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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요한 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5. 8.

 

 

요한 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김성수 목사)

 

 

요한 계시록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케 된 교회가 이 땅에서 겪어내야 할 일들을 그려 놓은 책이며 그들이 그 일들을 잘 견뎌내고 이겨 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이 땅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역사적, 가시적 교회와 천상의 완성된 교회를 동시에 그려 놓고 “봐라, 너희는 절대 실패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절대 미래에 있을 어떤 일로 혹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수수께끼처럼 풀어서는 안 됩니다.

 

(계 1:1-8) “1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이 내려 주시고,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내려 주시고, 5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의 첫 열매이시요(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씻어') 주셨고, 6 우리로 나라를 이루셔서,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부터 요한 계시록 강해를 시작합니다. 계시록 강해를 들으시면서 꼭 미리 숙지해 놓으셔야 할 내용이 제가 전에 기독교 교리를 설교 한 것 중에 “성경” 이라는 설교와 “교회론 세 번째”설교를 꼭 여러 번 들어 놓으셔야 합니다. 거기에 천년 왕국이라든지 다니엘서 9장의 70 이레(주간)라든지 계시록을 풀어 가는데 꼭 기본으로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여자 분이 교회로 찾아오셨습니다. 이유인 즉은 방송으로 목사님 설교를 듣다보니 참 영통한 분이신 것 같아서 목사님께 기도 받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기도를 해 드릴까요? 했더니 “방언을 받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방언을 받고 싶으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제가 성경을 열네 번을 완독을 했고 두 번을 한국말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필사를 했고, 영어로 한번을 썼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공부를 했는데 기도만 하면 10분을 못 넘깁니다. 10분만 기도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기도하는 다른 사람들은 방언으로 2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기도를 합니다, 10분 정도 기도하고 할 말 없이 멍하니 있다 보면 그 사람들보다 제가 영적으로 너무 딸리는 것 같이 느껴지고 하나님께도 죄송해서 목사님께 방언 기도 할 수 있게 기도 받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기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 분이 무엇을 잘 못 생각하고 계신지에 대해서는 부연하지 않겠습니다. 성경을 열네 번을 읽으셨고 세 번을 쓰신 분이 왜 그런 잘 못된 신앙관을 갖고 계실까요? 성경이 무엇에 관해서 기록된 것인지 그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행동지침서 정도로 생각하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부유함과 번영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적어놓은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과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이야기이외에 다른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을 어떻게 이루고 계시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요한 계시록은 마치 성경의 부록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저 미래, 세상의 끝에 일어날 일들을 수수께끼처럼 엮어 놓은 책 정도로 알고 있어요. 요한 계시록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케 된 교회가 이 땅에서 겪어내야 할 일들을 그려 놓은 책이며 그 들이 그 일들을 잘 견뎌내고 이겨 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이 땅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역사적, 가시적 교회와 천상의 완성된 교회를 동시에 그려 놓고 “봐라, 너희는 절대 실패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창조하시면서 가지고 계셨던 “창조의 목적”이 완전하게 완성되어집니다.

 

(1)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면 계시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2)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며 빛을 창조하셨지만 계시록에는 그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주님의 영광의 빛”이 거룩한 성을 밝혀줍니다.

 

(3) 창세기에는 교활한 사탄이 등장하여 인간을 미혹하지만 계시록에서는 그 사탄이 결박당한 채 불 못에 던져 집니다.

 

(4)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낙원을 상실하지만 계시록에서는 그 낙원이 회복됩니다.

 

(5)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결별하지만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이 혼인관계에 들어갑니다.

 

(6) 창세기에서는 자연이 가시덤불을 내고 엉겅퀴를 내어 인간을 해치지만 계시록에서는 자연이 사람을 부양하고 위로합니다.

 

(7) 창세기에서는 생명나무가 천사의 경계로 누구도 그 과실을 먹을 수 없었으나 계시록에서는 인간이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회복됩니다.

 

(8) 에덴동산 가운데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흐르던 강물이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로 흐릅니다.

 

(9)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을 통치하라고 위탁받았으나 실패했던 인간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영원히 왕 노릇을 하며 그 만물을 통치합니다.

 

(10) 창세기의 낙원, 에덴동산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문이 닫히고 말았지만 요한 계시록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진짜 낙원이 21,22장에 결론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참 낙원에는 이제 선악과가 없습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더 이상 시험은 없다는 것입니다. "probation is over"

 

이렇게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성경은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인간을 어떻게 그 완전한 낙원에 데리고 들어가시는가가 기록되어 있는 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제시하신 것이고 요한 계시록의 내용 또한 십자가 복음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요한 계시록을 읽으실 때 중요한 tip을 한 가지 드린다면 여러분은 요한 계시록에 접근을 할 때 수수께끼를 푸는 태도로 접근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한 계시록을 읽으시면서“열 뿔이 무엇인가? 곰의 발은 무엇인가?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무엇인가?”로 접근하지 마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먼저 그리고 (복음이라는 숲을 먼저 보시고) 그 다음에 그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 풀, 벌레, 열매들을 차근차근 풀어 나가셔야 합니다. 그렇게 요한 계시록이 수수께끼처럼 어려운 책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 자체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분명 읽고, 듣고, 기록한 것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계시록은 다른 책과 똑같은 교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 하나님의 비밀을 밝히 계시하시기 위해 주시는 것이지 어떻게 해서든 감추어서 약 올리려고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미리부터 겁먹지 마시고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R. R. Torkin이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든 The Lord of the ring을 볼 때 그 영화에 엉뚱하고 신비적인 인물들과 이상한 괴물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전체적인 내용 파악이 어렵지 않지요? 그렇지만 거기에 나오는 악마의 이가 몇 개가 튀어 나와 있었는지 그 걸어 다니는 나무에 수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엄청나게 큰 코끼리의 상아가 얼마나 길었는지 스미골의 머리털이 몇 개가 남아 있었는지 그런 것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지요? 그러나 내용은 기억합니다. 여러분은 계시록을 먼저 그렇게 접근 하셔야 합니다. 열 뿔, 일곱 머리, 네 생물, 곰의 발, 일곱별 이런 것은 일단 지우시고 전체적인 그림부터 그리자고요.

 

요한 계시록의 내용은 친절하게 성경이 성경 자체에서 상당부분 그 내용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자체에서도 그 답을 제시하고 있지만 구약의 여러 곳에서도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가지게 되는 의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사 백 네 구절 중에 거의 삼 백 구절 가까이가 구약의 내용을 짜깁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주의 깊게 공부하신 분들은 요한 계시록을 아주 수월하게 이해하실 수가 있습니다. 몇 군데만 예로 찾아드리지요.

 

(계 7:13-14) “13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나는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성경이 직접 답을 해 주고 있지요?

 

(계 12:9)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큰 용이 뭡니까? 사단, 마귀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성경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책입니다. 포이츠레쓰 목사님의 The Returning King 이라는 책을 보면, 포이츠레쓰 목사님이 교회에서 요한 계시록에 대해서 강의를 하셨는데 12살 짜리 아이가 와서 “목사님 저는 요한 계시록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책인지 잘 알아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어떤 내용인지 말해 줄래? 했더니 정확하게 그 책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 석사과정 학생들이 학교 농구 코트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데 수위 아저씨가 요한 계시록을 읽고 계시더랍니다. 그래서 그 아저씨를 좀 도와드릴 양으로 다가가서 아저씨 그 책이 어떤 내용인지 아시고 읽으시는 거예요? 했더니 “알다 마다요, 예수님이 이기신대요” 하시더랍니다. 네 그거예요. 요한 계시록은 “지금 가시적으로는 교회가 세상에 당하고 있는 것 같고 /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이기셨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절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승리할 것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교회는 반드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된다는”소망의 복음이 적혀 있는 책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요한 계시록을 절대 미래에 있을 어떤 일로 혹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수수께끼처럼 풀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표면상으로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편지가 당시의 일곱 교회에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일곱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여 이 요한 계시록의 수신자가 전체 교회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그들이 쓰는 숫자에 특정한 개념을 부여했었습니다.

 

특히 1부터10까지의 숫자에 그런 특별한 개념을 부여했었는데 7 이라는 숫자는 전체, 충만, 완전, 안식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소아시아에 다른 유명한 교회들이 많았는데도 굳이 일곱 교회만을 등장시킨 것은 말씀드린 대로 그 일곱 교회 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초월한 “전체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라는 사실을 힌트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의 전편에 걸쳐서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는 주제는 “교회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요한 계시록을 강해하기 전에 열 네 편의 교회 론 설교로 문을 연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계시록 강해 전체가 풍성한 교회 론의 결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공부하겠지만 4장과5장에 나오는 24장로라든지 7장의 144,000이라든지, 셀 수 없는 무리, 그리고11장의 성전과 도시 12장의 여인,14장에 다시 나오는 144,000, 15장의 승리자들 그리고 19장의 어린양의 신부 이런 표현들은 전부 하나님의 백성, 교회를 상징하는 표현들입니다. 이렇게 요한 계시록은 교회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는 책입니다.

 

계시록은 당시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던 교회를 향해, 로마인들이 알아 볼 수 없는 그들만의 상징과 구약의 언어로 ‘우리가 이 땅에서는 전투하는 교회로 , 고난을 당하는 교회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승리한 교회로서 영적으로 하늘에 존재하며 그 하늘에서는 이미 왕 노릇하고 있고 하나님은 반드시 실패 없이 가시적으로도 우리를 그렇게 완성하실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일례로 4장과 5장에서 24장로로 표현된 교회는 하나님 보좌 주위에 놓여있는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이미 우리 교회는 영적으로 완성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이 앉는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지상 적 관점의 교회의 모습과 이미 승리하여 잔치를 누리고 있는 천상(天上) 적 관점에서의 교회를 동시에 떠 올려놓음으로써 핍박받는 교회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심어 주는 책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쉬운 말로 천상에서 지상의 교회를 내려다보고 그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로 완성되어져 가는가를 보여주는 책이 바로 계시록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지금 고난당하고 핍박당하고 힘겹게 세상과 싸우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에도 동일한 메시지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계속해서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핍박으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속이 빈 통나무에 넣어서 톱으로 썰어서 죽이기도 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아서 죽이기도 하고 껍질을 벗겨서 죽이기도 하고 ,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을 하나하나 기름에 튀겨서 죽이기도 하고 온갖 잔인한 방법을 다 써서 교회를 분열시키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위협을 받고 사분오열(四分五裂)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교회는 이렇게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탄은 방법을 바꿨습니다. 핍박을 가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겁을 주는 방법에서 이제 사단은 인간들에게 풍요와 번영과 쾌락을 선물합니다.

 

서구의 교회들이 오락과 레저와 취미생활에 밀려 하나 둘씩 문을 닫습니다. 얼마 전 유럽 여행을 다녀오신 목사님 부부로부터 그 유럽의 예배당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예배당들이 이제는 관광지나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어서 주일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일인데도 예배당 문을 열고 예배를 하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힘드셨답니다. 사단은 인간들에게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 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 재미에 파 묻혀서 하나님을 잊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교회는 그 핍박 속에서 지금까지 실패하지 않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보호아래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승리의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너희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라” “지금은 너희가 당하는 것 같고 지는 것 같지만 아니다. 너희는 이기고 있는 것이고 그 고난 뒤에 너희에게 올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기대하며 이겨라, 이겨라” 이것이 계시록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에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인 교회시대, 다른 말로 하면 말세의 때, 그 마지막 때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교회 시대의 기간을 가리키는 1260일, 42개월, 한때 두 때 반 때, 삼 년 반의 기간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리가 전에 다니엘서 9장의 70 이레를 공부하면서 왜 그 기간이 교회 시대를 가리키는 것인가를 배웠지요? 요한 계시록은 그렇게 교회시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학에는 요한 계시록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다른 관점들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재앙의 사건들은 AD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그 이전의 사건들이라고 바라보는 과거주의 해석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요한 계시록의 재앙의 사건들을 아직 닥치지 않았지만 미래에 일어나게 될 일들로 보는 미래주의 적 해석도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이 바로 그러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관점은 요한 계시록의 재앙의 내용을 상징으로 해석해서 역사 속의 전체 교회에 적용시키는 상징주의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징주의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요한 계시록은 언제 기록이 된 것일까? 이 저작 연대가 요한 계시록을 해석하는 중요한 키가 되기 때문에 요한 계시록의 저작 연대는 아주 중요합니다. 과거주의 해석을 하는 분들은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이 계시록이 성전이 파괴된 AD70년 이전이라고 주장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환난의 내용은 네로 시대에 핍박을 당했던 이스라엘과 AD70년의 성전 파괴를 비롯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 요한 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는 기독교인들을 아주 심하게 핍박한 네로 황제가 죽이 이전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네로가AD68년에 죽었으니까 그 전에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을 하지요.

 

만일 그러한 주장을 따른다면 그 이후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이 요한 계시록이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 되지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일어난 일만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면 우리가 이 책을 공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성경에 어느 책은 우리와 상관이 없고 어느 책은 상관이 있고 그렇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저작 시기를 언제로 보는가?

 

(계 2:13) “13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그 저작 시기를 추론합니다. 이 구절을 잘 보시면 이 계시록이 기록되었던 시기에는 핍박이 있었던 시기였고 “사단의 위”“사단의 거하는 곳”이라는 단어로 미루어 보아 신성 숭배가 있었던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 정도가 아니라 황제를 신으로 여기는 시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상징주의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요한 계시록의 저작 시기를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자신을 신격화했던 도미티안 황제 때, 그러니까 AD95년으로 봅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자기를 “신” 혹은 “주님”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핍박은 했지만 자기를 신격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의 밧모 섬 귀양시기와 그의 나머지 인생을 모두 보게 되면 AD95년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AD70년 이전에 계시록이 기록되었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환난과 고난은 이미 AD70년 이전에 다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을 후 천년설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핍박과 환난은 없고 승승장구 승리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역사진보주의, 역사 낙관주의자 들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진보되어 종국에는 지상의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고 났더니 정말 승승장구 만사형통 일사천리의 인생이 되던가요? 고난과 환난의 연속이지요? 우리의 경험상으로도 후 천년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미래주의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을 하고 넘어가지요. 미래주의 해석의 대표적인 사람들이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 교회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관점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세대주의는 John Nelson Darby로 부터 시작하여 Edward Irving과 Cyrus I Scofield에 의해 체계화되고 John F Walwoord, J. Dwight Pentecost와 근래 Charles Ririe에 의해 다듬어진 학설입니다.

 

이 미래주의적 관점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록 2장3장의 일곱 교회 이야기는 교회시대를 가리키고 4장부터 나오는 것은 모두 7년 대 환난 기간 동안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 7년 대 환난은 교회의 휴거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므로 계시록 4장 이후부터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 땅에서의 그 환난은 이스라엘과 관계있는 것이지 우리 교회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성경을 문자 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사무엘 서에서의 하나님의 언약, 다윗의 언약(나단의 신탁)이 이 땅에서 민족적 이스라엘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요한 계시록 4장 이후부터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3장까지만 공부하고 말까요?

 

그분들은 성경을 문자 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요한 계시록의 모든 사건을 시간 순으로, 즉 연대기 적으로 봅니다. 그렇게 되면 이 계시록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됩니다. 간단하게 그들의 오류를 성경에서 찾아볼까요? 계시록 6:12절로 갑니다.

 

(계 6:12) “12 그 어린 양이 여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과 같이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와 같이 되고”

 

천재지변이 일어납니다. 어디서 이 장면을 보셨지요? 마 24장으로 갑니다.

 

(마 24:29-31) “29 그 환난의 날들이 지난 뒤에, 곧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30 그 때에 인자가 올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날 터인데, 그 때에는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31 그리고 그는 자기 천사들을 큰 나팔 소리와 함께 보낼 것인데, 그들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의 재림 때를 예수께서 직접 이렇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미 여섯 번째 인을 뗄 때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인 다음에 아직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최후의 심판 다음에도 또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 되지요? 이렇게 시간 순으로 연대기 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성경 안에서 상충되는 부분이 많이 생깁니다. 요한 계시록 8장으로 가보시지요.

 

(계 8:12)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입어서,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고,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고, 밤도 역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네 번째 나팔 사건입니다. 이 네 번째 나팔은 여섯 번째 인의 사건 훨씬 뒤의 일입니다. 분명 여섯 번째 인의 사건에서 태양이 총담(總擔) 같이 검어지고 달이 피 빛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나팔 사건에 태양과 달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세력으로 상징되는 바벨론은 몇 번씩 망합니다.

 

(계 16:19-20) “19 그리고 그 큰 도시가 세 조각이 나고, 민족들의 성읍들도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 도시 바빌론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독한 포도주의 잔을 그 성읍에 내리시니 20 모든 섬들이 사라지고, 산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바벨론이 멸망합니다.

 

(계 17:16) “16 그리고 네가 본 그 열 뿔과 그 짐승은 그 창녀를 미워해서 비참하게 만들고 벌거벗은 꼴로 만들 것이다. 그들은 그 창녀의 살을 삼키고, 그 여자를 불에 태울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지만 음녀는 바벨론입니다. 이미 16장에서 망한 바벨론이 17장에서 또 망합니다.

 

(계 19:2) “2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음행으로 세상을 망친 그 큰 창녀를 심판하셨다. 자기 종들의 피를 흘리게 한 그 여자를 멸하셨다.”

 

19장에서 바벨론이 또 망합니다. 이렇게 요한 계시록을 연대기적 사건으로 읽게 되면 우리는 이 요한 계시록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보게 되면 요한 계시록에서는 하나님 백성들, 교회의 구원도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구원받고 또 구원받고 또 다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연 계도 계속 다시 생깁니다. 이렇게 요한 계시록은 시간적인 순서로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볼까요?

 

(계 19:19-21) “19 또 나는 짐승과 세상의 왕들과 그 군대들이, 흰 말을 타신 분과 그분의 군대에 대항해서 싸우려고 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20 그러나 그 짐승은 붙잡혔고, 또 그 앞에서 이적들을 행하던 그 거짓 예언자도 그와 함께 붙잡혔습니다. 그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을 이런 이적으로 미혹시킨 자입니다. 그 둘은 산 채로, 유황이 타오르는 불바다로 던져졌습니다 21 그리고 남은 자들은 말 타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에 맞아 죽었고, 모든 새가 그들의 살점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짐승과 군대가 모두 불 못에 던지우게 됩니다.

 

(계 20:7-10) “7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옥에서 풀려나서 8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고 그들을 모을 것인데, 그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입니다. 9 그들은 지면으로 올라와서, 성도들의 진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시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2)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10 그들을 미혹하던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19장에서 다 죽었는데 또 전쟁이 일어납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서 다 죽었는데 곡과 마곡의 전쟁이 또 일어납니다. 이 두 전쟁의 이야기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을 보면 한 이야기라는 것을 금방 압니다. 요한이 그 최후의 심판 때 사탄과 그 무리가 심판을 당할 것을 에스겔서를 인용해서 반복해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8장과 39장에는 곡과 마곡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귀의 무리들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을 일러주십니다. 그 곡과 마곡의 심판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겔 39:17) “17 너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서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

 

조금 전에 읽었던 19장 아마겟돈 전쟁을 보세요.

 

(계 19:21)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은 한 전쟁을 반복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묵시문학의 특징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전체적으로 반복기법을 쓰고 있습니다. (recapitulation)이라고 하지요. 그것은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쓰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은 같은 사건입니다. 그것을 반복해서 점진 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심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주의 적인 해석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상징주의 해석은 어떠한 것인지를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설교든지 서론 부분은 조금 지루합니다.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잘 들어 주세요. 사실 상징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그렇게 좋은 단어는 아닙니다. 신학자 핸드릭슨은 상징주의라는 말 대신 ‘symbolic parallelism’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요한 계시록 전체를 이 땅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완전한 상징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디까지 가는가 하면 에덴동산도 상징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냥 그런 상징적인 묘사들을 통해 우리가 받을 교훈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해석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요.

 

우리는 그러한 상징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상징적으로 본다는 것은 바다에서 용이 나온다든지, 그 용이 열 뿔이 달려 있다든지 하는 것은 상징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사건은 단순히 어떤 일회적인 사건이나 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에 실제로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상징주의인 것입니다.

 

즉 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이라든지 곡과 마곡의 전쟁은 상징적인 단어들로 표현이 되었지만 있지도 않을 사건을 설화로 꾸며서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전쟁은 교회시대 내내 교회가 겪어내야 할 전체 전투를 종합해서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마겟돈 전쟁은 미래에 있을 중국과 아시아가 합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그런 한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시대 때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가 마귀의 공격을 대적하여 싸우는 전체의 전쟁을 다 종합해서 아마겟돈이다 곡과 마곡의 전쟁이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럼 앞으로 아마겟돈 전쟁은 없는 것이냐? 아니지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점점 더 심한 공격과 고통이 우리에게 닥칠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에 엄청난 마귀의 발악이 있겠지요. 그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한 전쟁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한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일 2:18) “18 자녀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적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적그리스도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이미 요한은 그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있어왔고 앞으로 더욱 거세게 발악을 하는 적그리스도가 나올 겁니다. 그 모두를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읽을 때 반복적이며 종합적인 개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시대를 통해 교회가 겪어 내야할 일들과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시며 우리 교회는 어떻게 안전하게 그 승리의 나팔을 불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지를 보여주는 위로와 격려의 복음이 적혀 있는 책입니다.

 

그것을 당시 그들을 핍박하던 로마를 빗대어 바벨론으로 표기하며 당시의 정황, 사건, 신화 등을 동원해서 구약 성경의 언어를 사용해서 이야기 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명확하게 발견하게 될 것이며 승리자요 왕 노릇 하는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조금 더 보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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