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제사장으로
(김성수 목사)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 하나님 나라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집단 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하나님을 힘써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외롭게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을 목소리 높여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헌금을 하여 가진 소유를 나누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위용을 자랑하는 예배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십일조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헌금을 안 합니까? 하나님은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 전체를 다 달라고 하십니다.
(계 1:5-6) “5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의 첫 열매이시요(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씻어') 주셨고, 6 우리로 나라를 이루셔서,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장차 오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과 은혜, 그리고 보좌 앞의 일곱 영으로 표현된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 그리고 충성된 증인으로 먼저 살다 가셨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하나님의 맏아들, 우리의 큰형,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오는 그 은혜와 평강을 이야기하면서 감격을 이기지 못해 5절과 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합니다. 오늘은 그 찬송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뿐 아니라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전하면서 언제나 감격에 복받쳐 중간 중간에 찬송을 합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본인이 그 기쁨과 감사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엡 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딤전 1:17) “17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유 1:24-25) “24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의 영광 앞에 기쁘게 나서게 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 25 곧 우리의 구주이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주권과 권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 전에서부터 이제와 영원까지 있기를 빕니다.”
이렇게 사도들은 복음을 이야기하다가 문득문득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저는 사무실에서 성경을 읽다가 가끔 너무 복받쳐서 의자에서 내려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한동안 앉아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엉엉 웁니다. 그 울음은 너무 감격스러워서 우는 울음이 아니라 ‘나에게 이러한 은혜가 주어졌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자주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는가? 왜 나는 이렇게 좀 더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왜 나는 이렇게 지금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와 친한가?’ 그런 것 때문에 한참을 괴로워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 복음에 대해 묵상을 합니다. 그리고는 이내 어떻게 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이렇게 구원해 주셨는지 놀라고 또 놀랍니다. 그리고 크게 찬송을 부릅니다.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도 부르고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도 부릅니다. 어떨 때는 성경을 읽으면서 제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 노릇 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읽으면서 제 살을 꼬집어 볼 때도 있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감격하면서 말이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생각하시면서, 복음을 곱씹으시면서 얼마나 감격을 하십니까?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얼마나 감격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마음 깊이 사랑하지 않고 여전히 추한 나의 모습으로 얼마나 울어 보셨습니까? 신자는 자기에게 닥친 문제 때문에 우는 자들이 아닙니다. 신자는 하나님과 그 분의 하신 일 때문에 감격해서 울고 그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해 안타까워 우는 자들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수시로 찬송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 계시록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감격스러운 찬송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무려 다섯 군데에서 복받치는 감격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감격이 점차적으로 점진적으로 커집니다. 급기야 7장12절에서는
(계 7:12)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6절에서는 영광과 능력 두 가지만 나열을 합니다. 복음을 설명해 나가면서 그 감격이 점점 커져서 동원할 수 있는 단어는 다 동원해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엡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세요?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줍지 않은 인본주의, 휴머니즘, 인내천, 천인 무간 사상 같은 인간이 최고라는 사상이 우리 안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기 위해 구원받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유가 나오는데 6절을 보시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입니다.
(계 1:6)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따라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나오지 않고 그냥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면 여러분은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시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찬양 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아버지’라는 소리 한번 듣고 싶으셔서 , 정말 마음 깊이 감사와 사랑이 넘쳐 나서 부르게 되는 ‘아버지’라는 찬송의 소리 한번 듣고 싶으셔서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신 것이고 양육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이 땅에 나타났습니까?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그 피를 우리 죄의 대가로 삼으셨습니다.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습니다. 5절 하반부를 보시면 5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해방하시고’는 헬라어로 ‘루오’라고 합니다. 그 ‘루오’는 ‘깨끗이 목욕시키다, 깨끗이 빨다’라는 의미입니다. 온통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빨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의 피가 속전으로 치러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 5:9)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히 9:22)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13:12)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어떤 사람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아주 심한 중병이 들었습니다. 여기 저기 동물 병원엘 데리고 다녀 보았습니다. 어떤 병원에서는 그 강아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송아지를 푹 삶아서 먹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키우던 송아지를 삶아 먹였습니다. 그런데도 안 나았습니다. 어떤 의사는 그 강아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커다란 말을 삶아 먹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소중히 아끼던 말을 삶아서 강아지에게 먹였습니다. 그런데 강아지가 낫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정말 용하다는 어떤 의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강아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꼭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장남을 죽여서 푹 삶아 먹이십시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강아지가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자기의 장남을 삶아 먹여서 살리고 싶은 정신병자가 있을까요?
(사 1:3)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
개만도 못한 죄인들을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서 난자해 버린 아버지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이 어찌 찬송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길 가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펄쩍펄쩍 뛰는 거예요. 사업 때문에 가정 문제 때문에 머리 터지게 고민하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떼굴떼굴 구르는 거예요, 좋아서 ‘아버지, 나의 아버지’를 부르는 거예요. 오늘 본문 6절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라와 제사장을 원어로 보면 ‘바실레이안 히에라이스’입니다. 이 말은‘나라, 곧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동격입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19:6절의 성취이죠?
(출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우리 교회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다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그 삶을 전가시키셔서 우리는 비로소 제사장 나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본문 6절에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의 ‘에포이에센’은 ‘포이에오’의 과거 시제입니다. ‘포이에오’는 ‘창조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으로 창조해 내셨다는 말입니다. 베드로 서에서도 똑같은 말이 나오지요?
(벧전 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우리가 ‘나라’라는 개념을 영토의 개념으로 가지고 있어서 조금 이해가 어려우실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 교회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있던 자들이 누굽니까? 바로 제사장이지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나라, 곧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확실하게 밝혀지지요.
(히 10:19)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 누구라고요? 제사장들이에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서 성소에 들어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알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영원한 성소,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것입니다. 찬송이라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기를 낳아 본 사람은 압니다. 그 아기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너무 좋아서 계속 그 아기에게 말을 합니다. ‘손이 예쁘다, 발이 예쁘다, 눈이 맑다’너무 사랑하니까 칭찬하고 싶어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당당하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갈 수 있게 되어 그 하나님의 존전(尊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찬송하는 제사장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요 제사장들입니다.
(계 20:4-6) "4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과,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5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롬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 13:15)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려서, 절대적인 순종을 하셔서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을,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물은 마땅히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산 자가 죽음을 방불 하는 제물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 이하를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보지요.
(벧전 2:9-21) “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엑상겔로’ 발표하다, 크게 자랑하다) 하려는 것입니다. 10 여러분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적인 욕정을 멀리하십시오. 12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을 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13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14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총독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하려고, 왕이 보낸 이들입니다.”
왜 우리가 제도와 법과 상위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지는 제가 이미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제도나 법 상위 권위 등으로 인간의 죄를 억제하고 계시기 때문이라 했지요? 계속해서 15절을 읽겠습니다.
“15 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6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17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신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십시오. 18 하인 여러분, 가장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이 삶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기꺼이 그 분을 섬기게 되면 이까짓 찰나의 세상에서 받는 어려움 고난은 참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밟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제사장의 삶을 살다가 그 제사장들이 교회가 모이는 시간에 모여서 진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이 땅에 보여주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그 분을 자랑하며 찬양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축소판이 바로 교회가 모이는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야말로 우리 제사장들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제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삶이 결국은 예배의 삶이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계 22:3)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여기서 ‘섬기며’라고 번역된 ‘라트류오’는 ‘예배하다’라는 뜻입니다.
(히 9:14)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의 삶을 사는 것이고 천국의 장자들의 총회가 모이는 예배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제사장과 나라를 동격으로 이야기하는지 아세요? 제사장들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창세전에 교회라는 커다란 무리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궁극적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감사와 기쁨이 담긴 아버지 소리를 듣고 싶으셔서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내셨다고 했지요. 우리가 하나님이 진짜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아는 것,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그것이 나라요 제사장인 우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와 자녀가 영원히 함께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시며 자녀들은 아버지를 섬기며 따르며 사는) 거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바로 그 모습을 지상에 그려놓으신 것이 교회의 예배입니다.
(히 12:22-24) “22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23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아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예배의 모습이요,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서 드려지던 제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교회, 하나님 나라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집단 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하나님을 힘써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외롭게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을 목소리 높여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헌금을 하여 가진 소유를 나누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위용을 자랑하는 예배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행 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오심으로 율법이 폐기된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고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진 하나님 나라로 지어져 가면서 예수 안에서 그 율법들을 완성시켜 나가는 자들입니다. 십일조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헌금을 안 합니까? 하나님은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 전체를 다 달라고 하십니다. 그 형식은 완성되었지만 정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배를 안 드립니까?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심히 주일을 지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동물제사는 이제 없어졌지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열심히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 구약의 제사에 흐르던 정신이 뭡니까? 속죄, 십자가, 피 아닙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한 장자들의 총회가 모여 오늘도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세상을 향해 거룩하게 구별된 어떤 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격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 세상에서 불려 나와서 기쁘게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도 그렇게 구별되어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 천국 백성들이 모이는 예배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천국이 뭔지 속죄가 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예배에 늑장을 부릴 수 있습니까? 그러한 예배에 전화가 왔다고 전화를 받으러 나갈 수 있습니까? 그러한 예배 중에 잡담을 합니까? 그러한 예배 중에 화장실을 들락거립니까? 아론이 성소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말고 화장실 다녀와서 다시 지내고 했을까요?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미리미리 와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고 기도하며 감격 속에 천국잔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배가 시작되었을 때 하늘나라의 감격 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장자들의 총회가 모이는 예배보다 골프가 더 좋을 수 있을까요? 장자들의 총회가 모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예배보다 학교 숙제가 더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하늘나라를 맛보는 예배보다 아르바이트 일이 더 중요합니까?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하나님을 자랑하고 선포하는 제사장이라고요?
천만에요. 만일 이 중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분들입니다. 섣불리 하나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엉터리 복음이 흘러들어 갈 것입니다. 언제든지 나의 일이 바쁘면 미뤄 둘 수 있는 천국, 언제든지 나를 즐겁게 해 줄 용무가 있으면 빠져나가 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 그런 하나님 나라를 전하실 겁니까? 그들이 여러분이 언제든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교회가 모이는 것을 빼먹는 것을 보면서 무어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난 당신보다 더 바쁜 일이 있어, 그래서 난 교회 못 가’‘너도 바쁘면 안 가잖아’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더 진지해 지셔야 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 나라요 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신 분들입니다. 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여러분, 자연계가 완전하게 회복되고 나를 목숨을 걸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영원히 문명과 문화를 즐기며 슬픔과 눈물과 고통이 없는 곳에서 우리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버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영원히 산 다는 것이 진짜 기다려지세요? 아니면 억지로 나와 앉아 계신 겁니까?
정말 그 나라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가 모이는 것을 매순간 사모하며 살아요. 말씀을 그렇게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나 무시하면 교회 안 나가?‘하고 배짱을 부립니다. 그러면 나오지 마세요. 복음을 그렇게 구걸하며 전할 생각 전혀 없습니다. 제가 교회 안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 잡는 것 보셨습니까? 말씀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 안 나올까봐 겁내는 거 보셨어요? 기독교는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목숨을 끊어가며 건져내신 교회는 그렇게 우스운 것이 아닙니다.
6절에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포이에오’는 과거시제입니다.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 우리를 사랑하사‘아가파오’는 현재시제입니다. 그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과 영광과 능력은 세세토록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계 1:6)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러한 확실한 소망 속에 거하시는 여러분이 왜 그렇게 어깨가 축 쳐져 있으세요? 힘을 내세요. 여러분은 왕이요 나라요 제사장이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환경, 상황 속에서 열심히 하나님 섬기며 순종하며 제사장으로 살아내자고요. 그리고 열심히 모여서 사랑하며 격려하며 말씀을 나누며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아멘’으로 도장을 꽝 찍고 있잖아요?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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