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의 구속
(김성수 목사)
(엡 1:3-7)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서 발현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등을 알아드리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는 것을 공부했지요? 이번 주에는 6절과 7절의 말씀 중에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음’에 대해서 함께 공부를 해 볼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3절에서 6절까지 성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작정과 예정에 관해 설명하시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이 되어 지는가를 7절부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거기에 대한 해답을 ‘그리스도’라고 제시합니다. 자, 제가 먼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어떤 사람은 그 질문에 대해 겸손하게 대답한답시고 ‘네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뜻 듣기에 그 말이 아주 겸손해 보이지만 그 사람은 복음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불신자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우리를 가르치고 교훈하셔서, 우리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가를 모범으로 보여주시고 고무시키려고 오셨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너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러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만일 그래서 될 일이었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일찍 죽으실 것이 아니라 수천 년을 사시면서 열심히 우리를 가르치시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죄인들이 그 죄의 사슬을 끊고 빠져 나올 수가 없기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분 자체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방법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비롯한 수많은 성경 기자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하라’의 명령은 도대체 다 무엇입니까? 가까운 예로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도 나오지 않아요?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성도가 지켜야 할 계명을 풀어 설명해 주셨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더러 ‘너희들 이것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자들이 살게 될 천국 백성의 속성과 본질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오게 되었는가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지위를 얻게 되기까지는 많은 것들이 행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위를 얻기까지 가장 큰 장애는 다름 아닌 죄의 문제입니다. 그 죄의 장벽이 하나님과 우리를 막고 있었습니다. 이 죄의 장벽이 무너져야 하나님과 우리는 화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 59:1-2)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렇게 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 죄를 없애는 방법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그 죄를 없애는 방법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구원은 우리에게서 발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라고 심중에 대답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죽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은혜가 뭔지 아직 모르는 사람이며 그의 죄는 아직, 아니 영원히 그의 노력으로 해결이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그리스도인들을 때려죽이는 결과로 나타난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내어 놓는 우리 인간의 열심은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가능함을 이미 아셨기에 창세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을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가 되게 하셔서 완전히 죽음 아래로 내려감으로 해서 하나님은 그 분의 공의와 사랑을 한 번에 보이신 것이지요.
(고후 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의 장막을 깨버리시고 우리와 화해를 하신 것입니다.
(고후 5:18-19)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구원, 구속함이라는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주님은 그 구속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가 바로 그 ‘구속’의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고전 1:30)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딤전 2:6)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적절한 때에 그 증거를 주셨습니다.”
(딛 2:14)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위해서는 그 사람의 몸값을 친족 중에 누군가가 지불을 해야 그가 풀려나는 것처럼 우리의 몸값으로 예수님이 치러지신 것입니다.
(벧전 1:18-19) “18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19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값을 치루고 사신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이지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속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마음대로 살면 안 됩니다. 이제 성도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을 주고 사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런데 사도는 그 ‘구속’ 속전을 치르고 우리를 사신 것을 ‘구속 곧 죄 사함’이라고 구속과 죄 사함을 동격으로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의 구속은 단순히 ‘죄 사함’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구속을 이야기하면서 죄 사함이란 말을 마치 구속이 죄 사함인 것처럼 표현을 해 놓았을까요?
(롬 8:23)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경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구속’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사도는 분명히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의 차원에서 ‘구속’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속은 그만큼 죄 사함 뿐만 아니라 더 풍성하고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구속이 곧 죄 사함인 것처럼 쓰여 졌을까요? 사도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구속은 분명 내 몸이 영화롭게 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 사함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속의 시작은 죄 사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구속이 곧 죄 사함이다‘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속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 죄 사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있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바로 이 ‘죄’라는 말인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절대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구속의 출발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행복해지기 원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을 원합니다. 죄 같은 것은 부담스러운 주제이기에 저리 밀쳐놓습니다. 아니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감성적으로 출발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죄의 자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께 감사할 수 가 업습니다. 은혜가 뭔지도 모르며 은혜를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없는데 왜 구원이 필요하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데 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습니까?
여러분 또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 거라고요? saved from what?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는 왜 생긴 것입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그 죄의 용서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그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라는 한 마디로 빛을 창조하시는 분이 ‘모든 자들아 죄의 용서함을 받으라.’ 하고 왜 한 번에 그렇게 못 하시나요?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속성이 공의로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용서하실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나중에 심판을 할 근거를 잃어버리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그게 공의입니다.
(요일 1:5) “5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스스로 모순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데 그 죄 값을 ‘예수의 피’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인간의 죄가 얼마나 흉악한 것인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처절한 십자가는 바로 죄인들이 달려 죽어야 할 형틀이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들이 젖어 있는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우며 악독한 것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고 그 외아들에게 저주를 내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셨으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롬 3:24-26)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의로우심을 잃지 않으시면서 의로우심을 보이시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택하신 것입니다.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죄를 방조 내지는 조장하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죄를 벌하시고 아울러 용서도 하시는 그 놀라우신 지혜를 아들을 죽이시는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고후 5:19-21)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아예 기억조차 하시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가 저지른 파렴치한, 남에게 몰래 숨기고 싶은 그 모든 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치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만 천하에 드러나면 천국에서도 얼굴 뜨거워서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위기 16장의 수 염소 ‘아사셀’에게 죄를 전가시켜 저 보이지 않는 광야로 쫓아 보내심 같이 우리 죄를 보이지도 않게 없애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렘 31:34)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히 10:17) “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잃지 않으시면서 또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부어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십자가에서 쏟게 만드셨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 6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굳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여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발적으로 쓰여 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사도 바울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고 표현을 한 의도가 분명히 있을 텐데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는데 그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자 하나님’이란 것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마 3:17)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이렇게 우리 주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품속에 계시던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었습니다.
(요 1:18)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의 품속에서 하나님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구속이 주어졌다는 사실, 그 사실을 사도는 이러한 단어들을 동원하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시며 본질이 같으시고 영광과 거룩과 모든 신성이 동일하신 분이셨습니다.
(히 1:1-3)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토록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아들이 이 땅에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서 완전한 축복을 누리고 계셨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강보가 없어서 구유의 짚더미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셨고, 그 아들이 당연히 죄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아버지는 아셨습니다. 그리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벌레 같은 인간들이 돌을 던지는 것을 보셨고,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상처를 내고 배척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아들을 조롱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 속에서도 참으시는 것을 보셨고 그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와의 단절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급기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그 모습까지 보시면서 하나님은 견디신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한 사랑 안에 영원한 축복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 지경까지 낮아지셨으며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사랑하는 자 안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 17:23)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자기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진리입니다.
(골 3:12)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살후 2:13) “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주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신분이 어떤 신분인지 조금 이해가 가십니까? 죄의 장막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해 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에게 떨어질 저주와 심판을 다 받게 하시고 우리의 죄가 되게 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심으로 그 죄의 장막을 찢으셨고 우리는 더 이상 정죄 받지 않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근거도 찾지 않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며 우리를 완전한 구원으로 만드실 완성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나는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부를 수 없어, 난 아직 그만큼 선하지 못해’ 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 엄청난 은혜 앞에서 ‘난 지금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오직 그 예수를 의지하며 그분의 하신 일 안으로 숨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항복에서 우리의 수고와 열심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어진 공짜 선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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