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강.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롬 8:24-30)
롬 8:24-27=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자 제자들이 근심 어린 눈으로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라는 그늘 아래서 쉼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론가 떠난다고 하니 불안 한 것입니다.
이를 예수께서 아시고 말씀 하십니다.
얘들아!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란다!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줄 것이다!
그럼 내가 너희 안에 거하게 된단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물론 이 말씀을 제자들을 알아먹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시 후에 벌어질 사건들을 미리 말씀 해 주십니다.
이제 너희들이 조금 후면 내가 지금 한 말을 다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시고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이 사실로 믿어지기 시작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내 주신 그 성령이 이제 제자들 속에서 도우시는 일을 합니다.
어떤 일을 돕는가 하면 제자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도우십니다.
이름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일들을 도우십니다.
신령한 일이란? 하나님에 속한 일을 말합니다.
우린 하나님에 속한 일들을 알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땅에 일만 압니다.
눈만 뜨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궁리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마땅히 빌어야 함에도 빌지 못하는 그것을 대신 빌어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걸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을 하면서 우리 대신 간구하신다고 합니다.
왜? 성령이 탄식하면서 우리 안에서 간구하실까요?
이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대신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보혜사로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교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교제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사람이 탄식을 언제 합니까?
뻔히 알면서도 되지 않을 때 하지요.
모르면 탄식도 나오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수험생이 시험을 보는데 정답을 뻔히 아는데 틀리게 적었을 때 탄식이 나옵니다.
정답을 모르면 탄식이 나오지 않아요.
공부 잘하는 이이들은 한 문제만 틀려도 탄식을 합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아이는 다 틀려도 탄식하지 않아요.
결국 탄식이란? 정답을 알면서도 정답대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도가 탄식하는 것도 이와 같아요.
하나님은 성경 속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그 뜻을 담아내지를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뜻은 의인이라야만 행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린 죄 아래서 출생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겐 소 귀에 경 읽기와 같은 겁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 몸은 원래 창조한 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지배하는 몸으로 출생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 뜻을 알고서도 그 뜻대로 살 수가 없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좀 구원해 달라고 탄식을 합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몸이 죄와 사망에 가두어져 있다고 토설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에 가두어진 몸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할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할 수 있는 몸으로서의 구속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몸은 아담 안에서 난 몸으로는 불가능해요.
즉 흙에서 난 몸으로는 안 된단 말입니다.
흙에서 난 몸은 하나님 말씀을 담아 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몸에 구속을 바란다는 그 몸은 지금의 이러한 몸이 아니고 죽음에서 살아나는 부활의 몸인 것입니다.
이 부활의 몸은 흙에서 난 몸이 죽고 난 후에 주어지는 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부활의 몸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우리 몸에 하셨어요.
그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이 오신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일컬어 부활의 영이라고 합니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죽을 몸을 다시 살려 내십니다.
죄와 상관이 없는 몸으로 살려내세요.
바울은 이 몸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는 두 몸을 준비해 두셨어요.
땅에서 살 몸과 하늘에서 살 몸이 있어요.
그런데 먼저 땅에서 살 몸을 주셨어요.
이 몸 속에 하늘에 몸을 씨앗처럼 심어 놓았습니다.
우리 몸은 마치 씨앗처럼 죽어서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35-44=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 ~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어떤 사람이 예수 믿다가 죽어도 다시 산다고 하니까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따집니다.
그러자 바울이 씨앗으로 비유합니다.
씨가 죽어서 씨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체의 나무를 내듯이 우리 몸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육신에 몸이 죽어서 하늘에 몸을 낸다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두 형체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죽을 땅에 속한 형체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날 하늘에 속한 형체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형체는 땅에 속한 형체가 씨처럼 죽어야 주어진다고 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고!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살며!
육에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살고!
육에 몸이 있은 즉 신령한 몸도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살아갈 신령에 몸은 육에 몸이 죽어야 주어져요.
이걸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소원은 빨리 죽기를 소원 했어요.
고린도후서 5장을 보고 갑시다.
고후 5:1-9=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바울은 여기서도 탄식을 하고 있지요.
왜? 탄식 합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고 싶어서입니다.
여기서 처소란 몸을 말해요.
알다시피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삼층천에 갔다 왔어요.
거기에서 보니 땅에 장막을 벗고 하늘에 장막을 입고 사는 바울은 본 겁니다.
하늘에 장막을 입고 사는 바울은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안식하는 바울이었어요.
온전한 바울인 겁니다.
그런데 땅에는 눈물 흘리고 고통당하고 수고하는 바울입니다.
삼층천에 있는 바울을 보고 온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고 싶은 겁니다.
하늘에 장막을 보고 오니 빨리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탄식하는 겁니다.
나 빨리 데려가 달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바울은 비록 육신의 몸으로 살면서 탄식하는 그 탄식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은 자기 안에 하늘에 몸을 입을 씨를 하나님께서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부활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와 있다는 것은 죽어도 산다는 보증이에요.
땅에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는다는 보증입니다.
성령이 우리 죽을 몸을 생명의 몸으로 살려 내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소망이 생기는 겁니다.
무슨 소망인가 하면 하늘에 소망이에요.
이 소망을 가지라고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자기 백성들에게 부활의 영이신 성령을 보증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살아도 주의 것으로 살고 죽어도 주의 것으로 죽어서 다시 살기 때문에 죽으나 사나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에서는 빨리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고 싶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서 난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담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는 탄식과 세상 사람들이 하는 탄식은 달라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탄식을 합니다.
이는 곧 세상 것을 얻지 못함에서 나오는 탄식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하는 탄식은 자기 욕심을 이루지 못하는 탐심에서 나오는 탄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는 탄식은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데서 오는 탄식입니다.
죄로 인하여 자기 마음 먹은 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탄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탄식은 사망으로 나아가지만 성도가 하는 탄식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좋은 탄식이라고 했습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탄식을 고민이니 근심이라고 해 봅시다.
나는 지금 무슨 고민을 하고 어떤 근심을 합니까?
세상에 대한 고민입니까?아니면 하늘에 대한 고민입니까?
아까 말했지요.
탄식은 정답을 아는데 그 정답대로 살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렇게 되면 성도가 하는 탄식은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탄식이므로 신령한 탄식이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탄식을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해요.
이건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는 신령한 탄식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탄식이 나온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것이므로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살았다는 것은 감각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땅에서 태어났어요.
땅에서 태어날 땐 우리도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어요.
하늘나라에 대하여 관심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신 겁니다.
그러자 그동안 모르던 하늘나라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을 합니다.
이상하게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일을 하세요.
하나님에 대하여 모를 때는 안타까움이나 탄식이 없었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 주고 나니까 예전에 모르던 탄식이 일어나기 시작을 한 겁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은 산 제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사를 받으신다고 해요.
이런 제사는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에게만 일어나요.
신앙생활이란? 완벽하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완벽할 수가 없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내가 연약함을 알 때 비로서 탄식이 나오고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연약함을 알 때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연약함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연약한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너희는 원래 내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연약한 자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세요.
아! 내가 이렇게 틀린 자이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죄인이구나! 를 알게 하세요.
그리하여 우리의 눈길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하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합니다.
연약함을 돕는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우리가 연약하여서 할 수가 없으니 대신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는 또 다른 의미는 성령께서 우리가 연약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의 실존을 고발하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넌 죄인이야!
너 때문에 예수가 죽었어!
너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어!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세요.
성경은 죄인을 일컬어 목이 곧은 자라고 합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교만하다는 말입니다.
교만이란? 자신의 연약함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를 악한 자라고 합니다.
피조물은 독자적으로 살 수가 없도록 창조가 되었어요.
창조주의 도움으로 살도록 해 놓았어요.
그러니 내가 사는 바탕엔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이러한 사실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에요.
이 사실을 알 때 감사가 나옵니다.
죄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찬송이 없어요.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도 안에서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세요.
너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야!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살고 있어!
그러니 사나 죽으나 감사하고 살어! 라고 깨닫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 할 줄 알고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마귀는 어떻게 일을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게 만들겠지요.
하나님을 잊게 하겠지요.
이런 상태를 죄라고 합니다.
죄란? 창조주를 떠나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즉 창조주를 잊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잊으면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을 해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하게 되어요.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이해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 어그러진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보니 내가 틀려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런 인간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자기 실존에 대한 자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면서 참고 기다린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기다린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속에는 보이는 이 세상 것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보이는 이 세상에 것을 주려면 구원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그냥 우리 힘으로 얻어 내면 되니까요.
보이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은 소망이 아니고 희망이에요.
소망(所望)과 희망(希望)은 달라요.
희망(希望)은 땅에서 바라는 것이지만, 소망(所望)은 다른 세상에 것을 바라는 것을 말해요.
성령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것은 이 세상에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에요.
즉 보이지 않는 그 나라에 것들이란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는 “그에 나라와 그의 의(義)”라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 몸은 그에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아요.
우리 몸은 그 나라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직 이 세상 것에만 관심이 있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야 우리 몸에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것은 이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 몸이 본능적으로 알아요.
예수님이 사십일을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옵니다.
마귀가 뭘 들고 옵니까?
육신에게 필요한 떡을 들고 오지요.
육신에게 필요한 세상 부귀영화를 들고 오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마귀가 떡을 준다고 하자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 달라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 몸에 필요한 것을 주고자 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사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은 떡을 먹어야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흙에서 난 몸은 흙에서 난 것을 먹어야 살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땅에 것을 구하고 찾게 되어 있어요.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사십일을 굶은 예수님에게 육신에게 필요한 떡을 들고 온 겁니다.
얼마나 인간들의 입장을 이해를 잘 해 줍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을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떡을 먹지 않아도 산다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의 존재 목적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은 자기 몸뚱이 챙기고 사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인간의 존재 목적은 자기 몸뚱이 끌어안고 사는 것이라고 해요.
사십일을 굶은 사람에겐 떡이 양식이지 하나님 말씀이 양식일 수 없어요.
이게 마귀의 논리에요.
우리 몸에 상식으로는 마귀의 말이 백번 천번 맞아요.
예수님 말씀이 틀렸어요.
흙에서 난 인간들은 자기 몸뚱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는 자기 몸뚱이를 끌어안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몸이 사는 것이 먼저이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 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과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 양식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두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들의 존재 양식은 우리 몸뚱이 끌어안는데 두고 있어요.
예수님과 우리들은 왜? 사는지 그 의미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한 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할까요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예수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예수 믿으라는 것입니다.
떡 보다 예수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말하면 주 예수를 믿으라는 거에요.
그런데 마귀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합니다.
야! 사람이 먹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추상같다고 할지라도 먼저 떡을 먹고 배가 부른 후에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라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사는 것이 먼저이고 하나님의 뜻은 나중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주장은 인간이 사는 것이 우선이고 하나님 말씀은 나중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주장은 인간이 사는 것 보다 하나님 말씀이 먼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을 하는데 반하여 마귀는 우리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마귀는 내 존재로부터 출발하게 해요.
이게 죄거든요.
예수님은 하나님이 먼저이고 우리는 나중이라고 하는데!
마귀는 아니야! 우리가 먼저이고 하나님이 나중이야!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너 있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계셨으니 하나님 뜻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마귀와 예수님은 그 근본이 달라요.
이는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였고 마귀는 땅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했어요.
그러니 마귀의 기업은 땅인 겁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땅에 것에 관심사를 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땅을 지옥이라고 해요.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가 땅에 일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던 겁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땅에 속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너희들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므로 먹고 마시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그 나라와 그에 의가 먼저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사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살게 하셨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존재에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명제 속에서 늘 충돌을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겉 사람은 떡을 달라고 하고 우리 속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달라고 해요.
옛 사람은 땅을 지향하고자 하고 새 사람은 하늘을 지향하고자 해요.
이 두 싸움에서 우리는 곤고함을 느끼고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싸움을 가나안 전쟁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이라고 하였어요.
이 전쟁은 우리 안에서 죽을 때까지 일어나요.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늘 상한 심령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주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흙에서 난 자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로 거듭 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새로운 가치관이 생겨요.
하늘에 것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생깁니다.
이건 이방인들에겐 없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이방인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광야에서 마귀와 예수님의 가치관과 같아요.
마귀는 떡에 가치로 사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에 가치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하고 이야기 하다가 별 미친놈 다 있네 하면서 떠나간 겁니다.
세상에 떡이 싫다고 하는 놈은 처음 봤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이건 마귀하고 예수님만이 아니에요.
성도와 이방인의 차이에요.
이방인은 떡에 가치로 살지만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가치로 살아요.
이는 성령이 성도 안에서 땅에 가치에서 하늘에 가치로 살도록 간섭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은 본능적으로 떡을 구하는데 성령이 아니냐 떡 보다 말씀이야!
너는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자야! 라고 하면서 우리의 가치에 전도를 일으키고 우리의 원함과 반대로 우리를 간섭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으앙~ 하고 울어요.
드디어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인하여 더욱 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곤 이런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다고 알려 주세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도 예전에는 자기 몸뚱이 끌어안고 살았어요.
자기 몸뚱이 끌어안는다는 것은 곧 보이는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게 죄 거든요.
그런데 구원을 얻고 난 후로는 자기 몸뚱이 끌어안고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보이는 것을 소망 삼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해요.
우리 몸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상관없이 여전히 본능대로 움직여요.
여전히 떡을 구해요.
보이는 것을 구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몸 가지고는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으니까 이 몸 좀 바꿔 달라고 몸에 구속을 바라면서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해요.
피조물이 왜? 탄식하며 고통 합니까?
이는 인간들이 피조물을 자기중심으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도록 했어요.
그럼 인간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었어요.
죄란? 하나님 마음을 상실한 겁니다.
하나님 마음을 상실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겁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로 창조가 되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이 보기에 좋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이 고통당하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자연 보호는 자연 그대로 놔 두는 것이 최고의 자연 보호에요.
그럴 때 피조물이 좋아 해요.
그런데 인간들이 전부 자기들 좋도록 뜯어 고치고 있어요.
그러니 피조물이 고통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 뭔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지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요?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어요.
내 자신을 찬미(讚美)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아담 안에 있다가 예수 안으로 옮겨 놓았어요.
장소적으로는 영역이 이동이 되었어요.
그런데 몸뚱이는 옛날 몸뚱이 그대로에요.
몸뚱이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변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도 여전히 자기 영광을 구하고 산단 말입니다.
이에 성령이 말할 수 없이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되기 때문에 탄식하는 겁니다.
잘 되면 탄식할 이유가 없지요.
안 되기 때문에 한 숨 쉬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돕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돕는가 하면 우리가 연약하여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대신 간구해 주시는 것으로 도우세요.
우린 이 도움으로 살고 있어요.
성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어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다 함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에게만 오셨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그 안에 성령이 보혜사로 계세요.
즉 성령이 성도를 도우시고 계신단 말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성령이 무엇을 돕는가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고 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돕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우리 몸이 죄 아래 팔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대신 기도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아버지! 이 놈이 지금 몸뚱이로 자기 영광 챙기고자 합니다.
그러니 이 놈을 그대로 두지 말고 아버지가 간섭을 좀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한단 말입니다.
우린 이런 기도를 못해요.
우리는 기껏 기도해야 우리 몸 좀 편하게 해 주세요!
세상에서 살 잘게 해 주세요! 라는 식의 자기 몸뚱이 챙기는 기도 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것엔 연약해요.
육적인 것에는 강한데 영적인 것에는 약해요.
세상 살아가는 데에는 밝은데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에는 둔감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탄식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다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것을 구하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 몸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단 말입니다.
그럼 아버지는 성령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우리의 원함과 반대 되는 식으로 간섭을 하세요.
그래서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러한 성령의 기도로 인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을 구원에 보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신다는 것은 곧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직접 챙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원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무엇과 같은고 하니 우리가 자식을 키우는 것과 같아요.
자식들은 부모의 원함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므로 자식이 태어나면 부모가 그 아이가 자라는 모든 것을 책임을 지고 키우는 것과 같아요.
이번에 제 둘째 딸 아이가 출산을 했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이 녀석이 뱃속에서 양수를 먹어서 과 호흡 증세가 있어서 숨을 조금 가쁘게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병원에서 약 열흘간 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았어요.
지금은 퇴원해서 아주 잘 자라고 있어요.
제가 이 녀석을 보면서 엄청 은혜를 받았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손으로 만진바 되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바 되었어요.
먼저 이 아이가 엄마 뱃속에 잉태하자 부모들이 장차 이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어요.
이건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어질 때 이미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갈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신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에 백합화를 봐라!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기르시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에 핀 백합화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면서 이 사실을 알아야 해요.
아!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분은 하나님이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상에서는 이 사실들을 간과하고 살아요.
우리는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맡긴 적이 없어요.
우리가 우리 인생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다 내 노력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이번에 손자 녀석의 출생을 보면서 성경 속에 이야기가 내게서 실상으로 와 닿는 것을 더 깊이 느끼고 맛보았어요.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이에요.
그리고 엄청 은혜를 받은 것은 이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니 제 입에서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제 입에서 주여! 도와주소서! 라는 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간구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야! 내 안에서도 성령이 이처럼 나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심이 더 확실하게 믿어지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병들었는지 몰라요.
자기 상태가 어떤지를 몰라요.
부모만 알아요.
그러니 부모가 다 알아서 치료하고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우리가 어떤 꼬라지로 있는지 몰라요.
내가 죽은 놈인지!
내가 죄인인지 몰라요.
우리는 우리가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하고 고쳐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제일 큰 은혜가 아이가 점점 좋아지니까 내가 그 아이에게 고맙다고 하더란 것입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하고 나니 그 아이가 너무도 고마운 겁니다.
그래서 요셉아 고맙다! 라고 했어요.
하나님 고맙습니다! 가 나와요.
아이가 젖을 잘 먹어도 고맙다고 하고!
트림을 해도 고맙다고 하고!
똥을 잘 싸도 고맙다고 하고!
잠을 잘 자도 고맙다고 해요.
웃어주면 웃어 준다고 고맙고!
눈을 마주치면 눈을 마주쳐 준다고 고맙고!
실룩거리면 실룩거려서 고마워요.
우유를 먹고 트림을 해 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아이의 행동 하나 하나가 다 고마운 겁니다.
부모에게는 아이의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고 고맙고 예뻐요.
저는 이 아이를 통해서 참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어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손자 녀석과 같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 은혜를 깨닫고 나니 성도님들이 주일날 교회에 온다는 그 자체가 엄청난 은혜라는 것을 더 실감이 나는 겁니다.
야! 하나님께서 저들의 발걸음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구나!
그러니 저들이 이 좋은 봄 날에 놀러가지 않고 교회에 왔구나!
봉사하면 봉사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고!
연보를 하면 연보하는 것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어요.
서로 교제하면 교제 하는 것 속에서 하나님 은혜를 보게 되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보면 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구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이 보여져요.
예전에는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당연히 온가 보다!
봉사하면 봉사하는가 보다! 라고 했어요.
감사는 하였지만 지금처럼 그렇게 고마워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덤덤했다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엄청 고마운 겁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발걸음을 주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이 보여져요.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 속에서 주의 사랑이 보여져요.
그들이 하는 하나 하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제겐 엄청난 은혜에요.
제가 목사가 되어서 지금처럼 성도들의 귀중함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
그동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감사였고 고마움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실상으로 피부로 느껴진단 말이에요.
야! 이 분들이 어쩌자고 그 많고 많은 교회들이 있음에도 이 초라하고 작은 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하고 교제 할 수가 있을까!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찾아온다는 것이 너무도 귀한 겁니다.
세상에 부산에서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수요일에도 오세요.
이건 놀랄 일이에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도 오지 않는데 그 먼 곳에 계신 분들이 오신다구요.
이건 성령이 그들 속에서 도우시고 간섭을 하신 증거에요.
그러니 그 분들의 행동 하나 하나와 말 한마디 한 마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읽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분들을 보는 제 마음이 너무도 감사한 겁니다.
마치 손자 녀석의 행동 하나 나나에 감동을 받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주님께 감사해요.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게 되어요.
그냥 저절로 나온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저의 무디어진 영적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 손자 녀석을 가지고 나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린 입술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지만 그것이 관념으로 있을 때가 많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관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맛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고 감사할 것들이에요.
믿음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보여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인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실상으로 드러나고 있음이 보여진단 말이에요.
사도행전 11장을 봅시다.
행 11:19-24=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스데반이 죽고 나자 큰 환란이 일어나서 성도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 때 흩어진 자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의 도를 전합니다.
그리하여 안디옥까지 이릅니다.
안디옥에서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을 합니다.
이러한 소문이 예루살렘까지 퍼집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을 합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어요.
바나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까?
믿음에 눈으로 보니까 그 험한 핍박 속에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으로 보인 겁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눈으로 보면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요.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게 되어요.
범사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어요.
살아가면서 사소하고 소소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해요.
평범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범사 속에서 감사하는 삶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범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감사하기를 바라세요.
이게 좋은 신앙에요.
신앙이란? 성경적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니에요.
거창하게 큰 일을 행하는 것도 아니에요.
아프리카에 가서 순교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살아가는 범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거창하게 큰 일을 하는 것이나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는 것이 나쁘단 말이 아니고 신앙생활이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 속에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구원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루 하루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이 지금 내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 속에서 주의 일하심을 보아야 해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주의 일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어요.
우리는 이러한 눈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해요.
이러 할 때 비로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럴 때 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게 되고 만지게 되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보게 된단 말입니다.
요한일서 1장을 봅시다.
요일 1: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고 하지요.
자신은 본 것을 증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진바 될 때 사귐이 되어요.
하나님과도 사귐이 되고 성도 간에도 사귐이 되어요.
신앙생활이란 사귐이에요.
사귐이란? 스킨쉽이에요.
서로 만나고!
서로 나누고!
서로 사랑하는 거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에요.
우리의 발걸음 하나 하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인도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이 믿어지고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에요.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증거물이에요.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도 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 말씀이 깨달아지게도 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어서 살게도 하세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감사케도 하시고 섬기게도 하시고 봉사케도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시고 그 구원 안에 거하게 하세요.
이러한 것을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몰라요.
성령만이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요.
그래서 성령이 성도를 대신하여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간구하심 때문에 예기치 않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봅시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이 부활을 하시고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곤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젊어서는 네 맘대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네 원대로 살아지지가 않고 네 원함과 상관없이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젊었다 늙었다 라는 말은 성령이 오시기 전과 후를 말해요.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젊은이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살지만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는 늙은이들처럼 몸뚱이가 내 맘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성령이 그 안에서 우리 뜻을 차압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도록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보혜사로 계시는 성도들의 인생살이는 우리 맘대로 살아지지 않고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다 하나님 앞에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요.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선을 이룬다는 말은 다 하나님 뜻을 이루어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 필요해서 우리에게 허락한 것이란 말입니다.
넘어 질 때는 넘어짐이 필요하기 때문에 넘어지게 하신 것이고!
일으켜 세우실 때는 일으켜 세우실 만한 하니까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모두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실패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에게 일어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사건도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하는 사건이에요.
이걸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2장을 봅니다.
삼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생사화복(生死禍福)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다스리세요.
때로는 죽이기도 하시고 때로는 살리기도 하시고!
때로는 부하게도 하시고 때로는 가난케도 하시고!
때로는 높이기도 하시고 때로는 낮추기도 하세요.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일들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어 가는데 사용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둘러 진 치시고 살피세요.
감찰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다 복인 겁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합니다.
비록 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선이에요.
우리는 믿음으로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족하지 않아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실족하는게 뭡니까?
다 살아가는 것 때문이잖아요.
자기 뜻대로 안 살아지기 때문이잖아요.
남들 앞에 자랑하면서 내어 놓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신이 나는데 조금 수치스러운 일이 있다고 하면 숨어 버리잖아요.
속된 말로 세상 적으로 실패하고 창피스러운 일을 당하면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우리는 교회도 떳떳함이 있어야 나와요.
이게 우리 실력이에요.
이 모두가 다 영적 가치로 보지 않고 세상적 가치로 보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가치를 깨트리는 일을 하십니다.
신앙을 육적 가치로 보지 않고 영적 가치로 보도록 바꿔주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럼 영적으로 보는 안목이 생겨요.
이 안목이 생기면 육적인 것으로 예수를 믿네! 안 믿네!
교회 다니네! 안 다니네!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죽네 사네 하는데 이젠 그러려니 하고 견디어 내잖아요.
이 모두가 성령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간섭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 25- 26절을 보세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지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지요.
왜? 도우시고 간구하시는가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서 참음으로 기다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보이는 땅에 것만 구하니까 성령이 보이지 않는 하늘에 것을 좇아가도록 도우시고 구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린 뭘 빌어야 할지 몰라요.
맨 날 땅강아지 마냥 흙만 퍼 먹고자 해요.
뱀처럼 종신토록 흙에 빌붙어서 흙에 것만 먹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내가 어떤 자인가를 알려 주는 일을 해요.
먼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하세요.
그리하여 우리의 행실로 인한 사단의 참소를 예수님의 피로 이겨내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법에 거하지 않고 은혜 아래 거하게 하세요.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또 하시는 일이 있어요.
우리의 정체성을 알려 주는 일을 하세요.
우리가 도대체 어떤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지 알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29-30절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누구인가 하면 그 아들에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창세전에 미리 아신바 된 자들이에요.
꼬라지가 이래도 우리 안에 그 아들에 생명이 들어 있어요.
우리는 그 아들에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어진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 누구인가요?
창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에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에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성령이 그 아들에 형상으로 만들어 가실 겁니다.
여기서 그 아들에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 하셨다는 것은 곧 완성을 두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에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고 하셨으면 우린 반드시 그런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미리 정하였으면 영화의 자리까지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봅시다.
고전 1:8-9=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신다고 하지요.
이는 실패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마치 불 속에서 건져진 통나무와 같아요.
조각가가 자기가 원하는 작품으로 만들어 갑니다.
대패로 밀고 톱으로 켜서 잘라 낼 것은 잘라내고 파 낼 것은 파내어서 조각가가 보시기에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가세요.
하나님은 창조주세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린도 교회에게 내가 골통 같은 너희들을 반드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마치 이 시대 교회와 같아요.
가장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가장 개판으로 살던 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고린도교회 안에 성도들의 면면들을 보세요.
이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쁜 악당들이 모였어요.
그럼에도 그들을 잘라내지 않고 주께서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들로 끝까지 견고케 하신다고 하잖아요.
지금 저와 여러분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넘어서지 못해요.
다 거기서 거기에요.
도낀 개낀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손가락질을 하고 나무랄 군번이 아니란 말입니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진 않아요.
우린 그만큼 악당들이고 고약한 자들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많은 은사들을 받았음에도 서로 파당을 지어서 상대를 헐뜯고 쌈박질을 하고 각양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모인 곳이었어요.
그럼에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하셨으니 반드시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죄인들이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덮고 있다는 말입니다.
은혜가 그들 속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추한 죄 가운데서도 결코 정죄당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구원에 은혜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에 영을 받지 않고 아들의 영을 받았어요.
우리를 아들로 삼아 주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꼬라지가 이래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들이에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이에요.
이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보지 않아요.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우리를 대하세요.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결코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죄당하지 않는 바탕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예수그리스도의 그 피 때문에 그 사랑에서 짤려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소리 치는 겁니다.
누가 감히 송사하리요!
누가 감히 정죄하리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이 살아서 눈 시퍼렇게 뜨고 간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담대하게 사십시오.
단 하나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지 마시면서 말이에요.
이 담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거지 발에 때만도 못한 우리를 위하여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더 많이 알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마음 속 깊은 데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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