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 암 극복, 실명 위기 극복, 자폐증 아들 회복, 아버지의 기독교 세례, 이게 모두 제가 겪은 기적들입니다.”
민아 씨의 고백은 온통 시련과 기적의 체험으로 이어진다. 1992년 갓 신앙을 갖게 된 그에게 갑상선암이 덮쳤다. 수술을 했고, 기적적으로 나았지만 4년 후 재발했다. 열네 살, 네 살, 두 살, 8개월짜리까지 아이 넷을 둔 엄마.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았다. 그는 “왜 나에게 암이 재발했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믿음도 흔들렸다. 그나마 치료가 잘 되었지만, 3년 후 암은 또 재발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무렵 유치원에 다니던 작은아들은 자폐증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몸조차 이겨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잠시도 통제할 수 없는 아들을 돌보느라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LA지역의 어느 학교에서도 아이를 받아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자폐증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가 호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아 씨 가족은 아무 연고도 없는 하와이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에게 망막이 떨어져나가는 실명 위기가 찾아왔다. 이름난 무신론자였던 아버지는 “(딸이)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눈물로 기도하기도 했다. 또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서울에 온 딸은 병원에 갔다가 “미국 의사가 영어를 빨리 말해서 못 알아들은 것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망막박리가 흔적도 없이 나은 것이다. 몇 달 뒤 아들의 자폐증도 완전히 나았다. 아버지는 기도했던대로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세례를 받았다. 2007년 2월부터 7월까지 벌어진 일이다. 이 전 장관이 세례를 받은 날은 마침 민아 씨의 생일이었다. 평생 받은 것 중 가장 큰 선물이었다.
두 번의 암 재발과 실명 위기까지 하지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전 장관의 세례를 온 가족의 기쁨으로 간직한 지 3주 만에, 스물다섯 살 된 큰아들 유린이 이유 없이 혼수상태에 빠져 1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민아 씨는, 성경에 나오는 욥이 그랬을까. 절망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 아이 대신 어머니 아버지 사랑 못 받고 하나님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사역하겠다”고 선언했다.
데려가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 유진은 당시 캘리포니아대 버클리대학을 나와 법대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아 씨가 첫 결혼에서 얻은 유진은 이혼 후 홀로 키우며 의지했던 아들이었다. 민아 씨가 2002년 변호사로 전직했을 때, 마약하는 아이들, 갱단 아이들을 집에 데려와 먹이고 재울 정도로 어려운 이들을 끌어안던 사랑이 많은 아들이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엄마라서, 그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 봐 싫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유진이가 그러더군요. ‘엄마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 이 아이들이 갈 데가 없는데, 내가 얘들을 내보내면 길거리에서 자는 거 알면서….’ 그렇게 어른스러운 말을 하는 겁니다.” 참 심성이 고운 자식이었다. 아들의 그 말이 민아 씨를 변화시켰다. “그때까지 내 아이들과 내 가정밖에 몰랐던 제가 위태로운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중보자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건을 맡을 때마다 아이들 엄마의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마약, 폭력 등 중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이 놀랍게 변했다. 우울증에 걸려 총기를 구입하고 마약을 하던 아이가 눈빛이 변하며 믿음을 고백하자 판사도 마음이 움직여 아이를 풀어주었다. 말썽꾼 아이를 미워하며 스스로 고통받던 아이의 부모도 변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엄청난 변화를 이끌었던 아들 유진이 너무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민아 씨에게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는 이 일로 겪은 아픔을 성경을 통해 고백한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이사야 55:8) “너무 놀랍지요. 왜 제 아들을 데려가셨는지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내 생각과 너희의 생각이 다르다’는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들을 데려간 것이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저의 길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길을 택하겠습니다. 이 아이 대신 어머니 아버지 사랑 못 받고 하나님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사역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아들의 묘비명도 ‘내 아버지 집에는 쉴 곳이 많다’는 성경 구절로 새겨 넣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2009년 4월, 그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암이 낫고, 자폐증이 낫고, 망막 박리가 나았다는 치유와 기적의 체험을 과학과 합리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오죽하면 이 전 장관도 “절대로 이런 말은 밖에 나가서 하면 안 돼. 모든 사람이 널 비웃고 우리를 박해하려 들 거야” 했겠는가.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의 시차는 15시간. 기적을 바라는 믿음이 올바른 것인가 물었다. 한밤중에 전화선 저편에 앉은 이민아 씨는, 막 치유 집회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피곤으로 목소리가 갈라지면서도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치유와 기적은 상징 아닌 실제” “치유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몸과 마음의 병이 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병 고쳐달라 한 자 중에 고침 받지 못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은 아주 간단한 거예요.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죠.” 그는 병 때문에, 아들의 아픔 때문에 죽을 것처럼 힘들다가도 번번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고, 너무나 큰 위로를 경험했다. 예전의 자신처럼 소망이 없어서 울부짖는 엄마들과 그 위로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제 아들이 다섯 살부터 열두 살까지 학교마다 쫓겨나고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더 이상 갈 학교가 없었어요. 그러다 치유받고 완전히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된 이야기를 한 집회에서 말씀드렸더니 너무 너무 많은 엄마들이 울면서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더군요.” 큰아들 유진이 하늘로 떠난 후 그는 더 많은 아이들을 얻었다. 교포 2세들, 조기유학으로 너무 일찍 부모 품을 떠난 아이들이다. 부모와의 세대 차이, 문화 차이, 언어 차이로 의사소통이 안 되고 절망과 좌절의 벽에 부딪혀 약물과 폭력으로 문제를 더 키우는 아이들은 그를 엄마라고 부르며 따른다. “사춘기 아이들은 어디서나 힘들기 마련인데, 교포 아이들은 이중 삼중의 어려움이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아버지는 분명 아들을 사랑하는데, 전통적인 한국 아버지 방식으로, 권위적인 모습으로 사랑해요. 아이들은 미국 학교 다니고 미국 사회에 살면서 그런 의사소통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죠.” 방황하는 아이들을 만나고, 또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민아 씨는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버지 이 전 장관과 어머니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서울대 국문과 동기로, 평생 문학평론의 길을 함께 걸어온 지식인이다. 민아 씨 자신도 영문학과 불문학을 복수 전공하며 3년 만에 조기 졸업을 했을 정도로 수재였다.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갔지만 영문학 석사를 딴 뒤 법학으로 전공을 바꿔 검사가 됐다. 나중에는 변호사로 전직했다. 그런 그에게 암과 실명 위기, 둘째아들의 자폐증, 그리고 큰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나의 변호사 직업으로도, 돈 버는 능력으로도, 부모님의 힘으로도, 우리의 어떤 힘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겪어 나가면서 부모님과 함께 영적인 가족을 완성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말한다. “아빠(그는 줄곧 ‘아빠’라고 불렀다)는 참 가정적인 분이에요. 정도 많고…. 유진이 하늘로 갔을 때도 저는 아버지가 손자를 잃고 흔들리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무 말씀 없이 ‘사랑하는 훈우에게’라는 시 한 편을 보내주셨어요.” 이어령 전 장관은 민아 씨에게 언제나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다. “책 읽기에 바쁜 아버지, 항상 회의에 참석하고 없는 그런 아버지가 보고 싶어 서재 방문을 열어보면 늘 비어 있거나 책상에 구부리고 앉아 있는 아빠의 등 뒤만 바라보았던” 딸에게 이 전 장관은 “지키지 못하는 약속을 해놓고 쩔쩔매던 아버지”였다(‘회개 없이 돌아온 탕자’ 중에서).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딸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시력을 잃어간다는 말에 무릎을 꿇었다. “못 볼 바다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푸른가”고 애를 끓였던 아버지는 “암에 걸렸던 너의 아픔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너의 어둠이 나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었다”며 이제는 딸을 ‘나의 동행자’라고 부른다. 이 전 장관 이야기가 나오자 전화 건너편에서, 민아 씨의 목소리가 활짝 피어난다. “유진이 일이 있을 때, 신뢰하는 마음을 먼저 주신 것에 감사해요. 아빠하고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어떤 일도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만남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지요.” 지난해 9월 서울의 한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그는 뜨겁게 기도하며 찬송하며 춤을 추었다. 기도하던 여성들도 함께 춤을 추었다. 그 뜨거운 분위기는 신비적이었다. 아버지인 이 전 장관이 말한 것처럼, 그도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멀리 옮겨가 있는 것이다. 민아 씨는 오는 6월쯤 한국에 올 예정이다. 한국의 청소년을 위한 사역을 비전으로 갖고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상처 입고 고통 속에 있는 아이들과 엄마들, 그리고 가족을 위한 치유의 걸음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신앙 체험을 담은 책도 쓰려고 준비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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