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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천지 창조의 교훈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5. 18.

 

 

천지 창조의 교훈

 

(김성수 목사)

 

 

(창 1:1‐2)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우리는 지난주에 우리가 공부하는 이 창세기가 어떻게 요한 계시록으로 흘러가게 되는지, 그리고 이 창세기는 어떤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아울러 과학과 합리를 통해 창조론이 옳을 수밖에 없음을 간단하게 변증을 하고 마쳤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성도는 그러한 변증이 필요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변증 없이 ‘믿음’으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하도 시비 거는 사람들이 많아서 제가 잠시 반박을 해 본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아무런 변증 없이도 믿습니다. 그것도 완전한 ‘무(無)’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창조’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바라’ ‘야차르’ ‘아사’ 가 그것인데 이 세 단어 중에 ‘바라’는 아무 것도 없는데서 어떤 물질을 만들어 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고 ‘야차르’나‘아사’는 기존의 재료를 사용해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당연히 창세기 1장 1절에는 ‘바라’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던 곳에서 천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땅에 영원하며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영원하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태초에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1절에 쓰인 ‘태초에’ ‘레시트’는 ‘시간의 시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만물이 창조에 의해서 형태화 된 그 시점이 바로 ‘시간의 시작’이라는 말이지요. 그 말은 ‘물질의 존재’와 ‘시간의 시작’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라는 것은 물질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시간이라는 것은 물질이 존재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없이 물질이 있을 수 없고 물질이 없이 시간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만물은 시간 내에서 존재하고 시간 내에서 소멸됩니다. 그러니까 사물은 ‘시간’이라는 것을 그 존재방식으로 갖게 되는 것이고 존재가 소멸하면 그 존재는 ‘시간’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초 전,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하나님 이외의 존재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 만물은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 맞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말처럼 ‘무(無) 적(的)인 어떤 형이상학 적 재료’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무(無)에서 창조 된 것입니다.

 

그림을 한 번 그려보세요. 성경은 시간이 창조되기 이 전의 상태를 ‘영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은 지속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 속에서 천지 창조를 계획하셨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그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 속에서 창조가 시작된 그 시점을 우리가 ‘시간의 시작’ ‘역사의 시작’ ‘레시트’ ‘태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창조된 물질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소멸되고 새 세상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최후의 종말’ 다른 말로 ‘시간의 소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소멸되고 나면 다시 영원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물질인 육체를 벗어나게 되는 그 죽음의 순간 시간을 상실하게 되고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순간 물질이 아닌 영혼으로 존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간은 물질이 존재하는 방식이지 영혼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시간에서 영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의 존재 방식이 시간이고 영의 존재방식이 영원이므로) 그래서 ‘영원한 지옥’ ‘영원한 천국’이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인 그 영원 속에서도 ‘육신’을 입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때 입을 육신은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물질’로서의 육신이 아닌 ‘새로운 육신’입니다. 그 새 육신은 지금의 이 육신처럼 시간을 존재 방식으로 하지 않는 새로운 육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벽을 뚫고 들어오시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나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초’ ‘시간의 시작’ ‘레시트’는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물질로 변형된 그 순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에서 ‘존재’를 있게 하시고(창조를 하시고) ‘시간’과 ‘물질세계’ 속에서 다른 말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이며 그 곳은 우리 성도들에게 어떻게 주어지게 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그 나라를 선물해 주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지를 자상하게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힌트 할 뿐만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창조된 에덴과 아담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힌트하고 있는 동시에 물질세계 속에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창조는 새 창조를 힌트하고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첫 창조가 완전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은 그 첫 창조 자체가 목적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 작정 속에서 그 첫 창조가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첫 창조가 완전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게 목적이었고 그 목적에 맞게 완전하게 창조되었다면 피조물이 타락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아주 중요한 이슈가 하나 대두되지요? ‘만일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역사가 그렇게 하나님의 작정의 형태화에 불과하다면 선악과 사건도 아담이, 하나님도 기대치 않았던 실수를 우발적이며 돌발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까지도 작정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죄의 조성 자 아닙니까? 혹시 이런 질문 안 드세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께서 ‘죄’를 계획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은 죄의 조성 자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와 악은 최고의 선이신 그 분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는 아담의 삶 속에 ‘죄’라는 것이 들어 올 수 있는가? 그게 신비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섭리‘를 설명하는 부분인 5장 2항에 보면 제 1원인이신 하나님은 제 2원인인 인간의 의지나 감정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들이 자유롭게, 우발적으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하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에게 죄를 강요하셨다면 심판의 근거가 없어지지요? 그러니까 선악과 사건을 비롯한 그 이후의 이 땅의 모든 죄들은 하나님께서 강제로 시키신 것이 아니라 인간과 타락한 천사들이 자발적이며 자유롭게 저지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도저히 우리 인간의 지성과 논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을 때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것을 선용하셔서 만민의 생명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창 50:19‐20) “19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20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판 것을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이 아님에도 그 모든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흘러가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시기에 가능 합니다’ 현대 신학은 거기까지밖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논리를 들으시고 ‘난 도저히 수긍을 못하겠다. 그래서 난 그런 기독교를 믿을 수가 없다’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어서 어서 근처의 달마사나 다른 절로 가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고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을 믿습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1절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그냥 믿는 것입니다. 믿겨지니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한계가 얼마나 보잘것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택한 백성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 이외에는 하늘의 비밀을 모두 감추어 두셨습니다. 가르쳐 주신다 해도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것들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감추신 것을 우리가 밝히겠다고 나서서 온갖 억측과 상상으로 엉뚱한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 자체가 헛된 일이요, 죄악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구원에 필요한 내용만큼은, 아니 그 내용만 성경을 통해 충분히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이라도 열심히 공부하자고요. 그렇게 첫 창조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작정이 가시적으로 힌트 되고 있는 것이며, 형태 화 된 것이며 또 그 작정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첫 창조의 세상과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잘 아시겠지요? 여러분의 배를 불리고 여러분의 명성과 자랑을 쌓으라고 역사와 만물이 존재하는 것 아닙니다. 이 역사와 만물의 존재의 목적은 오직 하나,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에 알 맞는 자로 지어져 가는 일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두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것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창조의 회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의 회복’이라고 하면 자칫 ‘완성 될 하나님 나라’를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지요? 하나님 나라는 그런 의미로서의 ‘창조의 회복’이 아니라 ‘첫 창조에 새 창조의 내용이 이미 충분하게 힌트 되어졌고 계시되어졌었는데 그 힌트 되어졌던 내용이 완성된 나라’라는 의미에서 ‘창조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덴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 나라가 에덴으로의 회귀라면 거기는 또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곳이 되니까요)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 다른 말로 구원의 완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창조를 빼 버리면 구원도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뭡니까? 그 ‘구원’으로 말미암게 될 ‘완성 된 하나님 나라’ ‘새 창조의 완성’이라는 것은 첫 창조 때 그 창조 속에 계시 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로 만물을 회복하시는 것’이 ‘완성된 새 창조’입니다. 첫 창조를 통해 새 창조를 힌트 하신 어떤 절대자가 첫 창조를 말씀으로 무에서 해 내신 것처럼, 새 창조도 말씀의 능력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이 구원이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 아닙니까? 그러니까 첫 창조가 없이는 우리가 새 창조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 창조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새 창조를 첫 창조에서부터 시작하셔서 타락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실현해 나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첫 창조가 없으면 구원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고 새 창조로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한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원래의 목적이었던 ‘구원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시간의 시작부터 ‘창조, 타락, 실낙원, 구원, 새 창조의 완성’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현실이 묵시 속에서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말씀을 통해 그 분의 백성들에게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첫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 일을 실현시켜 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첫 창조가 없이는 새 창조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고 왜 인간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자들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왜 인간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분께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지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절대자가 계셔야 그 분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죄인들 속에 새로운 창조를 완성하실 구원자가 되실 수 있으므로 창조 없는 기독교는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 종교에서는 ‘구원‘이 창조의 부정 내지 거부로 나타나게 됩니다.

 

힌두교의 구원은 존재자들이 우주의 영혼인 브라마와 합일하여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상실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의 구원은 ‘해탈’이라고도 부르는데 해탈은 존재가 무로 돌아가서 생의 바퀴 곧 윤회의 과정을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종교에는 ‘창조’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창조는 더럽고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밖에 많은 이방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이방 종교들이 만물은 영원 전부터 존재했었으며 그 개별 존재로부터의 해탈이 구원이라는 구원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에서는 그들의 구원을 창조의 부정 내지는 거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를 부정하고 멸절 시키는 것을 ‘구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창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시대정신들 물질주의, 유물론, 성공주의, 자연주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요즘 토요일 새벽마다 저희 서머나 교회 장로 안수집사 후보들과 같이 기독교 강요를 공부하고 있는데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바로 그 것이 ‘죄’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고 부인하려는 의도로 하는 모든 행위’ 그게 죄입니다. 왜 창조론과 진화론이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자들은 창조자와 창조를 거부하는 것을 ‘구원관’으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창조론 이 아닌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부정하는 마귀의 세력이 역사를 통해서 내어놓은 것들을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지요.

 

창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무신론(無神論)을 주장합니다. 창조와 창조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신은 없다고 우깁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자기보다 힘이 센, 자기를 벌 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니체처럼 신은 없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창조를 믿고 있는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죄인들을 벌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상을 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늘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게 되는 것이지요. 천지 만물이 이렇게 조화롭게 규칙적으로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 아닙니까?

 

어떻게 낮과 밤의 길이가 이렇게 일정하지요? 어떻게 수십억 수천 억 개의 별들이 그렇게 제 자리를 지키며 정확한 궤도로 돌고 있습니까? 어떻게 지구를 비롯한 그 무거운 별들이 허공에 떠 있습니까? 왜 그 별들은 만류인력의 법칙을 거스리며 그렇게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까? 그것들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 만물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질주의(物質主義)’ 또는 ‘유물주의(唯物主義)’를 주장합니다. 보이는 것, 물질이 우주의 전부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물질 이전, 시간의 이전, 태초 전부터 존재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물질을 창조하셨으며 그 것을 당신의 뜻에 따라 이용하시는 분이시라는 것도 압니다. 이 천지 만물은 하나님께서 잠시 사용하시는 것들이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없습니다. 유물론 철학자들은 물질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보다시피 물질은 필요에 따라 잠시 존재하는 것일 뿐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물질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창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물질과 인간, 물질과 신을 동일시하는 ‘범신론(汎神論)’을 내어 놓기도 합니다. 범신론이란 인간과 신, 물질과 신을 동일시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사물 안에 존재하며 그 사물이 또한 하나님이라고 믿는 철학이 범신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만물은 만물이지 하나님과 만물은 하나가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열심히 수행하고 고행하고 정진하는 것입니다. 신이 되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우리 인간은 도저히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네 번째로 창조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자연주의(自然主義)’를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초월자와 초월적인 영역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와 만물 속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인한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부정하고 만물은 오직 자연법칙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사상입니다. 해도 달도 별도 그저 자연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신이 창조 때부터 만물을 품어 안고 간섭하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우주의 중심과 목적은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 해도 인간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지요?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은 우주의 중심과 목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여섯 번째로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신론(多神論)’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도 신이요, 달도 신이요, 별도 신이요, 산도 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모든 것들은 하나님 한 분에 의해 무(無)로부터 창조된 것임을 밝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1절은 기독교와 이방 종교, 진리와 세상 풍속(시대정신)이 갈리는 아주 중요한 기독교 교리의 정수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독교에서 창조가 왜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며 그 첫 창조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새 창조 속에서 계획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를 첫 창조에 힌트 된 내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은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지향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겠지요? 성경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사 43:7) "7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사 60:21) "21 너의 백성이 모두 시민권을 얻고, 땅을 영원히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주께서 심으신 나무다. 주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만든 주의 작품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을 비롯한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제가 전에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존재’는 ‘고정적이며 동시에 흐르는 양태‘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요?’존재‘라는 것은 그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쉬지 않고 흐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10분전의 꽃과 10분 후의 꽃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그리고 모든 만물을 이루고 있는 분자나 원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존재는 그 고유의 성질에서는 고정되어 있지만 형태는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지요? 그것은 현대 철학이 내린 존재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현대 철학이 어떻게 그 존재의 정의를 내렸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에서 그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신분이나 본질에 있어서는 고정적이지만 그 분은 그 존재가 담고 있는 내용을 발산을 하셔서 그 분의 영광을 그 속에 담으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본체 적 영광을 밖으로 발산하시는데 그 영광이 피조물 안에 그대로 담겨서 현시 화된 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지혜와 권능과 성품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잘 관찰하면 그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허공은 그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성품을 반사해서 현시 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현시 화시키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담지 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 바로 피조물이며 그 것이 천지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성품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며 피조물은 언제 어디서나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을 효과적 영광 혹은 반사적 영광이라고 했지요?

 

(고전 10:31)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6:20) "20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계 4:11) "11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습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시는 타락할 수 없으며 강제에 의해서가 아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반사해서 나타내는 피조물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첫 창조에서 시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 하셔서 그 나라를 어떻게 완성하실 것인가를 힌트 하시며, 그 나라를 힌트 하실 뿐만 아니라 그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 실현해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곳이 어떤 곳이 되겠습니까?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으로 살며,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그 곳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다른 말로 모든 존재가 ‘거룩하시고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시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처럼‘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산다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로봇처럼 하나님을 자랑하고 목소리 높여 노래하는 그런 유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산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지혜를 그대로 받아서 그 영광을 반사하며 그 영광에 참여해서 죄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게 새 창조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인간 아담이 그렇게 엄청난 지혜(창조물들의 이름을 다 지음, 고대 시대에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는 그 존재의 내용이었음, 그러니까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은 그 존재의 내용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를 갖고 있었고 무죄하게 태어난 것입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한 지체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게 될 교회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실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성도’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금까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삶에서 돌이켜서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이고, 성경은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천국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의 인격과 이성 속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역사 속에서 우리 택한 백성들을 설복 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타락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인내의 깊이를 알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한 자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순종과 의존의 삶을 이끌어 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자녀들이 다시는 자의로 타락을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미 그의 이성으로 타락한 자들의 추악함과 죄가 주는 고통을 충분히 겪었고 하나님을 의존하며 그 분께 자기를 맡기며,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이미 경험한 자들은 절대 자의로 타락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 속에서 인간들을 ‘창조에서 타락으로, 타락에서 십자가로, 십자가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시적으로 이끌어 가시며 보여주시는 이유는 바로 그의 백성들의 설복을 위해서 인 것입니다.

 

(엡 1:4‐6)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5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6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설복하셔서 자발적인 찬미와 순종과 의존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을 비롯한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바로 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제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제 자리를 이탈해서 엉뚱한 짓들을 하게 된 것이지요.

 

얼마 전에 저희 아이들하고 캠핑을 갔었습니다. 울창한 산 속에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간혹 뿌리가 뽑혀서 길가에 나 뒹구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런 나무들은 정말 골칫거리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데 불편을 주기도 하고 미관상으로도 아주 안 좋습니다. 한 마디로 쓰레기이지요. 그 나무들도 땅에 뿌리를 박고 제 자리에 있었을 때는 자연의 경관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자리를 잃고 길거리에 뒹굴자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해 준 그 자리에서 이탈해서 엉뚱한 자리에 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에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일들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인간들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면서 인간은 모두 쓰레기를 쏟아내는 추한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원래의 창조 목적에로 자기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는 새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를, 다른 말로 그 쓰레기들을 어떻게 청소하시고 어떻게 제 자리로 복귀를 시키시는가를 창조부터 시작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의 말씀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받으셨습니까? 우리는 이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관념이나 무 인격 적인 원리나 힘 혹은 이론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태초 이전인 영원부터 홀로 존재하시는 살아있는 인격이시며 누구에 의해 피조 되거나 종속되지 않는 우주의 근본이요 만물의 원인자요 주인이시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 분은 ‘스스로 충분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그 전에도 홀로 존재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누구의 섬김이 필요치 않으신 홀로 충분하시고 홀로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도움 없이도 피조물들의 찬양이 없이도 홀로 충분히 완전하며 홀로 충분히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을 창조하시고 자기 곁에 두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사랑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셔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서 어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해 드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맡기시는 일들은 모두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시간 전부터 존재하셨고 시간 후에도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시간 후의 영원에는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처럼 되어서 그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 창세기를 쓴 모세는 그 영원하신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시 90:2‐4) "2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3 주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4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계 4:8) "8 이 네 생물은 각각 날개 여섯 개씩 가졌는데, 날개 둘레와 그 안쪽에는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다. 또 장차 오실 분이시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 분의 변함없음과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그 분은 영원하신 분이시므로 그 분의 속성과 사역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천지 만물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통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지 만물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새로운 창조를 힌트하기 위해 그리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될 그 분의 백성의 양육과 성숙에 필요한 것이고 이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새 창조가 완성이 될 때에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첫 창조의 것들에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아니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목숨을 걸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바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로 안타까워하시고 그 일로 부지런을 떠시고 그 일로 눈물을 흘리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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