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복음
요즘 TV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재벌 2세들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드라마에서 그리고 있는 재벌 2세들은 잘생기고 돈만 많은 것이 아니라 바른 생각과 인간적인 면모를 두루 갖추었습니다. 얼마 전 종영된 미스 리플리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본부장과 그 라이벌 역에 해당하는 장대표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술집 종업원을 하다가 도망하여 거짓 학력을 위조하여 호텔리어가 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방송에 출연하기까지 하는 장미리에게 어떤 희열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불안함과 동시에 거짓된 그녀에게 분노의 전단계인 짜증을 느낍니다. 비록 화려한 외모를 지녔지만 그런 그녀에게 성심을 다하는 두 남자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무의식중에 성공하고 돈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변화됩니다.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이 역시 능력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메시지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특히 본부장이 모든 것이 드러난 후에도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이면서 장미리라는 여자가 그렇게 된 것이 과연 누구의 책임이냐는 고민을 드러냈을 때 시청자들은 그런 그에게서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도 그와 같이 세상의 정상에 서게 되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보면서 자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오죽하면 그런 그에게서 제가 예수님의 마음을 느꼈겠습니까?
우리가 무심코 보는 드라마 속에는 세상의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은 돈이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내용입니다. 극중 인물이 가상의 인물들이며 드라마의 역시 가상의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게 되고 거기에 담긴 가짜 이야기를 진짜 이야기로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주는 메시지에 깊이 몰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도 강력하고 그것이 너무도 은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복음에 조금씩, 조금씩 깊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실재로는 존재 전체로 그것을 갈망하는 이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상의 복음은 교회 안으로도 깊숙이 들어와 예수님의 복음을 완전히 압도하거나 최소한 왜곡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오래 전에 봉침을 통해 많은 돈을 번 장로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민간요법인 봉침을 기독교와 접목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봉침으로 해외봉사까지 나가 선교를 하고 국내에서도 많은 봉사활동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분당의 몫 좋은 곳에 3층짜리 집을 마련한 것만 해도 상당한 부를 소유한 것인데 몇 년 지나고 가보니 아예 커다란 기독교 봉침협회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런 그분이 점심을 내겠다고 저를 데리고 간 곳은 한 중국집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자장면을 제일 맛있게 하는 곳이라며 자장면을 사주었습니다. 물만두도 한 그릇 곁들였지만 돈 많이 번 사람의 대접이라기에는 어딘가 자린고비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대화 도중 그분은 자신은 이제 친척 가운데 전도할 대상이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봉침을 통해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일가친척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말을 안 해도 다 알아서 예수 믿겠다고 했다며 역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호쾌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사실 이런 분위기가 한국 기독교의 분위기인 것은 누구라도 다 아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거기에 토를 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거의 대부분이 신앙과 부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자녀인 우리들이 못살기를 바라시겠느냐고 말하면서 우리가 못사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감추인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그것이 복음과 상치된다는 사실을 말하면 거의 예외 없이 분노를 표출하거나 더 이상 이야기하기를 꺼려합니다. 교제 자체를 거부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복음이 예수님의 복음을 이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실재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세상으로 끌리는 마음을 가지고는 예수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복음이 말하는 것들이 진리임을 알 수 있는데 마음이 온통 세상으로 가득 차 있고 거기에 끌리고 있는데 어떻게 복음이 복음으로 들릴 수가 있겠습니까? 늘 강조하는 바이지만 회개의 본질은 방향의 전환입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고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복음은 방송과 인터넷이라는 양 날개를 가지고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형수술 안 하고, 식스 팩 못 만들고, 명품 안 가지고, 새로운 제품 안 가지고, 좋은 차 안 가지고, 좋은 집 안 가지고 무엇이든 쌓아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지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도록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마음을 온통 다 빼앗긴 사람들에게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하고,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이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찢으려고 달려듭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렘20:8)라고 주님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예레미야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예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게 됩니다.
사도와 속 사도를 이은 교부들은 "부는 본래 선하지만 부유한 자들은 도둑들이다" "상속은 훔친 재물의 양도와 축재이다." "네 자녀가 너의 창조주보다 오히려 너의 세습재산을 의지하지 않게 하라." "사적 소유는 우상숭배이다." "사적 소유는 수많은 불행을 초래한다."와 같은 메시지들을 강력하게 설파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 여기고 있는 사적 소유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라는 사회가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부에 관한 이해가 일반화되고 법제화되어 정착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런 메시지들을 강력하게 전한 이유는 기독교가 공인된 후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복음에 대한 경계심이 무너졌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이해를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크로스틱'이란 일종의 약자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암호로 사용하던 물고기라는 뜻의 단어 '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라는 단어들의 첫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로마(ROMA)라는 단어를 아크로스틱으로 '라딕스 옴니움 말로룸 아바리타'(radix omnium malorum avarita)라는 문장으로 이해했습니다. 여기서 '라딕스'는 '뿌리', '옴니움'은 '모두', '말로룸'은 '악', 그리고 '아바리타'는 '탐욕'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라틴어 문장은 "탐욕이 모든 악의 뿌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로마 제국은 탐욕의 화신이라는 것이 그들의 세상 이해였던 것입니다. 탐욕의 화신, 이것이 바로 제국이고, 이것이 바로 세상의 진면목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와 그동안 쌓아놓았던 장벽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의 풍속을 따라가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세상의 복음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에 없는 사람이라도 세상의 복음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장사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 새로운 황족이 된 재벌들의 근처에 보통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습니다. 함께 섹스를 할 수는 있지만 결혼은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그들에게 팔수는 있지만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거나 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필요가 사라지면 용도폐기 되는 것이 그들과의 교제의 한계입니다. 그들에게서 평등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사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더더욱 정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탐욕의 대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실재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참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 일이 가당치 않게 여겨지거나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지는 사람은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회개해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복음의 물결이 도도하게 우리 주위를 흘러갑니다. 그 물살이 빠르고 파도가 거칠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도 따라 흘러내려가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무시무시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힘을 합쳐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성령공동체를 이룰 때, 성령의 역사가 우리와 함께 하고,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런 모습이 세상에 희망으로 다가갈 것이며 그 때 예수의 복음은 참된 복음으로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의 복음을 밀어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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