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삼으심(수양)
(김성수 목사)
(엡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지난주에 예정이란 무엇이며 작정이란 무엇이고 섭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를 향한 작정과 예정을 가지고 계셨고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방법으로 예수님이라는 방법을 택하셨고, 그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성경이기에 성경 전체는 예수님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언약과 계획을 밝혀 놓으신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사 46:9-13) “9 너희는 태초부터 이루어진 일들을 기억하여라. 나는 하나님이다.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와 같은 이는 없다. 10 처음부터 내가 장차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였고, 내가, 이미 오래 전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렸다. '나의 뜻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이룬다'고 말하였다. 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고,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불렀다. 내가 말하였으니, 내가 그것을 곧 이루겠으며, 내가 계획하였으니, 내가 곧 그것을 성취하겠다. 12 내가 승리할 것을 믿지 않는 너희 고집 센 백성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13 내가 싸워서 이길 날이 가까이 왔다. 그 날이 멀지 않다. 내가 이기는 그 날은 지체되지 않는다. 내가 시온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안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내겠다." [표준 새 번역]
이렇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고 그것을 이루어가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역사(歷史)라 부르는 것입니다.
(딤후 1:9)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엡 1:11)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잘 보세요. 제가 다시 한 번 성경 구절로 지난 주 우리가 공부한 내용을 복습 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구원은 하나님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거나 보태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로 가서 더 확실한 증거를 대 드리겠습니다.
(롬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명확하지요? 하나님께서 미리 사랑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구원의 서정 즉, 구원의 논리적인 순서를 전에 한 번 설명 드린 적이 있지요? 한 번 함께 암송해 볼까요?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수양-성화-견인-영화입니다. 물론 이 순서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입니다. 창세전에 택하시는 부르심이 먼저 있고,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게 되며, 그러한 자들이 신앙을 갖게 되고, 그 자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양자로 삼아 자녀 삼으십니다. 자녀를 삼은 그들은 성화의 길을 걷게 되며, 그들은 반드시 영화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서정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로 그 구원의 서정 중에 수양, 양자 삼으심을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로만 가톨릭이나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성화-칭의-영화 로 구원의 서정이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을 보태어서 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교리입니다.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최후의 심판이 이 역사를 뚫고 들어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아서 죄 값을 다 치르고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다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 아시지요? 우리는 다시 재판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이 이미 역사 속에 뚫고 들어와 버렸다는 의미에서 지금을 말세라 부르는 것입니다. 말세(末世)는 미래의 어느 날 우리에게 닥칠 그런 날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최후의 심판에서 정죄 받아야 할 어떤 자들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시고 죽으셨을 때부터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까지를 모두 말세(末世)라 부르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4절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 정도가 아니라 어떤 법적인 장치까지 해 놓으셨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기 위해서라고 하면 혹자들이 죄가 없었던 아담으로의 회복인 것으로 착각들을 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죄가 없었던 아담도 able to sin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 죄를 짓고 타락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실 것이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듯이 그 구절에 첨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양자 삼으심. 하나님은 우리로 아들들이 되도록 양자로 받아들이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he predestined us to be adopted as his sons through Jesus Christ’
그러니까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양자로 삼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양자냐?’ 우리는 이 양자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진 그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개념이요, 용어인 양자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 양자는 로마법에서 빌려온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의 법적 체계에서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고 그러한 분위기에서도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양자라는 개념으로 우리의 신분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법에는 양자가 되면 양자가 된 사람이 그를 양자로 받아들인 사람의 이름을 따고 그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확보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어떤 사람의 양자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 아이는 아버지의 권한을 행사하게 되는 권한과 특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적자(嫡子)들에게는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자(養子)들에게는 반드시 재산을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그게 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엄청난 신분으로 우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법적 안전장치까지 동원하여 자녀를 삼으시려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계심을 사도는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양자라는 것은 위치와 지위와 특권과 신분을 규정하는 법적인 용어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키워 보다가 맘에 들면 호적에 올리고, 맘에 안 들면 버리지 않고, 낳자마자 일단 호적에 올리고 사람답게 키우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창세전에,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셔서 아들을 삼으시고 그 후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 분은 실패하거나 실수하실 수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전적으로 자기를 비우셨고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의도하시는 대로 살아내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나,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만 했고 아버지가 하라는 말만 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것은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동생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이 되어갈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이끄실 것이고 우리는 그 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게 되어 결국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그 분의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동일하게 완성해 내신 그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도 동일하게 계신 것입니다.
(갈 4:4-7)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보시다시피 그 아들에게 임했던 영이 우리 안에 동일하게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완성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가 하신 일을 성령에 의해서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동일한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실존으로는 절대 확신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분의 자녀로 완성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의 꼴을 보면서 ‘난 안 돼’ ‘난 가짜인가 봐’ ‘우리 아빠는 안 될 거야’ ‘다른 사람은 다 돼도 우리 엄마는 안 될 거야’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이며 죄입니다. 지금의 모습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혹 불가능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신다면 낙담하고 절망하시면 안 되지요.
(롬 8:23-28) "23 그뿐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28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표준 새 번역]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아직 죄의 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신이 나고,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으면 너무나 괴롭습니다. 그래서 하루속히 이 죄의 몸을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신의 죽음은 바로 옛사람의 완전한 죽음이 되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단, 죄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해본 사람들에 한해서만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날이 기다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 처절하게 고민하고 느끼셔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는 완성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을 중도에 포기하신다면 하나님이 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이고 우리의 완성은 필연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물려버릴 수 없는 완전한 법적 제도적 안전장치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벧후 3:10-13)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성경 말씀처럼 이 땅의 모든 원소들은 다 불 타버릴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변화하며 불타버릴 것 들 뿐입니다. 절대적이며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영원한 하늘나라밖에는 영원하며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안에서도 특권층을 부러워하며, 높은 지위를 부러워하고, 심지어 그 것들을 추구하며 살자는 설교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불타버릴 것들을 추구하라니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부자가 지옥의 불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기서는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불타는 일밖에 없습니다. 무덤 너머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불타는 부자는 매일 잔치를 벌였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좋은 옷에 첨단의 유행을 따라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이 땅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개처럼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먹으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 거지 나사로는 저 하늘에서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지 이 땅에다 두고 갈 것들을 쌓는 자들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 땅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그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추구하시겠습니까? 아님 잘 먹고 잘 사는데 눈이 팔려 내세를 잊고 사시다가 영원히 지옥의 땔감으로 사시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다가 가던 간에가 우리 모두는 참으로 존귀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이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천사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모셔갑니다.
(눅 16:22) “22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그렇지요? 천사가 기다리다가 받들고 올라갑니다. 영국의 무신론자들의 모임인 atheism club의 회장인 프란시스 뉴포트 경은 임종의 순간에 자신의 임종을 지켜 보기위해 온 무신론 클럽의 회원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자네들은 더 이상 나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 줄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나는 지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내가 격노하시는 그 분 앞에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지. 자네들은 더 이상 나에게 지옥이 없다고 말해 줄 필요가 없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 영혼이 이미 지옥불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 이 망할 놈들아, 내게 희망이 있다는 허튼 소리 집어치우지 못하겠어? 나는 영원히 망했단 말이야’
혹시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 중에 이러한 유언을 하고 가는 사람이 생긴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두려워 하셔야 합니다. 뭐가 사랑입니까? 이 땅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제공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시키는 것이 사랑입니까? 진짜 사랑을 하세요. 이미 양자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이 땅에서 만사형통, 무사안일 일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너무나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요.
(요 16:33) "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골 1:24)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후 11:23-27)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구체적으로 왜 우리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고난을 당하게 되는 지 요한복음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 15:18-25)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21 그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믿는다고 해서, 이런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해 주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다. 23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24 내가 다른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3) 그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서도, 나와 내 아버지를 미워하였다.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고서도 미워하였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음' 25 그래서 그들의 율법에 '그들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기록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자기와 일치하지 않는 것을 싫어합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구가 돈다고 말했을 때 세상은 그를 화형 시키려 했습니다. 요나스 한웨이가 처음 우산을 만들어서 영국에 소개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오물을 던졌습니다. 신사가 어떻게 저런 걸 들고 다니냐는 것이지요. 아덴에 아리스 티데스 라는 걸출한 의인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민들이 투표를 해서 그를 아덴에서 쫓아냈습니다. 왠 줄 아세요? 시민들이 그를 쫓아 낸 이유는 ‘어딜 가나 그는 의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미웠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악인이 되더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습니다. 아니 추구라도 합니다.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살기 위해 애를 쓰는 그들을 세상은 곱게 보아주지 않습니다. 꼴 보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향해 돌을 드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세요.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들이라는 신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기에 꿋꿋이 그 공격을 이기고 가는 것입니다.
(고후 4:17)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물론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이렇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시 73편) “1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2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3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5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6 그들에게는 오만이 목걸이요, 폭력이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7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다니며, 마음에 기대한 것보다 더 얻으며, 8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9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10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11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 12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13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14 하나님, 주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15 "나도 그들처럼 말하면서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도 주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처럼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16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17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19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20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21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22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23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25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26 내 몸과 마음이 다 사그라져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27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절을 버리는 사람은, 주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께서 이루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성경이 분명히 밝히지요? 성도는 죄인들의 떵떵거리며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을 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절망하거나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소망의 은혜를 붙잡고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고백을 했던 사람이고, 그러한 삶을 경주했던 사람입니다.
(롬 8:18-39) “18 나는,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21 그것은 곧 피조물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23 그뿐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28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대가족 안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0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31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6 성경에 기록된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그 엄청난 고난조차 이기게 하는 그 아들의 신분, 자녀의 신분 그 신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신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왕으로 그 나라에 서게 되는 것이며 우리는 천사를 심판하는 자로 서게 될 것입니다.
(고전 6:2-3)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히 2:9) “9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앗수르 군사 십팔 만 오천 명을 단 칼에 없앨 수 있는 존재가 천사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이 우리를 수종(隨從) 든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이 임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사들은 우리를 섬기는, 우린 그런 신분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그 신분을 정말 자각하고 있으십니까?
(요일 3:1-2)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본문5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양자를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서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시는 것이 그토록 기쁘셔서 아들을 내려 보내셔서 죽이신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을 아는 사람들이 왜 그로 인해 기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 기뻐 뛰며 춤을 춰도 모자랍니다.
(요 15:11)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 복음을 아는 자들은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 십자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즐거움, 그 환희가 여러분 삶 속에도 있습니까? 주식 시세만 조금 떨어져도 흔들려 버리는 기쁨, 자식이 조금만 속을 썩여도 흔들려 버리는 기쁨, 그런 기쁨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계신 기쁨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은혜의 예수를 알아가야 합니다.
(히 12:2)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의 그 기쁨이 우리 기쁨이며 우리 안에 동일하게 있어야 합니다. ‘기뻐하라, 기뻐하라, 이제 그 날은 곧 온다. 기뻐하라‘ 지금 여러분을 향해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시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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