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우시고 채우시는 하나님
(김성수 목사)
(창 1:9‐23) “9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거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고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11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서, 낮과 밤을 가르고, 계절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15 또 하늘 창공에 있는 빛나는 것들은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16 하나님이 두 큰 빛을 만드시고, 둘 가운데서 큰 빛으로는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으로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나님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두시고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시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20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 창공으로 날아다녀라" 하셨다. 21 하나님이 커다란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22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창세기의 둘째 날 창조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이제 첫째 날의 빛과 둘째 날의 ‘궁창과 궁창 위의 물,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이 구속사 안에서 어떤 것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를 아셨지요? 오늘은 셋째 날부터 다섯째 날 까지를 공부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셋째 날에 물과 뭍을 나누십니다. 온통 물로 덮여 있던 지구에 땅의 융기현상이 일어나 땅과 바다가 나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의 지구는 셋째 날 전에는 온통 물로 덮여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땅의 기초를 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 24:1‐2) 1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거기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도 주의 것이다. 2 분명히 주께서 그 기초를 바다 밑에 놓으셨고, 강바닥에 단단히 세우셨구나.“
이렇게 땅이 생기게 되는 장면을 좀 더 자세하고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시편 104편에 있습니다.
(시 104:5‐9) 5 땅의 기초를 든든히 놓으셔서, 땅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6 옷으로 몸을 감싸듯, 깊은 물로 땅을 덮으시더니, 물이 높이 솟아서 산들을 덮었습니다. 7 그러나 주께서 한 번 꾸짖으시니 물이 도망 치고, 주의 천둥소리에 물이 서둘러서 물러갑니다. 8 물은 산을 넘고,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서, 주께서 정하여 주신 그 자리로 흘러갑니다. 9 주님은 경계를 정하여 놓고 물이 거기를 넘지 못하게 하시며, 물이 되돌아와서 땅을 덮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온통 바다였던 지구에 땅을 솟게 만드셔서 땅과 바다가 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다의 경계도 정해주셨습니다. (여담이지만 지질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원래는 땅과 바다가 지금처럼 오대양 육대주로 갈라진 상태가 아니라 땅은 하나로 뭉쳐있었고 바다는 그 땅 둘레를 감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지각 대 변동으로 오늘날처럼 땅이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오대양 육대주를 컴퓨터로 모아보면 흩어진 퍼즐들이 맞춰지듯이 정확하게 하나로 맞춰진다고 합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El gore의 강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강연에서 남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대륙을 컴퓨터로 붙여 보았더니 정말 퍼즐이 맞듯이 딱 맞았습니다. 그렇게 한 덩어리였던 땅이 노아의 홍수 때 지각의 대 변동으로 지금처럼 갈라졌다는 것이 지질학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학설입니다)
셋째 날에 땅과 바다가 그렇게 나누어졌습니다. 이 셋째 날의 창조사건도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창조의 사건처럼 현상론적 의미 뿐 아니라 영적이며 구속사적인 힌트를 담고 있습니다. 영적인 메시지를 들추기 전에 먼저 현상론적 접근으로 셋째 날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셋째 날까지 생물이 존재할 수 있는 터를 준비하십니다.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동식물을 비롯한 하나님의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대기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먹거리인 씨 맺는 채소와 과실까지를 셋째 날까지 다 만드시는 것입니다.
셋째 날 나누어진 땅과 바다는 그냥 아무렇게나 나누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다는 전체 지표면의 71%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바다와 땅의 비율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정확하게 7:3입니다. 만일 바다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거나 늘어나게 되면 땅은 온갖 과실과 열매를 전혀 맺을 수 없게 됩니다. / 지금보다 바다의 비율이 늘어나게 되면 수증기가 지나치게 늘어나 지구는 온통 습지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바다의 비율이 지금보다 줄어들게 되면 수증기의 양이 줄어들어 지구는 온통 사막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 지구상에서 동식물이 잘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바다와 땅의 정확한 비율이 7:3입니다. 그런데 그 비율이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비율을 조금만 건드리셔도 지구는 곧 멸망하고 맙니다. 그런데 벌써 그 말세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지요? 지구 온난화 현상(global warming)으로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바다가 차지하는 지표면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 빛을 받아서 10%를 저장하고 90%를 적외선으로 방출을 하게 되는데 탄산가스층이 지구를 덮으면서 적외선이 대기권 안에 자꾸 갇혀 버리는 현상이 온난화 현상입니다. 그 결과 빙하가 녹고 있고 바다의 지표면 점유 비율이 높아지면서 세계 각 곳에 홍수가 나고 있고 어떤 지역에는 극심한 가뭄이 일어나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들이 쌓고 있는 문명의 바벨탑이 낳은 열매인 것입니다. 인간들의 탐욕, 죄는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은 태초에 우리 인간이 생존하기에 가장 적당한 양의 물을 바다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다와 땅의 지표면 점유 비율도 정확하게 7:3으로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우주 만물과 자연의 법칙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오묘한 솜씨와 섬세한 배려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정말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제가 지난주에 병원엘 들렀다가 병원에서 사람의 신체 구조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라는 것이 얼마나 기기묘묘하게 만들어졌는지 너무나 신기해서 해부학 책까지 보면서 장시간 인간의 몸에 대해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인간의 몸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솜씨와 배려에 완전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000조 개의 molecule로 구성된 70조개의 세포가 모여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이루는데 그 70조 개의 세포가 저마다 먹고 마시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수 만 가지의 신진대사를 합니다.
그리고 밖에서 음식이 들어오면 소화기와 내장에서 그 것을 에너지로 바꾸는데 그 과정은 정말 신묘막측 합니다. 위, 소장, 대장, 간, 신장, 췌장 어느 것 할 것 없이 정확한 설계도에 의해 지어진 공장처럼 각기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각자에게 분담된 작업의 내용을 완벽하게 수행해 내고 있습니다. 산소를 공급하고, 독소를 정화하고, 고장 난 부분을 스스로 자가 치료합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손상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척수와 뇌, 그리고 내장은 든든한 뼈로 잘 싸여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마치 어떤 공장을 돌리기 위해 70조 명의 인부가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움직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잠시 그 일을 멈추면 우리 몸은 큰일 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최고의 창조물인 인간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늘과 바다와 땅의 틀을 마련해 주셨으며 먹거리까지 준비해 주셨고 인간의 몸을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mechanism으로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지점까지 도달할 때까지 세심하게 간섭하시면서 우주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를 제대로 알고 나면 하나님에게 무엇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가 감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문제에 갇혀서 천지 만물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너무나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 38:25‐30) “25 쏟아진 폭우가 시내가 되어서 흐르도록 개울을 낸 이가 누구냐? 천둥과 번개가 가는 길을 낸 이가 누구냐? 26 사람이 없는 땅, 인기척이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가 누구냐? 27 메마른 거친 땅을 적시며, 굳은 땅에서 풀이 돋아나게 하는 이가 누구냐? 28 비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누가 이슬 방울을 낳기라도 하였느냐? 29 얼음은 어느 모태에서 나왔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30 물을 돌같이 굳게 얼리는 이, 바다의 수면도 얼게 하는 이가 누구냐?”
보세요.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수고로 되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체가 존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우매한 인간들은 우리의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 하나님의 은혜와 솜씨와 배려를 그저 ‘견(見)하고 문(聞)’하며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셋째 날에 생명체가 존재하는데 필요한 틀이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틀이 완성이 되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셋째 날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십니다. (둘째 날에는 그 말씀이 없었지요?) 그런데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를 가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시고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을 창조하시고 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바다와 땅은 둘 째 날의 ‘궁창, 하늘’과 한 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이어 땅과 바다가 완성이 되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고 거기에 동물과 인간의 먹 거리인 풀과 씨 맺는 채소(곡물)와 열매 맺는 과목을 창조하신 후에 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은 둘 다 식량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틀을 완성하시고 식량까지 준비하시고 셋째 날을 마감하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인간이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입니다. 창세기 9장 3절에 보면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라는 말씀이 있지요? 그 때부터 인간이 고기를 먹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셋째 날의 현상론적 설명입니다.’땅과 바다를 나누시고 식량을 준비해 주신 것’
이제 그 셋째 날이 담고 있는 구속사 안에서의 영적 메시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뭍‘과 ’바다‘가 대조되어 나올 때 항상 ’뭍‘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바다‘는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다섯째 날 만들어진 바다 속의 생물 중에 ’타닌‘이라는 것이 등장한다고 설명해 드렸었지요? 창세기 1장 21절의 그 ’큰 물고기‘ ’타닌‘이라는 단어는 ’용‘’뱀‘’바다 괴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는 것으로 묘사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 51:9‐11) “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타닌)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시 104:2‐5) “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3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4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 같이 뛰었도다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이 구절들의 배경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홍해가 마르고 요단이 갈라진 사건입니다.
(출 14:21) 21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수 3:17) 17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잘 보시면 이 두 곳 모두에서 성경이 일부러 ‘마른 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과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하는 사건’에 굳이 ‘마른 땅’이라는 단어를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른땅’이라는 것은 바다가 완전히 물러갔음을 강조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여기서 쓰인 ‘마른 땅’ ‘하라바’는 ‘사막’ ‘dry land'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바다가 물러가고 강물이 말랐다 할지라도 그 바닥이 사막처럼 되겠습니까? 개펄처럼은 되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굳이 ’마른 땅‘’하라바‘’먼지가 날리는 땅‘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은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그러한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애굽 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에 빠져 죽는 것이고 가나안 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마른땅에서 올라오는 것이지요? 그게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셋째 날에는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마른땅에서 올라오는 인간‘하면 생각나는 것이 없으세요? 성경이 아담의 창조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아담이 ’흙으로 지어졌다’ ‘아다마 민 아파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 말을 정확히 번역을 하면 아담이 ‘흙으로부터 올라왔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른땅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가 되는 아담이 깊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이 홍해와 요단을 건너 마른땅에서 올라오는 그 사건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창조되는 새 창조를 의미한다는 것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셋째 날은 바다가 물러가고 마른땅, 뭍이 드러나는 새 창조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묘사에서 그 곳에는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라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셋째 날의 창조까지 다 마쳤습니다.
우리가 이 셋째 날까지의 창조, ‘구조적 틀의 창조’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갈라놓으신 것은 절대 합쳐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상론적 측면에서 볼 때는 이 천지를 생명이 존재하는 가장 적합한 환경으로 만드셨고 일정한 비율로 잘 나누어 놓으신 것이지만 영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합쳐져서는 안 될 것들을 분리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없어져야 할 것과 영원히 남을 것을 나누어 놓으심으로 지금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남겨놓은 그 것들을 이제 이 역사 속에서 치워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나누어 놓으신 것들이 합쳐진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 나누어 놓으신 어두움과 빛이 도로 합쳐져서 흑암이 된 적이 있었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재앙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던 고센 땅에는 빛이 있었는데 그 고센 땅을 제외한 애굽 전역이 흑암으로 뒤 덮였습니다. 그렇게 빛과 어두움이 도로 섞여서 빛이 사라지게 되면 생명체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에 빛과 어두움이 섞이는 흑암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날 나누어 놓으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도로 합쳐지고 셋째 날 나누어 놓으신 바다의 물과 육지가 섞이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노아의 홍수입니다. 그 사건도 역시 기식하는 것들이 모두 죽는 저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누어 놓으신 것은 합쳐지면 저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어두움과 바다를 물리치시고 빛과 뭍이 드러나는 창조의 사건은 우리 성도에게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세상을 분리시켜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성도를 거룩하게 분리시켜 놓으신 것은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듯이 그리고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드러나듯이 죄악 된 세상을 물러가게 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만을 남기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천명인 것입니다. 아니 영적으로는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세상과 분리시켜 거룩하게 만들어 놓으신 그 상태에서 다시 세상과 섞여 버리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창조적 분리’가 우리의 우매함과 나태함에 의해 다시 섞여 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바로 재앙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세상에 섞여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성도가 세상과 섞이게 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는지를 ‘파이데이아’ ‘징계’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순결하고 순전하게 우리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와 세상과의 관계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자들과 영원히 타는 불 속으로 던져질 자들의 분리로서의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쪽을 완전히 밀어내심으로 영원한 빛과 뭍의 나라를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내면에도 똑같은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새 사람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아직도 죄의 오염과 부패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새 창조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그 더러운 어두움과 바다를 모두 몰아내실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우리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써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어두움과 바다’로 대표되는 옛 것들을 벗어버리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 2:15)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 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여러분은 이렇게 여러분의 옛 사람과 세상의 삶의 원리에 섞여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첫 창조는 ‘어두움이 모두 물러간 빛의 세상, 궁창 아래의 물이 모두 말라버리고 궁창 위의 유리바다만 남는 세상, 바다가 모두 물러가고 뭍이 드러난 세상 ’즉 새 창조에 의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출발인 것입니다.
이제 넷째 날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 까지 셋째 날까지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틀에다가 내용물을 충만하게 채우십니다. 낮에는 태양을 다십니다. 그리고 밤에는 달과 별을 다십니다. 궁창에는 궁창을 나는 새들로 채우십니다.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에는 물고기로 채우십니다. 그리고 뭍에는 육축으로 채우시고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피조물 중의 왕 인간이 여섯째 날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은 첫째 날과 둘째 날과 셋째 날을 채우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넷째 날에 만들어진 태양과 달과 별에 의해 비로소 사계절과 낮과 밤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고 겪고 있는 해와 달과 낮과 밤이 바로 이 때 창조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태양과 달과 낮과 밤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배려와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 19:1‐4)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잘 보시면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셔서 낮과 밤을 인간들에게 주신 것은 그 낮과 밤으로 하여금 지식을 전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떠한 지식이겠습니까? 그 지식은 ‘이 세상은 결코 우연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지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은 변함없이 오고가는 낮과 밤을 보면서, 저 태양과 달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 분의 백성들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지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지식을 정확하게 안 사람이었습니다.
(시 8:3‐4)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이 지으신 해와 달과 별을 보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에 감격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낮의 태양과 밤하늘의 달과 별들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배어있는 하나님의 솜씨와 배려와 은혜와 경륜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실 수 있으셔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너무 바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들을 너무나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천지 만물에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사랑과 배려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 태양과 달과 별들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빛의 역할을 이토록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땅에도 빛으로 창조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빛으로 부름을 받아 빛의 삶을 명(命)받은 우리는 왜 이 모양입니까? 우리는 저 태양과 달과 별들을 보면서 우리의 이 게으르고 나태한 실존을 좀 직시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넷째 날 하늘의 광명들의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엿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첫째 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광체로 하는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그러나 세상을 주관하고 능력으로 역사 하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지 만물은 그 빛에 의해 주관되고 운행되며 움직여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공부했습니다. 태양이 없는데도 밤과 낮이 이미 있었고 태양이 없는데도 식물들이 자라났습니다.
만물의 생존과 자연의 법칙은 모두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력인 보이지 않는 빛에 의해 주관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태양이 없어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이 역사와 공간 속에 그 빛의 대리자로 태양과 달과 별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빛은 그 태양 뒤에 숨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일을 하시는 방법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태양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태양의 일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저렇게 일을 하시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미루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히 11:3)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 눈에 나타나는 형상과 현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타난 형상인 태양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그 속에서 읽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술’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의술’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모형으로,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 이런 계획이 있으시고 너희를 위해 지금도 이렇게 일하고 계신다는 확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빛의 사역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태양과 같은 역할을 ‘의술’과 ‘의학’과 ‘의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떤 질병에 걸리셨을 때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병이 나은 것이 의사를 통해 일어나지만 그 뒤에서 보이지 않는 빛인 하나님이 일을 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병에 걸렸을 때 기도원에 가서 병이 나으면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믿음을 높이 사주고, 병원에 가서 병이 나으면 마치 믿음이 없어서 ‘의술’에나 의존한 그런 사람으로 치부를 합니다. 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여러분 의술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들이 창조해 낸 것인가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2절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구절을 통해 어떤 것을 배우셨습니까?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될 때까지(새 창조가 완성이 될 때까지)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천지 만물을 품어 안으시고 계속 창조의 사역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창조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들이 태어나고 훌륭한 예술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엄청난 과학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성령 하나님의 간섭 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창조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 창조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빵 나무를 주시지 않고 밀을 심어서 추수를 하게 하시고 밀가루를 만들어 반죽을 하게 하시고 적당한 불에 적당하게 구워 빵을 만들게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 인간들의 질병을 치유하고 계시다는 모형으로 의술과 의사와 의학을 인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병원에 가서 병이 나은 것이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서 병이 나은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에 걸렸을 때 ‘나는 절대 하나님의 치유를 믿지 않아, 그러니까 하나님께 부탁하지 않고 의사에게 갈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이는 모형인 태양만 보고 그 뒤의 보이지 않는 빛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신자는 병에 걸렸을 때 병원에 가면 안 돼, 오직 하나님께 부탁해서 기도로 나아야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태양과 같은 모형으로 이 땅에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병에 걸렸을 때 병원에 가서 의사의 치료를 받는 동시에 그 의사의 손을 통해 일 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약 5:14)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여러분 이 구절이 강조하는 것은 ‘병에 걸리면 무조건 모여서 기도하라‘가 아닙니다. 물론 신자는 병에 걸리게 되면 맨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러한 병을 허락하셨는지, 그리고 이 고통 속에서 구원해 주십사 하는 기도를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해야지요. 그러나 기도만 해서 모든 병이 나을 거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기름을 바르며‘’알레이프산테스‘는 당시 고대시대의 의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시대에는 환자의 환부에 기름으로 문지르는 의술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병든 사람에게 ’모여서 기도만 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술을 의지하여 치료를 하면서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빛의 대행자로 창조된 태양과 달과 별을 보면서 그러한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지혜를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비합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로 흘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유지하시지만 하나님은 태양을 세워 그 뒤에서 일을 하십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며 일을 하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괜히 은 이를 금 이로 바꾸는 그런 일은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하늘의 비밀인 복음을 설명하실 때 간혹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자연의 법칙을 한 번도 거슬러 일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에게 무언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태양을 뒤로 가게도 하시고 지구의 자전을 멈추게도 하시고 만유인력의 법칙도 잠시 물리시고 물위를 걸으시기도 하셨지만 그 것은 모두 교회에게 어떠한 설명이 필요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때에는 성자 하나님 자신도 철저하게 자신이 만들어 놓으신 그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셨습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했고 몸이 피곤하면 주무셔야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병자들의 병을 기적처럼 신비하게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태양을 통해서 빛의 일을 하시듯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의술과 의사들을 통해서 병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손창호라는 탤런트가 있었습니다. 한 때 어떤 방송국에서 저하고 함께 방송을 진행한 적이 있어서 제가 잘 압니다. 그 분이 이혼을 하고 서울역에서 신부전증을 앓는 노숙자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병이 위중해서 시에서 가톨릭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지속적으로 투석을 하며 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어느 날 돌연 병원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시체로 돌아왔지요. 이유인 즉 병원에 잘 있는 그 분을 어떤 기도원 원장이 찾아와서 자기네 기도원에서 기도하면 금방 낫는다고 유혹을 해서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시체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여러분, 그건 아주 미련한 짓입니다. 그건 살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이 유방암에 걸리셨는데 기도 깨나 하신다는 분이 그 분께 절대 병원에 가지 말고 기도로 고치라고 권고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입니다. 병이 나면 병원에 가세요. 기도원에 가지 마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성경이 해와 달과 별을 그냥 큰 광명, 작은 광명이라고만 부릅니다. 왜 그랬을까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장 열심히 섬겼던 신이 바로 태양신이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섬기던 그 일월성신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이지 너희들이 섬길 대상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해와 달을 ’하나님이 만드신 큰 광명 작은 광명‘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렇게 넷째 날의 창조가 끝나고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둘째 날과 셋째 날의 틀에 새와 물고기, 그리고 육축으로 내용물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게 창조입니다.
‘틀을 세우시고 내용물을 충만하게 채우셔서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만드시는 것‘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도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주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시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틀을 세우시고 12사도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는 바로 그 새 창조를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새 창조는 우리 안에 이미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전은 충만하게 채워져야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채워져야 할까요? 성령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나간 자리가 성령으로 채워지지 않고 비어있으면 일곱 귀신이 들어온다는 복음서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늘 우리의 삶을 성령 충만한 삶으로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삶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까?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사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이지요.
‘십자가의 삶‘ 하나님은 첫 창조를 그토록 멋지게 끝내시고 안식을 하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시작된 새 창조도 반드시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이 나의 인격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 되는 그야 말로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전으로 우리를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으며 바로 지금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세상 속에서 연습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고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회는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이 하늘의 일이 되어야 하고 교회의 삶이 하늘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땅에서 푸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풀리고 교회가 이 땅에서 매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매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이 땅에서 창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창조는 반드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운내시고 다시 한 번 피곤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셔서 열심히 우리가 경주해야 할 트랙을 달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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