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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평강(平康)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5. 23.

 

 

평강(平康)

 

(김성수 목사)

 

 

(엡 1: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부터 에베소서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의 구조는 1-3장까지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천국의 시민으로 만드시는가가 기술 되어있고 4-6장까지는 그 천국 시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에는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그 편지의 인사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편지의 발신자는 사도 바울이고 편지의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인사말을 하는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라고 인사말을 합니다. 이 두 절에서도 우리가 함께 공부해 보아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가 뭔지, 성도가 뭔지,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은혜와 평강이 뭔지 등등 함께 공부해야할 부분이 많은데 오늘은 먼저 그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평강이 무엇인지부터 공부할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강이 무엇입니까? 평화가 금방 떠오르지요? peace,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말은 ‘샬롬’입니다. 샬롬은 말 그대로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굳이 요세프스의 유대 전쟁사를 읽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유대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사도 샬롬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사말은 대체로 그 시대의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시금석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옛날에 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먹고 사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식사를 했는지를 묻는 것이 인사말이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에 세끼를 먹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 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영국 사람들은 기후가 너무나 안 좋아서 항상 인사가 일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사말이 ‘Good morning’ ‘good afternoon'인 것입니다.

 

왜 사도가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 ‘평강’이라고 인사를 하는지 짐작이 가시지요?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그저 싸움이 없고 다툼이 없고 평안한 상태를 평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원수지간이었던 자들이 서로 화해를 하고 돌아서서 부둥켜안는 것 까지를 평강이라 합니다. 그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연합의 의미가 더 큽니다. 성경은 분리가 있은 뒤에 오는 연합을 평강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그 평강은 누구와의 평강일까요? 사도는 하나님과의 평강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범죄 한 인간은 모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아담 이후로 하나님과 평강의 관계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어떤 한 무리에게 하나님과 화해가 되어야만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평강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지금 평강을 빌고 있는 분은 사도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평강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 평강이 어떻게 오게 되었지요? 성경은 그 짧은 두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잘 보시면 그 짧은 두 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사도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것이며,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이며, 그들에게 주어질 것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주어지는 것임을 성경은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기에 저주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담지하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계십니까?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 안에 그 분이 구약에서 약속한 바로 그 메시아이며,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그 평강이 예수로 말미암아 왔다는 신앙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누차 설명 드렸듯이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니라 ‘title’입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아가 헬라어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메시아 예수를 철저하게 인정한 기독교인이란 것입니다. 당시는 예수를 메시아로 부르고 따르는 자들은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했던 시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하릴없이 죽어버린 그런 나약한 목수가 아닌 힘 센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그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무엇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까? 은혜와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그 평강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만들어져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도 평강을 이야기 합니다.

 

(렘 14:13-14) 14:13 그래서 내가 아뢰었다. "그렇지만 주 하나님, 저 예언자들이 이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근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2)주님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화를 주신다' 합니다.(" 히, '내가')

 

(14:14)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예언자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예언자로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은, 거짓된 환상과 3)허황된 점괘와 그들의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이다." (또는 '우상 숭배와')

 

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너희에게 평강을 주실 ’이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지요? 나는 그런 애들 보낸 적 없다. 거짓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전히 범죄하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행위로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는 그들은 하나님이 오시면 곧 저주받아 죽어야 할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라는 자들이 ‘아니다 너희는 평안하다, 평안하다’하고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므로 메시야가 오면 자기들을 칭찬해 줄 것이며, 자기들만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가르쳤던 것과 똑 같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알매니안 주의를 근간으로 한 모든 종교가 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행위를 보태면 죄인인 인간들에게도 평안이 올 수 있다는 가르침, 그 것은 이단적 사설인 것입니다. 그 평안은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도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평안은 하나님께서 전적인 그 분의 주권 아래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14절을 보세요.

 

(렘 6:14) “그들이(가짜 선지자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기적도 일으키고 병도 낫게 하는데 하나님은 평강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짜들은 거짓평화를 전한다고 합니다. 병이 낫고, 환경이 좋아 지고, 생활이 윤택해 지는 것이 참 평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그런 평강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 날도 그런 거짓 평안을 외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고, 소원이 이루어지며,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이 만사형통(萬事亨通)으로,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이루어지고, 병도 안 걸리는 그런 요술램프를 쥔 알라딘 같은 신앙을 외치는 자들이 널리고 널려있습니다.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물질적, 공간적 편이들이 내게 주어져 있지 않을 때, 그 때도 사라지지 않는 그 어떤 하늘의 것을 ‘평안’‘에이레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을 참고해 보지요.

 

(요 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눅 12:51-53)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5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3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잘 보세요.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평강은 아무 일 없는 조용한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분쟁이 생깁니다. 싸움이 생깁니다. 예수님 때문에 친한 친구들이 떠나가고 예수님 때문에 가족 사이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평강은 전쟁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왼손잡이 에훗의 시대에 태평을 이야기하면서, 삼갈의 전쟁이 그 에훗의 시대에 동시에 묘사 되어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반석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태운 그 하나님의 표적의 자리에서 여호와 샬롬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나서, 평안을 외치고 나서, 바로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찍으러 가야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평강은 그렇게 태평성대(太平聖代)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 때문에 손해보고, 예수 때문에 고단하고, 예수 때문에 멸시받는 것이 평강이 임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렇게 당하면서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 마음은 기쁘고 잔잔하기만 한 것을 성경이 말하는 평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평강은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평강입니다. 그래서 그 평강은 선물로밖에, 은혜로밖에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갖고 있는 것은 전부 물질적, 공간적, 제한적 질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주어지는 평강은 참 평강이 아닙니다. 따라서 참 평안, 참 평강, 참 평화는 이 세상의 것을 질료로 하는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그 근간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선물로만 주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진리입니다. 'intrusion', 하나님께서 뚫고 들어와서 마음속에 새겨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평강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론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빛이 왔는데 아무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해서 세례요한이 빛을 설명하러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그 평강은 죄인들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점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 주십니다.

 

(눅 19:37-42)19:37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38 2)"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시 118:26) 39 그런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40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41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42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시며 죄인들이 그 평강을 원하지도 않으며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죄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십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에 복음의 씨가 떨어져도 결실을 맺는 것은 좋은 밭뿐이란 것을 설명하시면서 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3:13-17)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 하였느니라”

 

보세요. 분명 성경은 인간들 스스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평강을 쟁취할 수 없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 평강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10 명의 청년들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중 주축 멤버였던 우리 지영이가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학원을 개원하면서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지영이가 그냥 살짝 눈 한번 질끈 감고, 법을 조금만 어기면 두루두루 평안하고 무리 없이 진행이 될 만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크게 남에게 해가 되는 범법 행위도 아니었습니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지날 수 있는 관행 같은 것이었는데 지영이는 그것으로 아주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밥을 먹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렇게 불법적인 것을 하면서까지 학원을 개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친구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자로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어린 청년들의 그 몸부림에 함께 가슴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정하고 난 지영이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렇게 진행해 나갔습니다. 물론 약간의 편법을 쓴 것보다 상당히 많이 힘들었고 흘린 눈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예수를 믿는 자로서의 평안을 누리는 그 아이를 보면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의 평안이 바로 저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평강입니다. 세상의 일이 잘 되어서 주어지는 기쁨은 ‘편안’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세상은 절대 흉내 낼 수도 없는 그 것이 바로 평안, 평강, 평화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삶을 간섭하고 있는 그 진리에 기쁘게 순종하며 가는 것을 성경은 평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어떻게 그런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세상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그런 평강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직 그 분의 공로로만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정말 기적 아닙니까? 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이 물질 세계 속에 있다면 저에게 소개 좀 시켜 주세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안타까워하실 만큼 그 평강은 죄인들이 바라지도 않고 보지도 못하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 그 평강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 같으면 지금이라도 목을 맬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쁨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배짱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기적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 기적 앞에서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 평강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사 45:7) “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그렇지요? 죄에 빠진 세상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죄인들이 평강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강은 하나님께서 지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올바로 인식한 자들에게만 복음이 ‘복음(福音)’으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평강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벗어날 수 없는 그러한 어두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평강이 약속된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을 보십시오.

 

(사 9:6) “6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2)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3)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또는 '놀라운 자, 조언자' 또는 '권좌에 앉으신 이')

 

한 아기가 태어나는데 그 아기의 이름이 평강의 왕이며 그 아기로 말미암아 평강의 더함이 무궁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평강이 없는 세상에 평강을 주시는 방법이 이 한 아이를 통해서 입니다. 성경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집니다.

 

(슥 9:9-10)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10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로 말미암아 이방사람들에게 ‘평강’‘솨롬’이 전해 질 것이라 예언하십니다. 그런데 그 평강은 기가 막히게도 이렇게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사 53:5)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엡 2:14-17)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15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16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평강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수난의 정점에 선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의 찔림이 없으면 절대 그 평강은 우리에게 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상함이 없었다면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인지하고 얻을 수 있는 그 평강이 우리에게 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 평강은 바로 십자가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의 삶을 뚫고 들어 온 십자가,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 평강이 넘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입니다. 감옥에서 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더럽고 불편한 감옥에서 사도 바울에게 바로 그 평강이 넘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감옥에 있는 바울이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강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누리는 평강, 이해가 가세요? 이제 성경이 말하는 평강의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 지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그 평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주받아 신칙하여 돌격하여 죽여 버려야 할 그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의 연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원수였던 우리 성도들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서로 돌아서서 서로 부둥켜안고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평강, 그 평강을 무엇과 바꾸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평강을 누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십니다. ‘너희들은 한 몸이니 세상과 너희는 반목하더라도 너희끼리는 평강을 누려라. 너희 안에서는 그 하늘의 평강이 있게 하라’고 하십니다.

 

(골 1:20)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3:15)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러한 십자가로 말미암아 평강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들입니다. 그러한 수직적 화해의 장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수평적으로도 화해와 평강의 장을 이루어 내게 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과 화목케 된 분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끼리도 당연히 화목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 평강을 소유한 자들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서로서로의 관계에서 평강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평강을 빌어주어야 하며 우리 가운데에 늘 평강이 흐르도록 해야 할 은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평강을 누리고 계십니까?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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