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5. 23.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김성수 목사)

 

 

구원은 바로 죄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십자가가 감사하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러나 진짜 무서운 마귀의 핍박과 공격은 예수를 믿고도 전혀 변함없이 자기 욕심을 위해, 자기의 쾌락을 위해 옛 습관과 경향대로 막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죄로 물들여 망가트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사단이 주는 환난과 핍박이라는 것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성경이 성도인 여러분을 성전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계 1:12-16) “12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13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가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14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15 발은 화덕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16 또 오른손에는 일곱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밧모 섬에서 성령에 감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 요한을 공부했습니다. 성령에 감동한 요한이 그 환난과 핍박의 장소인 밧모 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처럼 성령 안에 있는 우리도 역시 이 객관적인 현실 속에서 예수를 볼 수 있는 자라는 것을 함께 확인했지요. 제가 수요일에는 에베소서를 강해를 하고 있는데 마침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요즘 공부하는 부분이 죄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죄인이었는가?’

 

제가 너무 강하게 죄에 대해서 지적을 했지요? 왜 다소 지나치리만큼 인간과 죄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다루었는가 하면 구원은 바로 죄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십자가가 감사하게 느껴지겠습니까? 복음은 바로 우리가 떨어졌어야 할 지옥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제자들이 분명 복음을 전하러 나갔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전했을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너희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자각하고 도우심을 구하라’ 는 말입니다. 죄인임에 대한 자각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죄에 대한 지적이 있을 때 여러분이 부담을 느끼시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감격 하셔야지요. 그리고 주일에는 요한 계시록을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환난에 대해서 많이 설교를 합니다.

 

지난주에는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는데 제 삶에는 그런 환난이 없는데요, 저는 가짜인가요?’ 그러시더라고요. 여러분, 환난에 대해서 잘 정리를 하고 계셔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은 물론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아픔과 통증으로도 우리에게 옵니다. 견디기 힘들죠. 그러나 진짜 무서운 마귀의 핍박과 공격은 예수를 믿고도 전혀 변함없이 자기 욕심을 위해, 자기의 쾌락을 위해 옛 습관과 경향대로 막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죄로 물들여 망가트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 것이야 말로 우리가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사단이 주는 환난과 핍박이라는 것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물론 당시는 즐겁습니다. 아무런 고통이 없지요. 그러나 신앙이 점점 성숙해 지게 되면 그렇게 살았던 삶이 엄청나게 괴로운 기억으로 남습니다. 여러분, 환난과 핍박 하니까 무조건 사업이 망하고 병이 걸리고 그런 것만 떠 올리시는가 본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환난은 보이지 않게 우리 삶을 타락시키는 폭풍 속의 고요입니다.

 

평안을 가장한 핍박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환난과 핍박의 내용입니다. 아무 일 없다고 해서 왜 나에게는 환난이 없고 핍박이 없지? 하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 사람은 부자라서 저 사람은 얼굴이 잘 생겨서 저 사람은 건강해서 아무 환난도 경험하고 있지 않을 거야’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환난과 핍박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신 장로님께서도 성경을 가르치시면서 환난과 핍박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를 하시니까 어떤 분이 ‘장로님은 부자라서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모르고 그렇게 말씀 하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돈이 많으면 환난과 핍박을 모릅니까? 여러분, 45일 동안 잠 못 자 보셨어요? 여러분 2년 동안 악성 관절염으로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을 면도칼로 긁는 듯한 고통을 느껴보셨나요?

 

여러분 걸핏하면 코피가 흘러 멈추지 않아서 911에 실려 가는 고통을 당해 보셨습니까? 환난과 핍박과 고통이 뭔지 몰라서 그렇다고요? 사람들은 철저한 인본주의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 고통이 제일 큰지 알아요.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는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쓰인 ‘람바노’라는 헬라어는 누구나 흔히 겪는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만큼의 아픔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다고 나만 제일 불행하다고, 내가 제일 큰 환난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게 환난의 당위성과 필연성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게 부담스럽기만 하시다면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은 아직 땅에 눈을 두고 계신 분 들일 겁니다.

 

12절부터는 요한이 자기가 본 예수님을 자기가 알고 있는 구약의 표현을 인용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바라봐야 할 그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한은 아홉 가지로 그 분을 묘사합니다. 맨 먼저 우리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 그 사람의 신분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지금 요한이 예수님의 옷을 묘사하면서 그 분의 신분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은 제사장의 옷을 말합니다. ‘발에 끌리는’ ‘포데레’는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에 한번밖에 안 나오지만 70인 역 LXX에서는 일곱 번이 나옵니다. 거기서 이 ‘포데레’는 전부 제사장의 의복과 연관해서 쓰이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에 발 뿐 만이 아니라 신체의 어떤 부분의 살도 겉으로 나오면 안 되었습니다. 얼굴과 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철저하게 가려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이후 인간의 몸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부분을 철저하게 가렸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사장들은 머리에 관을 쓰고 발을 덮는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에 그 제사장의 옷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제사장의 옷은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 28:4) “4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지며”

 

(출 29:5) “5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레 16:4) “4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제사장의 옷은 속옷과 겉옷과 에봇과 흉패로 나누어집니다. 흉패는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이 박혀있습니다. 12지파는 교회 즉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전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그 흉패는 정사각형입니다. 그리고 옷감은 성막을 짓는 천과 같은 것입니다. 사용하는 실의 색상도 유사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사장이 입고 있는 옷은 성막을, 성전을,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막의 지성소는 정사각형이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고 모자란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흉패도 정사각형입니다. 지성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성막을 입고 있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요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 텐트를 치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장막으로 덮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계 7:15-16)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21:2-3)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자세히 보시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쳐주시는 장막 아래 보호를 받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이제 이 정도의 연관성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은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사장이 성막을 입고 있다는 것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이신 그 분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게 되는 것을 우리는 제사장의 옷을 입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 3:27)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그 제사장의 옷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서 계십니다. 촛대는 교회라고 했지요? 교회는 또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를 성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오해는 마세요. 제가 말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지 붉은 벽돌로 지은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건물은 예배당이지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참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인 여러분을 성전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계 15:6) “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띤 예수님이 어디로부터 나오십니까? (왜 일곱 천사가 예수님을 상징하는 지는 나중에 그 부분에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성전으로부터 나오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 계신 대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본문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십니다. 허리가 아닌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던 사람은 왕이었습니다. 고대 시대 왕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대제사장은 하늘 성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대제사장은 왕이면서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끌리는 옷을 입으시고 가슴에 금띠를 띤 분은 왕이시면서 제사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나팔 같은 소리로 말씀을 하십니다. 나팔 같은 소리로 하늘의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누굽니까? 선지자들. 바로 그 분이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요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시라는 것입니다.

 

초림 때는 누더기 옷에 흠모할 것도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그 영광을 회복하시고 영광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 모습으로 영광스러운 재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읽어내야 합니다. 초림 때는 구원을 이루시려 오셨지만 이제 그 분은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을 보세요. 14절을 보시면,

 

(계 1:14)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라고 나옵니다. 이 구절은 다니엘서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단 7:9-10) “9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다니엘서는 분명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하나님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바로 예수님이 그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분은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 우리를 구원해 내신 제사장,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심판자이시라는 것을 요한은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백발은 영광과 위엄, 영광의 면류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백발이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레 19:32) “32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잠 16:31) “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요한은 그러한 구약의 상징을 이용하여 이제 하늘 영광을 회복하신 영광과 위엄을 소유하신 예수님께서 심판자로 오실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불꽃같은 눈을 갖고 계십니다. 14절 ‘그의 눈은 불꽃같고’ 불꽃같은 눈도 역시 상징이지요. 공중기도 하시는 분들이 가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요?

 

(단 10:5-6) “5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계 19:11-12)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불꽃같은 눈도 보시다시피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 분 앞에서는 감추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며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삶을 관찰하시고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마 10:26) “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큰일 났지요? 하나도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심판만을 이야기하시는 것일까요? 그럼 우리가 기도하라 때 ‘주님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 우리에게 심판을 내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되나요? 이 말씀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말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심판의 말씀들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축복의 말씀인지 함께 보자고요.

 

요한 계시록 19장에 보면 그 불꽃같은 눈을 하신 심판의 예수님께서 발에 끌리는 제사장 옷을 입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옷에 피가 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무리는 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왜 그런 모습일까요? 이 모습을 머리에 잘 그려 보세요. 이 부분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49장11절로 먼저 가야 합니다.

 

(창 49:8-11)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그 중 유다에게 유언을 하는데 유다의 후손에서 ‘실로’ 곧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는 암 나귀 새끼를 타고 그 옷을 포도주에 빨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바로 ‘suffering of christ’‘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는 모습으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른 자들의 저주를 몸에 받고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면 그 옷을 포도즙(원어로는 포도의 피 입니다) 틀에 빤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 63:1-6)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죄인들을 포도즙 틀에 놓인 포도들처럼 밟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발에 밟혀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밟히셨습니다. 그 분의 옷에 피가 튀었습니다. 죄의 대가로 흘려야 할 이스라엘의 모든 피가 그 분께 튀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고 예수가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제사장이 아무리 금실 은실로 짠 좋은 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제사를 드리면 그 제물의 피가 옷에 낭자하게 묻게 됩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잡고 제단에 바치면서 그 옷에 피가 묻게 되는 것은 바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계시록19장 15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십니다. 그런데 그 포도에게 돌아가야 할 피가 전부 튀어서 예수님의 옷에 묻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은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원래 그 피는 그 뒤에 좇아오는 사람들 것이었는데 예수님의 옷에 그 저주의 피가 다 튄 것입니다.

 

이렇게 불꽃같은 눈은 포도주 틀을 밟는 것과 연결이 되는 것이고 그 것은 심판과 함께 구원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달라는 기도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고 마지막 때에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듯 밟으실 것입니다. 피의 저주가 그 포도주 틀에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무리의 저주는 예수님께서 친히 담당하셔서 건져 주실 것이라는 것을 구약에 능통했던 당시 초대 교회들은 감격 속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불꽃같은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아시겠지요?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두 눈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 중에서 교회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 속에서 교회답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래서 잘 못 가고 있는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그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내실 그 불꽃같은 눈이 우리의 이 엉터리 같은 삶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계 2:18-20)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우리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세상을 심판하시고 교회를 구원하실 것이며 혹 우리가 잘 못 갈 때 그 분이 지금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면서 우리를 책망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시 139:7-10)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무 데도 도망 못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은‘빛난 주석’같았다고 요한은 묘사합니다. 주석은 헬라어로 ‘칼콜리바논’입니다. 이 단어는 놋쇠‘칼코스’와 유향, 향나무‘리바노스’라는 단어가 복합되어 생긴 단어입니다. 놋쇠는 능력 권위 주권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 발이 주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계 10:1-2) “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오른발로 바다를 왼발로 땅을 밟고 계신 그 발, 그 분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라는 말입니다. 그 분의 발은 원수인 마귀의 세력 또한 밟아 뭉개실 것입니다.

 

(시 110:1)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 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예수님의 발이 주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기시고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주석은 놋쇠와 유향의 합성어라고 했지요? 유향은 제사 때 드려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이 있지요? 바로 제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엡 5:2)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능력의 왕으로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가지신 그 권위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 진 것이냐? 바로 자신을 제사로 드린 영단번의 제사, 십자가로 그 권위가 주어진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주어진 고난입니다. 그게 주석이라는 단어가 가진 뜻입니다. 그 주석이 어떤 주석입니까? 풀무에 달구어낸 주석입니다. 풀무에 달구어냈다는 것은 고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발이 주석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고난을 통과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계 3:18)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2:9)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여러분 정말 부요하고 싶으세요? 성경의 부요를 맛보고 싶으십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참 부요 함이라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는 것이 부요함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그리고 그 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에스겔서에서 인용을 한 것입니다.

 

(겔 43:2) “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음성을 그 하나님의 음성을 묘사하는 단어를 가져다가 표현을 했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구약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택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물소리’라는 단어는 절대적이며 쉬지 않고 힘차게 나타나는 권위의 음성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목소리로 예수님은 교회에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지는 편지 서두에 모두 ‘타데 레게이’‘가라사대’하고 시작이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늘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기적으로 일하시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몇 초만 나타나셔서 ‘나 있다’ 그러고 가시면 전도가 잘 될 텐데 왜 안 그러십니까? 이 패역한 인간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도 못 믿는다는 말입니다. 방법은 성령을 통해서 뿐입니다. 기적을 원하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부어주셨다면 기적 같은 것 없어도 얼마든지 기쁘고 행복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그런데 자꾸 기적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아직 선물로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자꾸 신기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알파코스라는 것이 요즘 한국 교회를 강타하고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바로 한국교회의 믿음 없음을 증거 하는 것들이라 확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씀 안에 완전한 하늘나라와 복음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 좇아다니지 마세요. 여러분 ,지금까지 제가 설교한 내용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됩니까? 아니면 불편하십니까? 저는 애써 기쁜 소식, 복음을 전했는데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쁘세요?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시면서 정말 예수로만 만족하십니까? 심판과 저주의 재림 때 그 저주에서 건져내어졌다는 그 사실만으로 정말 기쁘신가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는 어떤 것으로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 기뻐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 듣고 있기 때문에 몇 번이고 확인하고 확인한 후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설교를 합니다. 저 때문에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옥가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저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뭔가 잘못 된 것 아닙니까? 저는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여러분이 다른 더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제게 원하신다면 뭔가 잘 못 되도 한참 잘 못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제발 복음을 이해하세요. 정말 복음이 뭔지 바르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매일 매일 확인하세요.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