섯 째 날까지 천지와 만물을 다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까지 만들어 놓으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습니다. 유독 여섯째 날에만 ‘심히 좋다‘ ’메오드’라는 단어를 쓰신 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도덕적이며 인격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백성, 인간이 만들어짐으로 해서 그 창조가 비로소 하나님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천지 만물이 인간의 다스림 속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 속에 충만히 거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을 쉰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다른 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과 지혜가 충만하게 드러나고 발휘되어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분께 순복 하는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거하실 상태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유지하시면서 만족하게 그 처소에 거하시는 상태‘를 ‘하나님의 안식‘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이라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과 능력과 지혜를 온전히 발휘하셔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완성하셔서 그 처소를 보호하고 유지하시면서 그 속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인간 쪽에서 보면 ‘인간이 자신을 처소 삼아 거하고 계신 그 하나님의 영광에 정상적으로 반응을 하여 그 분께 항복하고 순종하며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맡기는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쉼’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쪽이나 우리 쪽이나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 행하고 있는 상태가 ‘안식’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정말 ‘쉼’을 얻으시나요? 정신노동을 많이 하는 저는 월요일에 집안 청소를 하거나 운동을 해서 땀을 흠뻑 흘릴 때 ‘쉼’을 얻습니다. 반대로 육체노동을 많이 하는 분들은 조용히 앉아서 독서를 하거나 사색을 할 때 ‘쉼‘을 얻으시지요? 이렇게 ’안식‘ ’쉼‘ ’솨바트‘는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섯 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시자마자 일곱째 날이 안식의 날이었습니다. 인간은 만들어 지자마자 ‘안식’을 누리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을 포함한 천지 만물의 ‘안식’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안식이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영광이 발휘되고 드러났을 때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순종하며, 그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에 효과적으로 반응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안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피조물 속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며 거하시는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었습니다.
(고전 3:16)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출 15:17)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처소를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안식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처소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완성이 되었지만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는 계속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엡 2:19‐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세워진 건물이요, 그리스도 예수 스스로가 그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성전으로 자랍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함께 건물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이 되어갑니다.“
주님께서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말은 지금 주님께서 우리가 거할 천국을 짓고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올라가심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내려 오셔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우리를 하나님이 거하실 온전한 처소로 완성하실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참 안식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처소 됨을 위해 침 삼킬 틈도 쉬지 않으시고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요 5:17)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그 ‘안식‘을 누려야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처소로 잘 지어져 가야지요. 우리는 그 속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요즘 우리가 계속 만들어 가고 있는 등식에 하나가 더 보태지지요? 우리 성도의 존재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그 거룩한 삶은 성도를 하나로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고 그 하나 됨 속에서 보여 지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고 (왜냐하면 이제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과 내 이웃 중심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계명을 어길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 삶을 가리켜 하나님을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드리는 ‘예배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 성도는 비로소 순종과 의뢰의 삶인 ‘안식’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참된 ‘안식’속에 거해 보십시오.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안식 속에 거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 됨을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예배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안식 속에 거하십시오. 그게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가는 길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그 ‘안식’의 자리로 초대되어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안식을 스스로 차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힘으로 스스로의 안식을 만들기 위해 문명과 문화를 만들고 담을 쌓고 남의 것을 탈취하는 악을 자행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깨져버린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 자녀들의 안식을 반드시 회복하실 것임을 창세기의 일곱 날들을 통해 힌트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녁이 되며 어둠이 오겠지만 반드시 아침을 맞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창세기의 일곱 날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안식이 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종 목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참 안식이 완성되는 과정을 성경에서 창조와 타락과 구원과 심판으로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일곱째 날의 안식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 지점으로서의 안식이 아니라 ‘희미한 빛줄기를 담고 있는 저녁 같은 안식’인 것입니다. 그 저녁 같은 안식이 어떻게 캄캄한 어둠을 거쳐 왕국의 아침으로 향하고 대 낮의 영원한 참 안식으로 완성이 되어 지는가를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창조를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하루에 다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마다 의미를 담아 마치 그림책처럼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설명을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창세기가 구약을 거쳐 신약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저녁에서 아침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지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안식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졌을 때에만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계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죄한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켜내었을 때 그것이 그의 의가 되어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내지 못했고 타락을 함으로 그 안식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인간에 의해 뭉개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지요.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나약함을 확연하게 구별을 해 줌으로 해서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납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자율성과 이성과 인격을 가지고 언제든지 기고만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실패한 그 선악과의 시험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통과해 내시고 그 시험 결과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가시켜 주심으로 해서 그 백성들이 참 안식으로 들어가게 되는 식으로 인간에게 안식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안식에 있어서 인간 쪽에서의 기여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하나님의 장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을 타고 넘으려 할 때의 처절함을 그 분의 백성들에게 이성과 인격 속에서 주지시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의존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완전히 다르다, 라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격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에게 가르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순종해야할 그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이 흘러넘치시는 참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 성경이며 그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지켜낼 수 없는 하나님의 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명의 내용이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아담은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하와를 사랑하기는커녕 자신의 변명을 위해 그 이웃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씌워버렸습니다. 그게 피조물인 인간입니다. 그 첫 번째 동산인 에덴동산에서의 첫 번째 아담의 실패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두 번째 동산에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요 20:14‐15) “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15절에 보시면 요한이 일부러 ‘동산 지기’라는 단어를 동원해서 첫 번째 동산이었던 에덴동산과의 대조를 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는 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땅이 있었던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지켜야 할 제사장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동산에 전달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낼 때 인간은 ‘안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왕으로서 하와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해야 했었는데 아담은 오히려 이웃에게 핑계대기에 바빴습니다. 그러한 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실리 만무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서의 모든 역할에서 실패를 한 것입니다.
아담은 전체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러한 아담의 실패를 통해 우리 모든 인간이 그 역할을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해 낼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 안식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삶의 방식인 ‘사랑’이 인간에게는 버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 그 나약한 인간에게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동산지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참 안식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동산 지기는 죽어야 할 죄인의 상징인 여자, 창녀 막달라 마리아를 위해 그녀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창녀를 ‘안식할 수 있는 자’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하와와 예수님의 무덤이 있던 동산의 막달라 마리아의 대조를 이해하시겠어요? 성경은 이렇게 전체가 그 ‘은혜의 복음’ 이야기로만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안식’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지 보시겠어요?
창세기 4장과 5장이 가인의 후손과 아담의 후손의 계보를 대조하여 기록하면서 그 계보를 어디로 끌고 갑니까? 노아의 홍수 사건으로 끌고 갑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안식이 어떻게 올 것인지를 그 계보의 대조를 통해서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그 족보를 잘 보시면 가인의 후손에도 ’에녹‘이 있고 아담의 후손 중에도 ’에녹‘이 있습니다. 이 ’에녹‘이라는 이름은 ’봉헌 된‘이라는 뜻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쫓겨나서 제일 처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을 쌓고 그 성 이름을 ’에녹성‘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7대손 에녹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라고 짓고 오히려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의 말로에 대해 경고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삽니다. 물론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히 11:5)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옮겨 가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옮겨 가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증언을 받은 것입니다.”
에녹이 어떻게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까? 믿음으로, 믿음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이지요? 은혜로, 그러니까 에녹은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두 에녹의 대조는 심판으로 던져질 죄인들은 무엇이든 자신에게 봉헌하려 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봉헌 된 사람이라는 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봉헌된 자들은 성을 쌓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살게 되지만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들은 남을 밟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세상의 삶의 원리를 질타하며 심판을 선포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봉헌된 아담의 7대손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을 하지요. 그리고 가인의 후손 중에도 라멕이 있고 아담의 후손 중에도 라멕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두 라멕을 또 비교합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과 아담의 후손 라멕이 어떻게 다른지 볼까요?
(창 4:19‐24) “19 라멕은 두 아내와 함께 살았다.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씰라이다.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을 치고 살면서, 집짐승을 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인데, 유발은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2 또한 씰라는 두발가인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다. 두발가인에게는 나아마라고 하는 누이가 있었다. 23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24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라멕의 후손들은 동철로 기계를 만들고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고,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됩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세상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매한 인간들은 그러한 문명과 과학의 힘으로 자기들에게 ‘안식’이 주어질 것이라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 라멕의 후손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약해빠진 ‘노아’라는 바보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안식’입니다. 그는 자기의 힘이나 꾀로 세상을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20년 동안 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산 위에다가 배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식은 어리석고 미련해 보였던 노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의지해서 안식을 구하려다 모두 저주의 물에 빠져 죽을 때 노아는 바보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그와 그의 가족 8명만이 ‘안식’의 배에 올라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종을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어 그를 순종하는 자로 만드셔서 기필코 안식을 주고야 마시겠다는 것이 노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창 6:7‐8) “7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의 힘과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식으로 집어넣으시는데 그들은 이 땅에서 세상의 삶의 원리를 질타하는 삶을 사느라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며 약한 자의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 볼까요? 하나님은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안식이 언약의 저녁에서 출발해서 캄캄한 투쟁의 시간을 지나 왕국의 아침을 맞고 충만한 빛으로 완성이 될 것임을 미리 힌트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안식은 하나님 쪽에서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성품이 온전히 발휘되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완성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 처소를 보호하며 유지하시며 충만하게 거하시는 것이고, 인간 쪽에서 보면 그 하나님의 영광이 발산되어지는 곳에서 그 영광을 온전히 효과적으로 반사하며 그 엄위하심 앞에 항복하고 순종하며 그 분께 모든 삶을 의뢰하는 것을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안식은 절대 인간의 힘으로 완성될 수 없음을 인간의 타락으로 확증시키신 후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 안식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심으로 만 천하에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참 된 ‘안식’은 하나님의 선물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 항복하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께 우리의 모든 삶을 의뢰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조금 바보 같아 보이더라도 올곧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그 삶이 바로 우리 하나님 백성들의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 안식을 지금 누리십시오. 가인의 후손들처럼 세상의 힘을 좇다보면 안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에녹처럼 노아처럼 세상 사람들이 바보라고 손가락질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열심히 살다보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안식을 이 땅에서도 누리실 수 있고 이제 곧 닥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영원히 그 안식을 누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들을 자신의 힘을 삼아 사는 사람들은 모두다 저주의 물에 빠져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그렇게 사십시다. 마지막 결론으로 히브리서 몇 구절을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히 3:17‐18, 4:1, 4‐6, 11) “17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 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4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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