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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5. 8.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김성수 목사)

 

 

하나님과 겨뤄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이기적인 축복만을 받기 원하는 불가능한 인간을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죽여 버리시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체로 이 땅에 보내심으로 완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계시는 그게 전부입니다. 절대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계시를 받는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재현되고 있는가, 그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어 지고 있는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계 1:1-3) “1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서론 부분인 계시록 1장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고 시작을 합니다. 계시라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가려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계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추측할 수도 없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비밀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드러난 책이 성경이기에 성경을 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2:9-10)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이렇게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할 하늘의 일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유일하게 성경밖에 없음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계시인 성경은 하나님과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하신 일에 관해서만 기록되어져 있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크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추악한 죄인들을 위해 아들을 보내셔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계시라고도 부르고 그 일은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힌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 자손의 계보는 무죄한 자의 흘린 피로 이어진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셋의 이름의 뜻이 뭐지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입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새롭게 회복될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남은 자들을 감싸 안으신 예수께서 저주의 비를 맞으시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이 살아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한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되어 그 아래로 줄줄이 하나님의 백성이 올라오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힌트하고, 자기를 죽일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올라가는 이삭을 통해서 자신이 매달릴 나무를 짊어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으며 죽어야 할 자가 준비되어진 어린양이 대신 죽음으로 살아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의 올 때를 기다리다 보고 기뻐했다’라는 요한복음 8장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장면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얍복강 가의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겨뤄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이기적인 축복만을 받기 원하는 불가능한 인간을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죽여 버리시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환도 뼈가 부러졌다는 것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전인(全人)’‘전 존재’가 무너진 것을 의미했습니다. 야곱의 환도 뼈가 부러졌습니다. 야곱은 죽었고 다시 살아 ‘이스라엘‘’승리‘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환도 뼈가 부러졌으면 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승리‘라는 이름을 주십니까?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서 위대한 승리를 이룩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실 그 승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기꾼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의 옛 이름이 죽고 새 이름으로 태어나야지만 가능한데 그 것을 예수께서 야곱을 품으시고 대신하여 이루어 주실 것임을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을 통해서 무죄한 자가 고통을 받음으로 어떤 백성 전체가 구원을 받는 예수를 보여주시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유월절에 어린양들이 죽고 그 피가 인방과 문설주에 발려진 집만 살아납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그리고 광야40년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만나와 생수와 놋 뱀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옛 사람 60만 명이 다 죽고 새 사람 60만 명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장정만 계수한 것입니다.

 

모세는 똑같이 그 이스라엘의 삶을 먼저 삽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히브리 사내아이는 모두 죽여 버리라는 바로의 엄명이 있던 때였습니다. 모세는 살아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듯 물에서 건져집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 돌 판을 받아서 내려오는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라’하고 우상을 섬깁니다. 모세는 십계명 돌 판을 그들에게 던져서 깨버립니다. 그 십계명 돌 판은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하늘의 거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거룩은 죄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올라가서 이제 모세가 준비한 돌 판에 하나님이 쓰시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합쳐진 계명이 내려와 이스라엘을 끌고 갑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합쳐진 존재가 누구십니까? 예수님. 우리는 십계명 돌 판이 깨지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사사들을 통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인지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같이 바보 같은 사사들을 들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왼손잡이 에훗, 소 모는 작대기의 삼갈, 여자 드보라, 바람둥이 삼손 등등의 연약한 모습에 성령이 임하시자 큰 능력이 나타나 적을 섬멸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힌트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엘리야를 통해 또 한 번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850대1의 전투를 마치고 이세벨의 저주의 전갈을 받고 두려워 떱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머리를 박고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살려 내십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를 시켜 물과 떡을 날라다 주십니다. 그는 그릿 시내를 건너 광야 40일을 걸어서 호렙산, 시내 산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십니다. 헤롯이 죽고 예수님은 애굽에서 나오십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홍해를 건너신 것입니다.

 

(고전 10:1-2)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고 지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2.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를 받는다고 하지요? 그리고 광야로 가십니다. 시험을 받으시지요? 시험을 받으시고 어떤 결론을 내려주십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한다’라고 결론을 내려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셔서 광야를 살게 하신 목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실패했지만 예수님께서 실패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에 안고 하나님의 요구를 성취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신 8:2-3) “2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3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지요? ‘아냐, 나에겐 떡이 필요해’‘복 줘’ 그러다 다 망했습니다. 그 실패를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가리켜 생수라고 하셨고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자신이 하늘의 만나, 하늘의 떡이라 하셨으며 놋 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셔서 참 가나안,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복귀를 하셨습니다. 바로 그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내용입니다. 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는 말은 구약전체에 걸쳐서 예언되고 계시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란 것을 공포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소유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라는 뜻이 되지요. 그러므로 이 요한 계시록은 바로 그 복음이 적혀있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전체를 통해서 그림자로 계시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계시된 대로 그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히 1:1-2) "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씀을 하셨다는 뜻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림자로 모형으로 보여주었던 그 하늘의 비밀이 바로 이 이야기다’하시며 실체이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계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구절의 ‘마지막’은 헬라어 ‘에스카토스’ ‘~의 끝’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eschatology' 종말론 이라는 단어가 나왔지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체로 이 땅에 보내심으로 완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계시는 그게 전부입니다. 절대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계시를 받는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구원에 관한 계시가 성경으로 모자라나요?

 

additional information이 더 필요한가요? 그러면 우리는 참 한심한 사람들입니다.뭔가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성경이 다 인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자들입니까?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내려올 계시는 없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그 다음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마지막'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으로 계시를 완성하셨습니다. 그 완전한 계시, 그 홀로 충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적혀있는 책이 요한 계시록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구절에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리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라면, 그 분에 대한 내용이라면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은 손톱만큼도 없는 책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3절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주신 책이지 우리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 위해 주신 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맞다고 한다면 말이지요.

 

구약을 비롯한 다른 책들이 하늘의 것들을 원형으로 이 땅에 모형으로 그림자로 기록해서 하늘의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면 요한 계시록은 하늘의 모습을 직접 기록해서 이 땅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셔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시는 하늘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 땅의 사도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계속해서 복음의 나팔을 붑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반면에 요한 계시록은 직접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를 기록하여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렇게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가가 다를 뿐이지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을 보시면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 예수님이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나옵니다.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해 놓고 2절에서 그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해 줍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복음이라 부르지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위에서 살펴보신 바와 같이 광야에서의 교회의 삶입니다. 교회는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살다 가신 것이지요? 그러면 당연히 교회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야지요. 우리 교회의 삶 자체가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시 22편) “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6 그러나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조롱거리, 백성의 멸시거리일 뿐입니다. 7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비아냥댑니다. 8 "그가 주에게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가 그를 구하여 주겠지. 그가 그토록 주의 마음에 들었다면, 주가 그를 건져 주겠지" 합니다.(중략) 15 나의 기력이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나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께서 나를 흙 속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16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나를 에워싸고 내 손과 발을 찔렀습니다. 17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 만큼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원수들이 나를 끊임없이 노려봅니다. 18 나의 겉옷을 원수들이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집니다. 19 그러나 나의 주님,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시편 22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마치 예수님의 생애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지요? 시편 31편으로 가보세요.

 

(시 31:5) “5 주의 손에 나의 영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이신 주님, 나를 속량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시 34:18-21) “18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영혼이 짓밟힌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 19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 20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 21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끝내 죽음을 맞고, 의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분명 이 시편들은 전부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삶과 똑같습니까? 예수님의 삶을 다윗이 미리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시 22:27-28, 31) “27. 온 세계가 주님을 기억하고, 주께로 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28 나라는 주님의 것,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31.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

 

성경이 다윗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렇게 똑같이 기록해 놓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재현되고 있는가, 그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어 지고 있는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처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낼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직접 인간으로 오셔서 죽지 않으셔도 되었겠지요.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은 자신을 죽여 원수를 살려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를 우리 성도들이 이해하고 비록 자주 실패하고 실수하더라도 그 삶을 추구해 나가게 되는 그러한 삶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나타나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 그렇게 살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자리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때로 억울하고 억지스러운 일들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세요.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읽는 자라고 단수로 나와 있고, 듣는 자들이라고 복수로 나와 있는 것은 당시 성경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당에서 한 사람이 읽고 여러 사람이 들었던 것을 생각하라) 거기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복이 있는 자들이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읽고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약 1:22) “22 여러분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듣기만 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요구되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당연히 나타나게 될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만일 배신당하고 핍박받고 환난가운데 처해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실 것이 아니라 ‘와~신기하게 정말 그 예수님의 삶이 나의 삶 속에서 재현되는 구나’ 하고 기뻐하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이 나타나고 계시다면 잘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1절을 다시 보시면 그 계시의 일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절)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악한 세력이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되는 일입니다. 바로 그 일이 반드시 속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 계시록이 기록되어진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분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입니다. 그럼 이미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미 이루어진 일 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 기록을 했을까요? 그러면 그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다니엘서로 가보겠습니다.

 

(단 2:28-29) “28 비밀을 알려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임금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임금님의 꿈, 곧 임금님께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 머리 속에 나타난 환상은 이러합니다. 29 임금님, 임금님이 잠자리에 드셔서 앞날의 일을 생각하고 계실 때에, 비밀을 밝히시는 분께서 임금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해 주는 장면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속에서 큰 신상을 봅니다. 머리는 금으로 팔과 가슴은 은으로 나머지는 철로, 흙으로 되어 있는 그런 신상입니다. 그런데 뜨인 돌이 그 신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여기서 뜨인 돌이라는 것은 공중에 떠 있는 돌이라는 말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삽으로 뜨여진 돌, 그러니까 하늘에서 뜨여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 것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왕에게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해석을 해 줍니다.

 

이미 BC586년에 남 유대가 망하기 전인 BC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이 벌써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가기 시작했을 때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 갔으니까 예수께서 오시기 60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일은 장차 될 일, 장래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고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분명 계시록에서도 유대 지파의 사자가 이기셨고 그 분이 교회 시대의 역사인 책의 인을 떼실 분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계 5:5) “5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그 책의 인이 어떤 인이지요?

 

(단 12:1-4) “1 그 때에 너의 백성을 지키는 위대한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2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3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4 그러나 너 다니엘아, 너는 마지막 때까지 이 말씀을 은밀히 간직하고, 이 책을 봉하여 두어라. 많은 사람이 이러한 지식을 얻으려고 왔다갔다 할 것이다.”

 

그 인은 다니엘서에서 예언 된 마지막 때가 이르기까지 봉함하여 두라고 하신 그 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가 탄생되었으며 그 교회의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과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져 가는 모습이 적힌 책의 인이 떼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은 시작되어질 수 없을 것 같아서 울고 있던 요한에게 천사가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미 이기셨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이 책에 적힌 일들이 이제 공개가 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신상이 뜨인 돌이신 예수께 박살나듯 그 일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요한은 이미 이루어진 일 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반드시 속히 될 일’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또 우리는 already - not yet의 원리를 적용해야지요.

 

요한은 영적으로, 환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이미 그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악의 세력이 불 못에 던져진 것도 보았습니다. 그 일은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분명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영적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가시적으로도 반드시 실패 없이 이루어지고 만다는 운명적, 신분적 차원에서, 요한은 아직 가시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이미 시작해 놓으셨으므로 그 일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다’라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 4:7)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벧후 3:3-10) “3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4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뒤로, 만물은 처음 창조 때로부터 그냥 그대로다" 할 것입니다. 5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있다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서 물로 형성되었다는 것과, 6 또 물로 그 때의 세계가 홍수에 잠겨서 망해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7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서 멸망을 당할 때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것은 타 버릴') 드러날 것입니다.”

 

말세에 세상 사람들은 노아 때처럼 ‘언제 비가 오냐’‘비가 온다며, 왜 백년이 지났는데도 비가 안 오니?’ ‘정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종말이 올까?’ ‘언제?’ 이렇게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 때 비가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왔습니다. 120년 만에 왔지만 하나님께서 비로 멸망케 하겠다고 하셨으면 반드시 그 일은 이루어진 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신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한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이미 시작 된 일은 더 더욱이나 확실하게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을 가리켜 ‘속히 될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될 일 이라는 구절은 시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완성의 필연성과 확실성’에 강조를 둔 말입니다.

 

네, 우리는 그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매일 매일 돌아보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 힘드셔도 힘내시고 끝까지 이겨내 보자고요. 그날은 반드시 속히 옵니다.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구절을 통해 이 요한 계시록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바로 복음이며 우리에게도 그 예수님의 삶이 나타나야하며 그 삶이 때로 견디기 힘들고 눈물이 날 때 ‘그 마지막 날은 반드시 속히 온다’는 확신에 찬 소망으로 우리는 견뎌 내라는 것이 오늘 계시록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속히 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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