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전에 택하심을 받은 자
(김성수 목사)
(엡 1:4-5)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네 구원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하면 대부분 ‘네 제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왜 구원을 받지 못 하였습니까’ 하고 물으면 ‘네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물론 틀린 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틀린 답이기도 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장난 같은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지 이제부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그 대답이 어떤 면에서 틀리고 어떤 면에서 틀리지 않는가를 꼭 짚고 넘어가셔야 합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중점적으로 공부를 하겠습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사람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종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치성을 드린 만큼 보답이 되어지는 것이 다른 종교들의 공통점이지요. 불교에서는 자신들이 얻어내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보시를 열심히 하고, 수도를 하며, 고행을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열심히 성례를 행하고 ‘내 탓이오’를 외치며 선한 일을 하지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는 원죄만이 해결된 것이고 그 차후의 죄들은 자신들의 몫이기 때문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슬람교도 열심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알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여러 가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한 종교들도 그들이 하는 만큼 정신적, 육체적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성이면 감천(感天)이다’라는 논리 속에 자연스럽게 묶여있습니다.
유명한 미국의 장로교회 앞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성경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했더니 그 질문에 70%가 ‘Yes’라고 대답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정말 그런 구절이 성경에 있나요? 아니요. 그건 성경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명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인과율에 입각한 교육을 받았고 그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잘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러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다는 식의 치성의 종교가 아니라 계시의 종교이며, 은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만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찾아 내려오셨으며,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인간들에게 어떤 선물을 부어 주신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만 인간이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감동하여 그들에게 복을 내리는 다른 종교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몇 주 전 강해에서도 다루었던 주제이지만 워낙 중요한 주제이기에 오늘 본문에서 또 한 번 반복하는 것입니다. 잘 복습해 보세요.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존재였는데 어떻게 믿게 되었다고 했지요? 거기서부터 출발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놀라운 신령한 복을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복받쳐 오르는 감격에 ‘찬송하리로다.’ 하고 먼저 감탄사를 토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의 내용을 이야기 해 나갔지요? 그게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부분입니다. 4절에서 6절까지는 성부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7절에서 12절까지는 성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그리고 13절에서 14절까지 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 그 참 신령한 복이 어떻게 우리에게 들어왔는지를 설명하는데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고 그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이 우주가 탄생하기 전으로 가지고 올라갑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교리를 담지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가 탄생하기도 전에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 부르신 이름들을 하나님 나라에 데리고 들어가서 살고 싶으셔서 우주를 창조 하셨고 그 목적을 향해 역사와 우주를 경륜하고 계신다는 모든 내용이 그 한 구절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예를 하나 찾아볼까요?
(창 15:13-14) “13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가 있기 500년 전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 400년간 종살이 할 것이며 400년 후에 하나님께서 왕조를 바꾸셔서 그들을 핍박하게 해서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실 것이라는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일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역사를 그렇게 이끌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이끌어 가시고 계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인류의 역사는 인간들의 성취욕이 만들어 낸 열매로 착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성질 급하신 분들은 이 부분에서 예정론과 숙명론까지 질문이 이어지실 텐데 그 부분은 제가 조금 있다가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의 진행은 이미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회의와 약속 안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숙명적으로 다 짜여진 틀에 우리가 꼭두각시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부분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들은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틈틈이 읽어 보세요. 성경은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어지지 않은 일은 이 땅에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도 없던 일들이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면 그 분은 이미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죠. 하나님은 벌거벗은 아담이 어떻게 의의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만드실 것인가를 십자가라는 방법을 동원하셔서 이루어 내시는데 그 전체 하나님의 계획을 창세전에 이미 그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과 벌거벗은 아담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것조차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만들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어겨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면 때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이길 수 도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신학에서는 ‘예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정’하면 사람들이 왠지 어렵게 생각하고 거부감을 느낍니다. 우리 인간의 미래가 미리 다 결정되어 있다면 자신들이 너무 나약하고 초라해 보여서 그런 것 같아요. 죄인들은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인데 자신들이 끌어내린 그 왕에 의해 자신들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수긍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처럼 중요한 교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확인하고 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분명 이렇게 모든 것은 창세전에 예정되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을 시작으로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이 먼저 있고, 그 택한 자들에게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지요.
(살후 2:13-14) “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처음부터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14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표준 새 번역)
여기도 분명히 나오지요?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셔서 진리를 믿게 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순서가 뒤바뀌면 안 됩니다. 한군데만 더 확인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벧전 1:2)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미리 아심을 따라 (1) 여러분을 택하여 주시고, (2)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므로, 여러분은 (3)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의 피로 정결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표준 새 번역)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조차도 하나님의 택하심 뒤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세전에 택하셨고, 예수님은 그들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의 서정을 확실하게 정리 하자면 이러합니다.
(엡 2:1)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청각과 시각을 상실한 자들이었습니다.
(고전 2:14)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롬 8:7)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고전2:12)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4:3-6) “3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4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6 1)"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창 1:3]
이렇게 구원의 서정의 맨 앞은 하나님의 택하심, 즉 소명(召命),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드시지요? ‘왜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택하지 않으셨는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가 그들이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게 하셨느냐고 우리가 따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신을 판단하여 unfair하다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RC Sproul 목사님의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수가 세 번의 Paper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페이퍼를 안내면 Fail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첫 번째 페이퍼를 제출하는 날 10명이 안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교수가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페이퍼를 제출하는 날 20명이 안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날도 교수가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습니다. 세 번째 페이퍼를 제출하는 날 30명이 안 가져 왔습니다. 그 날은 교수가 약속대로 그들을 모두 Fail처리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수님을 보고 그 전에 용서받은 자들이 앉아서 ‘불공평하다. 저들은 왜 용서 안 해주나’ 하고 소리를 지르겠습니까? 고개 푹 숙이고 ‘참 감사하다. 나도 저렇게 F를 받아서 낙제를 해야 하는 자였는데 교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아남아 있구나.’하고 감사를 하겠지요. 따라서 ‘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으시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어떠한 지경에서 구원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언약이 어떠한 것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모르는 자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알마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은 다르게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긴 택하신다고 하지요.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처럼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도 그 것은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이 아니라 나중에 누가 믿고 누가 안 믿을 거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택하신 것이지 그냥 당신 마음대로 택하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 것을 그들은 예지 예정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단지 인간들의 앞일을 미리 내다보고 결정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원은 역시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요? 인간이 믿어줘야 구원이 전달되는 것이니까요. 정말 그렇게 하나님이 예수를 죽여 놓고 믿어주는 인간은 구원하고 안 믿는 인간은 저주의 불로 쓸어 넣어 버리시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불확실한 일을 위해 헛되이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안 믿어주면 어떡할 뻔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선행적 은총을 내려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전적인 타락이 아니라 진리를 인식하고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를 잡은 자들은 살아나는 것이고, 그 기회를 놓친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 성경적 근거도 없이 억지로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지 예정,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중에 예수를 믿을 자들을 미리 내다 보시고 그들을 택했다는 설을 주장하는 근거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8장29절과 베드로 전서 1장 2절입니다.
(롬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은 이 구절의 ‘미리 알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미리 알다’의 원어는 ‘프로 기노스코’입니다. 이 말은 ‘forethought’ ‘사전 고려, 장래에 대한 심려’의 뜻과 ‘predestinate’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미리 아셨다는 말은 ‘미리 사전에 고려되어지고 심려되어진 예정으로 말미암은’이라는 뜻이지 나중에 될 일을 미리 내다보셨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인간들을 위해 예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만을 위해서 예수를 죽이신 것입니다. 예수는 결코 전 인류를 위해 죽지 않았습니다. ‘택했다’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러 개 중에 일부를 선택할 때 ‘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 17:6)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 17:9)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창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보세요. 확실하게 나오지요? 성도는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어진 일부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 사탄의 후손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는 죽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들으시면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이고 독선적으로 들리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맞습니다. 기독교는 배타적이며 독선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해 이 역사를 경륜하십니다. 그리고 그들만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완성해 놓으셨고 나머지들을 무대장치와 엑스트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까지도...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은 절대 상위권 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을 이 역사와 마귀와 수많은 엑스트라들을 동원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인 여러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아시겠지요?
역사 낙관주의자들이나 역사 진보주의자들이 이 설교를 들으면 저를 맹렬히 비난할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남겨 가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들을 remnant라고 합니다. 성경의 중요한 교리중의 하나가 바로 ‘남은 자 사상’입니다. 모두 죽어야 할 죄인들 중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남겨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왜 우리를 택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 앞에서 감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인간이 다 택함을 받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택하십니까? 모두다 바벨탑을 쌓고 있는데 우상을 섬기고 있는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택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뭘 잘 해서가 아니라, 이런 엉터리 같은 자를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가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 아브라함의 선택입니다.
(롬 9:10-29)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삭은 어떻게 택하시지요? 이스마엘이 서자라서 택하지 않으시고 적자인 이삭을 택하신 것입니까? 그럼 야곱과 에서는 한 어머니 배속에서 난 자들인데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하시는 데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그 분의 긍휼하심을 따라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결정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감사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는 뭘 하려 하는가? 어차피 다 정해져 있다면서’ 이런 질문 안 드세요? 그런 질문은 하나님께서 들판의 곡식을 다 키우시고 자라게 하신다고 씨를 안 뿌려도 된다는 식의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위해 작정을 하시는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도 함께 정하셨습니다. 그 방법과 수단으로 우리의 전도를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일의 방법과 수단으로 전도를 하는 것이지 우리의 전도가 영혼을 살릴 힘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고전 1:21)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보세요. 우리의 전도, 원어는 설교입니다만, 우리가 하는 전도나 설교는 다 미련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전도나 설교는 그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질 때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시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미시적 해석으로 거룩이라는 것은 내적 순결의 상태를 말하고 흠이 없다는 것은 외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겉만 멀쩡한 사과가 속이 썩은 것처럼, 그렇게 위선적인 자들이 아니라 겉도 예쁘고 속도 실한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건 정말 요원한 일인 것 같은데요. 오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렇게 해 놓으신 것을 전가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음이 아니면 죽었다 깨어나도 구원 못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온전하게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하겠지요. 그래도 그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가슴 속에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오롯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로지 예수께서 해놓으신 일이 우리 것이라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우리에게 단 1%라도 있다면 우리는 천국 못 갑니다. 어제, 오늘, 내일의 삶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의는 ‘마음’까지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까지 다스릴 수 있나요? 죄에 대한 욕구, 욕정, 탐욕 정말 다스릴 수 있으세요? 정말 무서워서 소름 끼칩니다. 우리는 결코 자기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의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어서 우리가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다면 전 정말 자신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견인해 가신대요. 그래서 저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실할 거야.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나를 구원해 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님의 날에 나를 완성시키실 거야‘ 하고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집스러우신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으면 꼭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 거룩의 완성을 볼 것입니다.
(요일 3:2)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모양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밖에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라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우리가 예수와 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으므로 믿음이 필요하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데 무슨 믿음이 필요합니까? 믿음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에서 데리고 살고 싶으셔서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신 것입니다.
(벧후 3:14) "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So then, dear friends, since you are looking forward to this, make every effort to be found spotless, blameless and at peace with him.
우리에게는 그러한 삶이 요구되고 있음을 잊지 말세요.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살아지지 않을 때는 괴로워 라도 하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죄와 싸워볼 생각들도 안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앞에’(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서 또 한 번 놀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들입니까? 그것도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무엇입니까? 지옥의 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영원히 불에 타야 하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인데, 우리가 진노가 아닌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사도 바울이 설명하려고 하니까 모든 말에 앞서 ‘찬송하리로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그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예수께서 오셔서 죽으셨고 그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예수의 사역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완전한 새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의지라는 것은 지식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의지를 발동하여 행위로 옮긴다는 것은 그 것을 판단하는 지식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라는 단어자체가 모순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지식까지 어두움에 종속이 되어 버렸을 때 인간은 그 어두움의 지식에 종속된 악한 의지밖에 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뚫고 들어오셔서 그들의 심비에 하나님과 하늘을 아는 지식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오직 그들에게서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추구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어두움에 사로잡힌 자들이기에 자유로운 의지를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나중에 또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지요.
어쨌든 혹자들이 말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하에 있는 자유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숙명론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설명하면 주인이 어항을 이곳에서 저 곳까지 옮기려고 작정을 하고 의지를 가지고 옮기고 있습니다. 그 어항 안에서 물고기들이 싸움도 하고 사랑도 하고 전쟁도 하고 평화 협정도 맺으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그 어항은 저곳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과 작정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망적 관점에서의 예정을 자꾸 생각하지 마시고 역망적 관점에서의 예정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느 날 나의 모습을 보며 지금 이 모습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그 일들은 반드시 나의 삶 속에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을 우리가 간혹 깨닫지요? 그게 바로 역망적 관점의 예정인 것입니다. 아울러 확실하게 확인해 놓으세요. 성경은 논증이 아닙니다. 성경은 변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되어지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진술이며 제시입니다. 그렇게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믿는 자들을 우리는 신실한 자,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정이나 자유의지의 부분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해 놓으세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마세요. 어떻게 우리가 이 짧은 지식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것이 믿어지는 여러분에게 부어진 축복에 감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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