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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이야기

나의 날

by IMmiji 2010. 7. 6.

이십 년 전 일이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방학 때, 보육원에서 일을 잠깐 도울

때였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만화에나 나옴직한 여린 몸...

그런 그녀를 우리는 '정아 공주'라 불렀다.

정아 공주는 열일곱 살 소녀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보육원에서 일했다.

한 살부터 그녀 또래까지의 원생을 돌보려면 어른도 버거울 텐데

그녀는 나폴나폴 잘도 해냈다.

 

정아 공주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조그맣고 발그레한 입술은 꼭 다물고, 까맣고 긴 속눈썹은

가지런히 아래를 향할 때가 많았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연민이 일었다.

그것이 쓸데없는 생각임을 안 건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다음부터였다.

 

그곳을 떠나오기 전날 밤, 나는 베개를 들고 정아 공주 방으로

갔다.  가까이 지낸 온 만큼 그녀에게 좋은 언니로 남고 싶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소곤거리며 정담을 나누었다.

열두 시가 되자 그녀는 이부자리에 베개 둘을 나란히 놓았다.

나는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누웠다.

그녀는 그때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사뭇 다른 행동을 보였다.

냉정함이랄까 냉철함이랄까 그런 분위기가 묻어났다.

 

우선 노트에 뭔가 열심히 적었다.

그리고 옷장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까딱하고 책상과 주변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그러고는 이부자리로 들어와 반듯하게 누운 채 배에 성서를 

얹었다.  나는 모로 누워 그녀를 빤히 봤다.

내 궁금증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녀는 입을 열었다.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요."

 

오늘 밤 하늘나라로 가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주변을 정리한 다음

잠자리에 드는 것이 그녀가 하루를 마감하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하루살이'라고 하며 내일이라는 말은 없다고 했다.

매일 주어지는 '나의 날'에 최선을 다하며 산다고 했다.

작고 여린 소녀의 어느 구석에 그리도 큰 힘이 숨었던 걸까.

 

그 날 이후 나는 잠자리에 들 때, 종종 정아 공주를 떠올린다.

'다시 한 번 나의 인생을 산다면'이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나도 하루살이를 자청하며 산 지 오래다.

그러나 하루도 자신 있는 날이 없다.

오늘 밤 하늘나라로 가면 안될 것 같은 부끄러운 날의 연속이다.

 

 

 

 

                                         < 수필가 주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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